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중동 이야기] 고대 오리엔트 국가의 흥망 -4.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 델로스 섬의 번영
1994년 4월, 나는 크루즈 여행객들을 위한 강연을 맡으면서 에게 해 키클라데스 제도의 중심에 있는 델로스 섬을 여행하게 됐다. 뭄바이에서 출발해 아카바(요르단), 수에즈, 포트사이드(이집트), 로도스 섬, 미코노스 섬, 팔레우스(그리스), 코샤다스(이탈리아)들 들르는 동지중해 여행이었다.
여행 중에 들른 미코노스 섬은 새하앟게 빛나고 있어 이곳이 왜 관광자로 유명해졌는지를 알 수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집들의 모든 벽과 지붕은 물론 대문까지 온통 흰색이었다. 델로스 섬은 이곳 미코노스 섬에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20-30분 정도 걸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선착장에 내려서면 이 섬의 규모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면적은 3.5킬로미터이고, 남북의 길이는 5킬로미터, 동서로 1.3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섬을 일주한다 해도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델로스 섬은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졌으며, 한때 2만 5,000여 명이 이 섬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무인도로 변한 지금은 섬 전체가 유적의 무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섬에 상륙해 아폴론 신전이 있던 지역으로 향하던 돌 블록이 깔린 광장(아고라)으로 이어진다.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는 주랑과 정문을 지나면 아폴론 신전의 유적이 시작된다. 가까운 곳에 기원전 7세기에 봉헌됐다는 5마리의 백사자상이 남아 있다. 오른편에는 원형극장, 시장, 주거지 터 등이 산재하고 앞쪽으로 완만한 경사가 이어져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해발 110미터의 킨투스 산 정상에 도달한다. 이곳에서는 섬 전체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탄생에 관한 전설이 재미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절대신인 제우스 주신이 바람을 피해 레토라는 여인을 임신시켰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질투로 미친 듯이 노여워하며 “아이를 낳을 땅을 제공해선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난처해진 제우스는 델로스가 해초로 뒤덮인 채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사실에 착안해 “땅이 아니니 괜찮다”며 레토가 이 섬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했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아폴론과 아르테미스였다. 아폴론은 음악과 의학 그리고 태양의 신이며, 아르테미스는 농경과 수렵 그리고 출산의 신이다. 이처럼 델로스 섬은 그리스인에게는 그야말로 신의 영역이자 종교의 중심지였다.
살라미스 해전 승리 후에도 페르시아가 다시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던 아테네는 기원전 487년, 소아시아에 있는 이오니아의 도시국가들을 비롯해 에게 해의 섬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그 본거지를 이곳 델로스 섬에 두었다. 이것이 바로 델로스 동맹이다. 이 동맹을 주도한 아테네는 당연히 전력의 주체가 됐다. 동시에 이 동맹에 가입한 나라들은 모은 자금을 관리했고, 그 금고를 아폴론 신전에 두었다. 아테네의 해군력은 다른 모든 나라들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델로스 동맹을 축으로 아테네는 에게해를 지배하게 됐다. 델로스 섬이 그리스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되고, 에게 해의 주요 상업항으로 번영했던 것도 바로 이 시대였다.
그러나 이러한 아테네의 번영은 당시 또 하나의 대항 세력이었던 스파르타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두 세력이 격돌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기원전 404)이 일어났다. 이 오랜 소모전은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지만 스파르타의 패권에 반발하는 코린토스가 다시금 아테네를 끌어들여 반스파르타 연합을 결성, 두 세력이 또다시 충돌했다. 이것이 코린토스 전쟁(기원전 395-기원전 386년)이다.
