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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36 - 여진족 안완부 아골타가 세운 금(金)나라가 요와 송을 멸망시키다!
가오홍레이가 지은 1,044 페이지에 달하는 ‘절반의 중국사’ 라는 책에 제8장 말갈편
에 보면..... 장백산(백두산) 기슭에 놀던 선녀 셋 중에 푸쿠룬이 까치가 떨어뜨린
붉은 열매를 먹고는 후금을 건국하는 아이신기오르(애신각라 )를 낳았다고 나옵니다.
백두산(장백산)과 흑수(흑룡강) 사이 동굴이나 움집에 살던 원시적인 부족 말갈(깊은 숲의
노인) 은 헤이룽강 하류지역 숲이 원 고향이라는데, 이들이 성장해 여진(女眞: 동방의 매)
으로 불릴 때 금나라를 세우고 또 훗날 후금(청) 을 세워 스스로를 만주족이라 자칭합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 요나라는 저런 여진족을 통제하기 위하여 강한 부족들을 요양부 남쪽
으로 이주시키고 자신들이 관할하는 호적에 편입시키니 “熟女眞(숙여진)” 이라고 불렀으며,
북쪽 휘발강에 거주하던 여진은 요와 반기미(半羈靡) 관계로 “生女眞(생여진) 이라 불렀습니다.
금(金) 나라는 북만주 흑룡강 유역의 흑수말갈의 후예로 생여진인 완안부 여진족이 1115년에
만주 지방에 세운 나라로 1234년에 몽골에 망하는데..... 시조는 완안 아골타 이고 수도는
초기에는 북만주인 상경 회령부였으며 훗날 4대 군주인 해릉왕이 연경(북경) 으로 옮겼습니다.
황성(皇性) 은 한국식 독음으로는 완안(完顔) 으로, 금대 여진어로는 온얀(Won-ian) 이라고 읽었으며
만주어 발음으로는 왕야(Wanggiya) 고 중국식 황성은 왕(王)씨며 원조비사등 몽골의 기록에서는
'주르첸' 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을 몽골어로 부른 이름이니 금대 여진어
로는 자신들을 주션(ʤu-çiɛn) 이라 부른 것으로 보이며 훗날 만주어(청나라)로도 주션(ʤuʃən) 입니다.
금(金)은 중국식 국호이고 여진어로는 암반 알춘 구룬(Amban Altʃun Gurun) 으로, 국호인 금(Antʃun)
은 하얼빈 동쪽 아십하(阿什河) 의 옛 이름 안출호수(按出虎水) 에서 유래했는데, 안출호(按出虎) 는
여진어로 금(金) 을 뜻하는 '알춘(Altʃun)' 을 음차한 것인 말갈 7부중 안차골부(安車骨部) 의 땅 입니다.
금나라를 세운 완안 아골타가 말하기를, "요(遼)나라는 빈철(賓鐵)로 국호(國號) 를 정했는데
견고함을 취한 것이다. 빈철은 견고하지만 종국엔 녹이 슬어버리니, 오로지 완안부의
색인 백색을 띠는 금만이 변치않고 녹슬지도 않는다." 라면서 금(金) 을 국호로 삼았습니다.
다만 청나라 시절 “흠정만주원류고” 편찬자들은 금조의 국호가 안출호수에서 유래됐다는
주장을 안출호가 금(金) 을 뜻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해 이 주장을 억지라고 기술합니다.
그리고 금 시조 함보가 신라 땅에서 여진족 땅으로 이주했다니 신라 왕성인 김씨를 국호로 삼은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지만, 두 사람의 연대가 100여년 차이가 나는데다가 금태조 본인이
저렇게 말하며 국호를 지었으니... 후대 사람인 청의 학자가 엉뚱한 소리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진족은 발해 멸망후 만주지역을 떠돌며 지배자 거란족에게 숨 죽인채 지내야 했는데, 거란(요나라)
이 쇠퇴하는 조짐을 보이자 북만주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여 12세기초 부족 통일을 이룹니다.
그러고는 금태종 때 거란에게 시달리던 송나라에게 사신을 보냈고, 송나라는 요나라를 제거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다음 목표는 우리 송나라 라고 반대한 신하들도
있었지만...... 요나라를 향한 증오가 워낙 커서 무시하였는데 순망치한(脣亡齒寒) 을 몰랐나 봅니다?
금나라가 건국한지 불과 10년만인 1125년 송과 연합해 요나라를 멸망시켰는데, 북송의 송휘종이 잔꾀를
내어 요의 잔당들과 힘을 합쳐 금나라를 견제하려고 하자 노한 금나라는 1년 만에 북송의 수도인 개봉
을 무너뜨리고 화북 일대를 통째로 집어 삼키니 정강의 변이라고 부르는데.... 이때 송은 황제·상황· 황후·
황자·황녀가 모두 금에 포로로 끌려갔으니 북송이 멸망하고 임안(항저우) 을 수도로 한 남송이 세워집니다.
