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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두 -뒷골목의 히어로-
>실력을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1976년 9월 22일.
이날 리오 데 쟈네이로주의 전화공사에서 일하는
아버지 네리오 나자리오 데 리마와
어머니 소니아 도스 산토스와의 사이에 세번째 아이가 탄생했다.
이름은 호나우두. 출산을 도운 의사가 호나우두 발렌티란 이름이었어서
부모가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호나우두의 고향은 리오주 교외에 있는 벤토 리베이로라는
비교적 빈곤한 계층의 사람들이 사는 지구였다.
어렸을 때는 정말 사치는 생각할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 네리오의 수입으로
가족들이 둘러앉아 식사를 할만한 생활은 보장되어 있었다.
형 네리뇨와 여동생 이오네는 항상
태어난지 얼마 안된 호나우두를 '다다도' 라고 불렀다.
아직 어린 형제들에게 있어서 '호나우두'
라고 정확히 발음하는 일은 힘들었을 것이다.
곱슬곱슬한 컬 헤어에 애교있는 웃음을 잃지 않는 다다도.
그는 어느샌가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다다도란 애칭으로 귀여움을 받았고,
(그가) 거주하던 제네랄 세자르 오비노 거리계의 인기인이 되었다.
덧붙여 이 거리는 현재는 호나우두의 위대한 공적을 일컫는,
'호나우두 나자리오 거리' 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호나우두의 생가가 있던 114번지에는 새로운 집이 세워졌고,
친척 가족이 살고 있다고 들었다.
호나우두는 보통의 아이들보다도 빨리 걸음마를 시작했지만,
3살이 되기 전까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과묵한 호나우두의 유소년시절의 즐거움이라고 하면
삼바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나
아버지 네리오가 친구들을 모아 즐기던
아마추어 축구를 열심히 관전하는 것이었다.
"다다도는 과묵한 아이였지만 축구를 볼때는 정말 즐거워 보였습니다.
틀림없이, 그 아이는 빨리 커서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과 함께 플레이하고 싶었던게 아닐까요?"
어머니 소니아는 당시를 그렇게 회상한다.
"철이 들고나서부턴 그 아이는
매일같이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설마 그 꿈이 정말로 이루어져 버리리라곤..."
실은 호나우두는 어렸을 때부터 '학업을 우선하도록' 이라고
어머니 소니아에게 엄하게 이야기를 들어왔다.
브라질에선 옛날이나 지금이나
축구선수란 직업의 선택은 그다지 환영받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것은 아주 극소수의 선수들이며,
대부분은 큰 좌절을 맛보거나
힘든 생활을 하지않으면 안되는 실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니아는 그걸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에,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축구보다 학문이 중요하다고
늘상 호나우두에게 설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 다다도에게 있어서 학교에는 흥미를 끌만한 것이 거의 없었고,
학업은 지루하기 짝이없는 대상일 뿐이었다.
그의 흥미는 오직 뒷골목에서의 축구였고,
머릿속으론 항상 골을 넣기 위한 방법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플레이할 장소와 친구들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누군가 공을 차면 거기가 곧 즉석 그라운드가 되어,
5분도 채 지나지 않은 사이에 발길닿는 곳마다
맨발의 아이들이 모여들었던 것이다.
매일 다른 멤버들이 모이는 뒷골목 축구에서는
리더가 잘하는 아이부터 순서대로 멤버를 뽑아
두 개의 팀을 만드는 것이 룰이었다.
리더를 맡는 건 대부분의 경우 연장자나 공 주인이었는데,
호나우두의 자랑은 그 리더들로부터 가장 먼저 불리는 일이었다.
즉, 이미 이 세계에선 소년 다다도의 실력을 의심하는 자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호나우두의 아이돌은 지코였다.
그러나 그 동경은 이윽고 목표로 변한다.
축구에 열중하게 된 자식을 걱정해 소니아는
이전보다도 더욱 학문의 중요성을 열심히 외쳤지만,
이미 호나우두의 머릿속에는 지코와 같은 길을 걸을 생각밖에 없었다.
