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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더 / 전 홍구 추천 0 조회 26 12.03.04 10: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nampa의 무등산 산행자료

일 시 : 2008년 2월 5일 10시 10시20분-17:00 (6시간40분)

코 스 : 무등산장버스종점-원효사-관리사무소-꼬막재-규봉암-석불암-장불재-입석대-서석대-

          중봉-동화사터-덕산너덜-토끼등-증심교-증심사버스종점 약15km

산행동기 : 2008설연휴 고향을 찾는길에 시간이 있어, 성남에서 아침6시 고속버스로 출발하여 광주에 9시15분 도착하여.

      광천터미널 앞에서 1187번 버스를 타고 무등산장 종점에 하차하니 10시20분이었다.

      무등산은 고향같은 애착이 있는 산이지만 산보형식의 여행이었지 산행다운 등반을 한번도 하지 못했다.

      지난주 민주지산을 다녀온 후 오른쪽 무릎 통증이 있어 컨디션은 좋은 상태가 아니었으나 진통제 한알에 의지하고

      종주코스를 이용하여 많은 것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버스종점에서 600m 거리에 있는 원효사를 방문후 산행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종주를 해도 시간은 충분하리라는 생각이엇으나 무릎통증이 있어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교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는 원효사 입구가 종점이었다. 등반객이 몇분 있엇으나 원효사 쪽으로 가는 사람은 없었다.

      산행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원효사로 발길을 돌렸다.

      

nampa의 무등산 등산로 - 보라선 표시

 

 

광천터미널에서 1187번을 타면 무등산장까지 30분 정도 소요된다. 1187은 무등산 높이에서 따온 번호라 한다.

9번은 산행후 증심사에서 광천터미널 오는 버스 노선표이다. 

 

원효사 방문
 원효사로 가는 길은 가파르지 않는 언덕길의 포장로였다.

[10:20] 원효사 일주문

 

[08.02.05] nampa의 무등산 원효사 방문사진보기

 

[10:28]  원효사는 이름값에 비하여 규모는 적어 보였다. 사진만을 찍고 나왔다.

 등반로는 원효사 좌측으로 오르니 장불재로 가는 도로가 나왔다.

도로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관리사무소쪽으로 해서 꼬막재를 넘기로 했다.

 

[10:34] 원효사에서 관리사무소쪽으로 가는 도로..멀리 보이는 산이 무등산 정상

  

멀리 보이는 무등산을 좌측의 꼬막재를 넘어 오른쪽으로 돌아서 넘어오는 코스..

좀..아찔 해 보였다..관리사무소앞까지는 약 10분 거리였다.

 

[10:38] 관리사무소앞 이정표 

 

공원관리사무소앞 이정표: 해발 370m/꼬막재3.4km/규봉암6.5km/장불재6.4km/토끼등3.2km

해발370m 위치에서 무등산 천왕봉 1187m 고도차 817m이다

천왕봉은 통제되어 못간다 하더라도 입석대1100m이니 서울권의 산보다 높은 표고차이다. 

 

[10:41] 꼬막재 방면으로 진행하다 무등산장앞 관리사무소 쪽으로 뒤돌아본 전경이다

 

[11:03] 이정표 :  공원사무소1.9km/꼬막재1.5km

[11:11] 성벽

오성원이라 하면 옛날 주막같은 쉼터라 하는데 쌓여 있는 담벽규모로 보아 성벽같아 보인다

주변에 이정표나 설명 문구가 없어 알수는 없다.

 

[11:19] 이정표 현위치 오성원 해발 660m:  공원관리소2.4km/꼬막재1.0km/규봉암4.1km

성같은 돌탑을 지나 7분을 오르니 오성원 이정표가 있었다. 그 돌탑이 더 궁금해 진다.

누구 하나 물어 볼 사람도 없이 나홀로 산행이다.