금나라는 건국으로 부터 화북을 점령하기 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12년이니 중원의 다크호스
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왕조로, 아골타의 형이 동북 9성을 돌려달라고 고려에 애원했던
때가 1109년인데, 이때부터 따져도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기간에 당시 동북 아시아의
두 거대 제국을 전광석화 처럼 무너뜨렸으니.... 고려 입장에서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공을 바치던 그런 자들이 순식간에 대제국을 이루었으니 황당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고려와 국경을 접한 함경도에 살던 여진족이 아니며... 또 고구려 시대에
동남만주에 거주했던 속말말갈이나 백산말갈과는 다른, 발해 시대 흑룡강변 북만주 하얼빈에 있던
흑수말갈의 후예로 고려시대는 완안부로 불렸으니 세력이 커져서 남진해 여진족들을 통일하는데,
윤관의 여진정벌이 실패한 결과 그 전쟁에서 승전의 구심점이 된 완안부가 금나라를 건국한 것입니다.
맹안모극(猛安謀克) 이라는 유목 민족 특유의 군사 조직이 힘을 발휘했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
금나라의 철기병은 매우 막강했기 때문에.... 20년도 안 지난 기간에 요나라와 북송을 무너
뜨리고 화북을 얻을 수 있었는데, 특히 금나라의 초중장기병대인 '괴자마' 같은 경우는 말에
2~3겹의 갑옷을 입히고 자기 자신도 갑옷을 덮었으며 군마 3마리를 쇠사슬로 연결 했습니다.
1126년, 송나라의 지방관이 전공을 세울 목적으로 금나라 사신 일행을 공격했는데 사신을 호위
하던 17명의 기병과 궁기병들에게 송나라 보병 2,000명이 전멸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니
얼마나 용맹하고 전투에 능했는지 짐작 할수 있으며, 거기에 북송을 공격하면서 얻은
공성 무기들과 초기 형태의 화약을 노략하고 응용하여 기상천외한 신무기들을 개발했는데
로켓의 시초라 할 비화창(飛火槍) 과 화약 작렬탄인 진천뢰(震天雷)가 금나라 때 나온 무기입니다.
여진군은 모두 기병(騎兵)으로 사람과 말이 하나이니 그리스 신화의 켄타우로스 를
연상시키는데.... 1대(隊) 50 명이 부대의 기준이고 2대(隊) 100 명이 모극(謀克)
이니 족장급이고 10모극(謀克) 1,000 명이 맹안(猛安) 으로 대부족의 족장급입니다.
1대(隊)의 부대 편성은 전열에 20명의 중무장 기병이 서고 후열에 30명의 경무장 궁 기병이 받치며
맨 선두에 1~ 2명의 정찰 기병이 적진으로 빠르게 달려가서 적군의 전후좌우를 돌면서
빈틈을 찾으며 그 뒤를 따라 본군 50명이 전진해 100보 앞에 이르면 30명의 궁기병이 활을 쏩니다.
활을 어릴적부터 일상적으로 쏘아왔으니 명중률이 거의 100%에 가까우며....
송막기문에 따르면 여진인은 늙은이 까지 모두 시력이 대단히 좋다고
하며 그후 창과 곤봉으로 중무장 한 기병 20명을 선두로 적중으로 돌진합니다.
금건국 이전 부터 맹안모극제는 여진의 고유 병력 운용체계로 1114년 10월에 찰지수 전투 이후
아골타가 3,000호를 묶어 1천명 1맹안 제도를 확립시켰으며 금사 병지에 따르면 1184년 대정
24년에 등록된 맹안모극은 맹안(猛安) 202, 모극(謀克) 1878, 호(戶) 616,000 호 였다고 합니다.
1199년 금 황제 장종이 우승상 청신(清臣) 에게 병법의 사용에 대해 묻자 답하기를.... 「병서(兵書)
에는 일정(一定)한 법(法)이 있사온데, 응변(應變)함이 어렵습니다. 본조(本朝)는 정군(正軍)과
기군(奇軍)의 2 군(軍)만 사용하여 행병(行兵)하였는데, 교전하면 경우에 따라 융통성있게 행하며
정(正)이 기(奇)가 되고, 기(奇)가 정(正)이 되니 이런 연고(緣故)로 언제나 이기지 못함이 없었습니다.」
실제 전투에서는 변화가 무쌍하니 승패는 대장이 된 자의 판단과 작전에 많이 좌우되는 것
이니 먼저 적군을 정찰하고 다음 백보 앞에서 활을 쏨 중기병이 적진을 향해 위력 돌격
하고 경기병이 뒤를 받치는데 상황에 맞게 그때그때 임기응변에 능했다는 것으로
함께 생활하는 부족 공동체라 평시에 단체 행동에 익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거란국지 천조 황제 1114년 기사에, 여진(女真) 이 배반(背叛) 하였는데, 모두 기병(騎兵)을 거느렸다.
