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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BC 1000 ~ BC 300), 또는 철기시대 전기(BC 300~AD 1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지석묘, 무문토기, 갈돌, 갈판등이 발견되어 그 당시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옥저조의 고구려 동천왕 20년(246년)에 관한 기록에서 언급된 동해안의 섬이 울릉도라는 설이 있다.
우리나라 문헌에서 처음으로 울릉도에 관한 기록은 512년 신라 지증마립간 13년 하슬라주(현 강릉)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 복속 시켰다는 기록이 나온다.
연혁
930년 고려 태조 13년 조공을 바친 우릉도(芋陵島)주민에게 작위를 하사
1403년 조선 태종 3년 무릉도 주민들을 본토로 귀환 조치
1417년 태종 17년 김인우를 안무사로 파견하여 주민들을 귀환시킴.
1693년 숙종 19년 울릉도에서 안용복 일행과 일본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사이에 외교분쟁발생 (안용복 1차도일)
1696년 숙종 22년 안용복 2차 도일 왜의 백기주 태수와 담판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인정
1881년 고종 18년 이규원 검찰사 임명 울릉도순찰(공도정책포기)
1882년 고종19년 울릉도 개척령 공포 이민을 장려하고 도장을 도감으로 개칭
1883년 7월 개척민 54명 입도
1907년 융희 원년 울도군을 울릉군으로 개칭 경상남도에 편입
1949년 정부수립후 울릉군으로 환원(경상북도 울릉군)
1979년 남면이 울릉읍으로 승격. 현재의 1읍 2면체계
2000년 독도리 신설
이사부에 의해 신라에 귀속된 이후 1438년 도민귀환령으로 사람이 살지 않다가 1882년 개척령영포로 다시 사람이 이주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
삼국사기에 우산국이라 기록되었고 간릉도, 우릉도, 무릉도 등으로 부리우다가 그 후 울릉도로 칭하였다.
도지정문화재로 나리 너와집, 나리 투막집(4채), 남서리 고분군, 현포리 고분군 등 7개가 지정되어 있다. 성하신당에 얽힌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이 곳에서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제사를 지낸다.
천연기념물로 제48호(통구미 향나무 자생지), 제49호(대풍감 향나무 자생지), 제50호(태하리 솔송, 섬잣, 너도밤나무 군락지ㅒ, 제51호(도동 섬개야광, 섬댓강나무 군락지), 제52호(울릉국화, 섬배리향 군락지), 제189호(성인봉 원시림), 제237호(사동 흑비둘기 서식지), 제336호(독도 해조류 서식지) 등이 있다.
관광자원은 성인봉(984m)을 중심으로 울창한 원시림과 해안을 따라 둘러싼 기암괴석, 약수, 폭포 등이 유명하며 오징어, 호박엿, 향나무 공예품, 산나물들이 특산물로 인기가 좋다.
울릉도 근해의 풍부한 수산자원과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일본에서 독도의 영유권을 계속 주장하고 있다. 이 섬은 희귀 동식물이 많이 자생하고 있는 자연의 보고이다.
서면의 역사
(1)남양동
①남양동, 골계(곡계),곡포
서면 소재지인 남양동은 원래 비파산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두 골짜기에서 냇물이 흘러 내리고 있어 다른 마을보다 골짜기와 시내가 많다고 해서 골계(곡계)라 불렀으며 이규원 일기에는 곡포로 되어 있으나 행정동명을 제정하면서 겨울에도 본도에서 가장 따뜻한 지세라 하여 남앙동이라 하였다.
②돌문골(석문곡),석문동
골계 동서쪽에 있는 이 마을은 평지이면서 서방이 성을 쌓아 놓은 것처럼 산이 둘러있고 다만 입구에 서쪽으로 뻗어 있는 큰 바위가 문을 세워 놓은 것 같아 석문동이라 하였다.
③지통곡(골)
이곳에는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껍질을 벗겨 한지를 만들었던 곳이라 하여 지통곡이라 불이어지게 되었아.