 

[11:23] 이정표 : 관리사무소 3.0km/꼬막재 0.4km

 

[11:26] 꼬막재 약수터

10시18분 버스에서 내려 원효사 방문후 꼬막재까지 급경사지는 없어 쉬운 산행이나 지루한 느낌이 들정도로 구경거리 없이 올라왔다.

등반로에는 잔설과 어름이 얼어 있었다. 꼬막재 약수터가 있어 물한모금 할까하고 보았더니 "음용불가능"으로 되어 있다.

물이 땅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계곡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 같아 보였다.

좌측 하단의 "꼬막재 해발640m" 표지석은 약수터에서 400m를 더 가야 있는 것이다.

 

[11:29] 꼬막재

약수터에서 꼬막재까지 평지나 다름없는 길이다, 꼬막재라 해야 아무것도 볼것없이 표지석 하나 있다.

산행하면서 꼬막재 위치를 관찰하니 산의 능선이 꼬막 엎어저 있는 모습이 어렴푸시 나오는 것 같다. 

 

 [11:40] 꼬막재를 지나 광주 수원지가 보인다

 

 [11:42] 억새평원

멀리 내고향 산천이 보일것 같은데 선명하지가 않다. 제일 높아 보이는 산이 통명산이겠지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11:45] 이정표 광일목장후면부:공원관리소4.4km/장불재3.9km

[11:55] 이정표 : 꼬막재1.9km/장불재3.0km

    현위치 이름은 없고 장불재 3km 위치라는 표지인것 같다. 사이에 규봉암 표시만 되어 있다.

 

[12:29] 너덜에서 첫번째 쉬다 

2시간을 지루하게 걸었다. 볼거리도 별로 없다. 쉴 자리 의자도 없었다.

규봉암까지 다온 것 같은데 거리표시도 없고 보이지는 않는다.

앞에 고개가 보이는데 규봉암까지 가서 쉬기는 무리일것 같다.

너덜구간의 양지쪽 바위위에는 눈이 없었다. 아래로는 화순군 이서면 시골 마을이 보인다

시원하게 뚝 트인 공간에서 간식을 하면서 쉬어 가기로 하고, 암석위에 카메라를 놓고 쎌프 촬영해본다. 

 

[12:35] 휴식시간에 본 아래 화순군 이서면 

오래쉬면 땀이 식에 추위를 느낀다. 5분 정도면 충분하다.

 

[12:39] 삼거리 이정표: 화순꼬막재3.1km/화순장불재1.8km/화순이서영평1.6km

         이정표에 화순을 넣어 강조한 것이 화순군에서 설치한 것 같다. 사실 꼬막재를 지나 왔지만 여기서 화순땅임을 알게 되었다.

 

[12:40] 이정표 규봉암20m: 공원관리사무소 6.5km, 꼬막재3.1km / 장불재1.8km

점심을 하며 쉬었던 곳에서 규봉암은 5분 거리였다.

 

규봉과 규봉암

[12:42] 규봉암에 도착하여 nampa의 기념사진

 

[08.02.05] nampa의 무등산 규봉과 규봉암 방문사진보기

지공너덜 구간에 있는 규봉암은 건물3채 주변으로 기이한 암석이 애워싸고 있어 이제껏 보아온 무등산의 배경과는 색다른 느낌을 준다

 

[13:06] 이정표 : 꼬막재3.6km /장불재 1.3km

[13:08] 이정표 : 석불암250m

          규봉암에서 장불재로 가는 길목에 석불암으로 올라가는 이정표가 있다.

          거리가 250m 근거리이기에 올라가 보았다. 지공너덜 구간에 소림사터로 돌담에 쌓여있는 민가 모형이 석불암이다.

          보지는 못했지만 암벽에 마애석불이 있다한다. 

 

[13:14] 석불암

너덜구간이라 주위에 돌 천지이다. 이 길은 규봉암까지 이어진다.

