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화요일 성미산학교 고등의 지인지기 초대로 최규석 작가가 왔었다. 덕분에 만화에 별로 관심 없던 나도 만화를 좀 봤다. 34살이라는 젊은 나이이지만 최규석작가는 리얼리즘 만화를 구사한다. 그런데 그 소재가 70년대 근대화 과정에 나타난 농촌의 가부장제와 가난의 전형, 그리고 농촌과 도시빈민의 이야기와 정서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놀랍다. 그 자신의 놀람도 이런 시차의 공존에서 비롯된다. '난쏘공'형의 70년 전형은 근대한국사회의 모순을 압축한 것인데,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여전히 공존하며 폐부를 찌르는 일이 되고 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지만 동시에 <대한민국 원주민>처럼 인간이 기계들의 업그레이들을 따라가지 못하고 동물원의 고릴라처럼 덜 '진화'된 채 공존하게 된다. 즉 우리는 한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층 세계를 살아간다. 승자와 패자를 가름하고 차별하는 다층성은 여전히 현대의 비극이다. 물론 누군가는 다양성이라는 말로 미화하겠지만.
리얼리즘의 한계와 끝을 얘기한지 오래인 지금 리얼리즘 만화라니...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뭔가 다른 전략과 어법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로테스크리얼리즘의 취향을 보여주었던 데뷰작과 초기작들을 지나 자전적 회상리얼리즘과 역사를 거쳐 그는 잠시 정체된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첫 데뷰작인 <습지생태보고서>의 치기와 파토스 섞인 유머가 마음에 든다. 희화화될 수밖에 없는 없는 자들의 분노, 그리고 공상과 상상에서 위안을 받을 수밖에 없는 습지생태자들의 생활, 그것이야말로 만화적 상상력이 뿌리내리는 지층이 아니겠는가? 그는 아직 미래와 희망에 대해서 아직 충분히 말하고 있지 않다. 아름다움과 전망에 대해 말하기엔 습지에 대한 절망이 너무나 강한 탓일까? 그가 전망부재 속에 돌파할 곳은 어디일까의 문제는 과제로 남는다. 그리고 그의 만화가 더욱 전개되면서, 현 단계의 리얼리즘이 가진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고, 희망과 생명을 어떤 방식으로 구현낼 수 있을까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