④통구미, 통구미, 통구미
이 마을의 지형이 양쪽으로 산이 높이 솟아 골짜기가 깊고 좁아 통처럼생겼다고 하여 통구미라 하였으며 또한 앞 통구에 거북 모양의 암석이 마을을 향해 기어가는 듯한 것을 보고 거북이가 들어가는 통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통구미라고도 하며 일제시에 일인들이 통구미라 표기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⑤가물개, 가문개, 현포
통구미 동쪽에 있는 이 마을은 지세가 높고 앞쪽으로 바다가 확트인 곳으로 해변이 길어서 멀리까지 가물가물 보인다고 하여 가물개라 부르고 있으며 일설에는 이곳에 검은흙이 많다고 하여 현포라 불렀다고도 한다.
(2)남서동
①남서동
원래 골계의 일부였으나 행정구역 편제시에 2개로 나누어 1개는 남양동이라 하고 1개는 남양동의 서쪽동이라 하여 남서동이라 하였다.
②굴바우, 굴암, 구암
이 마을 입구 바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져 있어 굴바우라 부르기도 하고 마을 중앙에 위치한 산이 거죽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구암이라고도 한다.
③물칭칭, 수층
굴바우에서 학포동쪽으로 바닷가를 따라 조금 나가면 그곳을 물칭칭이라 한느데 이는 마을 앞개울에 바위가 여러층을 가로 놓여 있어서 물이 흘러 내릴 때 칭계(층계)칭계 떨어지는 까닭에 물칭칭이라 한다.
④제당골(곡), 제당촌
어민들이 출어시에 자주 재앙을 입어 왔는데 재앙으로부터 신의 가호와 풍어를 기원하기 위하여 해신제를 지내는 종당이 있는곳이라 하여 유래 되었다.
⑤사태구미, 사토구미
굴바우에서 남양동쪽으로 산을 한모퉁이 지난곳을 말하는데 이는 비가 오면 산사태가 많이 나기 때문에 생겨진 지명이다.
⑥나발등, 나팔등
북쪽 막바지 등성이에 있는 마을로서 개척민들이 이곳에서 나팔을 불어 일군들을 모았다고도 하고 나팔모양으로 생긴 등성이라는 뜻에서 불러졌다고 하나 도수 배상삼이 암살당하던 날 여기에서 나팔소리가 여러번 들렸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태하동
①큰 황토구미, 태하동
이 마을 구석에 위치한 황토굴에 많은 양의 황토가 있어 황토구미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이곳의 황토가 나라에 상납까지 되었다고 하며 조정에서는 3년에 한번씩 삼척영장을 이섬에 순찰을 보냈는데 그 순찰의 증거품으로 이곳의 황토와 향나무를 받았다고한다. 태하는 김(해태)이 많아서 태하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안개가 많아서 태하라불린다고도 한다. 이곳에는 울릉도 수호신을 모시는 선하신당이 있는데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가든지, 새로 배를 만들면 반드시 먼저 이곳에 풍성한 제물을 차려놓고 풍악을 울리면서 푸짐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곳은 개척당시 본도의 군청소재지였으나 1914년 군청 도동으로 이전됨에 따라 서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규원 일기에는 대황토구미로 되어 있으나 한일합병이후는 태하라 칭하게 되었으며 전설도 많은 마을이다.
②작은 황토구미, 학포
이곳에서도 황토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나 태하보다 지역도 좁고 황토도 적었기 때문에 소황토구미라 하였으나 마을 뒤편 암산에 학이 않아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다고하여 학포라 부르는데 1958년경 학의 부리 부분이 비, 바람에 떨어지고 몸통만 남아 있다고 한다. 원래 북면에 속하였으나 1903년 본도가 삼개면으로 편제됨에 따라 서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1914년 태하동에 합병되어 행정구역상 태하2동으로 되어있다.
③서달, 서달령
황토구미 동남쪽 등성이에 있는 이 마을은 서쪽 들에 능이 많이있다고 하여 서들령이라 하였으나, 차차 변하여 서달이라 하였다.
또한, 어떤이는 이 마을에 서달래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하여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명을 삼게 되었다는 말도 있다.
④삼막골(곡),산막골(곡)
학포동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산삼을 캐기 위하여 바람과 외부 세력을 막기 위하여 막을 치고 정성을 드려 제를 드리던 곳이라 하여 이름하였다.