법당입구에 약수터가 있어 물을 마시고 내려오는 너덜(돌무더기)에서 10분간 휴식을 하였다.

 

[08.02.05] nampa의 무등산 석불암(소림사터) 사진보기  

 

[13:47] 이정표 : 규봉암 1.6km / 장불재0.1km / 이서영평 3.5km

 

[13:49] 장불재 아래 쉼터에서 5분 휴식하며 백마능선과 안양산의 모습

 

[13:49] 위의 쉼터에서 본 입석대 전경

 

장불재 도착

[13:55] 장불재에서 nampa의 기념사진

 

[13:58]장불재 이정표 : 공원관리소 6.4km/중머리재1.5km/규봉암1.8km/입석대0.4km/서석대0.9km

 

입석대 방문

[14:10] nampa의 입석대 방문 기념사진

 

[08.02.05] 무등산 장불재와 입석대의 추가사진보기

 

[14:41] 서석대 고갯마루에서 천왕봉 방면으로(군사지역 출입금지)

 

서석대 방문

[14:51] nampa의 서석대 방문 기념사진

 

[08.02.05] 무등산 서석대의 모습 추가사진보기

대부분의 지도에는 서석대에서 입석대로 돌아서 다시 장불재로 내려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서석대에서 바로 내려가면서 서석대 전 구간을 볼 수 있다.

서석대에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경사지이다.

서석대 아래에서 5분정도 내려오면 천왕봉과 연결 되는 도로와 만난다.

우측 오르막 도로는 천왕봉 방면이고 내리막 길은 장불재와 이어진다

 

[15:04] 이정표 서석대입구 : 서석대 320m / 입석대820m

 

도로를 따라 200m 정도 내려오면 중봉 이정표가 있다.

  

[15:08] 이정표 구군부대정문 해발880m: 용추삼거리1.1km/ 중봉0.3km/ 장불재0.7km/ 공원관리사무소4.2km

       여기 공원관리사무소는 규봉암쪽이 아니고 장불재에서 관리사무소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기준한듯

       중봉으로 올라가는 300m 구간은 옛 군부대가 있었던 자리에 녹지로 조성되어 있다

        1965년부터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민간인 통제가 되었으나 1998년 군부대가 공원외지역으로 이전 되었다

 

[15:16] 중봉도착 -

무등산 천왕봉쪽과 우측의 서석대의 모습

 

중봉 우측으로 장불재와 kbs 한국통신 송신소. 입석대는 보이지 않는다.

 

중봉에서 중머리재 내려가는 길

 

중봉에서 본 청심봉쪽 kbc와 mbc  송신소의 모습

 

송신로를 지나 해발913m 청심봉 아래 동화사터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15:31] 청심봉에서 바라본 광주광역시의 모습

 

[15:35] 이정표 동화사터상단 해발845m: 중봉0.7km/서석대2.6km/동화사터0.7km/중봉하단삼거리0.8km

[15:45] 이정표 : 늦재1.6km/장불재2.6km/서석대3.3km/토끼등1.0km

 

[15:48] 동화사 약수터

지난해 5월중에서는 식용가능인데 2008.1월중 음용불가능으로 되어 있다.  

 

동화사터에서 토끼등으로 내려오는 길은 덕산너덜구간이다

경사가 심하고 적은 암석길로 이어진다. 눈이 많이 쌓여 미끄럽고 위험하다

 

[15:58] 덕산너덜

너덜? : 서석대 입석대와 같은 절리의 암석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파편이 된 비탈. 돌너덜.너덜겅등으로 부른다.

 

[16:12] 토끼등

해발460m에 위치한 토끼등이다. 암석에는 467m로 되어있다.

능선의 모습이 토끼 등 같아 보일까?... 여기까지 차가 올라올 수 있는 도로가 되어 있다.

이정표:증심교1.4km/바람재0.8km/중머리재1.7km/동화사터1.0km/공원관리사무소3.2km

 

[16:32] 증심사위의 녹차밭..증심사 절의 전경은 보이지 않았다. 

