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 법화경 요점①: 법화경의 명칭과 삼주설법
반야경의 공사상을 뒤집어서 서로 꽉 차 있다는 사상의 긍정으로 돌린 것이 법화경이고, 사물의 실상을 직시하는 것이 수행이다.
<반야경(般若經)>을 거쳐 <법화경(法華經)>에 연결되는 이음새, <법화경>의 원전과 번역본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제목의 의미, 연꽃의 상징, <법화경>의 전체적 구성, <법화경> 원시팔품과 삼주설법(三周說法), 적문(迹門)과 본문(本門) 등에 대해서 살펴보자.
반야부에서는 <대품반야경>, <반야심경>, <금강경>을 알아보았고 반야의 공사상을 극적으로 나타낸 <유마경>도 살펴보았다. <반야경> 다음에 <법화경>을 알아보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세상만사에는 흐름이 있듯이 불교 경전의 내용에도 흐름이 있다. 긍정에는 부정이 따르고 부정에는 긍정이 따른다. <아함경>에 불교의 기본사상이 다 담겨 있기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불교사상 전반의 기본이 되는 인연법이 주가 된다. 인연법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 예외 없이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에 인연법의 결론은 모든 사물이 독자적으로 영구히 존재하는 성품이 없다는 것이다. <반야경>은 사물이 독자성이 없는 것을 강조해서 공사상을 가르친다. 공사상을 기반으로 육바라밀을 전체적으로 실천하고 그 실천을 반야지혜로 돌리기 때문에 반야부 경전들은 공사상, 지혜의 완성에 주력한다. <반야경>에서는 공사상을 강조하다 보니 실체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것이 많다. ??형상에 의해서 보고 이름에 의해서 들을 수 있는 우리들은 무엇인가 긍정적인 것을 원하게 된다. 그래서 공사상의 부정을 뒤집어서 서로 꽉 차 있다는 사상의 긍정으로 돌린 것이 바로 <법화경>이다. <반야경>에서는 사물의 실체를 부정하는 것이 수행이지만 <법화경>에서는 모든 사물을 있는 모습 그 자리에서 진실한 실상으로 긍정하는 것이 수행이다.
<법화경>은 산스크리트어 원본도 전해지고 있는데, 총 여섯 번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그 중에서 세 번 번역된 것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오직 세 가지만 남아 있다. 축법호[(竺法護): 231 ~ 308?]는 <정법화경(正法華經)>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했고, 구마라집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사나굴다와 달마급다는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했다. 이 중에서 가장 널리 유포된 것은 구마라집이 번역한<묘법연화경>이다. 영어나 일본어본은 범어 원본에서 직접 번역된 것도 있고 한문본에서 번역된 것도 있다.
먼저 <법화경>의 제목에 대해서 알아보자. <법화경>의 범어 이름은 "삿다르마푼다리카수트라이다. '사드'는 '바르다'라는 뜻이고 '다르마'는 '진리, 또는 교법'이라는 뜻이다. '푼다리카'는 '연꽃'이라는 뜻이고 '수트라'는 불경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는 연꽃이 꽃 중에서 가장 고귀하다. 한글로 번역하면 '바른 법을 가르치는 가장 고귀한 연꽃과 같은 불경'이다. 한문으로 번역한다면 '정법연화경' 또는 '정법화경'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축법호는 <법화경>의 범어 이름 그대로 <정법화경>이라고 한문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나름대로 범어 '사드'라는 말을 묘할 묘(妙)자로 번역했다. 구마라집이 <법화경>의 제목에 임의로 묘자를 썼지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진리를 깨우치는 방법에 관한 문제가 배경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부처님의 침묵에 대해서 본 바 있다. 만동자가 이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 시작과 끝, 그리고 사후의 존재, 정신과 육체의 같음과 다름에 대해서 물었을 때 부처님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이 침묵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을 거부하는 의미도 있었고, 질문 속에 들어 있는 실체사상을 인정하지 아니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진리를 체득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진리를 어떤 개념으로 고정시키거나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부처님은 침묵을 쓰셨지만 용수보살은 변증법(辨證法)을 써서 상대가 쓰는 개념과 용어가 사물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부처님이 침묵을 쓰신 데 반해서 용수보살은 변증법을 쓴 것이다. 구마라집은 부처님의 침묵과 용수보살의 변증법이 의도하는 전통을 이어받아서 '묘할 묘'자를 썼다. 진리는 인간의 개념적인 사량 분별로는 파악할 수 없고 오직 수행의 직관에 의해서 체득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이 '묘' 자에 담긴 것이다. 이 '묘' 자는 지적인 개념이 아니라 종교적인 수행에 의해서만 참으로 묘하고 참으로 불가사의한 진리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천태대사[天台大師; 智顗(538 ~ 597)]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쓴 '묘(妙)' 자를 적문과 본문에 각기 열 가지 의미를 붙여서 해석했고, 이 열 가지 묘에 근거해서 천태의 후계자들은 불이사상(不二思相)을 끌어냈다.
'묘' 자 다음에 이어지는 '법' 자는 어렵지 않다. '법'은 '진리, 부처님의 가르침, 모든 사물'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물론 '진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 다음 '연화' 즉 '연꽃'에는 여러 가지 상징성이 있다. 첫째, '백련화'는 인도에선 가장 귀중하게 여겨지므로 존귀함을 상징한다. 둘째,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 즉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음을 상징한다. 셋째, '연꽃'은 '인과불이(因果不二)' 즉 '열매와 연꽃이 동시에 맺힘'을 상징한다. '연꽃'은 꽃이 핌과 동시에 그 안에 연 열매를 가지고 있다. '인과동시'는 방편과 진실, 수행과 성불 등의 동시성을 상징한다. 넷째, 연꽃의 뿌리는 진흙 속에 있고 머리는 맑은 하늘에 있으면서 진흙의 양분을 연꽃으로 전환하는 것을 상징한다. 즉 고해(苦海)에서의 번뇌와 갈등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고해에서 양분을 뽑아 해탈 열반의 연꽃을 피우는 것이다. 이 연꽃의 상징은 앞으로 자주 인용될 것이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법화경>은 총 28품으로 되어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은 보다 일찍 편집되었고 다른 부분은 보다 뒤에 편집되어서, 먼저 편집된 부분에 첨부되었으리라고 짐작되고 있다. <법화경> 28품 중에서 가장 짜임새 있게 연결된 것은 두 번째 <방편품>으로부터 시작되는 여덟 개의 품이다. 이 팔품에는 출연하는 제자들이나 내용면에서 볼 때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법화경> 연구학자들은 이 여덟 개의 장을 보통 '원시팔품(原始八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원시팔품' 내에서도 가르침의 주기가 반복되는 것이 느껴진다. 가령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으면 다음에는 그 가르침을 들은 제자들이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부처님께 고백하는 형식이 이어진다. 그러면 부처님은 제자들의 말을 듣고 그에 대한 비평이나 인증을 하고 이어서 미래세에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을 내리신다. 법을 전하는 이 네 단계 절차는 정설(正說), 영해(領解), 술성(述成), 수기(授記)이다. '원시팔품'에는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 제자들의 고백, 부처님의 인증, 그리고 성불예언이라는 네 단계의 절차가 세 번의 주기로 반복된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이와 같은 네 단계 절차가 세 번 반복된다고 해서 '원시팔품'에다 '삼주설법(三周說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방편품>에서부터 첫 번째 주기의 가르침은 '법설주'라고 하고 두 번째 주기의 가르침을 '비유주'라고 한다. 그리고 세 번째 주기의 가르침을 '인연주'라고 부른다. 부처님은 첫 번째 주기에서는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의 내용을 단도직입적으로 설하시고 두 번째 주기에서는 가르침을 비유로써 설하신다. 그리고 세 번째 주기에서는 가르침을 전생인연을 들어서 설하신다. 법을 바로 설명해서 알다듣지 못하는 중생이 있으면 비유로 설명하고, 그래도 이해하지 못하는 중생에게는 전생인연을 들어서 깨우치는 것이다. 도표로 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원시팔품(原始八品)'의 '삼주설법(三周說法)'
정설(正說): 방편품 법설주 영해(領解): 비유품 술성(述成): 비유품 수기(授記): 비유품
정설(正說): 비유품 비유주 영해(領解): 신해품 술성(述成): 약초유품 수기(授記): 수기품
정설(正說): 화성유품 인연주 영해(領解): 오백제자수기품 수학무학인기품 술성(述成): 오백제자수기품 수학무학인기품 수기(授記): 오백제자수기품 수학무학인기품
[석지명]법화경요점②: 일대사인연
낮은 근기의 중생은 일단 소승법을 닦게 해서 어느 정도 이끌어 놓고, 대승법을 닦게 하면 근기가 낮은 사람들도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
<방편품>은 <법화경> '원시팔품'의 첫 번째이다. <방편품>의 가르침은 법을 바로 가르치는 것, 비유를 써서 가르치는 것 그리고 전생인연을 들어 가르치는 것의 세 종류 설법 가운데 '법설주(法說周)' 부분에 속한다. 이 법설주에서도 부처님이 마음속에 품은 바를 바로 펴는 정설 부분에 속한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전하려고 하는 핵심이 이 <방편품>에 들어 있다. 그래서 이 <방편품>에 나오는 한 게송이 <법화경>의 대의(大義)를 나타내는 것으로 취급되어 왔고, 그 게송은 염불 속에 들게 되었다. <법화경>의 처음인 <서품>으로부터 <방편품>에 이르기까지의 줄거리를 먼저 잡아 놓고 교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법화경> 대의 게송을 생각해 보자.