기치(旗幟) 외(外) 목패(木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인마(人馬)를 묶어 1 호(號)로 하였으며, 50 인을
1 대(隊)로 하였다. 활을 쏜후 돌격해서 이기면 곧 진(陣)을 정돈(整頓)하면서 다시 추격하고, 패하면
곧 다시 무리를 모아 흩어지지 않았으며 개개인마다 자발적으로 싸우니 이런 까닭으로 승리(勝利)하였다.
1115년에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워 후방에서 요나라를 몰아붙이자 송나라 휘종은 여진족과
손을 잡고 요군를 쳐서 오래전 거란족에게 빼앗긴 연운 16주를 되찾으려고 하였습니다.
금에 다녀온 급사(給事) 이업(李鄴)에게 여진족은 어떠한가고 물으니 사신은 말을 탈 때는 용과
같고, 걸을 때는 범과 같고, 수영도 잘해 물개와 같고, 성을 올라갈 땐 원숭이 같다고 했으니
사신이 겁에 질려 잘못 본 것일수도 있지만... 설사 그렇다고 쳐도 얼마나 용맹한지 알만합니다.
금사 태조 본기에 보면, 아골타가 송사신 조양사(趙良嗣) 와 요사신 습니열(習泥烈)을 이끌고 직접
요의 상경에 대한 공성전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니... 상경(上京)의 사람들이 고수(固守)의
계책을 마련하여 양식을 저축(儲蓄)하여 갖추어 막았는데 갑인일(甲寅日)에 진공(進攻)하게 하였다.
상(上)이 말하길,「너희들은 나의 용병(用兵)이 꽤 볼만할 것이니, 거취(去就)를 점치어 보아라.」
상(上)이 친히 성을 내려다보고, 장사(將士)와 제군(諸軍)을 감독하여 북을 치며 나아갔다.
해가 돋을 무렵부터 사시(09~11시)에 이르기까지, 도모(闍母)가 휘하(麾下)를 거느리고
선등(先登)하여, 그 외성(外城)을 함락하니, 유수(留守) 달부야(撻不野)가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훗날 송과 금이 해상동맹 체결후 요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출격한 송나라 동관이 이끄는 1차 20만은
얼마 싸우다가 후퇴하였고, 2차 10만 송군은 연경의 1만 요군에 처참하게 패배한 적이 있었으니
당시 송군은 겁을 먹고 도주하다가 서로 짓밟혀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연경을 두 번이나
함락시키지 못한 동관은 패전의 죄를 받을까 두려워 금에게 돈을 주고 연경을 함락시키고자 합니다.
이에 금나라 아골타는 다시 1122년 12월에 연경을 직접 함락하는데 이때도 송에서 사신 조양사
와 마확이 왔는데, 아골타는 송에게 어찌 그리 대군을 이끌고도 질 수가 있느냐?
너희는 군법이 없느냐? 라고 묻고는 1~2일 사이에 우리는 관문에
도착할 것이니, 너는 우리 금나라의 전투하는 모습을 잘 살펴보라, 도망하는 자가 있는가 말이다.
금군이 요나라 수도 연경을 함락한후 동관이 막대한 세폐를 금나라에 바치고 저 연운 16주 중에 6주를
얻자, 휘종은 동관을 왕에 봉작합니다. 방랍(方臘, 요나라)이 비록 평정되었지만, 이어 북벌지역
(北伐之役 : 금)이 마침내 일어났다. 이미 연산(燕山)을 회복한 공(功)으로써, 절월(節鉞)
을 풀고, 동관을 진삼공(真三公)으로 삼았으며, 서(徐)와 예(豫)의 양국(兩國)을 가봉(加封) 하였다.
연지역을 회복한 공으로 동관은 왕에 책봉되었으나, 곧이어 금이 요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붙치자
연운의 나머지 지역도 회복할 요량으로 동관이 요나라 천조제를 송에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이를 알고 분노한 금 태종 오걸매는 곧장 송을 공격하여 개봉을 두 차례
포위하고 함락시킨후 휘종과 흠종에 황족을 모두 끌고 가니 결국 북송은 멸망하기에 이릅니다.
1125년 요나라가 망한후 1차 개봉 포위전후 금나라가 물러갔으나 재침입이 우려되던 1126년 5월
항전을 주장하던 송나라 이강(李綱)에게 심관(沈琯)이 책략이 담긴 서신을 보내니 금의
허실과 7가지 책략이 담겨 있었는데 그중 6번째에 여진군의 투구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금적(金賊)의 두무(兜鍪 투구)는 극히 견고하여 두 눈을 드러내는데 그치고, 이런 까닭으로 창전(槍箭
창과 화살)이 들어올 수 없으니 글단(契丹 거란)이 예로부터 곤봉(棍棒)을 사용하여 그 두항
(頭項 머리와 목덜미)을 타격(打擊)하였는데, 표면(表面)이 두터워 추마(墜馬 말에서 떨어짐)함이
있었습니다. 청(請)하건데, 이를 본떠 기병(騎兵)의 반(半)으로 하여금 곤봉(棍棒)을 쥐게 하여야 합니다.
