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5.31.PM2시)
수미정상게찬품(須彌頂上偈讚品)
시방 보살들의 찬탄
화엄경 한 단락 공부하겠다. 오늘도 수미정상게찬품, 이 내용 게송이 아주 심오하고 그럴 수 없이 좋은 내용이다.
4) 북방 공덕혜(功德慧)보살의 찬탄
여러 보살을 등장시키고 그중에서 대표인 시방의 모든 보살들을 인솔하고 온 인솔자 보살이 대표로서 열 개씩 게송을 가지고 부처님 법을 찬탄한다. 또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온갖 부처님 세계를 다 이렇게 아는 대로, 자기가 깨달은 바대로, 자기가 본 대로 펼쳐 보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것도 시방에서 몰려온 보살들이니까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방향에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세계와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 그리고 모든 깨달음의 내용을 남김없이 다 보고 그것을 설명하는 형식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오면서 자기가 배운 대로 느낀 대로 스스로 보고 깨달은 대로 이야기하기로 한다면 그런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여러 가지로 많을 것이다. 해도 보고, 달도 보고, 춘하추동 사시절이 바뀌는 것도 보고, 춘하추동 사시절이 바뀜으로 해서 거기에서 벌어지는 온갖 자연현상의 변화들, 얼마나 많겠는가? 참 많다.
불법이라고 하는 것을 제쳐두고도 우리가 한 번 정리해서 이렇게 화엄경 형식을 빌려서 생각해 보면 참 많고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다.
어디 현상계만 그런가?
태어나서 어머니를 만나고, 아버지를 만나고, 형제자매를 만나고, 친구들을 만나고, 유치원이라든지 학교라든지 온갖 먼저 온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 교육제도라든지 사회제도라든지 등등 그런 것들을 보고 느끼고 하면서 또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겠는가?
참 신기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 하나하나 깨달아 가면서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확인하는 것이 경이롭다.
인생사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경이롭고 놀라울 수가 없다. 정말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우리 인생사여,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이 세상사여, 아 뭐라고 찬탄할 길이 없다.
북방공덕해 보살의 찬탄이라.
이시(爾時)에 공덕혜보살(功德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공덕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1) 범부들의 잘못된 깨달음
제법무진실(諸法無眞實)이어늘 망취진실상(妄取眞實相)일새
시고제범부(是故諸凡夫)가 윤회생사옥(輪廻生死獄)이로다
모든 법에 진실이 없거늘
망령되이 진실한 모양을 취하네.
그러므로 모든 범부들이
생사의 옥에서 윤회(輪廻)하도다.
멋진 게송이다. 이 속에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일체 존재라고 하는 것, 그것은 고정분별하는 진실한 상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법에 진실이 없거늘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망령되이 진실한 모양을 취하네
사람이 그렇고, 감정이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미움도 그렇고, 명예도 그렇고, 부귀영화도 그렇고 그런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금방금방 변해가는 것이 인생사다. 그리고 세상사다. 변해가는 것은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뭔가? 참되다, 참되다 라고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영원히 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데 모든 존재는 세상사 객관적인 것도 그렇고 내 생각의 변화도 역시 변한다.
그러므로 모든 범부들이
생사의 옥에서 윤회(輪廻)하도다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생멸하는 감옥 속에서 윤회하고 있다. 아무리 감옥 속에서 윤회하고, 올라가고 내려가고, 올라가고 내려간다 한들 감옥 속이다.
성공했다 해도 감옥 속이요, 실패했다 해도 감옥 속이요, 사랑도 감옥 속이요, 미움도 감옥 속이요, 모든 것이 감옥 속이로다.
생사의 옥에서 윤회하도다. 거기에서 엎치락 뒤치락 윤회하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들 미혹한 범부들의 인생사다. 제가 거기에다가 강설로 적어놓았다.
모든 법은 텅 비어 공하다. 변하지 않는 진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범부들은 망령되게 허망한 현상에서 진실하며 영원한 것이라고 믿고 집착한다. 그래서 보는 족족 집착하고 따라다니며 윤회한다. 마치 무지개를 손으로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지랑이를 손으로 잡으려는 것과 같다. 이것이 범부들의 잘못된 깨달음이다.