부처님이 왕사성 기사굴산에서 많은 아라한, 보살, 천룡 등에 둘러싸여 있을 때 부처님은 <무량의경(無量義經)>을 설한 후 무량의처(無量義處) 삼매에 들었다. 하늘로부터 꽃비가 내리고 세계가 진동한 후 부처님의 미간에서 나온 광명이 많은 세계를 비춘다. 이때 대중은 이것이 무슨 전조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미륵의 질문에 대해서 문수가 <법화경>을 설할 전조라고 대답한다.
부처님은 삼매로부터 나와서 "모든 부처님네의 지혜는 깊고 깊어서 헤아리기 어려워 모든 성문, 연각이 알 수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부처님의 지혜는 부처님 외에는 누구도 전해 받을 수도, 측량할 수도 없다고 찬탄하신다. 그런데 그때까지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서 수행하여 부처님과 같은 해탈을 얻었다고 생각하던 소승(小乘)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의문에 빠졌다. 사리불이 대표로 일어나서 이 의혹을 풀어줄 완전한 진실의 법문을 해주십사고 사뢴다. 그러나 부처님은 제자들이 청한 법문을 거절하신다. 그리고는 "그만두거라. 만약 내가 이것을 설하면 일체세간(一切世間)의 모든 하늘과 사람들이 다 깜짝 놀랄 것이다."라고 말씀하면서 도무지 법을 설하려고 하지 않았다.
세 번째의 청에 의해 부처님이 법을 설하려고 하는데, 그때 좌중에 있던 5천 명의 사부대중, 증상만인(增上慢人)이 부처님께 예배하고 자리를 떠난다. 그들은 궁극의 깨달음을 얻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만심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부하고 자리를 떠난다. 부처님도 이들을 말리지 아니하고 그냥 침묵으로 보낸다. 그 증상만인들은 도는 낮은 데 비해서 자만심만 높아서 아직 <법화경>의 법문을 들을 마음가짐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억지로 도가 높은 법문을 들으면 그 깊은 도리를 알지도 못하면서 불법을 비방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업을 짓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비심으로 그들이 법회장에서 나가도록 방치한 것이다.
5천 명의 아만에 찬 사람들이 자리를 떠나고 법회장이 정리된 다음에야 부처님은 진지하게 법문을 여신다. 부처님이 설하는 법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지금 설하는 묘법은 모든 부처님네가 아주 드물게 한 번씩 설하는 진실의 법문이다. 모든 부처님네는 무수한 방편으로 여러 가지 법을 설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근기에 맞춘 미묘한 것이어서 부처님이 아니면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최대의 목적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인 개시오입(開示悟入), 즉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주고, 보여 주고, 깨닫게 해주고, 들어가게 해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는 자는 다 불도를 구하는 수행자로서 대승보살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불도의 최고 경지를 얻지 못할 이유가 없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 단지 최고의 경지를 설하기 때문에 낮은 단계의 공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러면 왜 부처님이나 보살이 되는 길만을 설하지 아니하고 낮은 수준의 소승법을 설했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사람들의 근기와 취향이 각기 다르지 않은가. 근기의 차별에 따라 각기 다른 방편으로 그들을 구해야 한다. 만약 어떤 이가 '나는 아라한으로 완전한 열반을 얻었다'고 주장하면서 더 이상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이 바로 '증상만인'이다.
부처님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한 목적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고 한다. 일대사인연이란 아주 큰일을 말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최고 지혜를 중생들에게 열어 보이고 중생들이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소승법은 궁극의 경지가 아니라 방편의 경지이고, 부처가 되는 대승법만이 불도의 최종적 목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소승법이 방편법이고 필경에 버려야 할 것이라면 애초부터 부처님이 되는 대승법을 설하지 않고 왜 소승법을 설해서, 그것을 열심히 닦게 해 놓고는 이제 와서 소승법을 버리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 부처님은 중생의 근기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낮은 근기의 중생에게는 일단 소승법을 닦게 해서 어느 정도 이끌어 놓고 그 다음에 대승법을 설하면 근기가 낮은 사람들도 차츰 낮은 데서 높은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이어서 <법화경>의 대의를 나타내는 유명한 게송을 설하신다.
<방편품>의 게송 중에 <법화경>의 대의를 나타내는 구절이 나온다.
눈앞에 보이는 일체의 사물이 본래부터 열반의 모습이다. 불자가 처처에서 도를 닦으면 앞으로 오는 세상에 부처를 이루리라. 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눈앞에 있는 사물이 그대로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라고 한다. 열반의 모습이 현재 우리의 삶과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 그대로가 열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 방면에서 나름대로 도를 닦기만 하면 새롭게 성불을 기다려서 성불이 오는 것이 아니라 수행하는 그 자리가 바로 성불이 된다고 한다.
이 게송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공사상으로부터 참사상으로 대전환이 필요하다. <반야경>에서는 모든 존재의 공사상을 강조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꿈과 같고, 환(幻)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다고 한다. 또 여래를 보려면 현재 보이는 겉모습을 지우고 보라고 한다. 형상에 의해서 사물의 실상을 파악할 수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의 존재는 부정되었다. 인연법을 사물이 공하다는 측면에서 더욱 깊이 풀이하고 이 공사상에 의해서 사물을 파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연법은 모든 사물이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 가지도 독자적인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한 가지의 사물에는 반드시 다른 요소나 영향이 포함되어 있다.
얼마 전에 국내 굴지의 자동차 제조공장에 부품이 제대로 조달되지 않아서 조업을 중단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원인은 부품 하청업체에 노사분규가 생겨서 부품생산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자동차공장은 해외로 수출을 하는 회사인데 그 자동차공장이 쉬게 되면 그 공장의 다른 하청업체들도 또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 하청업체에 부품자재를 조달하는 많은 다른 회사들도 타격을 입게 된다. 한 자동차부품 제조공장의 조업중단은 자동차공장을 비롯해서 그 자동차공장과 연계를 가지고 일을 하게 되는 다른 회사들의 직원들을 일하지 못하게 만드는 셈이다. 여기서 이미 노사분규가 생긴 회사의 조업상황만 다른 회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공장과 관련이 있는 모든 회사들 중에 한 곳에서만 문제가 생겨도 똑같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한 부품회사의 정상조업상황은 그 부품과 관련이 있는 모든 회사들의 조업상황을 보여주는 한 상황판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자동차 제조공정이나 하청 판매관계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예문이 좀 어수룩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상호영향을 미치는 긴밀한 관계 속에 있으므로, 그 관계 속에 있는 하나의 표본은 다른 모든 것들의 표본이 된다는 것만 생각하면 되겠다. 자동차공장과 하청업체들 그리고 그 하청업체에 물건을 대는 또 다른 업체들 사이의 관계는 그다지 긴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물들 사이의 관계는 해와 달이 정확한 것처럼 정확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눈앞에 보이는 사사물물이, 그대로 다른 모든 것들의 실상이며 열반의 모습이라고 설파하신다. 사소한 사물이 바로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나타낸다는 것을 '일색일향무비중도(一色一香無非中道)'라고 풀이했다. 즉 하나하나의 색경(色境)이나 향기가 그대로 중도의 경지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석지명] 법화경요점③: 만선성불(萬善成佛)
부처님을 칭송하는 말 한마디만 해도, 불상을 향해 약간의 경의만 표하여도 우리의 성불은 보장되어 있다.
<법화경>에는 '만선성불사상(萬善成佛思想)'이 있다. 즉 <방편품>의 게송 부분에는 사소한 선근공덕이나 수행이 다 성불의 원인이 된다고 설하고 있다. 성불의 원인이 된다고 할 경우에는 쉽게 수긍이 간다. 작은 공덕이 있으면 그 위에 더 큰 공덕도 쌓일 수 있고 그 공덕이 마침내 성불로 회향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보잘 것 없는 선행을 예로 들고 그것을 행한 이는 이미 성불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법화경>은 작은 선근공덕으로 인해 이미 부처가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과거의 부처님들은 무량억겁의 기간 동안 보살도를 닦아서 마침내 성불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약간의 선근공덕이 범부중생을 부처로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하다. 또 선행이나 수행을 하는 것이 바로 부처를 이룬다. 즉 눈앞의 사소한 일들이 다 해탈 열반의 모습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말씀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그러면 <법화경> <방편품>의 게송에 나오는 만선성불의 예를 읽어보자.
과거세에 어린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를 모아 불탑을 만들었어도, 그 아이들 모두 이미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아이들이 장난으로 나뭇가지나 붓이나 손톱으로 불상을 그리면 이런 아이들이 차츰차츰 공덕을 쌓아, 대비심을 갖추게 되고 마침내 불도를 이루어서 모든 보살을 교화하고 무량중생을 건지리라. 어떤 이가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되,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단 한마디만 하더라도, 그는 불도를 이루리라. 어떤 이가 산란한 마음으로 한 송이 꽃을 불상이나 탱화 앞에 공양하더라도 그는 차츰 모든 부처님의 친견하게 되리라. 또 어떤 이가 불상이나 탱화 앞에 절을 하거나 합장하거나 한 손만을 들거나 머리를 약간 숙여서 경의를 표하더라도, 그는 차츰 모든 부처님을 친견하고 불도를 이루고 무수한 중생들을 건지리라. 어떤 이가 산란한 마음의 상태에 있는 중이라도, 부처님 앞에 나아가 '나는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하고 단 한마디만 하더라도 그는 불도를 이루리라.