⑤향나무재, 향목령, 향목구미
태하동에서 현포로 가는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 이곳에 향나무 숲이 울창하였다고 하나 어느때인지 산불로 전부 타버렸다고 한다. 그때 향나무 타는 냄새가 강원도까지 풍겨 그곳 사람들이 울릉도에 큰 불이 났음을 알았다고 한다. 이규원 일기에는 향목구미라 되어있고(비단향목최다) 비단향목이 가장 많았다고 하였다.
⑥말바우, 마암
삼막 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잎 바닷가에 있는 바위가 말같이 생긴데서 말바우라 부른다.
⑦가문개
비교적 지대가 높은 곳으로서 개척당시 본토를 그리워하던 주민들이 이곳에서 바라보니 육지가 가물가물하다 하여생긴이름이다.
울릉읍 역사
(1) 도동
도방,도방청, 도방청포, 도동
1882년(고종19년)에 울릉읍 개척령을 반포하면서 개척민에게는 면세조치하자 점차 주민이 입도하기 시작하면서 이곳에 자치적인 하나의 지휘소를 설치하여 도방청이라 불렀으며 그 이전 감찰사 이규원의 울릉도 감찰일기(이하 이규원일기로 약칭)에도 도동을 도방청토구라 기록되어 있다.
도방청은 사람이 모여 살며 번화한 곳을 가리켰으며 그 후 행정 동명을 제정할 시 도방청의 도자를 따서 도동이라 하였으,며 1903년에 군청을 태하동에서 도동으로 이전하면서부터 군청소재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①행남(살구남)
행남, (살구남, 사구남, 죽포)
도동과 저동사이의 해안을 끼고 있는 조그만 한촌으로 울릉도에서 가장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에도 살구꽃을 볼 수 있는 따뜻한 이 마을 어귀에 한그루의 자연생의 큰살구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살구남(행남)으로 전래되고 있으며 지형이 뱀의 입처럼 되었다고 하여 사구남이라고도 한다. 이규원일기에는 죽포로 되어 있다. 많은 대나무(竹)가 자생
②깍개등, 깍깻등, 깍새등
도동북서쪽 올망졸망한 산등성이에 있는 마을로서 개척당시 이 산등성이에 깍새(슴새)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깍새등이라 부르다가 깍개등으로 변하여 불리워지고 있다.(2)사동
(아록사,와옥사,와록사,사동)
이 마을 뒷산의 모양이 사슴이 누워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와록사라고도 하였으며 옥과 같은 모래가 바닷가에 누워있다는 뜻에서 와옥사라고도 하였다. 이규원 일기에는 장작지포라 되어 있는데 둥근자갈이 10리 가까운 긴 해안에 깔려있다고 지어진듯하며 지금은 아록사로 부르고 있으며 동명을 제정하면서 사자만을 취하여 사동이라 하였고 사동 1,2,3동으로 편제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아록사라고 하면 사동 아랫 구석 마을을 지칭하고 있다
①옥천동(우복동)
현재 사동2동에 속하여 있으며 이 마을이 위치하고 있는 산등성이가 소가 엎드려 잇는 모습과 같다 하여 우복동이라 불리었으나 1904년부터 이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이 옥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옥천동이라 하였고 이 하천을 옥천천이라 한다.
②중평전
옥천동 북쪽 내평전 못가서 평지가 있는데 가운데 평지라 하여 중평전이라고 한다.
③안평전(내평전)
옥천동 북쪽에 있는 마을로서 옥천동 안쪽 깊숙한 곳에 넓은 평지가 있어 농사짓기에 알맞아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중평전 뒤편)
④신리
토지가 비옥하고 평지인 중령 마을과 식수를 구하기 용이한 옥천마을 일부를 합하여 새로운 동을 만들었다 하여 신리라 부르게 되었다.
⑤위막골(곡)
신리와 중령 사이 계곡이며 개척당시 일인들이 막을 치고 배를 짓기 위하여 나무를 베었던 곳이라 하여 "위막골"이라 했다.
⑥중령, 죽령, 장흥동
중령 밑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에는 대나무가 많아 죽령이라 했으나 지금은 일부지역만 있을뿐이며 중령이라고도 부르는 이 마을은 개척인들이 깊이 흥왕하라 는 뜻으로 장흥동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⑦간령(갓령)
간령 밑에 있는 이 마을은 신리 마을과 중령마을 보다 산의 끝쪽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갓(변)령이라 불렀으나 한자로 표기하면서 간령이라 하였다.