이것이 범부들의 잘못된 깨달음이다. 일찍이 그러한 것이 아지랑이와 같고 무지개와 같다고 하는 사실을 확연하게는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찍이 지혜가 있어서 눈치를 챈 사람들은 출가를 한다든지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여줬듯이 왕자의 지위도 버리고 아리따운 부인도 버리고 자녀도 버리지 않았는가. 이것이 일단은 좀 집착할만한 것이지만 끝내 집착할 것은 못 된다. 내 인생은 이 사람들이 책임져주지 않는다. 이러한 철든 생각을 한 고인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위시해서 많고 많다.
불교 안에는 수많은 그런 선지식들이 있고 보살들이 있다. 원효스님이 그렇고, 의상스님이 그렇고 저 멀리는 용수보살이 그렇고, 마명보살이 그렇고, 달마대사가 그렇고, 혜가대사가 그렇고, 육조대사가 그렇고, 가까이로는 숱한 훌륭한 선지식들이 많다. 불교에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우리 삶에 소금을 뿌리듯이 한 번씩 문득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봐야 된다.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생채소에 소금을 뿌려서 숨을 죽이는 역할과 같다. 정신없이 인생을 취생몽사하는 것보다야 설사 그렇게 숨을 좀 죽인 채소가 되더라도 좀 철들고 지혜로운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무래도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겠지만 깨달은 분들의 가르침을 우리가 따르고 깨달은 분들의 공부를 우리가 쫓아서 이렇게 하는 뜻은 그런 데에 있지 않는가, 이러한 생각을 해본다.
언사소설법(言詞所說法)을 소지망분별(小智妄分別)일새
시고생장애(是故生障礙)하야 불료어자심(不了於自心)이로다
말로 설명한 법을
조그마한 지혜로 망령되이 분별할새
그런 까닭에 장애가 생겨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도다.
말로 설명한 법을
조그마한 지혜로 망령되이 분별할새
조그마한 지혜라는 것이 우리 범부들 미혹한 범부들이 나름대로 앞에서 설명한 글이라든지 그 외 반야심경만 가지고도 우리 나름대로 자기 깜냥대로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 그것이 조그마한 지혜로 망령되이 분별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장애가 생겨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도다
마음이 근본인데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도다.
화엄경은 여러 가지 가르침이 있는데 그 가운데 보살행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다음에는 지혜를 그리고 자비를 마음의 도리, 일심의 도리를 상당히 중요하게 설명하고 있다.
불능료자심(不能了自心)이어니 운하지정도(云何知正道)리오
피유전도혜(彼由顚倒慧)하야 증장일체악(增長一切惡)이로다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바른 도(道)를 알겠는가.
저 전도(顚倒)된 지혜로 말미암아
온갖 악만 증장하도다.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바른 도(道)를 알겠는가
저 전도(顚倒)된 지혜로 말미암아
온갖 악만 증장하도다
잘못된 지혜, 거꾸러지고 잘못된 지혜, 그것은 지혜랄 것도 없다. 그런 것으로 말미암아서 온갖 악을 짓게 된다. 전도된 지혜란 자기의 얄팍한 눈앞의 이익만을 보는 꾀, 그런 얍삽한 꾀를 부리는 마음 씀씀이다.
참마음의 도리를 잘 알아야 된다.
화엄경 사구게를 흔히 ‘약인욕요지(若人慾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렇게들 알고 계실 것이다. 그것이 화엄경 전체의 뜻은 못 된다 하더라도 상당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화엄경 사구게라고 이야기한다.
약인욕요지(若人慾了知) 만약에 어떤 사람이 삼세일체불 (三世一切佛)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그 가운데 깨달으신 분, 그러한 세계를 잘 알고자 한다면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니라, 응당히 온 우주 법계, 모든 존재, 인생사, 세상사 그러한 모든 것들의 본바탕 일체가 다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졌다,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졌다 하는 것을 관찰하라, 살펴보라, 깊이 깨달아 보라.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하라, 그것이 화엄경 사구게라고 이야기한다.
이 사구게 하나만 외워도 대단하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하는 제목 공덕이나 이 사구게 하나의 공덕이나 대단하다. 의미상으로 보면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은 낱낱이 또 우리가 설명을 해야 그 의미가 조금 이해가 되지만, 이 사구게는 얼핏 들어도 좀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지 않는가?