부처님은 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를 가지고 불탑을 만들거나 장난으로 불상을 그리기만 해도 부처를 이룬다고 설하신다. 과거세에 그와 같은 선근공덕을 심은 사람들은 이미 불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부처님을 칭송하는 말을 한마디만 해도, 또 불상을 향해 약간의 경의만 표하더라도 불도를 이룬다고 한다. 단정하고 집중된 마음이 아니라 산란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귀의한다는 말을 한마디만 하더라도 불도를 이룬다고 한다. 아무리 작은 선행이나 공덕이라도 그것이 그대로 부처를 이루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법화경>은 만선성불, 즉 만 가지의 선행이 다 불도를 이루게 한다는 말씀만 전할 뿐 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반야경>에서는 공사상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설하기 때문에 공사상이 반야를 얻는 근본이 된다는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법화경>은 공사상과 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야경>이 너무 어려우므로 중생들이 쉽게 불법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법화경>이 나왔는데, 또 다시 공사상에 버금가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면 <법화경>도 또한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법화경>이 어려움을 피하면서 어려움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 핵심을 파악하기는 더 어려울 수도 있고, 궁극적인 초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더 먼 거리로 우회를 해야 하기도 한다. <법화경>에는 비유가 풍부하다. 그 비유들만 완전히 이해해도 <법화경>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이다. 왜 작은 선행이 그대로 부처님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스스로 터득해야만 한다.
공사상을 뒤집은 것에 대해서 반복하는 부분은 그만큼 중요하다. 불교는 들어가는 문이 달라도 나중에는 다 만나게 된다. <아함경>으로 들어가도 <반야경>으로 나오고 <반야경>으로 들어가도 <법화경>으로 나온다. <반야경>에서는 모든 사물이 실체가 없어서 공하다고 했다. 공한 가운데는 업도 없고 업을 짓는 자도 없다. 지옥도 없고 부처도 없다. 그러나 공사상을 뒤집으면 상대적인 모든 것이 그 자리에 같이 있게 된다. 지옥에 극락이 있고 극락에 지옥이 있다. 번뇌 속에 지혜가 있고 지혜 속에 번뇌가 있다. 기도 속에 성취가 있고 성취 속에 기도가 있다. 중생 속에 부처가 있고 부처 속에 중생이 있다.
<금강경>을 살펴볼 때, <반야경>의 대의를 나타낸다고 여겨지는 중요한 문장에 대해서 우리는 <법화경> 식으로 해석한 바 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면 '무릇 모양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 만약 모양을 보되 그 모양을 지우고 보면 바로 여래를 보리라'가 되겠다. 그러나 이 중에서 약견제상비상을 우리는 공사상을 더 깊이 들어가면 자연히 만나게 되는 법화사상으로 해석했다. 즉 '모든 모양을 보되 그 모양에서 과거와 미래의 모든 시간을 더하고 뺀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다면'으로 해석한 것이다. 한 모습에서 여러 모습을 동시에 보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가령 20대의 처녀에게서 80대의 노인과 핏덩이 갓난아기를 동시에 보고, 지옥의 고통에서 순간순간의 이전과 이후의 극락을 동시에 보는 식이다.
<묘법연화경>이라는 이름에 나타나는 연꽃은 꽉 차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 연꽃의 특징은 연꽃과 연밥이 동시에 생긴다는 것이다. 꽃과 열매, 원인과 결과의 동시성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더러움을 상징하는 진흙과 깨끗함을 상징하는 연꽃이 동시에 있기도 하다. 꽃과 열매 중에 어느 것을 씨앗으로 잡고 어느 것을 열매로 잡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순환적이기도 하다. 이 동시성을 확대해나가면 씨앗과 열매, 발원과 성취, 수행과 깨달음, 지옥과 극락, 윤회와 해탈, 중생과 부처, 번뇌와 지혜 등의 동시성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물론 연꽃과 진흙이 동시에 있지만, 또 연꽃과 진흙은 동시에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흙보다는 연꽃을 얻으려고 한다. 진흙의 더러움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연꽃에 양분을 제공함으로써 연꽃으로 전환됨을 의미할지언정, 진흙의 더러움을 퍼뜨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선과 악을 동시에 두고 악을 인정하지만, 악은 선으로 전환됨을 의미할지언정 악이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법화경>의 대의 게송은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이라고 한다. 즉 '일체의 모든 사물이 다 그대로 열반의 모습이라. 불자가 도를 닦기만 하면 오는 세상에 부처를 이루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본래 열반의 모습이라는 것은 본래 부처의 모습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없던 부처를 새롭게 이루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서 본래 있던 부처님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만 하면 바로 부처가 된다. 만선성불을 이야기하다가 이 결론을 얻으려고 다른 곳을 헤매었다. 즉 본래부터 부처와 중생은 동시에 있고 이 세상은 본래 부처의 세계이므로 수행을 하기만 하면 본래 있던 부처가 그 수행자에게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사소한 선근공덕을 닦더라도 그 자체가 바로 부처를 짓는 셈이 된다. 여기서 부처를 짓는다는 말은 없던 부처를 새로 지어낸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수행을 하지 않으므로 본래 있던 부처가 부처 역할을 하지 않았는데 수행을 함으로써 본래 있던 부처가 부처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부처를 짓는다, 또는 부처를 이룬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불상을 그리고 부처 불(佛)자를 쓸 경우, 그 아이들이 바로 부처를 이루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부처의 행이 본래 있던 부처를 부처로 만든다는 점이다. 부처의 행이 있는 기간 동안 부처이고 중생의 행을 지으면 중생이 된다. 한번 장난으로 불탑을 만들기만 하면 그 순간 부처이지만, 그러나 다음 순간에 중생의 행을 지으면 중생이 된다. 특별한 결심이나 집중이 없이 산란한 마음으로 부처님에게 귀의를 표시한다고 해도 부처를 이루기는 하지만, 그 부처를 이루는 선근공덕이 씨가 되어서 계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사 스님들의 유명한 말씀이 있다.
찰나 동안 부처의 행을 지으면 찰나 동안 부처이다. 하루 동안 부처의 행을 지으면 하루 동안 부처이다. 영원히 부처의 행을 지으면 영원히 부처이다.
참으로 멋있는 말씀이다.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탐욕스런 사람과 덕이 있는 사람이 다를 바 없다. 선인과 악인, 탐욕과 베품은 한자리에 있다. 선한 행을 지으면 바로 선한 사람이고, 보살행을 지으면 그는 바로 보살이다. 우리가 극락의 복을 지으면, 우리는 바로 극락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석지명]법화경요점④: 삼승방편과 일승진실
@ 일승과 삼승이 다 같이 일승이다. 능력에 의해 일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근공덕을 닦으려는 원력에 의해 일승이 되기 때문이다.
<법화경>에 있어서 방편과 진실의 문제는 삼승과 일승과의 관계가 같이 떠오른다. 부처님께서는 삼승은 방편이고 일승은 진실이라고 누누이 강조하신다. 삼승은 버려야 할 것이고 일승은 얻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삼승이 버려야 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설하지 말 것이지 왜 부처님은 삼승을 설하고는 다시 그것으로부터 떠나라고 하셨을까. 그러면 <법화경>에서는 방편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왜 삼승을 구박하는지, 일승의 진실한 요점은 무엇인지에 관해서 생각해 보자.
불교를 설명하는 사람과 공부하는 이에게 똑같이 부담이 되는 것은 불교용어의 어려움에 있기도 하지만 각 용어가 내포하는 기본적인 법수(法數)에 있기도 하다. 삼악도가 있는가 하면 삼선도도 있다. 사성(四聖)과 육범(六凡)도 있다. 또 십계도 있다. 이 용어들과 이 용어들이 나타내는 기초 법수들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용어들을 피하면서 교리공부를 하면 <법화경>이나 다른 경전들을 공부하고도 공부하지 않은 것과 같이 되어 버린다. 가령 수학 또는 셈본에서 곱하기와 나누기를 하려면 구구단을 외우는 것은 필수적이다. 구구단을 외지 않고도 곱하기와 나누기의 원리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면 애써 배운 곱하기 나누기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된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삼승과 일승을 설명하기 위해서 십계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십계(十界)란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불(佛) 등 열 가지의 세계이다. 이 열 가지의 세계는 선업과 악업의 정도에 따라, 수행을 많이 하고 적게 한 정도에 따라서, 또는 깨달음을 얻은 경지의 정도에 따라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올라간 것이다. 십계를 도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지 옥 계 - 아 귀 계 - 삼악도(三惡道) - 축 생 계 - 6범(六凡) - 아수라계 - 인 간 계 - 삼선도(三善道) - 9미(九迷) 천 상 계 - 성 문 계 - 연 각 계 - 4성(四聖) - 보 살 계 - 불 계 - 1오(一悟)
먼저 제일 낮은 단계의 삼악도를 본다면 지옥·아귀·축생인데 아귀는 탐심을 많이 내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고, 지옥은 성을 많이 내고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축생은 우치한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다. 탐심(貪心)·진심(瞋心)·치심(癡心)이라는 삼독(三毒)의 과보를 나타내는 악도가 바로 지옥·아귀·축생이 되는 것이다. 아귀의 입은 바늘구멍만큼 작고, 배는 산과 같이 큰 물고기인데 이 물고기의 모양에서 먹어도 먹어도 양이 차지 않는 인간의 욕심과 고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다음으로 아수라·인간·천상은 삼선도가 된다. 아수라는 싸우기를 좋아하는 세계이다. 이 세계를 가리킨 수라장 또는 아수라장이라는 용어는 우리말로 정착되었다. 인간세계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고 천상세계는 극락세계를 나타낸다.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와 아수라·인간·천상의 삼선도가 합해서 육범의 세계, 즉 여섯 가지 범부의 세계가 된다.
