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를 뚫고 솟아나는 근대의 파릇한 싹” 학자들은 흔히 서양의 17세기를 ‘천재들의 세기’라고 부른다. 갈릴레이, 뉴턴, 보일(R. Boyle:1627~1691) 등 인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걸출한 학자들은 모두 이 시기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막에서 큰 나무들이 자랄 수는 없는 법, 크고 멋있는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그만큼 좋은 토양과 환경이 필요하다. 앞서의 천재들을 큰 나무라고 한다면,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이들이 잘 뿌리내리고 자랄 수 있는 사상적 토양과 환경을 만든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 달에 살펴볼 베이컨(F.Bacon:1561~1626)은 이러한 철학자 중에 한 사람이다. 미신에 비추어 세상을 해석하고 신에 대한 믿음이 과학적 탐구보다 더 우선 시 되는 사상적 풍토에서는 관찰과 실험, 이성에 따른 추리를 중시했던 17세기 천재들의 학문적 업적은 결코 뿌리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 경험과 이성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새로운 토양 위에서만 이들의 학문은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 교회의 억압과 성서의 권위에 맞서, 베이컨은 지식이란 인간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했었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지식은 우리의 경험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 자신은 정작 눈에 띌만한 ‘경험에 기초한’ 과학적 발견을 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는 ‘발견을 쉽게 할 수 있는 발견’을 한 셈이다. 그것은 바로 관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새로운 사상 풍토이다.
“경탄할 만한 학문의 거미줄”, 그 공허함 베이컨은 1558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베이컨의 성장 배경과 교육은 모두 정치를 향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 니콜라스 베이컨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통치 아래 욱일승천(旭日昇天: 해가 떠오르는 힘찬 기세)하던 대영제국의 가장 높은 관료 중 하나였고 형제들도 후에 모두 고위 관직에 올랐을 뿐 아니라, 그가 받은 교육도 엘리트 관료가 거치는 전형적인 코스였으니 말이다. 최고 명문가의 소년 베이컨은 12살 때 이미 ‘출세를 위한 예비 학교’ 격인 케임브리지 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한다. 당시의 엘리트들이 흔히 그랬던 것처럼 그도 이 곳에서 성서에 기초해서 세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해석하는 중세 식의 스콜라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어린 베이컨에 눈에 비친 스콜라 철학은 ‘인간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는 불모(아무런 성과나 결과를 얻지 못함) 저작들’일 뿐이었다. 아무리 치밀한 논리로 세상을 설명하는 ‘경탄할 만한 학문의 거미줄’을 짓는다고 할지라도 구체적인 현실의 삶이 아닌 성서에 기초한 철학은 쓸모없는 지식일 뿐이다. 적을 이기려면 먼저 상대를 잘 알아야 하는 법, 생활에 도움이 되는 지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먼저 잘 알아야 한다. 따라서 그는 공허한 사색보다는 관찰과 실험에 바탕을 두는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고 결론짓는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의 공부는 3 년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스콜라 철학이 지배하던 대학의 분위기는 그가 학문하기에 적합한 분위기가 아니었을 뿐더러, 조용한 학자로 생활하기에는 그의 야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 학자들의 생활은 한마디로, ‘일하면서 연구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듯 싶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도 조폐국장을 지냈고 유명한 작가인 밀턴도 정치를 했으니 말이다. 이 시기 영국에서 활동한 철학자들은 흔히 ‘영국 경험론자’라고 불리는데,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학문 추구와 실생활이 결합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 철학함을 생계로 삼았던 ‘직업 철학자’는 없다. 외교관, 정치인, 관료 등 다른 직업 활동을 하면서 철학을 했던 것이다. 항상 경험에 기초한 확실한 지식을 주장했던 이들의 학문적 태도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출세를 향한 길고 긴 사다리” 베이컨은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뛰어 들었다. 열 여섯 살 나이로 ‘이해득실을 신중하게 계산한 끝’에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의 수행원이 된 것이다. 이때까지 베이컨은 가문, 학벌, 능력으로 비추어 보건대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관료로서 평탄한 길을 걸으며 성공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는 어딘가 드라마같이 극적인 데가 있다. 든든한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나머지, 이 잘 나가던 소년의 출세 길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는 급히 런던으로 돌아왔으나 아버지는 막내인데다가 아직 어린 나이였던 그에게 별다른 재산을 분배해 놓지 않았다. 때문에, 아직 18살에 불과했던 베이컨은 당장 생활에 곤란을 느낄 정도의 생활로 추락하고 말았다. 