그 네 구절은 다 두고라도 마지막 구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우리가 얼마나 자주 쓰는 말인가. 우리 불자들에게는 입에 익숙하고 귀에도 익숙하다. 또 익숙해야 되고 이것이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내 마음이 짓는 것이다. 우리 인생사는 거의 내 마음이 다 짓는다.
조금만 더 가지려고, 어느 정도 소득이 있는데 조금만 더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한 치 앞도 못 보고 바로 앞에서 그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자기 분이 거기까지인데 ’아 이거 되는구나‘ 싶어서 한걸음 그 길로 더 나아간다. 그러면 그동안 얻었던 것까지도 다 잃어버리는 예들이 많다. 특히 벼슬한다는 사람, 사업한다는 사람, 조그마한 장사라도 사람 등에서 무수히 그런 예를 본다. 그래서 세상이 그대로 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사 벌어지는 것을 우리가 보고 그것을 잘 관조하고 있으면 부처님 경책의 말씀을 그대로 세상사에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화엄경은 일심(一心), 또는 유심(唯心)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마음의 실체를 깨닫는 것을 정각이라고도 한다. 자기 마음의 실체를 알면 도를 알게 되고 바른 지혜가 증장한다. 그래서 “불교를 받든다는 것은 곧 마음을 잘 단속하고 마음을 잘 관리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 불교를 받들어 행한다고하는 것은 항상 내 마음 관리 잘하는 것이다. 섭심(攝心) 섭할 섭(攝)자 마음 심(心)자 그 두 자만 딱 걸어놓고 살아도 부엌에 걸어놓고, 거실에 걸어놓고, 안방에 걸어놓고, 화장실에 걸어 놓고, 곳곳에다 섭심(攝心) 섭심(攝心) 일체유심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섭심(攝心) 내가 마음 관리하는 일, 마음 관리 하는 일, 마음 관리는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변화무쌍하게 적용이 될 수 있으니까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깨닫는 것이다.
오늘 ‘약인욕요지(若人慾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리고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 이 좋은 말씀을 공부하게 되었다.
불견제법공(不見諸法空)하야 항수생사고(恒受生死苦)하나니
사인미능유(斯人未能有) 청정법안고(淸淨法眼故)로다
모든 법이 공(空)함을 보지 못하고
항상 생사의 고통을 받으니
이 사람은
청정한 법의 눈[眼]이 없는 까닭이로다.
모든 법이 공(空)함을 보지 못하고
제법공상(諸法空相) 모든 것은 공하다. 제법공상이라고 하지 않는가.
반야심경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이 법이 모든 공한 모양은’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본질의 입장도 있고 현상의 입장도 있는데 우리는 대개 현상의 입장을 이해하고 보고 듣고 거기에 의지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어떤가?
모든 법이 공하다. 텅 비고 변화무상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항상 생사의 고통을 받으니
공함을 알면 생사의 고통을 받을 까닭이 없다, 하는 내용이다.
이 사람은
청정한 법의 눈[眼]이 없는 까닭이로다
법을 아는 텅 빈 안목, 그것이 없는 까닭이다.
모든 법이 공(空)하다는 것은 반야심경에서 잘 가르치고 있다. 제법이 공한 모양은 불생불멸이며, 또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공에는 육근도 없고, 육진도 없고, 육식도 없고, 12인연도 없고, 고집멸도도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보는 것이 청정한 눈이다.
청정한 눈, 깨끗한 눈이다. 눈이라는 것이 육안도 눈이지만 혜안이니 법안이니 불안이니 여러 가지 눈이 있을 수 있다.
텅 비어 있음을 보는 눈이 청정한 눈, 깨끗한 눈이다. 어떤 조건에도 거기에 걸리지 않는 눈을 말하는 것이다.
(2) 참다운 깨달음을 보이다
아석수중고(我昔受衆苦)는 유아불견불(由我不見佛)이니
고당정법안(故當淨法眼)하야 관기소응견(觀其所應見)이로다
내가 옛적에 온갖 고통을 받은 것은
내가 부처를 보지 못한 까닭이니
마땅히 법의 눈을 깨끗이 하여
응당히 볼 것을 보리로다.
