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점자
손병걸
우르르 쾅쾅, 천둥 소리에
깜짝 놀라 떨어뜨린 점자책
책갈피마다 알알이 박힌
무수한 점자들이
와르르 쏟아진 걸까
으깨진 머리를 감싸 쥐며
방바닥을 뒹구는
점자들의 비명이 들려오고
땅바닥을 치는 빗방울 소리 따라
가빠 오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반지하 방바닥을 더듬을 때
내 생각과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두두두두, 빗소리는
꽉 닫힌 창문을 자유로이 넘나들고
다시 펼친 책갈피마다
하얀 여백을 딛고 오뚝한
점자들의 목소리 들려온다
그래 다시 일어설 일이다
바싹 마른 생활을 지르밟아 주는
축축한 저 소리들과
그래 다시 걸을 일이다
얼마든지 그러하게
저벅저벅, 걸을 일이다 서슴없이
스스로 젖을 일이다 유쾌하게
- 출처: 시집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손병걸
어젯밤 잠결에 빗소리를 들었다.
소나기인지 거세게 내리다가, 잠시 수그러들다, 다시 세차게 오는 소리들.
혹시 빗방울 들이칠까, 비몽사몽 거실로 나와 커다란 창문을 조금 닫고
잠시 우두커니 섰다.
자정이 지나 어제가 되어버린 금요일
간행물 원고 관련해서 시각장애인 전업 시인 손병걸 선생님과 전화상으로 인터뷰를 했던 일이 생각났다. 기사를 쓰던 중 잠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빗소리 덕인지 ‘빗방울 점자’라는 시도 떠올랐다.
거세게 내렸던 빗방울
누군가 점필로 1,2,3,4,5,6점 말소표 혹은 온표라도 찍고 있는 걸까.
멍한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픽 웃었다.
빗방울 점자 - 손병걸
시재: 점자, 빗방울
갈래: 저항시, 참여시, 자유시
성격: 남성적, 미래 지향적
어조: 담담함, 강인함
특징: 시각장애인의 모습, 일상이 시에 자연스레 녹아듦
시를 읽으면 으레 분석하려는 습관이 있다. 위에 나름대로 정리한 것처럼.
중고생 국어, 수능을 위한 현대시 공부가 남긴 일종의 부작용이다. 시인은 과연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생각하는 것도 여직 버리지 못한 습관.
이래서 시는 어렵고, 어려워지고,
그럼에도 문장 안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시 ‘빗방울 점자’에서 ‘비’는 이중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나’를 놀라게 한 존재, 점자책을 떨어뜨리게 만든 존재, 황망하게 방바닥을 더듬게 만든 존재, 일종의 시련 혹은 어려움을 준 존재.
그러나 빗방울이 ‘점자’와 오버랩이 되며 그 의미는 달라진다. 마치 빗방울이 점자로 화해 시인의 점자책에 스며든 것처럼.
매마른 삶, 건조한 생활을 적시는 변화.
물론 ‘변화’가 꼭 좋은 의미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시에서는 기꺼이 그 변화를 맞이할 마음을 드러낸다.
기꺼이 변화 속으로, 빗줄기 속으로 뛰어들어, 흠뻑 젖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노라고, 다시 일어서 걸어가겠노라고.
세차게 쏟아지는 빗속을 휘적휘적 어깨 들썩이며 걸어가는 인영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시
아마 통기타를 메고, 이따금 빗방울 소리에 맞춰 줄을 튕기며,
흰지팡이로 박자를 세며 흥얼흥얼 노래라도 부르지 않을까.
간밤 그렇게나 세차게 내리던 비
그러나 지금은 온데간데 그 기척이 없고 하늘은 맑은 편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선선하다.
그렇지만 귓가에는 간밤 쏟아지던 빗소리가 잔향처럼 남아 있다. 혹은 시 ‘빗방울 점자’의 잔상일까?
손에 시집 한 권 들고 싶게 만드는 계절, 가을이다.
첫댓글 시를 읽고 쓰기 좋은 계절입니다.
73`c는 두사람의 체온이 포개진 온도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