⑧새각단(신촌)
해안의 산 중허리가 무너져 내려오다가 해발 약 200m지점에 이르러 평지가 되었는데 그 후 이 평지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자 새로된 동리라는 뜻에서 새각단이라 부르게 되었다.(3)저동
저동,(저포),모시개
옛날부터 이 지방 일대에 많은 모시가 자생하여 이 지명을 저포라 하였으며 이규원일기에도 대저포,소저포로 되어 있다.
그후 동명제정과 구역분할시에 대저, 중저, 소저, 내수전의 4개동으로 분할제명하였다.
①대저, 큰모시개
개척과 동시 마을이 형성됨으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을 대저(큰모시개)라 하게 되었다.
②중간모시개, 중저
대저와 소저의 중간에 위치한 마을이라 이름하였다.
③작은모시개, 소저, 신흥동
중저와 내수전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서 새로 흥왕하라는 뜻으로 신흥동이라고 하였다.
④내수전,저전포
소저 북동쪽에 위치한 이 마을은 닥나무가 많아서 저전포라 하였으나 마을이 개척되면서 금내수란 사람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는 이유로 내수전이라 하였으며 저동삼동에 속한다.
⑤주사골(주사곡)
큰모시개 북서쪽 봉래폭포 아래 산골짜기 마을로 뒷산 석벽에 붉은 흙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며 이 붉은 흙에 물과 들깨유를 혼합하여 목기에 청하였다.
⑥줄맨등, 줄맨당
주사골에서 올라가는 산등의 길이 험한 바위로서 경사가 심하므로 줄을 매어 놓고 그 줄을 붙들면서 오르내렸다 하여 줄맨등이라 한다.
⑦깍개등, 깍새등
작은 모시개 뒤쪽 가파른 능선에 위치한 이 마을도 깍새가 많은 동성이라서 깍새등이라 불렀다. 도동의 깍새등과 유래가 같다.
⑧와다리, 와달리
내수전 북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해안 마을로서 옛날 황윤영이란 한학자가 처음 이곳에 와서 은거수도하면서 "혼자 누워 살아도 도가 하늘에 달한다" 라고 하여 와달리라고 불려지고 있으며 이규원 일기에는 와달웅통구미로 되어 있다.북면역사
(1)천부동
①옛선창, 왜선창, 천부
조선시대에 왜선들이 이곳에서 배를 만들고 고기를 잡고 이서의 진수지목을 도벌하여 많이 운반하여 갔기 때문에 왜선창이라 하였으며 옛날부터 선창이란 뜻에서 옛선창이라고도 하였다. 이규원일기에는 왜선창으로 되어있다.
그후 동명제정 당시 천부라고 하였다.
②본천부
개척민들이 이곳에 와보니 숲이 울창하여 사방의 지세를 알 수 없어 한곳에 나무를 베어 내고 보니 사람이 살기 좋고 지성도 평평하여 천부지지라 하였으나 후에 행정동명제정 당시에 왜선창을 천부라 하였기 때문에 이곳은 본래의 천부라 하여 본천부라 하였다.
③대바우, 죽암
바닷가를 중심으로 골짜기에 동네를 이루고 있는데 이 마을은 오죽, 장죽, 왕죽 등 대나무가 많은 동네라 하여 대바우라 부르며 한자로 표기하여 죽암이라 하였다.
④정들깨, 정들포, 석포
개척당시 주민들이 정착한 후 수년간 살다보니 정이 들어 외지로 이주할 때 울고 갈 정도로 정이든 곳이라 하여 정들포라 하였으나 후에 동명제정시 돌이 많다고 하여 석포라고 하였다.
⑤섬목, 도항
정들포 동쪽에 산이 바다로 뻗다가 중간이 끊어져 배가 래주하게 되고 다시 일어서서 깍새섬이 되어 이 사이가 꼭 섬의 목과 같다고 하여 섬목(도항)이라한다.
⑥백운동
해발600m의 높은 지세로서 죽암동이나 석포동쪽에서 이 마을을 쳐다보면 흰구름에 싸여 있다하여 백운도이라 부른다.