범부의 세계 다음으로 네 가지 성인의 세계가 바로 성문·연각·보살의 삼승과 부처 단계의 일승이다. 보살의 단계와 부처의 단계는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성문과 연각의 단계는 소승법만 깨친 사람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단지 꼭 필요한 것은 지옥으로부터 천상까지 여섯가지 단계 다음에 성문·연각·보살이 삼승이고 부처가 일승이라는 점과 전체 열 가지가 십계 즉 열 가지 세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 십계는 <법화경>의 핵심인 상호포함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일승만을 인정하고 삼승을 부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삼승은 꼭 필요한 것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한 장소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래께서는 다만 일불승(一佛乘)으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시나니 이승이나 삼상 같은 다른 가르침은 없느니라.
궁극점은 부처의 세계이지 성문·연각·보살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부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문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사제법문을 설하시어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건너 열반을 얻게 하시며 연각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십이인연법을 설해 주시며 모든 보살을 위하여 육바라밀을 설하사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이룩하도록 하셨느니라.
성문·연각·보살의 단계는 간략하게나마 설명되어 있다. 성문은 사성제를 깨친 사람, 연각은 십이인연을 깨친 사람, 보살은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부처님은 여기서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그에 맞는 가르침을 주셨다는 말씀이다. 일승 즉 부처의 세계만을 궁극점으로 잡았고 여기서는 삼승을 인정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풀이할 수가 있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포섭하는 뜻에서 삼승을 인정하고 삼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처의 세계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삼승을 부정하고 일승만을 인정한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이 삼승을 버리고 떠나야 할 단계라고 하는 의도는 삼승이 나쁘다고 몰아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삼승도 더욱 정진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다.
<반야경> <유마경>은 대승 초기경전이므로 대승과 소승의 구별을 위해서 아라한이 부처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반면에 <법화경>은 <반야경>보다 후기경전이므로 소승을 대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성문·연각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단지 성문·연각의 단계를 궁극의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됨을 주의시킬 뿐이다.
또 일승의 의미가 모든 중생이 근기가 다 똑같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 같이 일불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근기 차이에 의해서 이승·삼승에 있다 하더라도 일승을 궁극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향해서 수행한다면 삼승의 그 자리가 바로 일승이라는 의미에서 일승으로 삼승을 포용하고자 할 뿐이다. 삼승이 다 부처를 이룰 목적으로 수행하면 다 같이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삼승의 방편과 일승의 진실에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앞에서 말한 십계(十界)라는 계단이 어떤 높은 단계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처가 되는 위를 향하고 있느냐 아니면 지옥으로 가는 아래를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법화경>은 제법실상(諸法實相)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제법실상이라는 말은 법 즉 모든 사물의 실상을 의미하기도 하고 눈앞의 모든 사물, 일체법 그대로가 열반의 모습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법화경>의 대의 게송은 일체법이 본래로부터 항상 그대로 열반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 뜻을 제법실상으로 해석한다면 일체제법이 그대로 열반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제법이 바로 부처세계의 실상이므로 아무리 사소한 선근공덕도 본래의 부처가 부처로서 움직이게 한다. 어린아이들이 바닷가에서 모래로 부처의 모양을 그리기만 해도 그 공덕으로 부처를 이룬다. 술 취한 사람이 부처님 앞에 나아가 '나무불'하고 한번만 외워도 그는 성불한다. 모든 수행이 다 부처를 짓는 마당에서 삼승이나 일승이 다 같이 부처가 된다. 그래서 <법화경>의 부처님은 모든 성문·연각의 제자들에게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을 주신다.
사람마다 능력과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근기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삼승을 일승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모든 사람의 능력을 똑같이 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근기가 낮은 삼승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일승이 나와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일승은 사람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지향하는 바에 의해서 결정되어야만 한다. 어린아이는 모래 위에 불상을 그리는 것으로 부처를 이루고 다겁생래(多劫生來)로 보살행을 닦아온 이는 무량억겁 동안 무량억겁의 부처님에게 공양을 하고 부처를 이룬다. 재물이 있는 이는 재물을 보시해서 부처를 이루고 재물이 없는 이는 노동력을 보시해서 부처를 이룬다. 재물도 노동력도 없는 이는 마음으로만 보시해서 부처님을 이룬다. 자기 힘껏 선행을 하고 불법을 닦으면 누구나가 다 부처님을 이룬다. 여기서 근기가 높은 일승은 물론이거니와 근기가 낮은 삼승도 그대로 일불승이 된다. 일승과 삼승이 다 같이 일승이다. 능력에 의해 일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근공덕을 닦으려는 원력 즉 마음이 어느쪽을 향하느냐에 의해 일승이 되기 때문이다.
삼승이라는 근기 차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처를 이루려는 소원이나 행동에 의해 일승이라는 부처를 짓기 때문에 삼승의 방편이 그대로 일승의 진실이 되고 일승의 진실이 그대로 삼승의 방편이 된다. 방편은 진실이요, 진실도 방편이다.
[석지명]법화경요점-⑤수기와 불난 집의 비유 불난 집 밖으로 나온 장자는 당초에 약속했던 수레들보다 더 크고 더 좋은 흰 소가 끄는 수레들을 아이들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법화경> <비유품(譬喩品)>에는 수기가 나온다. 수기(授記)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앞으로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을 주시는 것이다. <법화경>의 원시팔품은 세 주기로 이루어져 있다. 세 주기를 법설주(法說周)·비유설주(譬喩說周)·인연설주(因緣說周)로 이름 붙여 합해서 삼주설법(三周說法)이라고 부른다.
삼주설법 중에서 <방편품>과 <비유품>은 부처님이 가르침을 직접 토해 내는 법설주에 해당한다. 다시 이 법설주 가운데서 <방편품>은 정설이라는 부처님을 가르침에 속하고 <비유품>은 영해·술성·수기 즉 제자의 고백, 부처님의 인증, 그리고 수기에 속한다. 예로부터 <법화경>의 핵심이 <방편품>에서 계속되는 원시팔품과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등에 들어 있다고 여겨져 오기 때문에 교리적으로 중요한 곳을 <방편품>과 <비유품>의 줄거리에서 보자.
<방편품>에서 부처님은 크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는 근기의 차이에 의해서 삼승을 설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방편이요, 궁극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는 삼승에 있으면서도 일불승의 이상을 향해 수행을 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길은 돈을 버는 일과 달라서 능력만큼 공덕을 쌓고 능력만큼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얻는다는 말씀과 비슷하다.
<비유품>에 들어와서 사리불은 부처님의 일승법문을 듣고 환희한다. 그리고는 방편과정을 최후 도달점으로 착각한 점, 아무리 작은 선행으로도 성불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르침을 듣고 안온을 얻었다는 것을 부처님께 사뢴다. 이에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주신다. 수기를 받은 사리불은 혼자 수기를 받는 데 만족하지 않고 모든 대중들이 같이 성불할 수 있도록 삼승과 일승과의 관계와 만선성불의 인연을 말씀해주십사 하고 부처님께 청한다. 여기서 부처님은 유명한 불난 집의 비유를 설하신다.
재산이 한량없이 많은 대부호 장자가 있었느니라. 그런데 어느 날 그 부호의 집에 불이 났느니라. 그 집 안에는 장자의 자녀들이 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놀고 있었느니라.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불에 타면 죽으니 대문 밖으로 빨리 나오라고 타일렀느니라. 그러나 아이들은 놀이에 빠져서 아버지의 말을 들은 체도 아니했느니라. 그래서 장자는 방편으로 대문 밖에 나가면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가 있다고 아이들에게 말했느니라. 불난 집 밖으로 나온 아이들은 약속한 수레를 달라고 장자에게 말했지만 장자는 당초에 약속했던 수레들보다 더 크고 더 좋은 흰 소가 끄는 수레들을 아이들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었느니라. 무한의 재산이 있는 장자가 자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수레를 주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느니라. 아이들은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받고 기뻐했느니라.
이 이야기를 끝낸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그 장자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했느냐고 묻는다. 사리불은 아이들의 목숨을 건지게 한 것만으로도 거짓말이 되지 않는데 하물며 최고로 좋은 수레를 주었으니 거짓말이 될 수 없다고 사뢴다.
