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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 세계적 공동체의 가능성
고미숙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고서
권성권(littlechri) 기자
이름만 들어도 어떤 곳인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는 곳들이 있다.
인구 5만명이 생활할 수 있도록 건설된 '오로빌',
수력·태양력 등
대체기술로 마을을 운영하는 영국의 '매헨세스',
한 달에 딱 두 번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오지 '아젠타',
워킹 액션이라는 육체노동을 통해
신성함을 체험토록 하고 있는 '제그',
매번 울리는 종소리를 통해
자신의 현재를 성찰케 되는 프랑스 남부의 '플럼 빌리지',
대안학교의 모범이 되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로 유명해 진
영국의 '슈마허 대학'과 '우드브룩',
그리고 스리랑카의 '사르보다야',
프랑스의 '때제',
스코틀랜드의 '핀드혼',
미국의 '트윈 오크스',
일본의 '도요사토' 등이 그 이름들이다.
그렇다.
그곳들은 바로 세계 곳곳의 특색 있는 공동체들이다.
그곳들 중 어떤 곳들은 자연을 자신의 생리에 맞게끔
자라도록 해 주는 생태 공동체인가 하면,
다른 곳들은 틱낫한과 같이 나름대로의 종교적 색채를 띤
명상 공동체이기도 하고,
또 다른 곳들은 열심히 땀흘려 일하는 노동공동체이기도 하고,
그 외 다른 곳들은 인간이 재생산해 낸
화학 에너지 대신 천연 자원만으로도
넉넉한 인간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는
자연에너지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런 세계적 명성을 지닐 수 있는 공동체가
한국에도 곧 등장할 것 같다는 생각을 최근에 한 적이 있다.
그것은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고미숙, 휴머니스트, 2004)라는
책을 읽고서 품은 이상향이기도 하다.
물론 생태공동체니 명상공동체니 노동공동체니 하는
단체들이 우리나라에도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
한국 사회의 화두가 된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적어도 이 공동체는
그런 공동체들과는 발상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 가능성이 기대된다는 것이다.
그 공동체는 다름 아닌 〈연구공간 '수유+너머'〉이다.
그 책의 저자이기도 하고,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창립자이기도 한
고미숙씨는 그 연구 공간을
어떤 원칙에 따라 그려 놓거나
제도화 혹은 조직화시켜 놓고서 출발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 자체마저도 종잡을 수 없고
기획할 수 없는 종횡무진의 도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길맹이다.
동서남북은 고사하고, 전후좌우도 잘 가리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내게 있어 익숙한 길이란 없다.
내게는, 모든 길이, 언제나, 낯설고 또 새롭다.
때로는 설렘과 흥분으로 질주하기도 했고,
때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뒷걸음치기도 했다.
그렇게 방황하다가 문득,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삶이 온통 길임을 알게 되었다.'(서문)
그래서 그 가능성이 기대된다는 것이다.
모든 공동체들이 규율과 제도,
그리고 조직이 밑바탕에 서 있지만
적어도 이 연구공간 공동체만큼은
그런 규율이나 제도에 얽매이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에 포획되지 않은 욕망,
라이브에 대한 열정,
가족관계 및 사회적 코드를 뛰어 넘는 우정의 연대 등등.
다들 반 농담처럼 듣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깊은 영감을 얻었고,
또 일이 꼬일 때 마다 그들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돌을 던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식을 공연하기 위하여,
앎의 향연을 펼치기 위하여.'(p.54)
이는 어떤 여성지에 실린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
그와 같은 발상을 얻은 것이기도 하다.
그런 관점에 서 있기 때문에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도
설득력을 얻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의 조직은 조직표를 그리는데 전력투구한다.
상부에서 아래까지 어떤 지위들을 정해놓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학연, 지연, 세대별로 골고루 안배할 것인가가
최대 관건이 된다.
그러다 보니 정작 구체적인 실천활동에는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심할 경우 조직표는 완벽하게 구축되었는데,
어떤 활동도 부재하는 역설이 일어나기도 한다.'(p.151)
하지만 그런 공동체나 조직의 틀과 체계와는 달리
이들 공동체〈연구공간 '수유+너머'〉는
활동들은 있지만 활동을 조직하는
뚜렷한 조직표나 체계는 없는 셈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자기 하기 나름 식의 공동체'라고
해도 좋을 조직이었다.