부처를 볼 것이다, 그런 뜻이다.
내가 옛적에 온갖 고통을 받은 것은
내가 부처를 보지 못한 까닭이니
우리 마음자리를 제대로 보지 못할 까닭이다. 마음자리를 본 사람은 고통을 받을 까닭이 없다. 모든 것은 일체유심조다.
마땅히 법의 눈을 깨끗이 하여
응당히 볼 것을 보리로다
부처님의 진실한 모양을 보려면 청정한 법의 눈을 갖춰야 한다. 32상과 80종호라는 형상을 부처님이라 하거나, 또는 역사적인 사실로서 부처님이라고 한다면 한량없는 목숨과 한량없는 광명과 한량없는 공덕과 한량없는 지혜와 한량없는 자비의 부처님은 꿈에도 보지 못하리라. 마땅히 법의 눈을 깨끗이 하여 응당히 이와 같은 실상을 보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부처님은 우리 마음의 부처님이라. 그 마음의 부처님은 한량없는 목숨, 한량없는 광명, 한량없는 공덕, 한량없는 지혜, 한량없는 자비 이것이 진정한 참나의 세계다. 그것을 우리는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화엄경의 차원은 일반 불교하고는 차원이 많이 다르다. 그러니까 화엄경을 이해하는 안목을 늘 갖추고 있어야 된다.
약득견어불(若得見於佛)하면 기심무소취(其心無所取)니
차인즉능견(此人則能見) 여불소지법(如佛所知法)이로다
만약 부처님을 보면
그 마음에 취하는 바가 없으니
이 사람은 곧 능히
부처님이 아신 바와 같은 법을 보리로다.
만약 부처님을 보면
그 마음에 취하는 바가 없으니
우리 소견으로는 우리가 부처님에게 취할 것이 너무 많다. 중생의 입장에서는 부처님에게서 가질 것, 취할 것, 본받을 것이 많다. 중생의 안목으로 부처님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입장, 부처님의 실상에서 만약에 부처님을 본다면, 그 마음에 취할 바가 없다, 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곧 능히
부처님이 아신 바와 같은 법을 보리로다
부처님을 보았다면 부처님이 아신 경지하고 똑같은 입장이 된다, 그런 이야기다.
만약 진여자성과 법성생명의 한량없는 목숨과 한량없는 광명과 한량없는 공덕과 한량없는 지혜와 한량없는 자비의 부처님을 보면 밖을 향해 취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내 마음 부처님 속에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 어디 밖으로 향해서 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은 곧 부처님이 아신 바와 같은 법을 보았기 때문이다.
너무너무 중요하고도 멋진 게송이 되겠다. 이 수미정상게찬품은 게송으로 부처님의 공덕과 부처님의 지혜, 부처님의 안목, 깨달음의 세계를 한껏 꿰뚫어 보고 찬탄하는 입장이라서 참 좋은 내용이 많다. 이런 데서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계를 우리가 조금이나마 이렇게 엿볼 수가 있는 기회가 된다. 이 수미정상게찬품, 우리가 눈여겨 보고 공부해야 할 부분이다.
약견불진법(若見佛眞法)이면 즉명대지자(則名大智者)니
사인유정안(斯人有淨眼)하야 능관찰세간(能觀察世間)이로다
만약 부처님의 진실한 법을 본다면
곧 대지자(大智者)라 이름할 것이니
이 사람은 청정한 눈이 있어
능히 세간을 관찰하리라.
만약 부처님의 진실한 법을 본다면
곧 대지자(大智者)라 이름할 것이니
크게 지혜로운 자라 이름할 것이니
이 사람은 청정한 눈이 있어
능히 세간을 관찰하리라
세간의 실상을 환하게 안다, 그런 뜻이다.
만약 부처님의 진실한 법을 본다면, 부처님의 세계를 제대로 본다면, 그 사람은 크게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사람은 청정한 눈이 있어 능히 세간을 관찰한다.
불교인은 언제나 여래의 진실한 뜻을 알기를 발원한다.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간경을 하든 여래의 신실한 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여래의 진실한 뜻만 안다면 그가 곧 여래다. 이 사람은 불안과 혜안과 법안과 영안으로 세상을 꿰뚫어 보게 되리라.