부처님은 장자가 쓴 방편에 대해서 사리불이 제대로 이해한 것을 칭찬하시고 그 불난 집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욕망의 세계라고 말씀하신다. 불난 집과 같은 이 세상에서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라는 삼승으로 방편을 쓰셨다. 마지막에는 흰 소가 끄는 수레인 일승을 중생들에게 주지만 부처님은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중생들의 수준에 맞는 방편을 써서 각자의 수준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필요한 것을 다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사리불과 다른 제자들에게 이 불난 집의 비유를 든 까닭은 누구든지 부처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지금의 작은 우물에서 큰 우물로 나오기만 하면 수기를 받은 사리불처럼 성불할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하셨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사리불의 고백에 따른 부처님의 수기내용이다. 부처님은 사리불의 고백을 듣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대승법으로의 깨달음은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만억 부처님을 거치면서부터 위없이 높은 도를 닦았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얼마 후 옛 인연을 잊어버린 사리불은 작은 지혜에 만족을 하고 궁극점을 얻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부처님은 다시 사리불이 과거세에 발심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내리신다. 그런데 그 미래라고 하는 것은 무량무변 불가사의겁을 지나 천만억 부처님을 공양한 다음이라고 한다. 일겁은 사람의 경험이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이다. 사방 사십리되는 큰 바위를 선녀의 부드러운 치맛자락으로 삼 년만에 한번씩 스치게 해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질 정도의 긴 시간이다. 일겁이 이렇게 헤아리기도 어려운데 무량무변 불가사의겁은 말할 필요도 없이 길고 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리불과 다른 제자들은 한량없는 먼 미래의 성불에 관한 예언, 즉 수기를 받고도 그것을 기뻐한다.
여기서 수기의 미묘함이 있다. 시간과 공간은 완전히 비어 있고 완전히 차 있다. 이것과 저것은 완전히 비어 있는 상태임과 동시에 서로 포함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 공간적으로 하나 속에 다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고 시간적으로 한순간에 모든 과거와 미래가 다 포함되어 있다. 과거에 현재가 포함되어 있고, 미래에 현재가 포함되어 있듯이 현재에 과거와 미래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모든 선근공덕과 원력은 바로 부처를 만든다. 일승법에 따라서 부처가 되기로 마음을 내고 또 부처가 되는 행을 짓는 순간 무량억천만겁의 미래는 바로 절대 현재로 다가온다. 절대 현재라는 말을 쓰는 것은 과거나 미래 또는 현재라고 하더라도 이 현재나 저 현재를 상대적으로 구별하지 않는 지금의 순간 그대로가 절대적으로 모든 시간을 다 포함하는 현재를 말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살펴보았듯이 수행의 단계는 지옥으로부터 올라가서 인간위에 천상의 단계가 있고 그 위에 성문·연각·보살의 삼승이 있다. 마지막으로는 부처의 단계다. 인간세계에 살고 있는 천상세계는 감히 넘보지도 못하는 우리들이 천상의 단계보다 더 위인 삼승의 단계를 넘어 부처의 단계를 목표로 세우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내고 그에 따라 행동으로 옮긴다면 아무리 사소한 수행이라 하더라도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수기에 나타나는 기간을 숫자상으로 보면 무량억천만겁의 미래이지만 그 미래는 바로 수행하는 이 순간의 마음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사할 때마다 '성불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성불하라는 말은 참으로 좋은 말이지만 나 자신은 성불에 관심이 없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성불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내용이 없는 겉치레 인사가 되고 만다. <법화경>에서 부처님은 자기구제에 만족하는 소승제자들에게 부처가 되는 일승법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근기가 턱없이 낮다고 해서 일승을 구하는 일이 <법화경> 속의 출연 인물들에게 만 해당되고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어린아이가 모래 위에 부처 '불'자를 그려도 그 공덕으로 성불한다고 말씀하셨다. 없던 부처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부처를 행세하라는 것이다. 우리도 부처로서 행세해야겠다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기는 본래의 부처로 살겠다는 마음을 내고 닦으라는 말씀이다. 또 우리는 부처가 되겠다는 마음을 낼 수 있는 높은 이상을 가진 사람임을 확인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석지명]법화경요점-⑥장자궁자의 비유 궁자의 본래상속권은 사소한 선근공덕으로도 성불 할 수 있다는 만선성불을 의미한다. 중생은 언제나 본래부처이다.
<법화경>의 <신해품(信解品)>에는 장자궁자(長者窮子)의 비유가 있다. '장자궁자'란 대부호인 아버지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궁하게 헤매면서 날품팔이나 하는 아들의 이야기이다. 이 비유에서는 궁한 아들이 본래적으로 가진 아버지 재산의 상속권과 본래불성을 떠오르게 한다. 이 본래상속권은 만선성불을 의미하고 아울러 궁자는 언제나 상속자이며 중생은 언제나 부처임을 뜻한다. 궁자가 가지는 본래상속권에서 우리는 우리의 본래불성·본래부처·항상부처·만선성불 등을 끌어내 생각해야 한다.
장자궁자의 비유는 불·법·승 삼보 중에 법보로 들어와서 경들의 중요성과의 연결을 찾아보기 위해 천태종의 교판을 공부하는 중에 한번 스친 바 있다. <법화경>에는 비유의 이야기가 많다. 그 중에서도 일곱 가지 비유가 교리적인 의미를 잘 나타내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비유품> 가운데 화택 즉 불난 집의 비유는 장자궁자의 비유와 같이 중요한 일곱 가지 비유에 속한다. 삼주설법 중에 <신해품>은 비유주의 <비유품> 정설(正說)에 이어서 제자들이 부처님께 깨달은 바를 고백하는 부분에 속한다. 먼저 <신해품>의 줄거리를 보도록 하겠다.
<비유품>에서 성문·연각의 소승제자들이 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적 기약을 받고 크게 기뻐한다. 일승보살도라는 무량보배를 얻은 기쁨을 나타내기 위해서, 수보리·가전연·가섭·목련 등이 유명한 장자궁자의 비유를 부처님 앞에 사뢴다.
한 부호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멀리 타국으로 도망쳐서 오랫동안 곤궁하게 살고 있었다. 그 동안 아버지는 더욱 부자가 되어 영화를 마음껏 누리게 되었다. 단지 걱정이 있다면 그 많은 재산을 물려줄 아들이 없다는 것이 근심이었다. 어느 날, 장자 아버지는 멀리 성문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자신의 아들이 일자리를 찾는 듯 거리를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하인들에게 그 아들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러나 아들은 무슨 벌이라도 받는 것이 아닌가 하고 겁을 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그냥 가도록 했다. 생각 끝에 장자는 몰골이 파리하고 위엄이 없는 신하 둘을 불렀다. 그리고는 "똥치는 일을 하면 두 배의 품삯을 준다."라고 말하게 하여 겁에 질려 있는 자신의 아들 즉 궁자를 데려오게 했다. 장자는 모든 보배 장신구를 벗어버리고 일부러 낡은 옷을 입고 허름한 모습으로 궁자에게 접근했다. 그리고는 "다른 데 가지 않고 계속 일을 잘하면 품삯도 더 많이 올려 주겠다."며 아들을 달래 안심시켰다. 후에 장자는 궁자에게 새로 이름을 지어 주고 양자를 삼았지만 궁자는 여전히 자신을 천한 사람이라 자처하며 똥치는 일만 계속하려 하였다. 그때 부호 장자에게 병이 생겼다.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음을 안 장자는 궁자를 불러 창고마다 가득한 보물과 금고를 지키는 일을 시켰다. 마침내 임종할 즈음에 장자는 국왕·대신·유지들을 불러 놓고 그들에게 선포했다.
"그 궁자는 바로 나의 모든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옛날에 집을 나간 나의 아들입니다."
궁자는 장자의 말을 듣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보배와 많은 재산의 주인이 바로 자신의 친아버지이며 그의 정당한 상속자가 자신임을 알고 크게 기뻐하였다.
이 장자궁자의 비유를 부처님께 사뢴 가전연 등 성문들은 그 비유에 나타나는 궁자처럼 자신들도 과거에는 하루의 품삯 같은 작은 열반에 만족하고 일승법을 구하지 않았음을 뉘우친다. 부처님이 바로 자신들의 아버지이고 자신들을 부처님이 가지신 일승보살도라는 법의 재산을 온전히 물려받을 상속자라는 깨달음과 자부심을 부처님께 고한다.
4인의 성문제자가 자신들의 소승법을 넘어선 일승법에 대해 신해(信解), 즉 믿음과 이해를 부처님께 사뢴다는 뜻에서 <신해품(信解品)>이라는 품명이 붙었다.
여기서 비유로 나타난 각 배역들은 부처님과 중생과의 관계를 나타낸다. 장자는 석가모니부처님이고 궁자는 성문제자들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불렀을 때, 궁자가 무서워 성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것은 대승법을 버리고 소승법을 취하는 것과 같다. 아버지가 오매불망(寤寐不忘) 아들 생각만 하는 것은 부처님이 오직 중생만을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재물과 보배는 부처가 된다는 일승묘법(一乘妙法)이요,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부처님께서 성문들이 성불할 거이라는 예언을 주시는 것과 같다.
궁자의 본래상속권은 중생의 본래불성을 나타낸다. 궁자가 멀리 아버지를 여의고 도망갔기 때문에 자신은 본래 장자의 아들이며 아무리 써도 남을 재산과 보물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궁자가 도망간 비유는 본래의 재산상속권을 없애거나 돌아온 사실이 새삼스럽게 없던 재산상속권을 만들지도 않았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불성도 없어지거나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본래 그 자리에 항상 그대로 있다는 뜻이다.
장자궁자의 비유에서 상속권을 가진 아들은 하나일 뿐이지만 불법의 세계에서는 온 중생 누구나가 다 평등하게 마음껏 쓰고도 남을 법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 상속자이다. 장자궁자의 비유에서는 장자가 궁자에게 일부러 친근해져 마침내 서로 부자관계를 인지해서 선포하지만 불성에 있어서는 선포하거나 말거나 우리 모두는 성불할 수 있는 이 즉 일승묘법의 상속자이다.