이처럼 끊임없는 분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페르시아는 모든 전쟁에 개입해 때로는 스파르타를, 때로는 아테네를 지원하며 자금과 무기를 원조했고 두 세력 중 어느 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도록 했다. 코린토스 전쟁은 결국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 손잡고 아테네를 굴복시킴으로서 끝났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이중적 개입을 거쳐 이른바 안탈키다스 화약(Peace of Antalkidas, 기원전 386년)이 성립됐고, 이로서 페르시아는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 도시의 지배권을 다시금 얻게 됐다. 그러나 거듭되는 전쟁으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힘을 소진했고, 다시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피폐해졌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마케도니아
이러한 와중에 돌연히 마케도니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지금의 북부 그리스와 남부 불가리아를 포함한 고대 마케도니아는 서쪽으로는 일리리아, 동쪽으로는 트라키아에 접해 있었다. 그리고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상부 마케도니아와 저지대의 본토 마케도니아로 나누어져 있었다. 테르마이 만과 접하며, 악시오스 강과 알리악몬 강 사이에 있는 저지대 마케도니아에는 이미 기원전 7세기에 그리스계 왕가가 존재했다고 한다.
마케도니아 왕가는 기원전 4세기에 이르러서야 그리스 역사에 등장하게 되는데 그리스 본토의 도시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봉건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인들은 왕에 대한 충성과 공납의 의무를 지는 대신 토지와 공민권을 갖고 있어 국왕 선출과 폐위에도 관여했다고 하니 봉건제도라고는 하지만 상당한 민주제이기도 했다.
기원전 4세기 중반, 필리포스 2세(제위 기원전 359-336)가 그때까지 분립하고 있던 상부 마케도니아를 편입해 저쪽의 일리리아, 에피루스, 남쪽의 테살리아, 동쪽의 트라키아, 북쪽의 파이오니아 민족을 정복하면서 급속도로 국력이 신장됐다. 이러한 마케도니아의 세력 확장은 당연히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 특히 아테네를 자극했다.
테르마이 만의 동쪽으로 넓게 펼쳐진 칼키디키 반도에까지 마케도니아가 손을 뻗치자 아테네는 칼키디키의 도시국가들과 대립하고 있엄음에도 다양한 형태로 이를 방해했다. 마케도니아가 테살리아, 포키스, 보이오티아 등 그리스 본토에 대한 남하정책을 펼 때도 주변의 도시국가들과 동맹을 맺고 이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해 공작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아테네는 보이오티아의 테베와 동맹을 맺고 기원전 338년, 마케도니아와 격돌하게 됐다. 아테네, 테베 동맹구느이 중보병 약 3만 5,000명과 마케도니아의 보병 3만 명이 대결한 카이로네아 전투였다. 이때 18세의 왕자 알렉산드로스는 왼쪽 부대 지휘를 맡아 종횡무진의 활약을 보였다. 그리스가 자랑했던 중보병 군단은 마케도니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마케도니아의 군사력은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V. D. 한센의 저서 <고대 그리스 전투>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정리해보자.
첫째, 마케도니아는 강력한 상비군(한센의 말을 빌리면 ’프로 군단‘)이 있었다. 이에 비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군대는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시민, 혹은 독립 자영농민이 자발적으로 모인 조직이었다. 따라서 강한 단결력과 용기는 갖고 있었지만, 각 폴리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에 따른 제약이 있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군대의 규모와 힘을 제약했다. 게다가 각 폴리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떨어짐에 따라 단결력과 군사력도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전투 방법과 지휘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이제까지의 전투는 시민군으로 이루어진 중보병이 정면으로 돌격하는 이른바 정공법이 주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군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승리하는 데 집중했다. 필요하다면 적진을 약탈했고, 중보병과의 정면 격돌은 가급적 회피하면서 기동성을 살린 게릴라 작전을 구사하기도 했다. 음모와 매수, 또는 동맹과 대항 동맹을 맺는 일도 다반사였다. 또한 보병전투를 지휘할 때 그리스는 일반적으로 중보병 군단은 지휘관 전원이 부하와 함께 군단의 최전선에 싸웠다.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도 선두에 서서 싸웠지만 그들 지휘관은 말을 타고 그 정면에 정예부대를 배치해 군단을 지휘했다. 그들은 나팔과 전령으로 전진, 후퇴, 견제, 예비군의 투입 등 복잡한 명령을 빠른 속도로 전달했고 군단은 그이ㅔ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고 한다.