물론 이 책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나름대로의 틀이나 시간 짜임새 같은 부분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전체 수입의 10%를 공간사용료의 명분으로
내게 하는 '강좌 운영의 원칙'이라든지,
'음식쓰레기' 근절, '육식금지', '흔적 남기지 않기',
그리고 '책상 위에서 유목하기' 등등이
그런 것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럴지라도 공동체에 속한 누구든지 간에
개인의 희생과 손해를 보게 해서는 안되다는 게
그들의 공동체의 신념이요 행동지침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명분이 무엇이든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구성원 개개인의 삶이 비옥해지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p.87)
'사랑이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혹은 자기와의 동일성에의 요구가 아니라,
그의 본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촉발해 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p.99)
바로 그와 같은 발상의 전환 위에 탄생한 작품이
<노마디즘> 1, 2권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저자도 <노마디즘> 숨결에 대해 그렇게 밝히기도 한다.
'한마디로 <노마디즘>에는
우리 연구실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셈이다.'(p.52)
그렇다면 이 책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라는 책은
〈연구공간 '수유+너머'〉라는 연구공동체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저자의 해명 아닌 해명을 통해 알 수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대체 무슨 속셈으로 마련했는가.
어떻게 그걸 운영하고 있는가?
또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책은 일차적으로는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에서 쓰여졌다. …
이 책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이자 비전 탐구서이기도 하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낯선 미래를
생생하게 구현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p.12)
그렇다.
이 책에는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만들어진 참 뜻과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그리고 인류학적 연구 공간으로서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는, 오전 10시부터
카페가 문을 닫는 밤 11시까지의
일상을 살아가는,
연구공간 속 사람들이 소개돼 있는 프롤로그를 비롯해,
문턱, 탈주, 배치, 축제, 그리고 비전 등의
다섯 가지 꼭지들이 그 구심점을 이루고 있다.
우선 프롤로그 부분에는
이 연구공간 공동체 내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들을 살펴보면,
우선 주말마다 <맹자>를 가르친다는
청년 이경근을 비롯해,
<동의보감>을 강의한다는 30대 초반 임영철,
'워킹 니체'라 불리는 고병권,
불교학과 박사과정 수료자인 30대 초반 김영진,
연극영화과에 다니다 다시 한의대에 입학하기 위해
수능준비를 하고 있는 20대 중반의 이성국,
춘천이 거주지인 40대 초반의 미술평론가 최형순,
40대 초반의 영화평론가 변성찬,
컴퓨터 공학과를 졸업하고 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한
20대 후반의 현영종,
그리고 박노자와 류준필 선생 등이
공간지기로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들의 전공도
니체, 불교, 미술, 영화, 컴퓨터 등 각양각색이다.
뿐만 아니라 나이도 40대에서 20대까지 두루두루 걸쳐 있다.
그런 이들이 어떻게 한데 어우러졌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만약 이들을 사회에서 한데 모을라해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도 이들 서로간에 만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만 할 뿐이다.
'운명의 장난.
이렇게 밖에는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다.
예기치 않은 마주침을 가능케 하고
끊임없이 낯선 삶과 관계 속을 들어가게 해 주는
운명의 장난.
이 우발적인 필드 위에서
우리는 날마다 스릴과 서스펜스를 만끽한다.'(p.25)
첫째 꼭지 '문턱'에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태동기와 발전기
그리고 부흥기가 그려져 있다.
대학 교수로서의 꿈을 접고
연구 공간을 시작하게 된 전환점이라든지,
'수유+너머'가 잉태되는 순간이라고 해도 좋을
첫 시작 단계에서 이진경씨와의 만남을 비롯해,
공부방에서 최초로 한 〈대한매일신보〉강독 세미나,
각각의 인재들이 어떻게 합류하게 됐는지에 대한 과정들,
그리고 점차 충무로로, 와이 빌딩으로,
그리고 석마빌딩으로 부흥해 가는 부분들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활동들을 할 수 있게 된 연구 공간에 대해
저자는 나름대로의 그런 견해를 견지하고 있었다.
'공간은 그저 텅 빈 대상이 아니다.
무엇이 접속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활동을 만들어 내는 일종의 '기계(machine)'이다.