북송은 인구도 1억에 가깝고 재물과 군인에 군량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요나라나 금나라군과
전쟁에 나서면 약한 모습을 보이니, 이는 당나라와 5대 10국 시절에 무인인 절도사들의
행패에 대한 반성으로 문치주의 나라가 되다 보니 총사령관이 군사를 모르는 문신인
데다가 그 아래 무신인 장군의 지위가 문신의 아래이니 재량권이 없어 위축된 면이 있습니다.
절도사 제도에서는 장군과 병사가 한몸 이었으나 송나라는 그냥 임명되어 부임한 장군과 새로
소속된 병사들의 관계라 상호간에 유대도 거의 없고 군법이 약하기도 했으며 병사들은 북방
민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으니, 1차 개봉 포위전에서 개봉성내에 중앙군이 10만
가까이 되고, 주변에 몰려드는 근왕병이 20만이나 되었는데다가, 황하를 지키던 수만
병력, 각 지역에서 수비하던 지방군까지 포함하면 40만으로 당시 금군 6만 보다 많았습니다.
하지만 황하를 지키던 병사들은 아군이 패했다는 소문만 믿고 뿔뿔이 흩어졌고 10만 가까이 되는 금군
을 가지고도 출진하지 않고 성내에 처박혀 강화협상만 추진한데다가, 20만이나 되는 근왕병에게
금군을 추격하랬다가 그만두랫다가 오락가락하다 결국 모두 흩어지고 말았으며 그 와중에 동관은
송나라 최강병 이라고 불리는 진진향병 1만을 호위군으로 빼내 휘종과 함께 개봉성을 탈출해 버립니다.
강화협상하러 간 송나라 사신 이절은 금나라 종망을 보자 심장이 오그라 붙어 벌벌떨며
무릎으로 기면서 화친을 애걸하였으며 2차 포위전은 더욱 황당한게.... 종한의
금군에 대항하여 송에서는 절언질에게 12만 병력을 주어 황하 도강을 막게 합니다.
1차 원정에서 금군은 이렇게 말했다는데.... “단 1천 명이라도 황하를 막고 있었으면 우리 금군이 어찌 황하를
도강하였겠는가?” 해서 이번엔 송에서도 대군으로 황하를 막게 하였는데.... 금나라 총대장 종한이 밤새 북을
두드리자, 다음날 절언질은 금군이 도강하여 쳐 들어오는줄 알고 도망치고 12만의 병력도 뿔뿔이 흩어집니다.
1125년 1차 개봉 포위전에 이강(李纲)의 계책대로 시행되었다면 금이 송을 어찌하지는 못했을 것이니
당시 금은 요를 멸한지 몇달이 되지 않았고, 금 6만에는 거란족, 발해족, 해족이 포함되었기 때문
에 어느 정도만 송군이 전투력을 보였으면 모래알 처럼 금군이 무너질 가능성도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1차 대송 전쟁 중이던 1125년 10월에 거란족, 해족, 발해족의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는 도통의 청을
태종 오걸매가 거부하는 기사가 있으니 여진족도 다수를 차지하는 타종족을 믿지 못했던 시기였는
데 문치에 치중하다 보니, 무사들의 기상이 땅에 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북방 오랑캐에 대한
공포나 또는 조정에 대한 미움이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팽배했는지 하여튼 송군은 허약했습니다.
금나라는 요나라 처럼 여러민족들을 통치하다 보니 분리적인 관인 통치를 했으니 즉 지배층이 여진족
이며, 피지배층은 한족이었는데 건국 초기엔 요나라의 제도를 참조하고 한자와 거란 문자를 본떠
여진 문자라는 독자 문자도 개발하는 등 여진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이후 중원에
정착하자 자진해서 유교를 받아들이고 한족을 적극 기용하는등 급속히 한인화 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중원을 정복한 초창기에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불태웠으며, 산동에 있는 공자 사당인 공묘(孔廟)
역시 여진족 병사들이 도굴하고 파헤치려던 것을 마침 같은 자리에 있었던 발해인 출신 금나라 관료
고경예가 그 광경을 보고, "대성인(大聖人)이 계신 곳이다." 하고 뜯어말려서 겨우 무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나라가 중원에 정착하고 한화(漢化) 된 이후에는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유학을 장려
하였고, 황제가 공자묘에 제사를 지냈으며 금나라가 점령한 곡부에 거주하는 공자의
직계 자손들에게 '연성공' 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다른 한족 왕조들 처럼 이들을 우대했습니다.
이는 유목민족 출신 정복 왕조의 군주도 일단 중국을 지배하고 유교의 내용을 알게 되면
제왕의 통치와 군림을 뒷받침해 주는 이데올로기로서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교만큼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니 따라서 정복 왕조의 군주도 유교를 국시
로 받아들이고는... 유교를 대표하는 공자를 성인으로 특별 대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금나라가 중원을 공격하기 직전 공자 가문은 남송 정부와 함께 곡부를 떠나 남하해서 절강성에 터전을 잡고
남송이 부여한 연성공 작위를 얻어서 공자의 후예로 인정받았으니 즉 같은 공자 가문에서 두 명의
연성공이 나오게 된 것이니 금나라가 인정한 가문을 '북종', 남송이 인정한 가문을 '남종' 이라고 부릅니다.