베이컨 시대 사람들 중에는 그를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그를 “강한 애정을 느낄 수 없고 큰 위험에 맞설 수 없으며 위대한 희생을 할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깎아 내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베이컨을 ‘비열한 기회주의자’ 정도로 여겼던 듯 싶다. 이런 평가를 받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출세욕에 불타는 젊은 청년이 처한 절박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이미 귀족으로서의 사치와 고위 관료들과의 사교에 익숙해 있던 베이컨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정치를 통해 출세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청년 베이컨에게는 출세를 위한 자신의 수단이 도덕적인지 아닌지를 가릴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끊임없이 벼슬자리를 구걸했지만, 주위의 ‘유력한’ 친척들은 베이컨이 원하는 만큼의 자리를 얻어 주지는 못했다. 그의 야심이 나이에 비해 너무 컸던 것이다. 결국 그는 혼자 힘으로 출세하기로 결심했다. 피나는 공부 끝에 21살의 나이로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고, ‘웅변술이 필요 없는 웅변가’라는 격찬을 들을 정도의 뛰어난 말솜씨를 발휘한 끝에 지방의회 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그의 출세길은 그다지 평탄하지 못했다. 세금을 늘리기로 한 여왕의 결정을 반대하는 연설을 해서 미움을 샀을 뿐더러, 이를 만회하기 위한 행동들도 주변의 경멸을 사기만 했다. 그가 어려웠던 시절, 법학 공부를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여왕의 ‘전 애인’ 에섹스(Essex) 경이 반역 혐의로 고발되자, 그를 처벌할 검사를 자청하고 나섰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은인이 처형당하는 데 앞장섰던 그를 편드는 사람은 지금까지도 그다지 많지 않다. 또한, 이 시기의 그의 생활은 수입에 비해 지나치게 화려해서, 어떤 사람은 “그의 소망은 직함, 후원인, 대저택, 아름다운 정원, 많은 하인, 화려하고 진기한 장식장 등을 갖추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낭비하는 생활을 비꼬기도 했다. 그는 과시와 사치를 즐겼지만, 그는 출세와 권력욕에 불타는 젊은이였다. 아마도 그는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면 장대함과 화려함은 기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사치하는 생활은 ‘비즈니스의 일부’였던 셈이다. 아무튼 그는 항상 1년 치 수입만큼의 빚을 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더더욱 출세를 위한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베이컨의 관료로서의 성공은 제임스 1세가 즉위한 후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왕과 의회 사이의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그는 왕의 편에 섬으로써 확실하게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또한, ‘다방면에 걸친 재능과 거의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 지식’ 은 그의 능력을 한껏 돋보이게 했고, 그 때문에 베이컨은 고속승진을 거듭한다. 48세에 법무차관, 52세에 법무장관을 거쳐 마침내 57세에는 최고의 관직인 대법관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남작(男爵)의 작위까지 받게 되었다. 나아가, 마침내 61세에는 세인트 올번스(St.Albans) 자작(子爵)이 되었다. 관료로서의 최고의 성공을 움켜쥔 것이다.
“지식은 힘이다.” 삶의 모습만을 본다면 베이컨은 철학자라기 보다는 정치가였다. 그의 철학적 작업은 어찌 보면 ‘부업’이고, ‘여가활동’이다. 그는 바쁜 정치활동 속에서도 부단한 독서와 철학적인 저술을 동시에 계속해 나갔다. 때문에 그는 현실과 사상의 균형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학문은 결국 실생활 속에서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 이럴 때에만 ‘지식은 곧 힘’이 될 수 있다. 학문의 목적은 결국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데 있다. 때문에, 그는 인간이 자연을 꿰뚫어 알고 지배할 수 있는 거대한 학문 체계를 새롭게 구상하려고 하였다. 이 엄청난 시도의 일부는 ꡔ신(新)기관(Novum Organum)ꡕ으로 구체화되었다. ‘기관’이란 지식을 만들어 내는 도구를 말한다. 스콜라 철학에 있어서 ‘기관’은 논리학을 말한다. 당시의 논리학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의미했으며, 학자들은 성서와 과거의 권위 있는 이론에서부터 세상에 대한 지식을 논리학을 통해 연역적으로 이끌어 내었다. 그러나, 베이컨의 ‘기관’은 귀납법이다. 진정 유용한 지식은 우리의 경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일상 경험에 대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지식과 법칙을 거꾸로 이끌어 내려 한다. 귀납법은 경험에 바탕을 둔 올바른 지식을 만들어 냄으로써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데 큰 힘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귀납법을 바로 학문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과거 수 백 년 동안 스콜라 철학이 우리 정신에 박아 놓은 ‘편견’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이컨은 편견을 제거할 목적에서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라는 유명한 ‘4대 우상론’을 내세운다. ‘종족의 우상’이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해석하는 편견을 말한다. 