일단 공간이 확보되자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관계들이
구성되기 시작했다.'(p.33)
그런데 이 첫째 꼭지 부분을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저자의 어깨를 힘껏 받쳐준 사람들이 여럿 등장하지만,
그 중 이 연구 공간을 살아 있는
학문의 산실로 급부상시킨 한 사람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다름 아닌 80년대를 주름잡던 명망가요,
<말과 사물> <천의 고원>에 대한
열렬한 강의를 구사했던 이진경씨다.
그의 출현과 함께 연구 공간은
나름대로의 '앎의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시발역이요,
'앎을 기쁨'을 쟁취할 수 있는 무한한 종착역임을,
다음과 같이 밝혀 주고 있다.
'앎이란 그렇듯 무지개처럼 가슴을 뛰게 하고
불면의 밤을 통과하게 하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이라는 것을.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출발점은 바로 거기였다.'(p.58)
그런데 출발선상에서 그처럼
보증금 2천 만 원에 월세 40만원의 20평짜리
건물에서 출발한 그 공간 공동체가 충무로로,
와이 빌딩으로, 그리고 석마빌딩으로 옮기면서,
어떻게 1억 가까운 건물을 임대할 수 있게 됐을까.
저자는 그에 대해
<삼국유사> '수로부인(水路婦人) 조'의
이야기를 곧잘 애용한다고 한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자꾸 입으로 떠들어대라.
그러면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말하자면 원하는 바를 미리 말로 표현함으로써
뜻하는 바를 선취하는 주술적 전략…'(p.61)
물론 그런 주술적 전략만으로 가능하겠는가.
쫀쫀하다던 이진경씨와는 달리
무대포식의 성격 탓도 크게 한 몫 했으리라 생각된다.
일말의 희망과 가능성이 보이면 무조건 덤벼대는
그의 종횡무진 성격 말이다.
그녀는 그와 같은 성격을 그렇게 드러내 보인다.
'믿어지지 않는다고?
일단 한 번 해 보시라. 밑져야 본전 아닌가.
안되면 될 때까지 하면 되고. 물론 조건이 하나 있다.
마음을 최대한 비워야 한다.
잔머리를 굴리거나
초조하다고 오락가락하면 절대 안 된다.
텅빈 마음으로 치열하게 열망할 것.
이것이 비결이다.'(p.64)
둘째 꼭지의 주제는 '탈주'이다.
이 부분에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임대료와 월세,
그리고 갖가지 자금압박(?)으로부터의 탈주에 대해서,
그리고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가 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설 속 주인공 베라를 통한
사랑이 아닌 소유로부터의 탈주에 대해서 묘사돼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임대료와 월세,
그리고 갖가지 자금압박(?)으로부터의 탈주에 대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보증금은 당시 9,500만원이었는데,
나와 이진경씨가 분담했다. …
일단 월세의 경우는 일반회원들이 내는 회비,
세미나 회비, 그리고 특별회비로 충당했다.
흥미로운 건 이 항목들 가운데
어떤 것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p.81)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만큼
물질적 순환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것.
그것은 집단적 차원에서건 개별적 차원에서건
다르지 않다.'(p.82)
자금 부분에 대한 점은,
이 꼭지 부분 외에 여러 부분에 걸쳐서 기록돼 있기에
그 부분만 언급해 두어야 할 것 같다.
다만 저자 나름대로 여러 부분에 있어서
속앓이를 했을 게 분명하지만,
그때마다 '보이는 것은 버리려 했다'는 것을
늘 주지시켜 주고 있어서
그 진면목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그게 한 가지 탈주 부분이라면,
다른 탈주 부분은 저자 고미숙씨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과 함께
줄거리를 읽어 가면서,
결국 지하 감옥에서 탈주한 주인공 베라가 그려 낸 것은
다름 아닌 코뮌, 즉
새로운 관계의 생성이었음을 꼬집어 준 것이 그것이었다.
'이 소설은 베라의 의식의 변화과정을
여러 번에 걸쳐 꿈이라는 상징을 통해 형상화한다.
첫 번째 꿈이 그녀를 '지하감옥'에서
탈주하게 하는 것과 연관된다면,
두 번째 꿈은 이제 그녀가 꾸려갈
새로운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다.'(p.103)
'베라는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노동을 조직한다.
세 명의 미싱사로 출발한 봉제공장을
하나의 작은 코뮌으로 만든 것이다.'(p.104)
'신체적 변이 속에서,
관계의 새로운 생성 속에서만이
코뮌주의는 실현 가능하다.'(p.105)
'베라가 꿈꾸는 코뮌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녀는 모두가 능동적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구별되고,
지도자와 추종자가 구획되는 한
그것은 아직 코뮌이 아니다.