이후 쭉 남,북종으로 나뉘다가 원 세조 쿠빌라이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남종 측에게 곡부에 돌아
가서 가문을 이으라고 명령했으나, 남종 측에서는 연성공의 직을 반납하고 북종 측에게
본래 공자 가문의 정통성을 인정하면서 정통성 문제가 정리되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금 세종은 여진족들의 복장과 풍습이 한족의 것과 유사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한족 복장의 착용과
머리 모양을 법으로 금지했지만 흐지부지되었으니 금나라의 상류층을 중심으로 남송풍 의복을
입는 것이 유행했기 때문이었는데, 금나라는 남송에게서 조공을 받는 등 상국 노릇을 했지만
지배층을 중심으로 남송 문화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남송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게됩니다.
세종 이후 재정이 급격하게 나빠지니 후대 청나라는 금나라가 한족 문화에 빠져버린 것을 금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보고, 중원에 들어오자 만주족의 옷과 변발을 한족에게 강요했는데....
물론 만주족 마저도 청나라 말기 이후로는 옷과 변발을 제외하면 거의 한족 문화에 동화
되어버렸고, 오히려 자신들의 의상이 한족 전통의상으로 잘못 알려지는 부작용을 야기합니다.
여진 문자는 금 세종의 보급 노력에도 불구하고, 차츰 여진족 스스로가 배우는 것을 경시
하며 한자 사용을 더 선호했으니 초창기의 여진 부족 체제에서 유래한 정치
제도는 유명무실화하고 경의와 사부를 설치하여 한인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
를 실시했고.... 또 중국식 신관제를 반포하고 중국식 백관의 의제와 조복을 채택 합니다.
초기에는 악비 등의 무장이 남송에 있어 고생했지만 나중엔 한족과의 혼인도 빈번해 적인지 아군
인지도 애매한 입장이 되는데, 금나라는 군사력은 강력했으나 문화적으로는 한족에 차츰 동화
되는 측면이 강했으며 피지배층 한족들도 지배층인 여진족들의 풍습에 물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송사전 금 열전’에 초창기인 금 태종 때만 해도 완안올출로 하여금 후손인 만주족처럼 정복지
의 송나라 백성들에게 중국식 복장을 금지시키고 변발령을 내려 따르지 않으면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훗날 1150년에는 중국식 의복 착용 금지령을 폐지하고 황제와 관료
들의 조복, 공복, 제복 및 황후와 비빈들, 명부의 복장은 모두 송나라 제도를 썼습니다.
북송 황실의 면류관 등 다수의 황실 제복들이 카이펑에 남아서 금나라 황제들과 관료들은
그 의상을 착용하기 시작했으니 금 희종이 처음으로 중국식 면류관과 곤룡포를 입었
으며 폭군 해릉양왕 때부터 한족 문물들을 급속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금 세종 때
다시 여진의 의상을 고수하지만, 장종 이후로 다시 급격한 한화(漢化) 현상이 일어납니다.
금나라는 전국을 19개의 로(路)로 나누고, 로(路)-부(府)/주(州)-현(縣)의 행정체계를 만들
었으니 금나라의 제도는 송나라의 행정구역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여, 여기서도
로(路)가 국가 최고 행정구역으로 기능하며 아래의 부(府)/주(州)와 현(縣)을 다스렸습니다.
금나라는 세종부터 장종까지 근 50년이 조금 안되는 전성기를 누렸는데, 그렇게 급하게
힘을 키운 금나라는 내부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으니
북송을 몰락시켜 한껏 기세를 타며 남하하다가 금 태종의 사망과 악비(岳飛), 한세충
(韓世忠) 등의 활약으로 금군이 강남에서 쫒겨나 화북으로 물러나 고착 상태가 진행됩니다.
그럼에도 금은 남송에게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세폐를 뜯어냈지만 결정적으로 남송을 멸망
시킬 능력이 없었으니... 이후에도 남송의 멸망을 노리는 군사작전을 여러차례 시도한 바가
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니, 한마디로 한족을 남쪽으로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할 역량은
있었을지언정 기마민족이라 강과 호수지역인 중국 강남을 차지할 역량까지는 없었습니다.
정강의 변으로 변경(개봉)이 함락되고 송조가 강남으로 달아났음에도 금나라는 곧바로 화북 전역을
차지하지는 못했으니 금나라는 장방창을 황제로 내세워 괴뢰국 초나라를 수립했고, 장방창이
남송으로 달아나자 다시 유예로 하여금 제나라를 세우게 하는등 무려 10년간 연운 16주
이남 지역을 직할통치하지 않고 한족 괴뢰정권에 맡기는 쪽을 택했는데 제나라 마저
남송군에 침공당하자 스스로도 힘에 부치는 것을 잘 아는 화북 전역의 직할통치를 짊어진 것입니다.