어머니 소니아의 설득도 헛되이,
결국 호나우두의 학생생활은 중학교 2학년으로 끝을 맞이한다.
그 후의 인생은 그야말로 축구 일색.
활약의 장이 먼지투성이의 뒷골목에서부터 훌륭한 잔디 구장으로 바뀌는데는
그다지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높은 허들
호나우두의 성공 스토리를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골목길 축구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풋살과의 만남이다.
호나우두가 처음 입단한 클럽은
테니스 크루베 바우케이레란 지방 축구 클럽이었다.
입단 당시의 나이는 6살.
그는 거기에서 천성의 재능을 갈고 닦아 교묘한 볼 컨트롤을 몸에 익혔다.
팀도 호나우두의 가입으로 기세가 올라
리오주의 쥬니어 대회에서 강호 바스코다가마에 승리하는 등 대 승리를 올렸다.
그리고 이 시합의 활약이 호나우두를 새로운 무대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관전하러 왔던 소시알 라모스 클럽의 스카우터가
갓 7살이 된 호나우두를 뽑아간 것이다.
소시알 라모스의 연습장이 있는 라모스 지구에는
벤토 리베이로부터 버스로 2시간이 필요했다.
어머니 소니아의 걱정은 불과 7살인 아들이
이 거리를 주에 2회 왕복하는 것이었다.
"교통비는 클럽 측이 부담해 주었지만,
7살 아이가 다니기에는 너무나 멀었습니다.
부모로서는 역시 찬성할 수 없었어요."
소니아는 그렇게 술회한다.
어머니의 걱정은 아랑곳않고 호나우두는
소시알 라모스의 풋살 팀에서도 빛을 발했다.
당시 모습을 담은 비디오는 오른발 왼발로 깔끔한 페인트를 쓰고,
마지막엔 적을 비웃는 듯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소년 호나우두의 모습이 비추인다.
하이라이트는 필드 위 모든 선수들을 드리블로 빠져나가 멋진 골을 성공시키는 신.
호리호리한 몸에서부터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강력한 그 플레이에 주변 사람들은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호나우두는 아무리 주변의 절찬을 받아도,
이대로 풋살 선수가 되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프로 축구선수가 되고싶다는 꿈을 절대 잃은 적은 없었다.
"기다려요, 엄마. 프로 축구선수가 되어서 첫 월급을 받으면,
소파 커버를 갈아줄테니까."
당시의 소년 호나우두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약속했다고 한다.
8살이 된 호나우두는 드디어 동경하던 지코가 소속되어있던 명문,
플라멩고의 입단 테스트를 받을 결심을 한다.
그 테스트는 수백명의 입단 희망자들이 몇개의 팀으로 나뉘어
20분 정도의 게임을 치루고, 눈에 띄는 선수들만이 남는 오디션 형식으로 치뤄졌다.
덧붙여 이 형식을 브라질에서는 '페네이라(체)' 라고 부른다.
선수들은 문자그대로 차례차례 체에 걸러져, 힙격자는 고작 1~2명.
정말로 초난관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호나우두는 약 40명의 그룹을 받은 첫 날 1차 테스트를 가볍게 패스해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커다란 문제에 직면한다.
자택에서부터 클럽까지는 약 40킬로미터.
거기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버스를 4번이나 계속 타야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교통비를 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준비했던 돈의 대부분을 버스 안에서 도둑맞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다음날 2차 테스트는 단념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본래대로라면 꿈에의 첫발을 내디뎠을 테지만,
완전히 뒤바뀌어 악몽으로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슬픔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침 비슷한 시기, 그때까지 따뜻하게 자식을 지켜봐주던 부모님이 돌연 이혼.
가장 사랑하던 아버지 네리오가 호나우두의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좌절과 실망. 그리고 가족의 분열.
8살의 소년이 넘지 않으면 안되는 허들은 너무나도 높았다.