그러한 선들이 서로 교차할 때,
그리하여 누구나 하나의 중심이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조직은 '코뮌적' 신체가 된다.'(p.107)
그런 소설 속 주인공 베라가 그려낸
코뮌을 통해 저자 고미숙씨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코뮌도 다시금 들여다보며,
그런 생각을 전해 주게 된다.
'나는 이렇게 권하고 싶다.
공동체를 거창한 이념으로 생각할 것 없다.
그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프로그램의 하나일 뿐이다.
고통받는 타인과 사회에 대한 구제는 그 다음 문제다.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타인을,
사회를 위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p.115)
'증여와 순환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주고 받음이 오직 혈연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차디찬 '계산기계'들.
그런 몸으로는 타인은커녕 자신의 삶도 구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탈주란 그렇게 거창한 구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가벼워지는 것,
부와 재물이란 멀리 떨어져 있는
누군가에게 양도되기 위해
잠시 내게 머무르는 것을 뿐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것이다.'(p.125)
셋째 꼭지는 '배치'에 대해 다루어 주고 있는데,
그것은 연구 공간에 대한 배치요,
사람 관계에 대한 배치요,
사람과 공간,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람과 우주에 대한 배치로 환원된다.
우선 저자는 배치 이전에 나름대로의 분담과 규칙을
그렇게 정해 두었음을 밝힌다.
'주방의 역사, 밥상공동체로의 발전,
자율적인 설거지 분담,
그리하여 '규칙은 규칙을 낳는다.
'음식쓰레기' 혹은 '육식'과의 처절한 전투 속에서
터득한 또 다른 윤리적 강령이
바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이다.'(p.145)
그리고 이어 그런 공간에 대한 배치,
사람 관계에 대한 배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주에 대한 배치로
확대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코뮌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무엇보다 공간이 비어 있어야 한다.
비어야 외부를 향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비움과 열림은 같은 표현이라 해도 좋다.
그리고 비어 있음의 표현이 바로 청결이다.
청결해야만 열림, 곧 변이가 가능하다.
공간을 단지 하나의 기능으로만 쓴다면 정말 낭비다.
하지만 이거도 되고 저것도 된다면
공간은 두 배, 세 배로 확장된다.'(p.146)
'배치를 조금만 바꾸면
약점이 최고의 장점으로 변환된다.
자신의 허점으로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니
이렇게 남는 장사도 드물지 않는가.
그 때문에 연구실에서는 어떤 모임에서도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토론회의 규모,
발표주제의 난이도와 내용 따위에 관계없이
늘 웃음이 함께 한다.
웃음이 웃음을 부르고,
그리하여 마침내 '웃음자체'가 되는 것,
언제 어디서건 웃음의 물결이 출렁이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유머의 경지이다.'(p.180)
''투쟁은 둥근 원과 같다.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의식, 그것은 코뮌의 가장 큰 적이다.
아니, 능동적 접속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넘어서야 할 문턱이다.'(p.189)
'아무리 거대한 것이라 해도
안팎의 경계가 있는 한 우주와 소통할 수 없다고.
뒤집어서 말하면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안팎이 사라지면 우주적 삶을 나눌 수 있다.'(p.255)
넷째 꼭지는 '축제'에 관한 장으로서,
이 부분에서는 토론과 세미나에 대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가져오고 있고,
특히 대학교육에 대한 비판들과 함께
생산적인 교육방법에 대해서도
언급해 주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었다.
'연구실에서는 원탁과 세미나 테이블,
개인 책상 따위를 그대로 죽 나열한 채로
강의가 진행된다.
강사의 위치는 수시로 바뀔 수 있고,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이다.'(p.205)
'지식 자체가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높이는 중심요소가 될 때
비로소 '스승과 친구가 하나인
우정의 교육'이 가능한 법이다.
따라서 공간의 수평적 배치는
교사와 학생의 경계뿐 아니라,
학습자들 상호간의 친화력을 상승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p.206)
'그래서 어떤 강좌에서는 선생이었던 이가
다른 강좌에서는 수강생이 되는 변환이
수시로 일어난다.'(p.208)
''어떤 일자적인 중심 없이,
가지나 줄기들이 서로 만나고 흩어지는 방식으로
접속되고 분기하는' 뿌리줄기,
곧 리좀이 그러하듯이.