 

[16:52] 계곡에서 5분동안 몸 단장을 하고 증심교에 도착

 

증심사 버스 정거장에 17시10분 도착하여 시내버스 54번을 이용하여 하산 후 고향방문을 하였다. 

    

무등산 도립공원 소개 

아래출처 : http://mudeungsan.gjcity.net/index.html (무등산도립공원)

공원소개
 

광주광역시 도심의 동쪽을 에워싸고 솟은 무등산은 광주의 진산으로 1972년 5월 22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해발1,187m의 무등산 최고봉인 천왕봉 일대는 서석대·입석대·규봉 등 수직 절리상의 암석이 석책을 두른 듯 치솟아 장관을 이룬다. 또 마치 옥새같다 하여 이름붙여진 새인봉은 장불재에서 서쪽 능선상에 병풍같은 바위절벽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고장 산악인들의 암벽훈련장으로 유명하다.

무등산의 특징이라면 무엇보다 너덜이라 할 수 있다.
천왕봉 남쪽의 지공너덜과 증심사 동쪽의 덕산너덜은 다른 산에서 볼 수 없는 경관을 연출한다.
옛 궁궐의 진상품이었던 무등산 수박은 광주의 또 다른 자랑이다.
개량 수박의 출하가 끝난 8월 중순 이후 추석 전후에 출하되고 있다.

위 치
  • 지 도 상 : 동경126°06′~ 127°01′
  • 북위 35°06′~ 35°10′
  • 행정구역 : 광주광역시, 전라남도(담양군, 화순군)

 


 
무등산의 유래

무진악(武珍岳)