우리 정신은 ‘울퉁불퉁한 거울’과 같아서, 자연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항상 인간과 관련지어 해석하여 오류를 범한다. 번개가 치는 것을 보고, 우리가 ‘벼락 맞을 짓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오류가 이에 해당하겠다. ‘동굴의 우상’은 개인이 가진 편견을 말한다. 우리 속담의 ‘우물 안에 개구리’라는 속담이 이 우상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시장의 우상’은 언어 때문에 생기는 편견이다. 요새의 증권 ‘시장’이 시장의 우상을 통해 베이컨이 설명하려는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다. 증권 시장에서는 사실여부와는 상관없이 단순한 입 소문만으로도 시세가 올랐다 내렸다 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신의 섭리’와 같은 말 때문에, 사람들은 마치 실제로 신의 섭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에 따라 행동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극장의 우상’은 기존 이론이나 종교의 권위에 기대는 오류를 말한다. 잘 차려진 무대 위에서는 모든 것이 그럴 듯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많은 그릇된 학설들이 ‘기득권’이라는 무대에 기대어 자신을 내세우면서 우리의 판단을 어지럽게 한다. 베이컨은 이 모든 편견들이 이성을 흐리고 있다고 보고, 이를 걷어내고 귀납법에 기초한 진정 유용한 지식의 체계를 만들어 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결국 아이디어 차원에서만 그치고 말았다. 바쁜 생활 속에서 그는 깊이 사색하고 학문할 여유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세의 끝, 허망한 죽음” 베이컨은 60대에 이르러, 최고의 출세와 ꡔ신기관ꡕ으로 대표되는 학문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성공을 손에 쥔 바로 그 순간, 베이컨은 다시는 올라올 꿈도 못 꿀 정도로 추락해버리고 만다. 베이컨에게는 학문의 적이 없었지만, 정치 세계에서 적은 너무나 많았다. 그의 성공은 의회와 왕이 갈등하는 정치 상황에서 왕을 강력하게 옹호했으므로 가능한 것이었다. 때문에, 의회가 그를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적들은 마침내 그를 제거할 결정적인 단서를 잡는다. 대법관 베이컨이 재판과정에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사실, 당시로서는 피고로부터 재판관이 돈을 받는다는 것은 ‘관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뇌물을 받는 등의 ‘관행’은 평상시에는 아무렇지 않은 듯하다가도 일단 문제가 되면 관료에게는 치명타가 되는 법이다. 현실 정치에 밝던 베이컨이 이점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의회에 고소에 순순히 꼬리를 내린다. 그는 “나는 지난 50년 동안 가장 공정한 재판관이었지만, (자신을 몰아내는) 판결은 최근 2백년 동안 의회가 내린 가장 공정한 판결이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모든 저항을 포기한 채 처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는 모든 관직에서 쫓겨나고 런던 탑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를 ‘찍어내기 위한’ 정치적 술수였음은 명백하다. 정치에 더 이상 뜻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곧 풀려났을 뿐더러, 뇌물을 받았다는 베이컨의 재판이 다시 이루어진 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이후 그는 런던 외곽에 은둔하며 학문 탐구에만 전념했다. 1626년, 66세의 베이컨은 지독한 독감 끝에 숨을 거둔다. 베이컨의 죽음에는 ‘과학의 순교자’ 같은 모습이 있다. 평생 관찰과 실험을 강조했던 그가, 결국 그 것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눈 덮인 어느 날, 시골길을 가던 중 베이컨은 문득 눈이 얼마나 부패를 막을 수 있는가를 알고 싶어졌다. 그는 즉시 ‘실험’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농가로 가서 닭 한 마리를 사 배를 갈라 눈을 채운 뒤 묻었다. 병상에 누워 베이컨은 실험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만족했지만, 실험을 위해 추운 밖에서 너무 오래 서 있던 것은 66세의 노인에게 죽음이라는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나는 기술의 승리에 모든 것을 건다.” 베이컨의 삶은 출세욕과 학문적 성취욕구로 가득 차 있다. 정치가로서의 베이컨이 더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했던 것처럼, 철학자로서의 베이컨은 학문을 통해 자연을 완벽하게 인간의 손에 넣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기술과 자연의 경주에서 기술의 승리를 확신’했었다. 그가 철학에서 세운 가장 큰 업적은 그 때까지 성서의 권위와 미신적 믿음에 눌려 주눅들어 있던 인간 이성에게 자신감을 회복시켜 준 일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자극 받은 ‘경험에 기초한 이성적 사고’는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을 지배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가 놓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 이성의 겸손함’이다. 이성을 짓누르던 편견에서 해방된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여 물질적 행복과 풍요를 누렸다. 그러나 이용당하는 자연을 ‘배려’하지 않은 나머지 수많은 환경 오염과 사회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의 편견과 단점을 깨닫고 스스로 반성할 줄 안다는 데에 있다. 베이컨이 인간 정신을 주눅들게 한 편견을 일깨워 주었다면, 거꾸로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 이성을 자만에 차게 한 ‘베이컨적 편견’을 일깨워 줄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