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리는 22세에 자결했다.
그의 죽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로 하여금
자기 가문을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으로 확립하려는 야심에
아무런 걸림돌이 없게 만들었다.
1598년 아버지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죽었을 때
히데요리는 불과 6세였기 때문에
사실상 5명의 다이로[大老]가 일본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히데요시가 자기가 죽을 경우
뒤에 남은 아들을 위하여
공동 섭정으로 임명해둔 사람들이었다.
오래지 않아 섭정들 사이에 충돌이 생겨 유혈사태로까지 발전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關ヶ原戰鬪]에서 승리해
일본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주요 다이묘[大名]들 전부가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수가 여전히 히데요리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이에야스는 히데요리로 하여금
히데요시의 근거지이던 오사카 성에 거주하면서
주위의 거대한 봉토를 다스리도록 했으며
자신의 손녀와 결혼시켜 두 가문을 통합했다.
1611년
히데요시를 기억하며 충성을 바치던 원로 무사들 가운데 마지막 사람이 죽자
이에야스는 드디어 히데요리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1614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복원하여 달아놓은
호코 사[方廣寺] 범종에 새겨진 글자를 빌미로 삼고 나섰다.
종에 새겨진 글자 중 '國家安康'은
이에야스[家康]라는 이름을 표기하는 데에도 쓰이는 것이었으니
이에야스는 히데요리가 자신을 헐뜯으려 했다고 비난하면서
오사카 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히데요리를 원조해준 다이묘들은 없었지만
그는 도쿠가와가 권력을 다질 때 쫓겨난 로닌[浪人]을 9만 명 이상 끌어모았다.
결국 도쿠가와의 군대가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지만
히데요리는 오사카 성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다.
1615년초
이에야스는 휴전을 제의했고
히데요리가 이를 받아들여 성 밖으로 둘러서 판 해자를 메꾸고
방책의 외부 방어시설을 부수도록 했다.
몇 달 뒤
이에야스는 무방비상태인 성을 공격했고
절망에 빠진 히데요리는
가족과 함께 자결하고 말았다.
1614년까지 히데요시를 따랐던 세력들이 대부분 죽자
이에야스는 마지막 정적인 히데요리를 별 위험없이 제거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두 진영의 오랜 긴장상태가 지속된 뒤
이에야스는 군대를 동원해 산발적이고 특기할 것 없는 싸움을 2차례 치른 끝에
마침내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고
히데요리 등 성의 실력자들을 제거했다.
이에야스는 도쿠가와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영지를 배분한 뒤
고향인 슨푸로 돌아가 이듬해인 1616년 병사했다.
그는 100여 년 동안 무사들이 이루려 했으나 실패한 일,
즉 자신의 가문들을 영원한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하고
일본 전역에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오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룩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