금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경제니 남송의 경제력이 엄청난데 비해 회남 이남 땅을 남송에
내준 금나라의 경제력은 약했으니 금세종 이전까지 국가예산에 대한 회계도 없다시피
했으며 건국때 부터 재정난에 시달린지라 민간에게 납속을 받아 관직을 주는 상황이
금의 전성기었던 세종 대에도 나타났으니 금의 재정 상황이 매우 열악했다는 것입니다.
금의 해릉양왕이 벌송(伐宋)군을 일으켜 남송을 공략하다가 실패했으며 나중에는 반란군에게
죽었고, 후퇴하는 금군의 뒤를 친 남송에게 숙주(宿州)까지 빼앗기고 말았는데 뒤를 이은
금세종은 장군 복산충의(僕散忠義)를 시켜 금나라 군대가 이를 수복해 즉시 숙주를
되찾았는데 승리를 거둔 금 세종은 되려 서둘러 정전 이야기를 추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장기적인 전쟁에 있어 경제력은 필수적이니 금나라는 군사적인 우위에도 정작 경제를 남송
이 보내는 세공(歲貢)에 크게 의존하는 터라 남송과 전쟁이 벌어지면....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이 나올뿐만 아니라 남송의 경제적 지원도 모조리 끊기며 심지어 남송에게
받은 세공조차 남송과의 무역으로 상당부분이 남송으로 다시 유출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문에 고려 사신이 금에 왔을 때 금세종이 조공받는 나라의 체면에 걸맞지 않게 외화유출을
막기 위해 직접 고려 사신들의 사무역을 통제했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남송 정도의
나라를 무너뜨리려면 장기전은 필수적인데, 정작 금은 장기전을 벌일 경제적 여력이 없었습니다.
금 세종이 추진한 화약에 따르면 남송에서 금에게 주어야 할 물건은 은 20만냥, 비단 20만필
이었는데, 이는 일전의 은 25만냥, 비단 25만필에서 줄어든 액수이며, 세공(歲貢)이라는
칭호에서 세폐(歲幣)라는 단어로 바뀌었으니 즉 상하관계의 급이 완화된 것으로 금나라는
다소 양보를 하더라도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남송의 지원을 받아내야 할만큼 절박했던 것입니다.
물론 남송도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 북벌을 감행해도 금나라를 쳐부술만한 수준이 아니라서
남송의 북벌군은 번번히 금군에게 격퇴되었으니 금군의 공격에 수비는 가능한 정도라,
결국엔 금이나 남송이나 서로의 공격은 막을 수 있어도, 치명상을 주기엔
힘들었던 것이니 저 세폐가 전쟁비용 보다는 훨씬 싸게 먹히는 지라 수용한 것입니다.
금나라의 2번째 문제로는, 터무니없이 적은 여진족의 인구 때문에 민족 갈등의 문제가 있었으니 여진족은
금나라 인구의 7분도 1도 안되었고, 때문에 해릉왕이 남송을 공격했을 때 거란인들과 해족을 징집하자
서북쪽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해릉왕이 남송정벌을 위한 원정을 떠났기 때문에 반란군은
아예 서북쪽을 점령한 상황이었으니 이후 금세종에게 진압되었지만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문화 수준이 본래 낮은데 불과 12년이란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지배민족이 되었기 때문에, 소수 여진족이
한족(漢族)의 바다에 표류하는 형태라 어느새 여진족들이 자기네의 낮은 문화를 부끄러워하는 풍조가
생겼고, 더 심각한 일은 만주의 자연환경에 맞게 반농반목을 해왔던 여진족의 경제가 중원으로 들어
가면서 너무나도 빨리 농경으로 바뀌면서, 적응을 못하고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여진족들이 나타납니다.
금 세종은 여진족의 민족적 자존심을 강조했는데, 그러기 위해선 명색이 지배민족인 그들의 빈곤도
없애야 했으니 관유지에서 농사를 짓던 한족들의 땅과, 세금을 안 내는 토지를 빼앗아서 여진족
에게 줬으니 이렇게 여진족을 도와주다보니 절대 다수인 한족들의 반감이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금세종 시기에 한족을 대상으로 한 세금도 증가했으니 땅에 등급을 매겨 세금을 거뒀는데
문제는 높은 세금을 내는 등급은 한족이 많이 배정되었는데 그나마 금세종 시기에는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공정하게 매겨보려고나 했으나 그 이후는 대충 하게되니 한족들의 반감은 점점 심해집니다.
금나라 이전의 요나라의 경우는 연운 16주를 차지했지만 그곳이야 중원의 북동부 가장
자리 일부였고 기본적으로는 북방의 국가였기 때문에, 한화 성향이 강해질 때도
있었지만 유목 국가의 성격이 강해서 내부적 혼란은 비교적 덜했지만 금나라는
중원 깊숙히 들어와서 가주하게 되었으니 이런 부분에서 혼란은 필연적 이었습니다.