무견즉시견(無見卽是見)이라 능견일체법(能見一切法)이니
어법약유견(於法若有見)이면 차즉무소견(此則無所見)이로다
봄이 없음[無見]이 곧 옳은 봄[是見]이니
능히 일체 법을 볼 수 있으리라.
법에 만약 봄이 있다면
이것은 곧 본 것이 없는 것이로다.
봄이 없음[無見]이 곧 옳은 봄[是見]이니
능히 일체 법을 볼 수 있으리라.
법에 만약 봄이 있다면
이것은 곧 본 것이 없는 것이로다
안목에 대한 것인데 이것은 곧 보는 것이 없는 것이로다. 봄이 있다면 제대로 보는 입장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는 것이 없는 경지다.
(3) 자각각타(自覺覺他)
일체제법성(一切諸法性)이 무생역무멸(無生亦無滅)이니
기재대도사(奇哉大導師)여 자각능각타(自覺能覺他)로다
일체 모든 법의 성품이
남[生]도 없고 또한 없어짐도 없나니
신기하도다. 큰 도사시여,
스스로 깨닫고 능히 남도 깨닫게 하셨도다.
일체 모든 법의 성품이
남[生]도 없고 또한 없어짐도 없나니
법의 성품,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법의 성품은 원융해서 두 가지 모양이 없다. 생멸이 없다. 생사가 없다, 그런 뜻이다. 그러면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다. 무생역무멸이다. 일체제법성(一切諸法性)이 무생역무멸(無生亦無滅)이니 기재대도사(奇哉大導師)여
신기하도다. 큰 도사시여
자각능각타(自覺能覺他)로다.
스스로 깨닫고 능히 남도 깨닫게 하셨도다
이것이 부처님이 하신 일이다. 우리가 부처가 되어서도 또한 이런 일을 할 것이다. 스스로 깨닫고, 또 다른 사람도 깨우쳐 주는 일, 그것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경지까지는 못 갔다 하더라도, 관세음보살에 대한 소신이 확실하게 있는 사람이라면 관세음보살에 대해서도 스스로 믿는 바를 다른 사람에게 일러줄 수도 있다. 그러면 보통 우리 불자들에게는 큰 힘이 된다. 인과 이치 하나만으로도 스스로 거기에 대한 소신이 확실히 들어서 그것이 인생철학이 되었다면 ‘인과의 이치가 나의 인생철학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무엇에 종사를 하든지 간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또 그렇게 일러주고, 일러줘도 참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자기 소신이 확실한 내용을 가지고 남에게 일러줄 때는 그 말씀에 힘이 실린다. 자기가 그렇게 믿지 않는 것을 가지고 들은 대로만 귀로 듣고 입으로 전하는 정도라면 거기에 크게 믿음이 가지지 않고 크게 힘이 실리지 않는다. 말씀 속에 크게 힘이 실리지 않는다.
믿는다 하더라도 믿는 정도, 믿음의 무게, 믿음의 깊이가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얼마나 거기에 심취하고 그 이치가 맞다고 하는 것을 느끼고 하느냐, 그 정도에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그 전해지는 무게가 다르다.
일체 제법의 성품은 불생이며 불멸이다. 현상은 끊임없이 천변만화하지만 그 본질은 불생불멸이다. 만약 모든 존재가 불생불멸하는 이치를 안다면 곧 깨달은 경지며, 큰 도사이다. 세존은 이와 같은 이치로 자신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하였다.
(4) 공덕을 승혜보살에게 미루다
이것은 늘 있어 온 형식이다.
승혜선이설(勝慧先已說) 여래소오법(如來所悟法)일새
아등종피문(我等從彼聞)하고 능지불진성(能知佛眞性)이로다
승혜보살이 나보다 먼저
여래의 깨달은 법을 말하시니
우리들은 그에게서 듣고
능히 부처님의 참된 성품 알았노라.
북방의 공덕혜(功德慧)보살이 앞서 설법한 승혜보살에게 그 공덕을 미루는 내용이다. 지난 시간에도 있었다. 매 보살마다 마지막 게송은 이렇게 공덕을 앞의 보살에게 미루는 것으로 되어 있다.