⑦홍살메기. 홍문동
천부동에서 나리동으로 가는 산중턱에 있는 마을로 천부동 공동묘지가 있는데 그 입구에 홍살문이 있었다 하여 홍문동이라 부르며 이규원 일기에는 홍문가로 되어있다.
⑧선창
석포마을에서 삼선암쪽에 배가 정박하기 좋은 항구 조건을 가진 마을로서 옛날에 선반을 생산하여 배를 만들었던 곳이라서 선반구미(이규원 일기)라 불렀고 옛날부터 많은 배들이 이 선창을 래왕하였기 때문에 선창이라 불려지고 있다.
⑨지계골(곡)
죽암 마을에서 남쪽으로 뻗쳐진 긴 계곡에서 유래된 듯 하다.
⑩천년포
임진왜란 당시 삼척정씨가 피란중 8형제를 이곳에서 글 공부를 시켜 모두 과거레 급제하게 되자 명당 자리라 하여 천년포라 이름하였다.(이규원 일기)(2)나리동
①나릿골(곡),나리동
이중식 화산이 분화구에 화산재가 쌓여서 완전히 평원이 되었으므로 우산국때부터 사람이 살았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공도정책으로 수백년 비워 오다가 고종때 개척령에 따라 개척민들이 이곳에 왔는데 옛날부터 정주한 사람들이 산야에 자생하고 있는 많은 섬말나리(나리두의 풀) 뿌리를 캐먹고 연명하였다고 하여 나리골이라 불리어지게 되었으며 큰 나리와 작은 나리가 있다. 나리동은 개척당시 거주민 93호에 500여명이 거주하여 본도 제1의 집단부락이었다.
②알봉(모봉)
화산구로 생긴 나리분지의 서쪽에 위치하며 화산이 2차로 폭발하여 알(모)모양으로 생긴 크고 작은 봉우리가 많이 생겼다. 이곳을 개척하여 많은 사람이 살았는데 큰 알봉과 작은 알봉이 있다.
③송곳산, 추산동
나리동 북서쪽에 있는 이 마을 옆에 송곳처럼 뾰족하게 생긴 산이 있다고 하여 송곳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동명제정시 한자를 따서 추산동이라 하였다.(3)현포동
①가문작지, 거문작지, 흑판지, 현판지 현포
동쪽의 촉태암의 그림자가 바다에 비치면 바닷물이 검게 보이는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에 촌락기 약 7석불, 석탑 등이 있었다고 하고 100여년전 개척때만 하여도 석실고분이 무려 40여기가 있었으나 점차 던착지로 변하여 지금은 몇 개만 남아있고 또 성묘, 누석장, 선돌과 같은 출토품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대 우산국의 도읍지가 아닌가 여겨진다.
행정동명 제도시 흑판지의 흑자나 현판지이 현자의 뜻이 같으므로 현자를 취하여 현포라고 하였다.
②신포구
가문작지 동쪽에 새로된 마을로 산이 무너져 바다를 메워 새로운 포구가 생겼다고 해서 불러진 이름이며 산이 무너져 내려올 때 수가구가 가옥이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내려와서 살았다고 한다.
③웅통계, 웅통구미, 웅포
현포 서쪽에 있는 이 마을은 웅통구미의 옛 이름에서 웅통계 또는 웅포라고 부르게 되었다.
④살강태, 살강터
바다에서 이 마을로 들어오다 보면 집은 보이지 않고 지형이 살강(부엌에 그릇을 얹어 놓는 선반)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⑤구암, 광암
이 마을을 둘러있는 바위산들이 모두 구멍이 뚫려 있어 구멍 뚫린 돌산속에 위치한데 유래되었다고 하나 개척전부터 불려진 광암이 차차변하여 구암으로 된듯하며 해변에 이규원 검찰사의 각석문이 있으며 지령은 각석문은 파도에 마멸되고 광암 두자만 남아있으며 마을북쪽 바다 가운데 구멍 뚫린 바위가 있다.(코끼리 바위)
⑥지통골(곡)
살강터 옆에 있는 이 마을은 가까운 산에 닥나무가 많아 이 껍질로 한지를 만들던 지통이 있었기 때문에 지통골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