광주의 옛 이름을 무진주(武珍州) 또는 무주(武州)라 해서 이 고을의 진산인 무등산도 일찍이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으로 부른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광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다가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였는데 이때 백제를 3주로 나누어 그 하나를 무진주(武珍州, 一云 奴只)라 하였으며 광주가 백제에 속한 시기는 4세기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때부터인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전국을 9주로 나누어 도독을 배치하면서도 계속 무진주와 완산주(지금의 全州)는 그대로 불렀다. 그런데 757년(경덕왕 16년)12월에 경덕왕이 고을 이름을 중국식인 외자로 고치면서 무진주는 무주로 완산주는 완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무주가 광주(光州)로 바뀌게 된 것은 940년(고려 태조 23년)3월에 여러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의 명칭을 바꾸었을 때부터이다. 그 뒤에도 1362년(고려 공민왕 11년)부터 1773년까지 무진주(茂珍州)라 하였는데 ‘武’를 피하고 ‘茂’로 바꾼 것은 고려 혜종(943~945)의 이름에 ‘武’자가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조선시대에도 1430년(세종12년)부터 1451년(문종1년)까지 다시 무진군(武珍郡)이라 불렀던 때가 있었다.
백제시대에 무진 혹은 노지라 이름을 쓰게 된 것은 원래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란 옛 지명에서 연유한 것인데 未冬은 습지를 뜻하는 우리 옛 말인 물들, 물둑(水場), 무들, 무돌을 차자표기한 것이다. 즉 未冬이라고 적고 무돌이라 발음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백제시대에 와서 무돌의 ‘무’는 한자음의 ‘武’로 표기하고 무돌의 ‘돌’은 뜻으로 볼 때‘珍’이 되므로 무돌을 무진(武珍)이라 하고 광주를 무진주(武珍州)라 했으며 무등산을 무진악(武珍岳)이라 한 것이다.
‘무돌’은 또 ‘무지개를 뿜는 돌’이란 뜻을 지닌 순우리말의 조어(造語)로 보기도 한다. 옛사람들은 지금보다도 낱말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썼다. 죽고 사는 것을 ‘죽사리’라고 했는데, 그것은 동사 ‘죽살다’에서 온 것이다.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산을 ‘갈뫼’라고 했다. 따라서 조어 ‘무돌’의 무등산은 무지개처럼 곱고 아름다운 돌산이란 뜻도 된다. 무등산을 서석산(瑞石山)이라고 불렀던 연유도 ‘무돌’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옛사람들은 돌을 무척 신성시했고 신앙의 대상물로 섬겼던 것으로 미루어 서석산이란 글자 그대로 상서로운 돌산이란 뜻이라 하겠다.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은 대체로 육산(肉山 또는 土山)으로 되어 있으나. 그 특색은 오히려 웅장한 암석미에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서석대, 입석대, 규봉 등이다.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에 서석대가, 남쪽에는 입석대가 위치하고 있는데, 특히 서석대는 마치 수정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아름다운 직절상(直截狀)의 석조(石條)로 이루어진 총석(叢石)의 집단이며 이곳을 ‘서석의 수정병풍’ 이라고도 한다.1)
무등산을 서석산이라 부른 것은 고려때의 일로 추측된다. 무진주를 광주로 고쳐 부른 것은 940년(태조 23년)인데, [고려사 지리지]는 ‘무등산’이라 적고 ‘혹은 무진악이라고 하고 혹은 서석산이라고 한다(一云 武珍岳, 一云 瑞石山)’고 그 명칭의 유래를 기록하고 있어 서석산이란 이름이 이때부터 무등산의 별칭 또는 애칭으로 함께 불려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 ‘이 산 서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가히 백척이나 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석이라 했다(山西陽崖 數十櫛立 高可百尺 山名瑞石 以此)’ 라며 서석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송강 정철은 성산별곡에서 ‘천변(天邊)에 뜨는 구름 서석을 집을 삼아’라 하였고, 제봉 고경명도[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겨 무등산을 예찬하고 있어 서석산은 조선시대의 문인들 사이에서도 즐겨 쓰였던 이름임을 알수있으며 현재 까지도 무등산의 별칭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등산에는 현재 우리가 서석이라 부르는 서석대 말고도 입석대, 규봉 , 그리고 정상 3봉을 비롯한 의상봉, 새인봉, 중봉 등 직립형 돌무더기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돌무더기를 우리 조상들은 ‘선돌’ 또는 ‘신돌’ 이라 불렀던 것이니 뜻을 취하면 ‘立’이 되고 음을 취하면 ‘瑞’가 되었던 것이다.2)
부정(不淨)을 피하고 성지를 예찬하던 고대의 풍습은 이처럼 신체(身體)에 비길 수 있는 천연의 석경(石景)을 상서롭고 신성한 뜻으로 받아들여 ‘서(瑞)’로 대하였던 것이니, 무등산의 돌 경관은 어느것이나 서석이요 입석이지 따로 구분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서석의 절경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무등산을 서석산이라 이름하였던 것은 과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무당산

광주의 옛 어른들은 흔히 무등산을 ‘무당산’ 또는 ‘무덤산’이라고 불렀다. 그중에서도 무당산이라 부르는데 반드시 어떠한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무당골’ 이라 부르던 골짜기가 증심사 뒤쪽에 있었고 깃발을 나부끼는 무당의 움막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곳곳에서 무당들의 내림굿이 펼쳐지기도 했었다.
‘무당산’은 ‘무당’에서 불려진 것이며 또한 무등산의 신령스러운 기운과 영험함을 믿는 민중의 믿음을 따라 이 산을 ‘무당산’이라 불렀음직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전에 있었던 원시종교 속에서 싹텄던 ‘당산’의 신앙이 곧 무등산을 ‘큰당산’으로 삼게 했고, 그것을 ‘무당산’이라 불렀을 것이다.1) 이렇게 당산을 신성시했던 시절에 무등산을 무당산으로 불렀던 이유는 곧 이 산을 신산(神山)으로 보았던 옛사람들의 토속신앙에서 연유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무덤산