5) 동북방 정진혜(精進慧)보살의 찬탄
이시(爾時)에 정진혜보살(精進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관찰시방(觀察十方)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정진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1) 무상관(無相觀)을 말하다
약주어분별(若住於分別)이면 즉괴정안(則壞淸淨眼)이라
우치사견증(愚癡邪見增)하야 영불견제불(永不見諸佛)이로다
만약 분별에 머물면
청정한 눈을 파괴하여
어리석고 삿된 소견만 더하여
영원히 모든 부처님 보지 못하리라.
만약 분별에 머물면
우리가 보는 차별성에 머물면
청정한 눈을 파괴하여
분별도 차별도 하지 않는 그대로 본성대로 보는 것, 아무런 감정개입 없이 텅 빈 마음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곧 청정한 눈이다. 분별을 하면 그것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어리석고 삿된 소견만 더하여
영원히 모든 부처님 보지 못하리라
영원히 부처님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
약능료사법(若能了邪法)하야 여실부전도(如實不顚倒)하며
지망본자진(知妄本自眞)하면 견불즉청정(見佛則淸淨)이로다
만약 삿된 법인 줄 알면
실상과 같아서 전도하지 아니하고
허망을 알아 본래 스스로 참다우면
부처님 보는 것이 곧 청정하리라.
만약 삿된 법인 줄 알면
실상과 같아서 전도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 삿된 법이라고 하는 것을 알 것 같으면 실상과 같아서 전도하지 않는다.
허망을 알아 본래 스스로 참다우면
허망한 줄을 알아 본래 스스로 참다운 것으로 딱 가라앉아 있으면
부처님 보는 것이 곧 청정하리라
제대로 부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유견즉위구(有見則爲垢)라 차즉미위견(此則未爲見)이니
원리어제견(遠離於諸見)하야사 여시내견불(如是乃見佛)이로다
봄[見]이 있으면 곧 때[垢]가 됨이라
이것은 아직 보는 것이 되지 않나니
모든 봄을 멀리 여의어야
이와 같이 부처를 보리라.
봄[見]이 있으면 곧 때[垢]가 됨이라
보는 것이 있으면 번뇌가 되리라.
이것은 아직 보는 것이 되지 않나니
모든 봄을 멀리 여의어야
이와 같이 부처를 보리라
안이비설신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이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 육근 중에 눈이 앞에 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견문(見聞) 보고 듣는다고 하지만 보는 것이 거의 90프로다. 그다음에 듣는 것이고 그다음에 다른 육근이고 그렇다. 그래서 보는 것을 가지고 제일 많이 말한다.
우리 생활을 점검해 보면 보는 것으로써 거의 하루의 삶이 다 거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입으로 먹어야 하는 것도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해서 일단 보아서 먹음직스러워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2) 무생관(無生觀)을 말하다
세간언어법(世間言語法)을 중생망분별(衆生妄分別)하나니
지세개무생(知世皆無生)이면 내시견세간(乃是見世間)이로다
세간의 말로 하는 법을
중생이 망령되이 분별하나니
세간이 모두 생멸이 없는 줄 알면
비로소 세간을 보게 되리라.
세간이 모두 생멸이 없는 줄 알면, 세간 본질의 불생불멸을 말하고 있다.
약견견세간(若見見世間)이면 견즉세간상(見則世間相)이니
여실등무이(如實等無異)라야 차명진견자(此名眞見者)로다
만약 봄으로 세간을 보면
봄이 곧 세간의 모양이니
실상과 같아 다름이 없어야
이 이름이 참으로 보는 자이니라.
만약 봄으로 세간을 보면
보는 것으로써 세간을 보면
봄이 곧 세간의 모양이니
보는 대로 우리는 세간이라고, 세상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실상과 같아 다름이 없어야
이 이름이 참으로 보는 자이니라
세상의 실상을 꿰뚫어 보는 것이 된다.
약견등무이(若見等無異)하야 어물불분별(於物不分別)이면
시견이제혹(是見離諸惑)하야 무루득자재(無漏得自在)로다
만약 평등하여 다름이 없음을 보고
사물에 분별하지 않으면
이렇게 보는 것은 모든 의혹을 여의어
샘이 없어 자재를 얻음이로다.
