詩人 김원호가 만난
매혹의 나라, 신비의 사람들
제1장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찾아서 1-4
4.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 사원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미얀마의 바간과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지로 꼽힌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보로부두르 사원은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갈 수 있는 방법이 늘 막연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열심히 여기저기 알아보니 보로부두르를 향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천공항에서 자카르타까지는 한국 항공기로 가고, 다시 족자카르타까지는 인도네시아 비행기로 가면 되고, 그곳에서 42km 떨어져 있는 보로부두르 사원까지는 버스를 이용하면 될 듯했다.
그러나 이 나이에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기온 35도를 오르내리는 그곳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망설이던 차에 신문을 뒤적이다보니, 광고란에 그곳으로 가는 패키지 상품이 있다. 조건은 발리에서 4일간 머물고, 단 하루만 보로부두르 사원에서 머무는 상품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필요 없이 여행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발리는 젊은이들이 신혼여행을 많이 가는 곳이다. 지금이야 신혼여행을 동남아나 유럽 등 세계 어느 곳이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풍요로움과 자유가 있다. 그러나 40년 전에는 꿈꿀 수도 없었다. 1960년대 말에는 족두리를 쓴 신부와 사모관대를 한 신랑이 올리는 전통결혼식이 대부분이었다. 그 당시 신식 결혼식은 식장에서 올린다 해도, 결혼식 후에 시어른이 있는 집에 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대접하고, 삼 일 후에는 신부 집에 가서 똑같은 잔치를 했다.
물질적으로 가난했던 신혼초가 마음에 걸렸다. 이 좋은 기회에 발리를 가지 않겠느냐고 아내에게 넌지시 권했더니, 이 더운 날씨에 더위 먹으러 그곳까지 뭐 하러 가냐며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나는 홀가분하게 깊은 물속으로 잠수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설렌다.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주위를 살펴보면, 고개 숙인 남자가 너무 많은 것 같다. 세월이 갈수록 마누라들의 목소리는 하늘 높은 줄도 모르고 올라만 가는데, 남자들은 땅속으로 기어들어 가기만 하는 것을 보고는 씁쓸히 웃곤 한다. 철이 들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힘이 빠져서일까? 어찌됐든 재미있는 현상이다.
*발리에서 생길 일이 없어지다
여행사에 여행 동반자들의 구성을 물어보았다. 여자가 대다수를 점하고 있으나, 나이들이 많다고 했다. 흔히 55세 이상은 노인이라고 하고, 65세가 넘으면 고령이라고들 한다. 나이가 많다고 하기에 동반자는 노인 정도로 생각을 했고, 아내 없이 혼자서 하는 여행이기에 은근히 기대 아닌 기대도 해보았는데, 내 앞에서 어찌하여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70세가 훨씬 넘어 보이는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의 이름을 거리낌이 없이 부르며, 한껏 설레는 소녀들 같이 들떠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10년 후의 아내의 모습을 이 할머니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다. 저승꽃이라고 하는 검버섯을 얼굴에 가득 그려 넣은 할머니, 요사이 흔하디흔한 염색마저 마다하고 자연 그대로인 호호백발 할머니, 지팡이에 의지하고 계신 할머니, 희미한 기억 속에 추억만 알알이 간직한 채 살아가는 분들 같이 보였다.
“이곳은 을루와뚜 절벽 사원입니다. 경치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많고, 그놈들은 방문객의 모자와 안경을 빼앗아가기를 우리네 밥 먹듯 쉽게 합니다. 모두 안경과 모자를 벗어서 가방에 넣어주세요. 혹시 빼앗기는 경우에는 과자를 던져주고 잃은 물건과 교환을 하세요.”
버스에서 내리기 전 안내자의 긴 설명이다.
절벽의 나무에 앉아 있던 원숭이가 할머니가 어설프게 쓰고 있던 안경을 빼앗아갔다. 순식간에 안경을 빼앗긴 할머니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원숭이만 멍하니 쳐다본다. 지혜로운 할머니 한 분이 원숭이에게 과자를 던져준다. 빼앗은 안경을 사람과 같이 눈에 쓴 원숭이는 과자를 받아만 먹고 안경을 줄 생각은 않는다. 남자 한 분이 다시 과자를 던져주고는 안경을 달라고 손을 내미니까, 원숭이는 앞니를 드러내놓고 경계의 표시로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옆에서 보기에도 섬뜩했다. 안경을 돌려줄 의사가 조금도 없어보였다. 막내딸이 칠순잔치 기념으로 사준 안경이라며 원숭이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고 있는 할머니가 가엾게 보였다. 그때 관리인이 나타나더니 원숭이에게 과자를 던져주며 소리를 질렀다. 원숭이는 과자를 정확하게 받고서야 안경을 할머니 쪽으로 집어던졌다. 공원 관리인을 알아본 게다. 참으로 영악한 놈이다. 우리 일행들이야 재미있는 볼거리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했지만, 그 할머니는 얼마나 놀랐을까? 아마 지금도 그때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을 쓸어내릴지도 모르겠다.