궁자의 본래상속권은 우리가 사소한 선근공덕으로도 성불할 수 있다는 만선성불을 의미한다. 궁자가 장자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장자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궁자는 본래부터 장자의 아들이요, 장자의 상속자이다. 우리가 깨닫거나 말거나 우리 또한 본래부처인 것이다. 궁자와 상속자의 차이는 똑같은 사람의 정신적·육체적 행동이 궁자적인 것이냐 상속자적인 것이냐에 있을 뿐이다. 장자의 아들이 아버지 곁을 도망쳐서 거지 생활을 하고 또 아버지를 만나서도 겁을 내고 가까이하지 못하는 비유는 궁자이지만 본래의 아버지와 본래상속권자임을 알아본 다음에는 그대로 상속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본래부처인 우리 중생들도 미혹의 행을 지으면 중생이고 깨달음의 수행을 지으면 그대로 부처임을 뜻한다.
그래서 어린이가 파도 치는 바닷가에서 모래로 부처님의 모양을 만들거나 그리더라도 그는 이미 부처일 수 있다. 어떤 이가 술에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부처님 전에 나아가 '나무불'이라고 외치거나 생각만 하여도 그는 이미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은 똑같은데 부처는 보살행을 짓고 중생은 삼독에 찬 업의 행을 짓는다는 데 차이가 있을 뿐이다.
궁자가 장자의 상속자로 선포되는데 어떤 노력이나 성취의 계단이 있지 않듯이 중생이 본래부처임을 깨닫고 본래부처로 돌아가는 데에는 지옥에서부터 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성문·연각·보살을 지나 부처에 이르는 9계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하찮은 수행을 지을지라도 보살행·부처행은 그대로 그 행위자를 부처로 만든다. 지금의 자리가 지옥이거나 아귀이거나 지옥의 마음을 먹고 있거나 아귀의 마음을 먹고 있거나 상관없이 당장에 보살행으로 전환하면 그 자리에서 보살이고 부처가 될 수 있다. 삼승을 버리고 일승을 얻는 다 함은 삼승이라는 계단식의 소승적 사고를 뛰어넘어 삼승과 일승의 자리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이 그대로 부처행을 짓고 부처가 됨을 의미한다. 지옥을 부수거나 성문을 지우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그대로 본래부처임을 선행이나 수행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세계에 있는 그대로를 부처로 자각하므로 한 사람이 더 부처가 되었다고 해서 부처의 세계가 늘어나지도 않고 중생의 세계가 줄어들지도 않는다. 지옥이 부처로 고쳐지거나 부처가 지옥을 흡수하지도 않는다. 보살행이 있으면 지옥의 그 자리도 아무런 바뀜이 없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석지명]법화경요점-⑦부처와 중생의 불이(不二) 중생으로서의 나와 부처님 상속자로서의 나는본래부터 둘이 아닌 하나였다. 상속자가 궁자로 착각되었을 뿐이다.
장자궁자의 이야기에는 미혹의 세계가 벌어지는 이유와 미혹과 깨달음과의 관계가 떠오른다. 장자궁자의 이야기에서 장자의 아들이 가난하게 된 원인, 즉 무명미혹이 생기는 원인이 무엇이냐가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 궁한 사람으로서의 아들을 번뇌라 하고 상속자로서의 아들을 지혜라고 할 경우 궁자와 상속자의 번뇌와 지혜는 어떤 관계이냐가 문제가 된다.
가난한 아들 궁자는 본래부터 궁자가 아니었다. 궁자로 착각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장자의 아들이 궁자로 착각되었다고 해서 장자의 상속자가 궁자로 변해지는 것은 아니다. 궁자가 장자의 상속자로 인정되고 선포되었다고 해서 궁자가 없어지거나 장자의 상속자가 새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궁자와 장자의 상속자는 본래부터 둘이 아닌 하나였다.
정신이 없는 우리, 어떻게 살아야만 정말로 잘사는지를 모르는 우리는 본래부터 이 같은 방황자가 아니었다. 이렇게 헐떡거리면서 살다가 말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인지도 모를 답답함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는 진실로 참답고 즐겁고 멋있게 살수 있는, 해탈열반의 세계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부처님의 상속자였다. 단지 탐·진·치 삼독과 오욕락에 질질 끌려 다니는 사람으로 착각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모든 재산의 물려받을 상속자가 미혹한 중생으로 착각되었다고 해서 상속자가 가난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가 부처님의 상속자로 선포되었다고 해서 중생인 우리가 없어지고 부처님의 상속자가 새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중생으로서의 나와 부처님 상속자로서의 나는 본래부터 둘이 아닌 하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생긴다. 왜 궁자가 생겼느냐는 것과 궁자는 본래 장자의 상속자이므로 없는 것으로 취급해야 할 것이냐는 의문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입장에서 궁자로 오인될 소지는 장자의 아들에게 본래부터 있었다. 장자의 아들에게 부처의 단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부처의 단계까지 십계(十界)가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 장자의 상속자인 그 아들이 부처가 되는 것과 궁자가 되는 것 즉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장자의 아들 자신이 어떤 단계의 깨달음을 실천하느냐에 달렸다. 장자의 아들은 본래부터 있고 궁자는 본래부터 없거나, 궁자가 장자로 변해지는 것도 아니다.
'왜 장자의 아들이 궁자가 되었느냐?'는 질문 속에는 허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장자의 아들은 오직 상속자로서의 가능성만 있고 궁자로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가정하는 '무의식적 고정성의 가정'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상속자와 궁자를 둘로 보면 그것은 공사상에도 위배되고 따라서 서로 꽉 차 있다는 사상에도 어긋난다. 공사상은 고정적인 상속자나 고정적인 궁자가 없다는 것을 깨우친다. 서로 꽉 차 있다는 사상은 상속자에게는 궁자가 포함되어 있고 궁자에게 상속자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우치기 때문이다. 불법은 어떤 시초가 좋으면 그 끝이 다 좋고 시초가 나쁘면 끝도 나쁘다는 실체적 고정주의가 아니다. 그 순간순간 '나'가 좋은 행을 닦느냐, 나쁜 행을 닦느냐, 업을 짓느냐, 보살도를 닦느냐에 따라서 윤회의 길과 해탈의 길이 갈라진다는 현장 행동지상주의이다. 그래서 찰나 동안 부처의 행을 지으면 찰나 동안 부처가 되고 한 시간 동안 부처의 행을 지으면 한시간 동안 부처가 된다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 귀인은 태생이 귀하기 때문에 귀한 것이 아니라 인격과 행동이 귀하기 때문에 귀한 것이고, 천인은 태생이 천하기 때문에 천한 것이 아니라 인격과 행동이 천하기 때문에 천한 것이다. 도가 높은 이는 과거에 높은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기 때문에 도가 높은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깨달음의 생활, 상황과 진리에 합당한 수행을 하기 때문에 도가 높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못난 사람 중에 하나는 다른 이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기분 나빠하고 화내는 사람이다. 상대방은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잘못 행동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나는 과거에 어떤 직책을 역임한 사람이다.' '나는 현재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돈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무서운 힘을 가진 실세의 친척이다.' '나는 유명하고 인기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존경받는 선생님이다.' 등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의 조상이 양반이었다는 사실은 내가 지금 양반이라는 것을 보증하지 못한다. 내가 학교 선생을 했다는 사실이 지금 모범적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보증하지 못한다. 내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이 내가 현재 부처임을 보증할 수 없다. 오직 내가 현재 부처의 행을 짓는 것만이 내가 부처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증할 뿐이다.
불교에서는 궁자가 생긴 원인과 착각된 궁자는 본래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의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그 이유는 이 문제가 무명(無明)의 기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본래 우리가 부처라고 한다면 그대로 부처이면 될 터인데 왜 우리는 미혹무명과 갈애집착에 빠져서 윤회의 길을 방황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나온다. 무명의 시작과 끝의 문제는 그 무명에 의해서 생긴 지옥·아귀 등 십계 중에 불계 이외에 9계가 있는데 그것을 본래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냐 없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냐의 물음과 관계가 있다. 무명이 본래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면 그에 의해서 우리가 무명에 대처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공사상으로부터 전환된 모든 것이 서로 꽉 얽혀서 포함되어 있고 차 있다는 사상에서는 무명과 진여, 부처의 단계와 지옥·아귀·축생 등 중생의 단계가 본래부터 서로 포함하고 갖추어 있다는 입장이다. 장자의 아들에게는 가난한 궁자가 될 가능성과 장자의 상속자가 될 가능성을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악인이라고 해서 그의 마음이 지옥으로만 되어 있지는 않다. 그의 마음에도 천상사람의 마음, 보살의 마음, 부처의 마음이 같이 포함되어 있다. 단지 그가 악인인 것은 그가 지금 악인의 마음을 먹고 악인의 행을 짓기 때문이다. 부처라고 해서 그의 마음이 불국정토로만 되어 있지는 않다. 그에게도 지옥의 마음, 아귀의 마음, 축생의 마음, 아수라의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부처인 것은 그가 지금 부처의 마음을 먹고 부처의 행을 짓기 때문이다. 악인에게도 부처의 마음이 있지만 부처의 마음은 쉬고 악인의 마음은 활동 중에 있을 뿐이다. 부처에게도 악인의 마음이 있지만 악인의 마음은 쉬고, 부처의 마음이 활동 중에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이 선인이냐, 악인이냐, 부처냐 중생이냐 하는 것은 그가 가진 본래의 성품이 선하냐 악하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마음이 잠자고 있고 어떤 마음이 활동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
궁자와 장자의 상속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두 사람은 이름만 다르게 불려질 뿐 동일인이다. 비굴한 사람이 되느냐, 당당한 사람이 되느냐의 사이에는 자신이 본래 상속자라는 깨달음과 그 깨달음의 실천이 없느냐 있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궁자가 장자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해서 한 그릇의 밥을 먹던 이가 두 그릇의 밥을 먹거나 한 개의 모자를 쓰던 사람이 두 개의 모자를 쓰는 것은 아니다. 오직 마음가짐과 인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궁자는 번뇌에 물든 이를 뜻하고 장자의 상속자는 번뇌를 뛰어넘은 이를 의미한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모두 개념으로 정해진 것일 뿐이고 개념으로 정해졌다는 말은 번뇌를 의미하기 때문에 궁자나 상속자나 모두 번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 깨달음의 인격과 행동이 번뇌를 없애지도 않는다. 단지 번뇌를 활용할 뿐이다. 똑같은 물을 뱀이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마시면 젖을 이룬다. 무명의 업이 그 아들을 움직이면 궁자를 이루고 깨달음의 원과 수행이 그 아들을 움직이면 상속자를 이룰 뿐이다.