만약 평등하여 다름이 없음을 보고
사물에 분별하지 않으면
이렇게 보는 것은 모든 의혹을 여의어
샘이 없어 자재를 얻음이로다
모든 존재의 공성(空性)은 평등하다. 사물의 공성을 보면 어떤 차별상도 차별하다고 분별하지 않는다. 사물의 공성, 사건의 공성, 사람의 공성, 사람이 짓는 모든 것의 공성을 보면 어떤 의혹도 없다. 그래서 무루(無漏)의 경지가 되어 일체에 자재하다.
모든 것은 본래 공성이고 텅 빈 것이고 궁극에 가서도 또한 텅 빈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염불을 하듯이 ‘관세음보살’ 하듯이 늘 외우는 사람은 아주 홀가분하게 인생을 살 것이다. 크게 집착없이, 어떤 문제가 일어나도, 대통령이 정치를 어떻게 하든지 국회의원이 어떻게 하든지 간에 ‘처음에도 공성이요 궁극에도 공성이다. 텅 빈 성품이다’ 그렇게 세상사를 꿰뚫어 보는 사람, 그와 달리 보통의
사람이 일체 존재에 자재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를 유성(有性)으로 보고 차별로 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그대로 있는 것[有]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문제로 많은 시시비비가 일어날 때 저는 작년에도 그러했고, 재작년에도 그러했고, 그전에도 그러했고, 5년 전에도 그러했고, 10년 전에도 그러했고, 20년 전에도 그러했는데 그때는 그 문제를 가지고 그렇게 중요하다고 정치인들이 시시비비하고 그렇게 나라가 막 떠나갈 듯이 옳느니, 그르느니 했는데 ‘그건 다 넘어가고 지금 또 그러고 있다’ 는 생각이 든다.
전부가 공성이기 때문에 그렇다.
공성인줄 뻔히 알고 지금 또 그렇게 그 공성을 가지고 텅 빈 성품을 가지고 실재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저렇게 시시비비한다.
우리 화엄행자, 화엄학인은 좀 한 번씩 그런 차원을 견지하고, 세상사와 인생사를 바라보는 삶이 필요하다. 마치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나서 막 소용돌이 치면서 흘러가더라도 우리는 언덕에 서서 그 소용돌이 치며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 보는 입장이 가끔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공부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강물에 휩쓸려서 같이 떠내려가서는 안된다. 아무리 세상이 그렇게 막 휩쓸려서 떠내려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얼른 발을 디뎠다가도 얼른 발을 빼고 이렇게 언덕에 와서 흘러가는 강물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훈련, 그런 마음의 여유, 이런 것을 일상에서 반드시 가질 필요가 있다.
(3) 무성관(無性觀)을 말하다
제불소개시(諸佛所開示) 일체분별법(一切分別法)을
시실불가득(是悉不可得)이니 피성청정고(彼性淸淨故)로다
모든 부처님이 열어 보이신
일체 분별의 법을
이것을 다 얻을 수 없으니
그 성품이 청정한 까닭이로다.
모든 부처님이 열어 보이신
일체 분별의 법을
팔만대장경 그 많고 많은 분별법, 얼마나 많은가?
이것을 다 얻을 수 없으니
그 성품이 청정한 까닭이로다
왜 그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가? 그 본성이 청정하다, 텅 비었다. 팔만장경에서 가르치는 법은 방편으로 펼쳐 보이신 법이기 때문에 그 본성은 텅 비어 없기 때문이다. 정말 명구다.
모든 존재의 무상(無相)과 무생(無生)과 무성(無性)은 본질을 보는 견해이다. 만약 현상이 눈에 보이는 대로라면 그것은 형상이며, 생멸이며, 고정된 자성이 있어야 한다. 불교는 언제나 현상에 미혹되지 말고 본질을 보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이 열어 보이신 온갖 가르침은 근기를 따르고 상황을 따라 분별해 보인 것이다. 그 본성은 텅 비어 청정[空]하다.
좋은 내용이다. 그래야 되는데 간혹 미혹하다.
저도 경을 보고 이렇게 말씀을 나누고 있을 때는 거의 그것이 내 살림살이가 된 것 같은데 간혹 또 깜빡깜빡 미혹해서 그렇지 못하고 그와 반대의 경우에 마음을 쓸 때가 많다. 그래서 이런 성인의 가르침을 자꾸자꾸 자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성본청정(法性本淸淨)하야 여공무유상(如空無有相)일새
일체무능설(一切無能說)이니 지자여시관(智者如是觀)이로다
법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여
허공과 같아 모양이 없을새
일체를 능히 말할 수 없으니
지혜 있는 자는 이와 같이 보리라.