이 가열찬 줄기들의 행진 속에서
어떤 흐름을 절단, 채취할 것인가?
우리는 늘 이런 행복한 고민에 휩싸여 지낸다.'(p.209)
그런 점들이 토론과 세미나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저자의 언급은 대학교육에 대한
비판적 지적들이라 할 수 있겠다.
'학부제를 다루면서도 이미 지적했듯이,
근대 이후 분과화된 학문체계는
현실정합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분과학문은
단지 여러 전공 사이의 소통장애에 그치지 않고,
분과 내의 위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p.211)
'지적 흐름이 막히면
'땅따먹기'식의 전공 분할이 더욱 가속화되고,
그것은 자연히 지식 외적 관계들에 의존하는
습속을 강화시킨다.
학벌주의, 임용비리 등을 거세게 비판하는 이들조차
통상적으로 그런 부조리와
이러한 지적 생산방식과는 전혀 별개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야말로 지식과 삶을 이원화하는
그물망에 나포된 것에 다름 아니다.'(p.211)
'기존의 분과체계가 영토를 정교하게 분할해서
나눠먹는 '정착민적' 유형이라면,
이런 식의 가로지르기는 늘 길 위에 있으면서
새로운 생성을 꿈꾼다는 점에서
'유목적' 유형이라 할 수 있다.'(p.213)
그리하여 이제, 저자는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추진하려는 다음과 같은 세미나식 방안을
대학 교육에서도 채택해 실현했으면 좋겠다는 점을
넌지시 부각시키고 있다.
'심포지엄을 축제로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예를 들면 상상을 뛰어넘는 선정적인 테마를 가지고서
다방면의 연구자들이 발제를 한다.
형식은 개별발표뿐 아니라 듀엣으로 할 수도 있고,
여럿이서 한 조가 되어 할 수도 있다.
한 곳에는 음식과 차가 잔뜩 준비되어 있다.
진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다.
중간 중간 휴식시간에는 록, 발라드, 클래식 등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들으면서 친교를 나눈다.
주제와 관련된 슬라이드나 비디오가 상영될 수도 있다.
심포지엄의 절정은 역시 토론인데,
예의나 격식에 따른 말들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논쟁을 극한까지 몰고 갈 수 있을 뿐 아니라,
형식적 구속이 없기 때문에
토론자나 발표자의 개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다.
시간 제한은 물론,
배고픔과 지루함을 견뎌야 할 필요가 없으니,
경우에 따라서는
밤을 지새워 토론이 이어질 수도 있다.'(p.221)
물론 그와 같은 점들을 모두 채택할 수는 없겠지만,
대학 교육에 있어서 부재 현상인
토론식 수업제도를 개선해 줄 부분이
여기에 나타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은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마지막 다섯 번째 꼭지는 '비전'에 관한 부분이다.
이는〈연구공간 '수유+너머'〉가
나아가야 할 비전으로서,
곧 인류학적 비전이기도 하다.
그 비전에 대한 부분 중 다음과 같은 부분을
새겨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새로운 경계로 나아가려면
숙하고 낡은 것들을 가차없이 내려놓아야 한다.'(p.245)
'비움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낯설고 새로운 앎에 대한 열정을 계속 고양시켜 가려면
비움의 강밀도 역시 커져야 한다.
앎이란 천지에 가득 찬 흐름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적으로 소유하려 하는 순간,
앎의 경계는 막혀버린다.
따라서 안팎의 경계를 넘어 계속 흐르게 하려면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
그 점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변이, 생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잊어버려야 한다.
망각의 크기가 곧 존재의 크기를 결정짓는다.
'흐름과 비움'의 윤리학'(p.246)
'이것은 노마디즘의 윤리적 기초이기도 하다.
노마드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량민이나 이주민이 아니다.
어떤 볼모의 땅에서도 철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새로운 삶과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들이다.
추원이나 스텝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 자리를 초원으로, 스텝으로 만드는 이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야 한다.'(p.246)
''보면 사라진다'고 했던가.
강렬하게 접속하되 집착과 소유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 것.