셋째, 마케도니아군의 장비다. 마케도니아의 군사 장비는 경장비였으며 기동력이 있었다. 우선 보병(페제타이로이)이 만드는 밀집방진은 언뜻 보기에는 그리스 보병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드는 창은 기존 창(2.5미터)의 2배 길이인 5.5미터까지 길어졌고, 창끝 또한 예리하게 만들어졌다. 창의 무게는 6.5킬로그램으로, 기존 창의 7배 이상 무거워졌기 때문에 양손으로 들어야 했다. 투구와 흉갑, 아대는 가죽이나 합성 소재를 이용했고 완전히 없는 경우도 있었다. 기존의 밀집방진이 전면의 3열까지 창을 수평으로 들고 돌격하는 형태였다면 이번에는 전면의 5열까지 창을 겨누고 전진했기 때문에 창을 겨눈 길이가 그리스의 중보병보다도 2.5미터에서 3미터까지 길어졌다. 마케도니아군의 밀집방진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틈이 없었고 공격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이처럼 강력한 보병 군단과 함께 기병부대가 연계작전을 펼쳤다. 기병은 헤타이로이라 불리는 소귀족으로 이루어진 군단이었다. ’벗‘이라는 뜻의 헤타이로이는 황이 자신의 특근들로 구성한 동료 부대였다. 앞서 설명한 보병 페제타이로이는 보병 헤타이로이가 되는 것이다. 이는 왕의 벗이라는 호칭을 보병에게도 내림으로써 왕과의 친근감을 강화하려는 의도다. 기병단은 방패와 검, 창으로 무장한 중기병으로 구성돼 접근전에서는 I자 형의 진형으로 민첩하고도 과감하게 움직였으며, 그리스 동맹군의 기병보다 기동력이 훨씬 뛰어났다. 이 중기병부태와 밀집보병부대의 일체화된 공격은 그리스군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전술이었다.
여기에 방패부대(히파스피스타이)라 불리는 보병 별동부대가 있었디. 이 부대는 방어 장비를 충분히 갖춘, 짧은 창으로 무장해 기병이 돌격한 후에 첫 번째로 공격하는 보병이다. 기병의 초기 공격과 그 후의 밀집방진 공격의 틈을 메우고 공격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밖에도 경장비부대, 투석부대, 궁수부대를 비롯해 창을 던지는 투척부대 등이 있었으며, 이러한 모든 부대들이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이렇게 뛰어난 전투력을 갖춘 마케도니아군은 그리스 동맹군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그 후 필리포스 2세는 펠로폰네소스로 진격했고, 스파르타를 제외한 모든 도시국가가 마케도니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필립포스 2세의 제안에 따라 스파르타를 제외한 그리스 본토의 모든 도시는 에게 해 섬에 있는 도시들과 함께 그리스 연맹을 조직해 연맹 가입국 간의 상호평화 준수와 이를 어긴 도시에 대한 제재를 약속하고, 이와 더불어 필리포스 2세를 연맹군의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필리포스 2세는 이들 도시를 마케도니아에 합병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자신을 그리스인이라 생각하고 이러한 인식을 그리스인과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인식은 그의 뒤를 이은 알렉산드로스에 게도 이어지게 된다. 그리스 연맹은 또 과거에 필리포스 2세가 주장하던 페르시아 진격을 승인하고 페르시아를 공격하기 위한 파견군의 소집에도 동의했다. 실제로 기원전 336년 봄, 필리포스 2세는 헬레스폰트 해협 맞은 편에 있는 소아시아 아비도스에 1만 명의 병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해 여름, 필리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 귀족 파우사니아스에게 암살당해 그의 페르시아 원정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47세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왕비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가 필리포스 2세와 헤어지자 어머니 고향으로 함께 돌아가,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와 한때 소원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부자간의 갈등은 곧 해결됐고, 약관의 나이에 알렉산드로스 3세(대왕, 재위 기원전 336-323)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