게다가 금나라에 조국을 잃은 거란족들 심정도 복잡했으니 여진족은 거란족을 어느정도 대우하면서
여진족과 거란족의 통혼을 장려했는데, 거란족을 끌어들이고 숫자가 적은 여진족의 단점을 보완
하려고 했으니 사자를 보내어 거란인을 이주시켜, 여직인(女直人)과 같이 살게 하고, 남혼여빙
(男婚女聘) 을 점차로 풍속화하는 것이 장구지책(長久之策) 이라고 1177년 세종의 조칙에 나옵니다.
하지만 이 방책은 실패했으니 회유책과 강경책을 반복한 금나라의 거란족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세종은 거란인과 통혼을 장려하면서도 거란족 관료 수를 줄였으며, 세종의 뒤를 이은 장종
(金章宗) 은 마침내 거란 문자 사용까지 금지시키자 거란족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몽골의 침입 당시 거란족은 반란을 일으켜 몽골에 협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며 멀리
서방에는 도망친 거란인들이 세운 서요의 존재도, 거란인들의 민족성이 남은 데 영향을 끼쳤습니다.
세종때는 그나마 통치가 잘 되었지만, 이후에는 금의 국세가 기울게 되고 게다가 이때 최강
인 몽골 제국이 북쪽에서 내려오면서 금나라는 방위비를 많이 지출함에도 불구하고
영토를 야금야금 뺏기기 시작하니 이런 과정에서도 남송을 틈만 나면 공략한지라
결과적으로 이는 몽골과 남송의 연합을 불러와 금나라의 멸망에 기여를 하게 됩니다.
뒷날 누르하치가 후금(청)을 세운 것처럼, "금" 은 전형적인 여진족(만주족)의 국호로 자리잡았으니
청나라 황족의 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 에서 '아이신' 은 금, 기오로는 '씨(氏)' 를 뜻하니
자신들이 금나라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것인데 일부 사람들은 금은 신라 왕족의 성씨인 김씨를
뜻하고, 愛新覺羅 가 "新羅 를 사랑하고 기억한다(愛覺)" 말을 섞어 놓은 것이라는데 맞지 않습니다.
여진족 고유의 문화 토대 위에 거란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한족 문화를 받아들였으니 여진 문자
가 대표적으로 여진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거란 문자와 한자를 사용했으며 거란 문자나
한자를 참조하여 여진 문자를 만들면서 거란 문자는 쓰이지 않았지만..... 서서히
한화로 인하여 한자를 더 많이 쓰게 되었고 여진 문자는 쓰이지 않는 경우가 많게 되었습니다.
금나라 조정은 여진인이 남송의 의상 착용을 금지하는 조칙을 세종, 장종 때 두번이나 내렸
으니, 조정의 명을 한쪽 귀로 흘리고 남송 의상을 입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니 이
조칙을 통해 남송의 문화가 금나라에서 유행했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실제로 금나라
는 매년 남송으로 부터 막대한 양의 사치품을 수입하느라 무역에서 항상 적자를 봤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금나라 치하의 한족 사이에서는 물론이고 남송에서도 여진족 패션 스타일이 유행했으니
여진족들은 장신구들을 착용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걸 보고 한족들이 따라 했으며 여진족의 호복을
입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러한 여진 문화 유행 현상을 보고 당대 한족 지식인들이 혀를 찰 정도였습니다.
예를 들어 금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남송의 문인 범성대는 백성들이 말하길 오랫동안 호복에 익숙
해져 제도가 오랑캐 처럼 되었다고 언급했으며 연운 지역을 포함한 화북의 한족들은 요나라와
금나라의 지배를 거치면서 남송의 한족들과 언어, 복장, 풍습에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금로도경에 따르면 금나라 사람의 의복은 좌임(左袵)이라는 점만 빼면 중국의 옷과 모양이 비슷
하다고 적혀있고 조정의 공복들은 송나라 제도를 썼다고 했지만, 일상 생활에서 입는 옷들은
송나라의 의상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중원으로 들어오기 전 수렵을
많이했던 여진족 전통의 영향을 받아 동물 문양, 특히 사슴 문양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요나라와 북송을 정복하면서 거란과 한족의 의복을 수용하였으니 여진 전통 의상에는 변화가
생겼지만, 아예 한족 의상을 그대로 착용했던 요나라 남면 의상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으며 변발의 경우 앞머리를 밀고 뒷머리를 남겨 땋아서 묶었다는 기록을 토대로 볼 때
후손인 만주족의 변발과 흡사하거나 변발을 양갈래로 늘어뜨린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금나라는 건국한지 불과 12년 만에 요와 북송 제국 2개를 무너뜨리고 화북을 장악했지만 12년 전까지
동북 변방의 수렵 민족인 생여진이었기 때문에 금나라 초반기의 경우 주변 나라들 보다 부족적인
성격이 짙었으니, 황제와 신하들이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고 술을 마시며 황제가 신하에게 곤장을 맞고
황족과 귀족의 의복이 일반 백성과 별 차이가 없다든가 제대로 된 황궁도 없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변두리 수렵 부족이 십수년만에 갑자기 제국을 건국해 출세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종의 문화
지체 현상이니 과거 북송의 땅이었던 화북을 통치할 생각은 하지않고 약탈만 하고 사람을
무참히 죽여대기만 하니 땅은 황폐화되고 조정에 저항하는 민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이런 현상은 금희종 이후 중국식 제도와 문물들을 수용하며 사라졌는데 해릉왕은 북송의 황궁을 본받아
천도한 중도(연경)에 으리으리한 황궁을 지었고 세종과 장종은 한문에 능했으며 서화와 서예 솜씨도
수준급이었으며 한문학은 여진 귀족들을 매료시켰고 많은 여진 귀족들이 한족 문화에 흠뻑 취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종의 손자이자 저헌거사(樗軒居士)라고 불렸던 완안숙(完顔璹)은 금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칭송받았으며 현대에까지 그의 시가
전해 내려오고 완안숙과 사귀던 조병문, 원호문, 왕약허 등 금나라의 한족 시인들도
유명했는데, 대표적으로 현대에 널리 알려진 금나라 시대 한시로는 안구사가 있습니다.