활동이 하나의 영역에 멈추지 않고
다른 활동들로 흘러 들어가게 할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없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명상의 지혜는
코뮌의 비전 탐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항이다.'(p.248)
이는 아마도 지금껏 이루어 놓은 결과에 대한 만족보다는
새로운 장을 열고, 새로운 만남을 위한 끊임없는 정진,
그를 위한 비움의 과정,
곧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을 위한 행진'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혜의 바다'로 '혁명의 산'으로 이어지려면
앎이 삶 속에서, 일상 속에서,
매 호흡마다 강렬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앎과 삶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경계를
거칠게 뛰어넘는 열정과 결단이 요구된다.
'야생마-되기' 혹은 '미꾸라지-되기'를
쉬임 없이 시도해야 한다.
'도래할 혁명', '오래된 미래'를 가능케 하는 건
이념적 명분도 수목적 위계도 중심적 장치도 아니고,
오직 '지금, 여기'에서 솟구치는
생의 '강밀도'인 까닭이다.'(p.279)
그렇게 모든 경계를 거칠게 뛰어넘는 열정과 결단이
그들〈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공동체 속에
내재돼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서울 근교에 별장을 하나 얻어,
'자연농법'(씨만 뿌리고 대충 내버려둔다는 뜻)으로
여름에 감자 한 번 거두고,
배추와 무를 심어 수확도 한 번
한 이력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게 모두 돈이 아닌 마음작용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리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코뮌의 궁극적 영역이 세 가지로 구획돼
힘차게 뻗어나갈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혀주고 있었다.
'첫째가 일상의 공간.
이곳은 일하고 먹고, 놀고, 즐기는 공간이다.
여기에는 '어린이에서 노인까지 결정에 참여해야 한다.
어린이를 타자화 하지 않고,
노인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디언 식이기 때문이다.'(p.289)
'둘째가 배움터다.
삶이 더 높은 곳으로 고양되기 위해서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환경에 대한 앎이 반드시 요구된다.
앎과 삶을 결합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은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될 것이다.
예컨대 자연을 주 텍스트로 삼아 배움을 확장해 가는 한편,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배움터들을 순례하면서
시야를 넓히는 방식을 적극 개발할 것이다.
이는 공동체의 자산 및 네트워크를 발판으로 하면
누구든 언제든 세계를 순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이 명상 센터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지식을 국경을 넘어,
인간을 넘어, 우주 전체로
흘러 넘치게 하기 위한 구도의 장이다.'
마지막으로 저자 고미숙씨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장래성에 대해서
그렇게 밝혀주면서 이 책을 갈무리하게 된다.
'연구 공간 '수유 +너머는 어떻게 되냐고?
거기도 하나의 코뮌이다.
네트워크의 일부이자 서울의 베이스캠프가 될 것이다.
그곳 역시 분자적 증식을 계속 해 나갈 것이다.
고도의 지적·영적 수련과정을 요구하는 대학원과정 및
동아시아를 비롯한 전 세계 지식인 연대의 구축
-이것이 지식생산의 한 코스라면,
육아방이나 공동주택, 청소년 교육프로그램 등은
공동체의 대중적 확산을 위한 코스가 될 것이다.
각각은 모두 하나의 '코뮌'이 되어
또 다른 인접계열들과 접속을 시도할 것이다.
중심은 많을수록 좋다.
별이 많을수록 밤하늘이 찬란한 것처럼.
나는 감히 꿈꾸어본다.
전국 방방곡곡에,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
크고 작은 코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를!
길이 길을 만들고,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삶이 온통 길이 되기를!'(pp.291-292)
지금껏 연구공간 공동체인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를 읽어보았다.
이런 연구공동체가 지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된다면
우리나라의 장래는 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세계를 향한 연구공동체로서
발돋음 하는 데에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서두에 밝힌 바와 같이
이〈연구공간 '수유+너머'〉공동체는
분명 세계적인 명성을 지닐 수 있는 공동체가
될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늘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듯,
그 최초 출발선상의 이념이 흐려지지 않아야 할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론의 여는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이 연구공간 공동체도
그런 마음가짐이 변질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고,
또 그럴 것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고병권씨의 〈종로시대의 제안〉이라는
메시지의 마지막 대목은
우리 세대나 다음 세대의 모든 조직과 공동체들이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인다 해도 부족함이 없는 일갈임에
분명하리라 생각되는 바이기에,
그 분의 말로 끝을 맺으려 한다.
'우리의 코뮌주의는 조직에서
나온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운동의 이름입니다.
'우리 코뮌을 어떻게 키울까'는
'우리 조직을 어떻게 키울까'가 아니라
'우리 운동을 어떻게 전개할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p.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