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제일 잘 아는 말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믿지 않는 분들도 이 말씀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전도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씀입니다. 혹자는 성경 66권을 한 줄로 요약한 말씀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씀이 사실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아들을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멸망 받지 않고 영생 얻도록! 단 믿음으로 된다고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몇 년 전 팀 티보라는 플로리다 미식축구선수가 경기 출전할 때마다 John3:16이라는 글씨가 새긴 이니셜을 얼굴에 붙이고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었고 요3:16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협회에서는 규정위반이라며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터치다운할 때마다 글씨 대신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결승경기에서 놀랍게도 시청률이 31.6%, 그가 뛴 거리가 316야드였습니다. 그가 받은 패스가 10번이니 한 번에 뛴 거리도 31.6야드로 나왔습니다. 놀랍게 일치된 숫자에 관심을 갖고 그때 구글에서 요3:16을 검색한 수가 1억 2천 번이었습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요?
1.먼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입니다. 1937년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이 영국에서 있었습니다. 대영제국의 왕 에드워드 8세가 한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왕의 자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왕은 윌리스 심프슨이라고 하는 평범한 이혼녀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는 결혼을 하기 위해 처음에는 자녀들이 갖게 될 왕실의 재산권을 다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왕실은 허락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퇴위하는 수밖에 없음을 안 에드워드 8세는 “사랑하는 여인을 곁에 두지 않고는 국가를 안전하게 운영하기 어렵다”는 말을 남기고 왕의 자리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프랑스로 가서 결혼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의 자리도 내어버린 것입니다. 사랑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정말 사랑하셨는데 얼마만큼 사랑하셨는가 하면 독생자를 내어주실 만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곧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좋으니까 그 사람이 키우는 개도 좋고 고양이도 예뻐 보이듯이.
그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어떻게 하셨는가? 즉 우리에게 어떻게 사랑을 나타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하신 일은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가장 귀한 것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도 가장 귀한 것은 독생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 생명이 일체입니다. 하나님께도 독생자는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생명을 내어주고라도 살리고 싶은 것이 아들입니다. 가장 귀한 가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곧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아들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곧 아버지이기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심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신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가치, 최고의 희생, 최고의 표현이 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왜 내어주셨습니까? 17절에 말한 것처럼 우리를 심판 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멸망 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심판, 멸망이라는 것을 법으로 설명하자면 이미 사형판결은 받았지만 아직 형을 집행하지는 않은 상태입니다. 재심, 대법원판결이 남아있어 항소할 기회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최종판결을 받았고 이제 집행날짜만 기다리는 상태에 놓인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독생자가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사형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은 잠시 빌려주신 것이 아닙니다. 앞에 14절에 말한 것처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고 했는데 독생자를 주신 것은 나무에 달려 죽는 것을 알고 주신 것, 죽음의 자리에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롬8:32에 우리 위해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이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로만 우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아들을 보내주심으로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 말로만? 이라고 반문합니다.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2.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의 모형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개와 고양이를 사랑하여 아들을 내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외형적인 모양만 닮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일하게 영을 부여한 영적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영원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동물은 호흡만 있어 죽으면 사라집니다. 나무나 풀이 말라 죽듯이 동물의 죽음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나 영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찾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실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입니다. 비록 죄로 인해 사망에 놓였고 깨어졌지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깊은 바다 속에서 물때가 끼어있고 해초가 달라붙어있어도 고려청자는 고려청자로 인정하듯이 하나님은 우리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보십니다. 만일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되겠느냐?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보는 관점입니다. 이 관점을 우리가 가져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은 우리를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기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그 생명 값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얻기 위해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시고 바꾸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알지 못하여 목숨을 쉽게 버리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아들의 목숨을 내어주실 만큼 우리 영혼의 가치를 인정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천하보다 귀한 존재라 해도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시면 심판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 사랑은 결국 우리가 죄로 인해 타락하고 멸망에 이르게 되었을 때 더 극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긍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온전한 우리의 모습을 사랑한 것만 아니라 우리가 죄로 더럽혀지고 멸망에 이르게 되었을 때도 아무 조건 없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할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좀 될 것 같고 있을 법 할 때만 다가가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강함만 아니라 약함을, 우리의 부유함만 아니라 가난함을, 우리의 지혜로움만 아니라 모자람을 더 긍휼히 여기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무조건 사랑입니다. 진짜 특급사랑입니다. 일방적으로 베푸신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해 멸망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이고 고소하다! 지옥에 가서 죄 값이나 톡톡히 받아라!' 하지 않고 이때 오히려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볼 때 실망하신 것이 아니라 붙들어주려 손을 내미신 것입니다. 허물을 볼 때 덮어주려 겉옷을 내미신 것입니다. 죄악에 더럽혀진 우리의 발을 씻기려 수건을 들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우리 죄를 보고 용서해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3.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 뒤에 던져버리고 우리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내게 와서 변론하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치 않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방적으로 이렇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고 나오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첫 설교할 때 너희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아 죽였노라고 하자 이들이 깨닫고는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죄인 됨을 고백하며 주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고 회개함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베드로도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회개야말로 우리가 살 길입니다. 그래서 행11:18에 “생명 얻는 회개”라고 했고 고후7:10에 “구원에 이르는 회개”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너희는 돌아오라,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주인에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와 믿음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자신의 죄에 대한 뉘우침, 돌이킴이 없다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하여 돌이킨다고는 하나 주님이 죄를 사해주셨다는 믿음이 또한 없다면 온전한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돌이키되 내 죄 때문에 주님이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뉘우침과 주님이 내 죄를 다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셨다는 믿음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생명을 주어 영생을 얻게 하셨어도 돌이켜 회개하고 믿는 자가 영생을 취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잔치를 벌려놓았어도 와서 먹어야 배부르듯이 하나님이 베푸신 이 은혜의 자리, 용서의 자리에 회개하고 믿고 나오는 자가 용서받고 은혜 받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러나 믿고 나오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셨지만 그 사실을 믿고 나오는 자만 구속받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영생을 주셨지만 그 사실을 믿고 나오는 자만 생명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어야 내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또한 이웃에게 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