무등산은 동서남북 어디에서 보나 형상이 비슷하고 뒷면, 즉 등성이에 변화가 없다. 홑산으로 이루어진 그 모습이 마치 무덤처럼 둥글넓적하게 생겼다고 하여 속칙 ‘무덤산’이라 했을 법하고 또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늘 덤덤하고 무덤덤한 심성을 상징하는 산이라 해서 붙여진 속칭일수도 있다. 그러나 육당(六堂)은 부정을 몹시 싫어하는 우리나라 풍속으로 봐서 이렇게 큼직한 신역(神域)에 “무덤산”이라는 흉측한 명칭을 썼을 것 같지 않다면서 ‘무당’이 와전된 것에 불과할 것1)이라고 했으며, 노산도 예부터 이고을 사람들이 무등산에 무덤만 써도 부정탄다고 여기며 신성시했던 점2)을 들어 ‘무등산’의 와전3)으로 보고 있다.

무정산

무정산은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왕명에 불복한 무정한 산이라 지칭한데서 연유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여러 명산대천에 왕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무등산 산신만은 그 소원을 거절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그는 나라를 세운 뒤에도 국내 명산의 산신들에게 제사를 올려 왕업이 수백대에 이르도록 이어지를 빌었고, 또 자기 손에 죽은 고려말 명신(名臣)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자주 산신에게 빌었다고 한다. 특히 나라에 가뭄이 계속되자 왕명으로 남쪽의 명산 무등산에 기우제를 지내게 했으나 무등산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비가 내리지 않았으므로 왕명에 불복한 무등산 산신을 멀리 지리산으로 귀양보내고 이 산을 무정한 산이라 하여 무정산(無情山)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국여지승람]에 ‘無等山神祠 新羅爲小祀 高麗致國祭本朝春秋令 本邑致祭’라 적어 고려 ?까지는 나라의 제사를 모시다가 조선조에 와서는 산신의 격을 낮추어 고을제(邑祭)로 지내게 한 사실을 두고 이러한 전설이 전해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무정산’ 역시 무등산에서 와전된 말일 것이다 생각된다.

무등산(無等山)

무등산이란 명칭은 서석산(瑞石山)과 함께 고려 때부터 부른 이름으로 ‘무돌’, ‘무진’이라 했던 것이 무등산으로 바뀐 것이다.
무등산의 어원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등산의 ‘무등’은 앞서 적은 바와 같이 ‘무돌’의 이두음인데, 이 ‘무돌’에는 옛 농경사회의 보편적 지명인 ‘물둑(水堤)’이라는 뜻과 순수 우리 옛말의 조어인 ‘무지개를 뿜는 돌’이라는 뜻에서 연유했다는 설이 있겠으나 이미 ‘무당산’ 대목에서 말한 대로 ‘당산’과 비슷한 음을 따서 한자로 나타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노산은 이 산이 불교적 영장(靈場)이 된 뒤에 불교적인 가치를 설명한 이름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교사전(동국역경원 간)에 의하면 ‘無有等等’은 부처님네는 세간의 모든 중생과 같지 않으므로 무등(無等)한 것이요, ‘無等等’은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서 견줄이가 없다는 뜻이라 하니 결국 무등산은 불교의 이 말을 빌려다 이름으로 삼아 불교적 가치를 더욱 높인 것이라고 하겠다.
과연 이 주장에 걸맞게 무등산은 불교와 인연이 적지않다. 곳곳에 수많은 사찰과 고승들의 전설이 서려 있고, 산의 경관이 좋은 곳마다 불교적 명칭들이 남아있다. 지왕봉을 비로봉, 인왕봉을 반야봉이라 부르기도 하며, 삼존석(觀音, 如來, 彌勒)이나 의상봉, 윤필봉, 규보의 법화, 설법, 능엄 등 여러 대(臺)의 이름에서도 이 사실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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