부처를 이룬다 함은 궁자를 죽이고 상속자를 새로 태어나게 하거나 번뇌를 죽이고 보리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번뇌 속에 있는 상태 즉 본래의 족보, 본래의 부처를 여실히 관하고 본래의 부처자리에서 행동할 뿐이다. 그래서 작은 수행도 바로 부처를 만들며 찰나의 수행도 찰나의 부처를 만드는 것이다.
[석지명]법화경요점-⑧독특성과 구족성(俱足性) 이 약초의 비유에서 모든 사람들이 잘나고 못남에 관계없이
각기 독특한 삶의 가치가 있음을 깨우칠 수 있다.
<법화경> <약초유품(藥草喩品)>에는 삼초이목(三草二木)이라는 약초의 비유가 나온다. 약초의 비유는 어떻게 모든 생명이 나름대로 독특한 삶의 가치를 가지는지, 갖가지 약초와 약초를 키우는 비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약초유품>의 줄거리를 보고 약초의 비유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살펴보자.
부처님은 <신해품>에서 제자들의 고백을 듣고 다시 유명한 운우(雲雨)의 비유 또는 삼초이목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의 이해가 바른 과정에 들어 있음을 인증해 준다. 운우란 구름 운(雲)자 비 우(雨)자로 비를 내리는 구름을 뜻한다. 그리고 삼초이목이란 세 가지의 풀과 두 가지의 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약초의 가치가 상·중·하로 있는 세 가지 풀과 크고 작은 나무를 의미한다.
비가 내려서 산천의 초목들을 자라게 할 때 나무의 크기·모양·성분 등에 따라서 비의 양과 질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비는 언제나 똑같이 내린다. 그러나 크고 작은 나무와 풀들은 각자 자기에게 알맞게 그 비의 수분을 흡수해서 자신을 키운다. 이 비는 특별히 선하거나 악할 것도 없고 특별히 아름답거나 추할 것도 없으며 비는 어리석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더러움도, 깨끗함도, 많음도, 적음도 없다. 사랑이나 미움, 좋아하거나 싫어함이 없다. 비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그러나 한땅에 나서 똑같은 비를 맞는다고 하더라도 여러 가지 하품·중품·상품의 약초와, 크고 작은 나무 즉 삼초이목은 각기 받아들인 비만을 소화시켜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똑같은 비를 받아서 각기 자기 나름대로 독특하게 소화시키고 이용하는 것이다.
삼초이목 중에서 하품·중품의 약초와 작은 나무는 삼승 가운데서 성문이나 연각 같은 소승에 속하기 때문에 버려야 하거나, 상품의 약초와 큰 나무는 일불승에 속하므로 특별히 관심을 갖고 키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치 운우 즉 비구름과 같아서 모든 중생이 각기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자기의 생명을 제대로 사느냐 못 사느냐에 따라 일승과 삼승이 갈라진다. 일승은 운우를 소화시키는 데 아무런 차별의 마음을 갖지 않는다. 일승은 운우 즉 부처님의 가르침 또는 불성이 있음을 확실히 알고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끊임없이 닦아 나가는 길이고, 삼승은 부처님의 설법이 운우와 같음을 모르거나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하품의 약초와 작은 나무는 존재할 가치가 없고 상품의 약초와 큰 나무만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하품의 약초와 상품의 약초에 차별과 단절을 두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운우는 부처님의 방편에 찬 설법을 뜻하고 3등급의 약초와 2등급의 나무는 각기 근기와 능력이 다른 우리 중생들을 의미한다. 운우의 한맛, 한모양은 부처님의 설법이 한맛, 한모양인 것과 같고 비가 주는 이익의 평등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주는 이익의 평등과 같다. 비가 평등하게 내림에도 불구하고 약초와 나무에 따라서 이익에 차이가 있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평등함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깨침에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비와 초목의 상관관계는 부처님과 중생들의 상관관계와 같다.
이 약초의 비유에서 모든 사람들이 잘나고 못남에 관계없이 각기 독특한 삶의 가치가 있음을 깨우칠 수 있다. 삼초이목이 아무런 구별 없이 나름대로 운우를 받고 독특한 가치의 삶을 꾸려나가듯이 모든 삶들도 악인과 선인, 못난이와 잘난 이, 천한 이와 귀한 이, 멍청이와 약은 이에 관계없이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내려 주시는 선교방편의 가르침을 받아서 독특한 삶을 꾸미고 독특한 가치를 만들어 낸다. 능력이 없는 사람보다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더 좋고 작은 마음보다는 큰마음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보통의 속된 중생들의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일승법에 있어서는 무능한 이와 유능한 이, 못난 이와 훌륭한 이를 가리지 않고 각기 나름대로 독특하게 존재해야 할 가치가 있음을 인정한다.
운우, 즉 비의 참얼굴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면 상품이 약초와 큰 나무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운우의 일면만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품의 약초 아니 사람들의 몸에 해롭다고 여겨지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등이 나서야만 산천초목을 동시에 살리는 운우의 무한한 능력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
하품의 약초와 작은 나무가 운우의 얼굴을 표현하는 데서 삶의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말은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다. 산천초목은 각기 혼자서 있는 그대로 존재해야 할 당위성과 가치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산천초목이 나름대로 비를 받아들이고 소화한다는 말은 산천초목 하나 하나가 각기 살아야 할 이유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도 된다. 삼초이목이 합쳐서 운우의 진면목을 표현하는 것은 그 자체가 최우선의 목적이 아니라 단지 각기의 삶을 누리는 데서 나오는 부산물일 뿐이다.
하품의 약초, 약초가 아닌 독초까지도 운우를 받고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면 우리들이 아무리 악하고 추하고 거짓되더라도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의 겉모양이 그럴듯하다고 해도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어디서 왔는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동물의 근성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내면에 잠재해 있는 이 미련과 이 멍청과 이 악을 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해야지 자신의 내면에 참답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만 가득 차 있다고 착각하고 거짓과 추악은 보려고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 데서부터 나선다면 그는 영원히 운우가 삼초이목을 키우는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못남, 이 모습, 이 어리석음, 이 부질없음을 안은 그 모양 그대로 우리는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우가 평등하게 내리지만 산천초목은 각기 자신에 알맞게 그 수분을 받아들여서 살아간다는 말을 뒤집으면 모든 초목들은 태어나기 이전이나 이후를 막론하고 본래부터 운우의 비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능력·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운우의 비는 헛되고 무의미하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산천의 무수한 초목을 예상하거나 전제하거나 구족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초목들은 비를 본래부터 자체 내에 구족하고 있고 비는 초목들을 본래부터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들도 본래부터 부처님의 깨우침에 의한 성불을 갖추고 있고 부처님은 처음부터 지금의 우리처럼 미혹에 헐떡이는 중생들을 예상하고 포함하고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산천초목은 비요, 비는 초목이며 우리 범부 인간은 부처요, 부처는 중생이 된다. 여기서 부처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모든 종류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 사람 그러나 자신의 행복 또는 열반에 빠지지 않고 모든 중생과 그 행복을 같이 누리겠다고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산천초목과 비를 일치시키고 우리 인간과 부처를 일치시킬 때 초목이 모양을 바꾸어서 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초목 그대로 비가 되고, 우리가 모양을 바꾸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범부의 모습 그대로 부처가 된다. 지옥이 모양을 바꾸지 않고 부처가 되고 부처가 지옥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초목이 운우의 본래구족(本來具足)을 믿고 그 뜻을 실행에 옮기기만 한다면 그리고 중생이 부처의 본래구족을 믿고 그 의미를 수행의 실천으로 옮기기만 한다면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비이고 그대로 부처이다.