벽돌에 조각이나 부조를 세기는 전각공예가 발달되었고, 무덤은 여러 조각들을 새긴 벽돌로
구성되기도 했으며 송나라의 영향으로 도자기, 칠기도 발달했는데.... 종교로는 대승불교,
유교, 도교, 여진족 고유 토속신앙 등을 주로 많이 믿었으나, 일부 무슬림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금나라 땅 한 복판에 백두산이 있으니.... 백두산은 화산 폭발로 흰색의 浮石(부석) 이 쌓인데서
붙여진 이름 인데, 원래는 BC 2세기에 편찬된 중국 책 山海經(산해경)에 不咸山(불함산)
으로 기록된 후.... 한나라 시대에는 개마대산, 위진 남북조 시대에는 태백산과 도태산으로
이후 백산, 삼신산으로 불리다가 금나라 때는 영웅산을 거쳐 長白山(장백산)으로 불리웠습니다.
이는 여진어로 "골민샹기얀알린 (Golmin Šanggiyan Alin)" 곧 궤리만싸에아린(果勤敏瑢廷阿林)
을 한자어로 옮기니.... 큰흰산(태백산) 또는 긴흰산(長白山 장백산) 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백두산(白頭山) 이라는 지명은 고려중엽 1145년에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고구려편에는 전혀 그 이름
이 나오지 않는데.... 당시 수도인 국내성에서 백두산이 너무 먼 거리이니,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는 국내성 앞 압록강변의 산 중턱에 자리한 큰 동굴(大穴)에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백두산” 이란 이름은 1135년 묘청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고 주장하며 쓴 "호국영산" 이라는
구절이 백두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1285년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나라에서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으니" 나오는 "태백산(太白山)"
을 백두산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정작 일연은 각주에서 "태백산을 묘향산" 이라고 적었습니다.
인터넷에 삼국유사 원문이 올려져 있는데.... 삼국유사 권제3 탑상(塔像第四) 대산오만진신
(臺山五萬眞身)에 “留二十日乃還<五臺山>此山乃<白頭山>之大脉,各臺眞身常住之地.”
이라고 나오니... “이 산(五臺山 오대산) 은 곧 백두산(白頭山) 의 큰 줄기로 각 대(臺)
는 (불보살의) 진신이 항상 머무는 땅이다.” 에서 “백두산” 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입니다.
두 번째는 1396년 조선 개국후 정도전과 조준이 편찬한 "고려사" 에 "白頭山(백두산)" 이라는 이름이
나오니,“성종 10년 991년 10월 왕이 서도에 갔으며 압록강 바깥에 사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 거기서 살게 했다.”이며 그외에도“有名虎景者....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 이름이 호경(虎景)
이라는 사람이 백두산(白頭山)에서 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에 이르러...” 라고 나옵니다.
고려사에는 “玉龍記云,‘我國始于白頭, 終于智異 옥룡기(玉龍記) 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지형지세)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라고 언급되며 용비어천가 1권 4장의
주석에 “慶源府西有長白山, 一名白頭山, 山凡三層, 其頂有大澤南流鶯鴨緑江”, “경원부(慶源府)
서쪽에 장백산이 있는데 일명 백두산이다. 정상에 큰 못(大澤)을 길러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 이 보인다.
1115년 여진족들이 金(금)나라를 세우자 자기민족의 발상지는 장백산(백두산)이며 그 천지의 물이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 유역이 천년이 넘는 삶의 근거지라 1172년에 금나라는 장백산(백두산)에
제를 올렸으며....... 1193년에는 장백산을 開天宏聖帝(개천굉성제)로 이름(존호)을 지어 올립니다.
청나라 강희제는 장백산(백두산)을 만주족(여진족)의 발상지라 1677년 12월에 백두산을 "장백산지신" 이라
부르며 천지에 손수 올라 직접 제사를 올렸는데...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만주족
들은 장백산(長白山) 을 청나라 시조 누루하치가 탄생한 곳 이라 하여 신성시하며 제사를 지낸다" 라고
적었으며 그 전에 우무나의 장백산 탐사보고에 의하면 어허너연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하고 등정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