시간과 돈이 있어도 건강을 잃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여행이지 않은가. 나는 안다. 지금 나는 인생살이의 긴 여행을 해왔고, 이제는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다. 어떻게 해야 저녁노을과 같이 아름답게 인생을 마감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게 한다. 재산도 명예도 모두가 세월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하니 말이다.
*발리 섬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감무쟈 나무의 흰 꽃으로 만든 목걸이를 한 사람씩 돌려가며 목에 걸어준다. 꽃의 짙은 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후덥지근한 습기가 몸을 감아온다. 3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다.
인도네시아는 2억에 가까운 인구의 90퍼센트가 무슬림이다. 26개 주 중에서 제일 작은 이 섬의 85퍼센트가 힌두교라는 설명에는 얼른 수긍이 가지 않는다. 13세기 이후에 인도네시아에 이슬람이 정착을 하게 되고, 이슬람에 대항하여 최후까지 힌두세력을 지키던 모죠포 왕조가 발리 섬으로 도망쳐 온 뒤부터 발리 섬의 힌두교 역사는 시작된다.
인도는 종교 문제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라는 나라로 세 조각이 났는데, 신기하게도 발리 섬은 종교가 다른 인도네시아에 속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해가 간다. 인도네시아는 물질보다 정신세계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 나라이다. 정부에선 다양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특히 모든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며, 죽은 후에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다.
발리의 힌두교는 인도에서 전래가 된 종교이나, 인도의 힌두교와는 또 다른 힌두교로 변질되어 전래되고 있다. 발리 사람들은 자신이 죽은 후 자연으로 돌아가나 5세대째 또는 그 이후에 자신들의 후손으로 환생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자기들이 죽은 후에는 전생에 쌓은 업보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환생한다고 믿는 점이 다르다. 발리 사람들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하루에 세 번 조상에게 제를 올린다. 제물은 꽃과 과일 그리고 꽃잎이 주종을 이룬다. 길거리에서도 제를 올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또 굴러다니는 제물을 드렸던 음식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지금은 거의 없어졌지만 우리도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르지 않았던가? 상청(上請)이 있고, 매 끼니마다 상식(上食)을 올리고, 삭망일인 음력으로 초하루 보름에는 곡(哭)을 하는 풍습이 있었으나, 이제는 모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우리에게는 없어진 풍습을 그들에게서 보면서, 우리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생각해본다.
우리가 부의 척도로 흔히 말을 하고 있는 그들의 국민소득은 천 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해도 어질고 착하게 보인다. 옛말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사촌이 부자가 되면 돈이 필요할 때는 빌려 쓸 수도 있고, 술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으니 분명 좋은 일이어야 하는데……. 부자들이 심술궂은 놀부와 같이 남의 것만 빼앗고, 이웃에게 나눔을 베풀지 않아서가 아닐까?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상대빈곤을 느껴서 마음이 가난해진 채 춥게 사는 우리의 이웃을 자주 본다.
제프리 존스(Jeffrey D. Jones)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명예회장이 “한국 사람들은 배고픔은 잘도 참는데, 배가 아픈 것은 참지를 못한다”라고 한 말을 우리는 두고두고 곱씹어 볼 일이다.
*데이 크루즈(쁘니다 섬)
“오― 코리아 짝짝짝!”
“대한민국 짝짝짝!”
우리가 배에서 내리자마자, 네 살에서 일곱 살 정도의 현지 아이들이 쁘니다 섬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서, 소라 껍데기와 해물 몇 가지를 앞에 놓고서는 부르는 노래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서 말이다. 한국전쟁, 내 어린시절의 힘들었던 영상이 소리 없이 빈 하늘에서 되돌려진다. 가슴에 찡한 아픔이 밀려온다.
그들이 우리를 보고 한국말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니, 우리가 그들에게 적지만 도와줄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친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집히는 대로 노래하는 아이들에게 뿌려주었다. “고마스니다(고맙습니다).” 어설프지만 우리말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어릴 적 우리가 미군병사에게서 초콜릿을 얻고 말하던 ‘댕큐’와 겹쳐져 하늘에 메아리친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는 어릴 적 골목길에서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고 끝에다 바람이 새어 나오지 않게 노끈으로 꽁꽁 동여매어 발로 차는 놀이를 하고는 했다. 축구공은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월드컵 4강, 붉은 악마, 대단한 힘이다. 아프리카 오지에서도, 중국 사천성 아미산 끝자락의 산골 아이들까지도 한국의 축구를 알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스포츠는 국력을 말하는데, 우리가 아테네올림픽에서도 당당히 9위를 차지하고 북경올림픽에서는 7위를 하다니, 그것도 세계 속에서 말이다. 폐허의 땅 위에서 꿈만 같은 기적을 이룬 것이다. 쁘니다 섬의 아이들이 장성해서 또 다른 옛날이야기를 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서 섬을 떠났다.
쪽빛 바다
수면은 침묵으로 입을 닫고
햇빛 부서져 금모래 구슬 구르니
물비늘도 빤짝이며 춤을 춘다
멀리 흰 돛단배
흰 목화송이 머리에 이고
바람 따라 어디로 가나
닿으면, 또 떠나야 하는데
- 「인생 여정」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