법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여
법의 성품 모든 존재의 본성은 본래 텅 비어 청정하다. 그래서
허공과 같아 모양이 없을새
일체를 능히 말할 수 없으니
지혜 있는 자는 이와 같이 보리라
원리어법상(遠離於法想)하야 불요일체법(不樂一切法)하면
차역무소수(此亦無所修)니 능견대모니(能見大牟尼)로다
법이란 생각 멀리 여의어
일체 법을 좋아하지 아니하면
이것은 또한 닦을 바가 없나니
능히 대모니(大牟尼)를 보리라.
대모니, 큰 성인이라는 뜻이다.
법이란 생각 멀리 여의어
법이라는 생각도 멀리 떠나서
일체 법을 좋아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훌륭한 법, 화엄경 아니라 화엄경보다 천 배 만 배 수승한 법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수준이 못되니까 일단 화엄경에 매료되어 있지만 그것마저 멀리 떠나 버릴 정도라면 한 차원 다른 세계다. 그래서 일체법을, 화엄경마저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닦을 바가 없나니
그 정도 되면 닦을 바가 없다. 그것은 큰 성인이 되는 것이다.
능히 대모니(大牟尼)를 보리라
‘석가모니’할 때의 대모니를 보리라.
불법은 무수이수(無修而修), 즉 닦아도 닦음이 없이 닦는다. 그래서 법성의 존재원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법성이라는 생각마저 멀리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닦을 바가 없다. 곧 예부터 움직이지 않는 부처님이다[舊來不動名爲佛].
옛날부터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부처님이다,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참 차원 높은 내용이다.
(4) 공덕을 공덕혜보살에게 미루다
여덕혜소설(如德慧所說)하야 차명견불자(此名見佛者)니
소유일체행(所有一切行)이 체성개적멸(體性皆寂滅)이로다
공덕혜보살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이름이 부처를 본 자니
있는 바 일체 행이
자체의 성품이 모두 적멸이라네.
이것도 공덕혜보살에게 공덕을 미루는 마지막 게송이다. 늘 이렇게 자기는 겸손하고 ‘내가 이렇게 설했지만 앞서 공덕혜보살이 훨씬 차원높은 법을 설했다’ 라고 겸손하는 것이다.
법은 한량이 없고 끝이 없으니까 아무리 높은 법을 안다고 하더라도 또 거기에서 한 차원 달리 생각해서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이에게 그 공덕과 법을 미루는 자세, 저 앞에서도 매번 이야기했다. 그렇게 보는 자세가 불자로서 바람직한 자세다, 그런 말씀이 되겠다.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하겠다.
지금 오신 분들 한 번 살펴보겠다.
*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다.
첫댓글 처음 어른스님 소식 듣고 먹먹하여 말이 안 나왔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안정되시고 27, 28일 양일간에 수술을 하신다고 합니다.
하루빨리 회복되셔서 다시 다시 법상에서 뵙게되기를 기도합니다.
_()()()_
🙏🙏🙏
🙏🙏🙏
빨리 회복되시기를 발원합니다. _()()()_ 나무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아직 누워만 계시고 진통제로 버티고 계십니다. 식사는 평소 하시던대로 채식 위주로 지내십니다. 병실에는 지혜월보살님이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고 계시고, 속가 동생 내외분이 와 계십니다.
꼼짝이라도 할라치면 오른쪽 고관절에 통증이 와서 힘들어하셔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의식은 명료하셔서 가까이 있는 저희들을 부르셔서 가서 뵙고 왔습니다.
27, 28, 양일간에 마취과 의사선생님과 연결되는대로 수술에 들어가신답니다.
속히 쾌차하시기를 두손모아 기도 드립시다.
_()()()_
_()()()_ 쾌차하시를 기도합니다.
一切唯心造...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간절한 발원 올립니다 _()()()_
화엄성중 화엄성중 화엄성중 속히 쾌차하시길 기원드립니다_()()()_
_()()()_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