운우의 비유 또는 삼초이목의 비유가 상징하는 인간존재의 독특성과 구족성은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불교교리를 익히면서 궁극적으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독특성은 우리가 지금 있는 그대로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 피해야 할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나름대로 독특한 삶의 가치가 있다. 그리고 크고 작은 풀이나 나무가 모두 합해서 비의 진정한 능력이나 얼굴을 나타내듯이 지옥의 세계나 아귀의 세계도 나름대로의 독특성을 가지면서도 부처세계의 진정한 능력과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지옥은 독특하게 부처를 포함하고 있고 부처는 또한 독특하게 지옥의 얼굴을 포함하고 있다. 지옥과 부처 그 어느 계단에 있거나 다 살아야 할 가치가 있지만, 문제는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에 달렸다. 깨달음의 길을 가느냐, 미혹의 길을 가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성불의 길을 간다면 만선이 다 성불이고 방편이 다 진실이다. 지옥 그 자리에서 바로 성불이다. 삼초이목과 운우의 관계에 나타나는 개개물물 나름대로의 독특한 생존가치를 생각하면서, 이 중생의 모습으로 부처가 구족해 있음을 드러내 보이자.
[석지명]법화경요점-⑨수행과정이 성불의 결과 지금 쉬고 있는 곳은 환상의 성일 뿐, 궁극의 도달점은 아니며 돌아가자면 3백 리요, 보배가 있는 장소를 가자면 2백 리만 가면 된다.
<법화경> <화성유품(化城喩品)>에서 길고 긴 과거생의 인연과 화성의 비유를 중심으로 불도를 닦는 과정 자체가 바로 성불이라는 것을 살펴보자. 공사상은 참사상으로 넘어가고 참사상에서 현재의 모든 것이 무량억겁의 시간과 뒤섞인 인연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그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우리의 100년 인생은 하나의 점보다도 더 작다. 이 긴 인연 속에서 짧은 인생의 우리가 닦는 수행은 궁극의 도달점과 일치되어야만 한다. 수행과 성불의 일치를 암시하면서 환상으로 된 휴식처로서의 성이야기가 나온다.
<화성유품>은 인연설주 가운데 부처님의 정설부분에 해당된다. 여기서 부처님은 숙세의 인연을 설명한다. 아주 헤아릴 수 없이 먼 옛날, 온 우주의 땅을 아주 가는 먼지로 빻아서 일천국토를 지날 때마다 한 개씩 떨어뜨려서 그 먼지가 다 없어질 때까지의 숫자와 같은 무수겁 전의 옛날에 대통지승여래가 있었다. 이 여래는 무수겁을 정진하여 부처님이 되었는데 출가하기 전에 왕자들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가 수행하여 성불했다는 말을 듣고 왕자들도 수행을 결심하고 아버지 부처님을 찾아갔다. 대통지승여래 아버지는 왕자들의 청을 받고 그들을 위해 사성제와 십이인연의 법을 설해 주었다. 왕자들이 다 동자로 출가하여 사미가 되니 전륜성왕이 이끌고 온 팔만억 명이 따라 출가하였다.
대통지승여래가 시민들의 청을 받아 이만겁 지나서야 <법화경>을 설하니 사미들은 다 수지하여 통달하였다. 부처님이 <법화경>을 팔천겁 동안 쉬지 않고 설한 후에 팔만사천겁 동안 선정에 드니 보살 사미들도 각기 법좌에 올라 팔만사천겁 동안<법화경>을 설하고 육백만억나유타 항하사(恒河沙) 중생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자신도 그 사미 중의 하나라고 밝힌다. 사미 보살이 다 부처님이 되어 각각의 세계를 담당하는데, 서방의 부처님은 아미타불이고, 동북방 사바세계 부처님은 지금 설법하는 자신인 석가모니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석가모니부처님은 성문·연각의 이승으로는 궁극의 열반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일불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하면서 저 유명한 환상의 성의 비유를 설한다.
보배가 있는 곳을 찾아서 많은 사람들이 멀고도 험난한 길을 나선다. 그러나 보배를 찾아 길을 나선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고 지치고 두려워서 더 이상 가지 못하겠다고 인도자에게 말한다. 인도자는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방편을 쓴다. 가령 5백 리를 목표지점으로 해서 갈 경우 3백 리쯤에 화성 즉 환상의 성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쉬게 한다. 그 화성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피로를 푼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들이 완전히 악도를 면하고 보배의 장소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 그래서 인도자는 그들에게 "지금 쉬는 곳은 환상의 성일 뿐 궁극의 도달점이 아니며 뒤로 돌아가자면 3백리를 가야하고, 앞으로 보배가 있는 장소를 향해서 가자면 2백 리만 가면 된다."고 말해 준다.
과거 전생의 이야기는 엄청나게 긴 시간의 이야기이고 이 화성의 비유는 공간의 이야기이다. 이 화성의 비유는 두 가지를 동시에 암시하고 있다. 한 가지는 현실에 우리가 나름대로 얻었다고 또는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 높은 깨달음을 향해서 끊임없이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부처의 길은 도착점이 아니고 과정에 있으니, 시간과 공간의 길고 짧음, 좁고 넓음을 따지지 말고 오직 순간순간의 수행에서 영원의 시간과 무량한 공간을 통해서 닦을 수행의 결과를 맛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 속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은 길을 안내하는 인도자요, 방편으로 화성을 만드는 도사이다. 이 세계는 인연의 세계이다. 비어 있는 상태라고 하거나 서로 포함되어 있는 상태라고 하거나에 상관없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서 털끝만큼의 틀림도 없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공의 세계를 숙세(宿世)의 인연으로 풀어서 설명하신다. 우리는 반드시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결과요, 새로운 결과에 대해서 원인이 된다. 과거의 인연담은 바로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과 말이 계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정말로 아득한 옛날에 대통지승여래가 있었는데 그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석가모니부처님이 <법화경>을 설하는 현재까지의 긴 세월은 인간의 마음 크기와 머리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무량겁이다. 일겁도 헤아릴 수 없다. 그런데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땅을 다 빻아서 가루를 만들어 일천겁의 국토를 지날 때마다 그 먼지 한 개씩을 떨어뜨리고 그 먼지가 다 없어질 세월의 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으며 계산할 수 있으며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대통지승여래는 사미들의 청을 받아 이만겁이 지나서야 <법화경>을 설하였다. 다시 그 부처님은 <법화경>을 팔천겁 동안 쉬지 않고 설한 후에 팔만사천겁 동안 선정에 들었다. 너무 엄청나고 벅찬 시간이다. 60년 아니 일 년을 한결같을 수 없는 우리 인간은 너무 초라하고 조잡하다. 대통지승여래와 그의 왕자들이 발심수행을 하고 <법화경>을 설하는 세월의 억천만 분의 일이라도, 단 일겁이라도 단 일만 년이라도, 단 100년이라도, 우리의 남은 여생 10년 내외라도, 그 부처님들이 갔던 길을 따를 결심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이 걱정이며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한 시간이라도 진정한 자신을 살지 못하면서 성급한 짧은 시간으로 감옥을 만들고 그 감옥에 갇혀 버리는 우리는 얼마나 우스운 사람들인가.
우리는 부처의 행을 짓는 순간 바로 본래의 부처가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 한순간이라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변덕을 부리는 그런 순간이 아니라 그 순간의 일념이 무량억천만겁 동안 전혀 흔들리지 않는 그러한 순간이다. 무량억천만겁에도 움직임이 없는 그 마음과 수행의 자세라면 한 모금의 바닷물로도 온 세계의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듯이 일념의 발심과 수행으로 온 세상 모든 시간의 성취를 다 맛볼 수 있다.
이 긴 시간의 인연에 있어서, 여기서는 화성 즉 환상의 성이 방편으로 되어 있지만 흔들리지 않는 일념 속에는 방편 그대로가 진실이 된다. 과정 그대로 목표가 된다. 화성을 지나쳐야 할 과정으로 보자면 앞으로 도달해야 할 보배의 장소도 지나쳐야 할 끝없이 무수한 방편중의 하나가 된다. 미혹 속에 있는 우리 중생과 성문·연각을 다 방편으로 잡으면 도달해야 할 일불승도 끝없이 더 높은 도, 쉬지 않고 닦아야 할 도의 방편이 된다.
<법화경>의 만선성불 정신은 미혹의 자리에서라고 할지라도 깨달음을 향해서 억만겁의 수행기간을 작정하고 발심한다면 그 자리가 바로 성불의 자리라는 것이다. 보배의 장소를 향해서 먼길을 떠나기 전이나 화성에 도착해서 피로를 풀고 다시 발심하는 때나 보배의 장소와 다를 바가 없다. 대통지승여래와 그의 왕자 사미들처럼 법문을 청하고 이만겁 후에 <법화경>을 듣고 팔만사천겁을 쉬지 않고 <법화경>을 닦는 그 자리에 왕자의 자리와 사미의 자리, 사미의 자리와 부처의 자리에 차별을 두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석가모니부처님의 전생담인 대통지승여래와 그 왕자들의 과거인연과 성불은 우리의 과거인연과 성불이다. 우리는 바로 그 인연대중이기 때문이다. 그 숙세 인연 속에 많은 태어남과 죽음이 보여지지만 방편으로 보면 그 또한 방편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태어나기 전이나 태어난 후나 죽기 전이나 죽은 후에 관계없이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부처님은 사실 과거로부터도 떠난 바가 없었고 미래에도 새삼스럽게 태어나는 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있는 이 국토는 이 자리 그대로 바로 성불의 자리이다. 단지 <법화경>을 듣기 위해서 법문을 청하고 이만겁을 기다릴 수 있는 자세가 요구될 뿐이다. 무량겁이 일념이라고 한다면 일념이 무량겁 동안 흔들리지 않고 계속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