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식 감독 데뷔작 '내 깡패같은 애인'
옆방 사는 건달·처녀 이야기, 제작비 불과 8억여원…
'박중훈 코미디' 화려한 부활… 배우 정유미 연기도 뛰어나
속되게 말해 '돈이 아깝지 않은 영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관람료도 그렇고 제작비도 그렇다. 4일 시사회에서 공개된 영화 '내 깡패같은 애인(20일 개봉)'은 3D에 치이고 투자 자본에 닦여온 한국 영화계에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듯 쩍 하고 나타난 작품이다. 제작비 고작 8억2000만원에 신인 감독(김광식)의 데뷔작이니 인물 없고 돈 없어 영화 못 찍는다는 말은 힘을 잃었다. 올해 개봉한 한국 상업영화 중 '의형제'가 유일한 적수라 할 이 영화는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기분 좋은 작품이다.
◆영화의 힘은 역시 스토리
할리우드의 모든 감독과 제작자들이 한목소리로 말하듯 3D 아니라 홀로그램 영화가 나온다 해도 스토리가 나쁘면 망한다. 서울에 취직하러 온 여자(정유미)가 반지하 셋집 옆방에 사는 건달(박중훈)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둘이 투닥거리다가 사랑하게 되는 로맨틱 코미디일 것 같지만(심지어 그런 투로 홍보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가슴 뭉클한 드라마에 가깝다.
이 영화 캐릭터들은 대웅전 기둥처럼 굵고 우직하다. 그 캐릭터들은 시종 우습고 찡하고 조마조마한 변주(變奏)를 들려주지만, 우왕좌왕하지 않는다. 많은 상업영화들이 바로 이 점에서 실패하는 것에 비출 때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은 직접 각본을 쓴 감독의 스토리텔링 능력이라 할 것이다.
고향이 충남 공주인 김광식(38) 감독은 예전부터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 서울이란 넓고 외로운 곳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캐릭터란 뭘까'라는 고민을 하다가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은 행동 양식을 반복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것이 이 영화 캐릭터들의 특성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벌떡 일어선 박중훈
누가 박중훈을 죽었다 하는가. 박중훈은 그의 작품 중 최고의 코미디를 보여준다. '투캅스'에서 비롯된 그의 코미디는 오랫동안 슬랩스틱과 표정 연기로만 정의됐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상황과 대사로만 폭소를 터뜨린다. 이삿짐센터 사람들을 욕하는 첫 등장부터 분식집 여고생들에게 소리지르는 장면, 간호사에게 구시렁대는 장면까지 보면 송강호의 코미디는 박중훈 코미디의 부분집합인 것 같다. 여자의 아버지를 만나 자기 소개하는 장면은 '코미디의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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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안풀리는 건달 역을 맡은 박중훈. 그는 이 영화에서 표정이나 몸짓이 아니라 캐릭터로 관객을 움직이며 고밀도의 웃음과 감동을 준다. /JK필름 제공
박중훈은 그러나 한번도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는다. 오히려 심각하거나 결연하다. 그는 조직에서 이용당하고 버림받는 누아르적 인물이지 여자 만난 뒤 개과천선하는 조폭이 아니다. 그 연기에 탄복하는 것은 웃기려고 애쓴 게 아니라 캐릭터를 충실히 연기한 결과가 우습거나 비장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박중훈 재발견'의 현장이다. 시사회 인사에서 박중훈은 "너무 오래 누워 있었습니다. 이제 일어서고 싶습니다"라고 농담했다. 누웠다기보다 엉거주춤했던 그의 모습은 '100m 크라우칭 자세'였던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영화에서 그는 신기록 세울 듯 총알처럼 튀어나간다.
◆정유미라는 배우의 발견
감히 논컨대 정유미의 근년작 '차우'와 '10억'은 그녀를 잘 이해하지 못한 영화였다. 홍상수 단편 '첩첩산중'에서야 다시 보게 된 그녀는 이 영화에서 제대로 연기력을 발휘했다. 어렵게 취직한 회사가 부도나면서 반지하 셋방으로 가게 된 그녀는 옆방에 사는 깡패와 가까워지지만 촐싹대지는 않는 영화 속 인물을 뛰어나게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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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영화에서 비로소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표현한 배우 정유미.
그녀의 첫인상은 배우라기보다 똘똘한 학교 후배 같은 느낌인데, 이 영화를 보면 그 인상이 더욱 굳어진다. 그리고 그것이 연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면 좀 무섭다. 특히 못된 면접관 앞에서 춤추며 노래 부른 뒤 눈물 흘리며 쏘아붙이는 장면은, 와, 정말 대단하다. 상업영화든 예술영화든 사실주의에 입각한 감독들은 앞으로도 꾸준히 이 배우를 찾을 것이다.
흔히 '예고편이 전부'라는 비아냥을 하지만 이 영화 예고편은 정말 예고편에 불과하다. 기자시사회에서는 웃음이 계속 터졌고, 끝난 뒤엔 박수도 터졌다(후천적 박수결핍증인 기자들이 박수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극장 나오면서 바로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는 무척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