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가방을 짊어 매며 어떻게 자기 있는 곳을 알았냐고 물었다. 나는 CIA에 아는 친구들이 좀 있다고 장난을 쳤다.
토어봐와 학원을 나설 때 너무 황홀한 나머지 오스트리아 직원 아주머니한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나갔다. 지금도 그것이 마음에 좀 걸린다.
거리로 나와 토어봐를 식당에라도 데리고 갈 참이었는데 그녀가 하는 말이 나와 같이 있을 시간이 얼마 없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학기 중에 독일어 시험을 보러 오슬로에 온 상태라 저녁 비행기로 다시 베르겐으로 가야 한다고 사정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런데 기뻤던 것은 그녀가 나를 기다린다고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한차례 놓쳤다는 것이다.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그녀는 떠나야 할 상황이어서 못 만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우리는 같이 중앙역으로 걸어갔다. 황홀한 나머지 중앙역까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거리에 많은 현지인들이 우리를 눈여겨보고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왔다.
그들의 눈에 동양인이 금발미녀와 다정히 이야기 하며 다니는 것이 상당히 못마땅했던 것 같다. 아니면 남자가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거나.
역에 들어가 매표소에서 공항행 표를 끊어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기차가 잠시 후면 도착할 상황이었는데 그녀에게 기념이 될만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가방을 뒤지니 두 권의 책과 지도가 나왔다. 가지고 있던 두 권의 책 중 한권은 여행안내책 이었고 한권은 ‘남태평양을 건넌 상록수의 혼’이란 책이었다. 아직 다 읽은 책은 아니었지만 귀국해서 또 사면되었으므로 그 책을 기념선물이라고 건네주었다.
책을 받고 그녀는 고마워하였다. 그녀도 갑자기 자기 가방을 뒤적거렸다. 가방 속에서 꺼낸 몇장의 사진 중 그녀의 모습이 있는 사진을 건네주었다. 그때 마침 기차가 때 맞춰 도착하였다.
기차가 도착하자 나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이렇게 그냥 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웠으나 그렇다고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잠시 만난 사이인데 좋아한다고 하면 그녀가 겁을 먹어 친구관계 조차도 유지가 되지 않을 것이 겁났다.
그러나 나는 고민 끝에 일을 일단 저지르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싫어하던 말던 키스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가 내 키스를 싫어했을 경우 도망 가버리려고 생각했다. 맞다, 확실히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기회를 노렸다. 그녀와 작별인사를 하고 그녀가 기차에 올라타려 했을 때 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소 거칠게 그녀를 내 쪽으로 돌려 세웠다.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때도 망설였다. 정말 내 생각이 바른 생각인지 아닌지... 생각을 하는 순간에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그녀를 덮치고 말았다. 그녀를 끌어안고는 그녀를 빨아들일 듯한 키스를 퍼 부었다.
눈 감고 덤비는 심정으로 한 짓(!)이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녀가 처음에 잠시 저항하는 듯 하다가 나중엔 못 이기는 척 응했던 것 같다. 바로 그때역무원이 기차 출발 신호로 호르라기를 힘차게 불었다.
짜식 그 순간에 질투 내기는! 나는 그녀를 보낼 수 밖에 없었고 그녀도 묘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녀도 방금 우리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몰라하는 눈치였다.
기차는 서서히 출발하였고 어정쩡하게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을 멀어져만 갔다. 기차역을 떠나는 동안 나의 감정은 묘하게 엉켜있었다. 남들이 가슴앓이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나는 그것이 단순한 시적 표현인줄 알았는데 진짜 가슴이 답답하고 아려왔다.
머리가 복잡했다. 한편으로는 여행와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일이 기대되었다. 사람일은 모르니까 말이다. 그 후 그녀에게 이 메일을 보냈고 그녀의 답장이 왔을 때는 제목만 봐도 심장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