>화려한 캐리어의 시작
13살이 된 호나우두는 소시알 라모스에서 풋살을 계속하면서,
산 크리스토반이란 클럽에서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했다.
리오시의 교외에 있는 산 크리스토반은 1926년에 주 리그의 왕자에 빛나는 등
과거에는 영화를 자랑했지만 그 당시는 경영상태도 빈곤해 지고,
일찌기의 화려한 면모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약소팀에서 플레이하던 호나우두였지만,
그의 성장 스피드는 어마어마했고,
서서히 거물로서의 부분부분을 엿보이게 되었다.
축구에 대한 한결같은 노력이 보답받은 것은,
92년 U-17남미대회(콜롬비아 개최)에 임하는 대표팀에 선출되었을 때였다.
이것을 기회로 호나우두는 레이나우도 피터,
알렉산드레 마르틴스란 두 사람의 대리인과 계약을 맺고
자신의 소유권을 그들에게 매각했다.
이렇게 얻은 얼마 안되는 수입으로
그는 염원의 나이키 슈즈를 자신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호나우두의 화려한 캐리어가 시작된 것은,
그 때부터 1년 후의 일이었다.
피터와 마르틴스 대리인 콤비는 이 16살의 천재소년을
5만달러의 이적금으로 크루제이로에 이적시킨 것이다.
태어나고 자란 리오를 떠나 브라질 중부의 공업도시 미나스 제라이스 주의
벨로 오리존테 시로 생활거점을 옮긴 호나우두.
크루제이로는 그런 그를 그야말로 다이아몬드 원석과 같이 소중하게 다뤘다.
물론 프로로서의 엄격함은 철저하게 엄히 가르쳤지만,
그 한 편으로 이 원석을 정성들여 갈고 닦은 것이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크루제이로는 이 해 코파 드 브라질을 제패했는데,
클럽은 호나우두에게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아직 1군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그를 대동했다고 한다.
호나우두의 데뷔전은 93년 5월 25일, 주 리그 카우덴세 전이었다.
기념해 마땅한 첫 골은 그 후로부터 2개월 후
벨레넨세스(포르투갈)과의 친선시합에서 나왔다.
이 후에도 폭발적인 기세로 시원한 진격은 이어졌다.
그리고 93년 12월에는 약관 17세로 최고봉 브라질 대표팀에 첫 소집되었다.
연봉도 대폭으로 올랐다.
처음 손에 들어온 고액의 수입으로,
그는 운전면허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폭스바겐의 골프를 구입했다.
또한 어머니 소니아를 위해 리오 서부에 새로운 집을 세우기도 했다.
호나우두와 가족의 생활은 확 바뀐것이다.
그 후의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크루제이로에서 압도적인 활약을 선보인 호나우두는,
94년 미국 월드컵 멤버에 뽑혔고, 그 후엔 유럽으로 진출.
PSV아인트호벤, 바르셀로나, 인터밀란, 그리고 현재의 레알 마드리드 등,
스타가도를 마구 달렸다.
또한 월드컵에서는 94년의 우승에 이어 98년도 준우승.
우승과 함께 득점왕의 타이틀까지 거머쥔 2002년 대회는
아직도 기억에 새록새록하다.
브라질의 빈민가에서 자란 다다도는
이렇게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했다.
뒷골목의 히어로에서 세계굴지의 스트라이커로.
어머니 소니아도 지금은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교과서와는 친구가 될 수 없었던 다다도였지만,
그녀는 그런 자식으로부터 멋진 인생을 선물받았으니까.
월드사커다이제스트 2003년
첫댓글 천재는 악조건에서 탄생된다. 그말이 사실인가^^?
마라도나가 축구 그 자체라면 호나우두는 축구를 위해 숨을 쉬며 살아가는 사람 같아요. 맨발로 흙땅을 누비며 허름한 축구공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배불뚝이 꼬마아이가 눈에 선 하네요.
박지성도 평발입니다~ 이러한 신체를 가지고 현재는 세계적인 미들로 변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