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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2월 8일 주일
[(자)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인간 존중과 인권 신장은 복음의 요구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권 주일로 시작하는 대림 제2주간을 2011년부터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오늘날 여러 가지 도전에 대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새 복음화’ 노력이 바로 사회 교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일깨우려는 것이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한국 교회가 정한 인권 주일이고 사회 교리 주간의 시작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사회를 보는 올바른 눈을 가지게 하는 사회 교리를 배우고 익혀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말씀의 초대
바룩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기를 빈다고 한다(제2독서). 하느님의 말씀이 내리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실 것이다.>
▥ 바룩서의 말씀입니다. 5,1-9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 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2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의 겉옷을 걸치고
영원하신 분의 영광스러운 관을 네 머리에 써라.
3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어디서나 너의 광채를 드러내 주시고
4 ‘의로운 평화, 거룩한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너를 부르실 것이다.
5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동쪽으로 눈을 돌려 보아라.
네 자녀들이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신 것을 기뻐하면서
해 지는 곳에서 해 뜨는 곳까지 사방에서 모여드는 것을 보아라.
6 그들은 원수들에게 끌려 너에게서 맨발로 떠나갔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왕좌처럼 영광스럽게 들어 올려 너에게 데려오신다.
7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당신 영광 안에서 안전하게 나아가도록
높은 산과 오래된 언덕은 모두 낮아지고
골짜기는 메워져 평지가 되라고 명령하셨다.
8 하느님의 명령으로 숲들도 온갖 향기로운 나무도
이스라엘에게 그늘을 드리우리라.
9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나오는 자비와 의로움으로
당신 영광의 빛 속에서 이스라엘을 즐거이 이끌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은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1,4-6.8-11
형제 여러분, 나는
4 기도할 때마다 늘 여러분 모두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5 여러분이 첫날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6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8 사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애정으로
여러분 모두를 몹시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9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10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1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 사람들이 많은 ‘도시’가 더 효과적일 텐데 하느님께서는 왜 광야를 고르셨을까요? 더욱이 그 말씀을 선포할 사람으로도 사람들에게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본시오 빌라도, 헤로데나 필리포스, 대사제 한나스와 카야파가 아닌, 광야에서 살고 있던 세례자 요한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으로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3,6)라는 구약의 예언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원을 준비하시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해 보이고 아주 비효율적인 방법, 비합리적이고 너무나 미약해 보이는 방법으로 당신께서 계획하신 일을 이루셨습니다. 믿음 없이는 절대로 알아볼 수 없는 방법들을 하느님께서는 선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3,3)야말로 우리 마음 안에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지며,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가장 탁월한 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3,4-5 참조). 고해성사는 우리가 이러한 은총의 길로 들어가게 해 줍니다. 많은 교우가 ‘회개하는 마음’ 없이 그저 ‘판공성사 표’가 나왔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합니다. 회개하는 마음과 함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영혼의 길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대림 시기를 지내며 하느님의 구원을 보는 은총의 주인공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보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 사막 체험은 필수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벌써 대림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서두에는 당대 세상을 주름잡고 있던 사람들의 이름이 쭉 나열되고 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로마 황제를 대신해 유다에 파견나와 있던 본시오 빌라도 총독,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그의 동생 필리포스, 대사제 한나스와 가야파...
엄청 대단한 사람들로 여겨지지만, 한 명 한 명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당시 세상과 종교의 주류 세력으로서 높은 자리에 앉아 세상과 교회를 쥐락펴락하던 권세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말씀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주름잡던 명망가들이나 세력가들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생각할수록 하느님은 참 묘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지니고 계신 본질적인 성향이랄까 속성 중에 두드러진 것 하나가 하향성입니다. 끝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은 당시 가장 낮은 곳에 낮은 모습으로 살아가던 세례자 요한에게 내렸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광야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늘 깨어있기 위해, 늘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자신의 촉각을 하느님께로 맞추기 위해 광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광야는 사실 무지막지한 곳입니다. 극한 체험을 하기에 딱 맞는 곳입니다. 먹을거리, 마실거리, 즐길거리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세찬 모래바람, 끝도 없는 메마름과 무미건조함, 세상과의 철저한 단절과 외로움만이 존재하는...모든 것이 결핍된 장소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그런 사막에서 끝도 없이 자신을 단련시키며 예수님께서 등장하시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사막이 필요합니다.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상태에서 매일 호의호식하며 부른 배를 두드리다보면, 주님 말씀과는 무관한 삶을 살게 되기 마련입니다.
보다 맑은 정신으로 깨어있기 위해서 사막 체험은 필수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보다 명확히 듣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결핍이 필요합니다.
남아있는 대림 시기, 보다 더 명료하게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도 기쁘게 사막으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그 사막이 어디인지 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자발적 광야의 삶을 사는 이가 존경스럽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만나게 해 주는 길과 같은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먼저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뇌엔 ‘망상활성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가 있습니다. 망상활성계는 뇌와 외부 자극 간의 필터 역할을 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뇌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를 다 처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까요? 바로 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면세점에서 무언가를 사려 집중할 때는 공항 방송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시계를 보고 출발시간이 지난 것을 알았을 때는 벌써 몇 분째 자기 이름이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신을 보이셨는데, 어떤 이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였고 어떤 이들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는 마치 망상활성계가 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분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들만 보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무엇에 집중하고 있어야 할까요? ‘뜻’입니다.
‘착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사랑입니다. 나에게 이웃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다면 예수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만약 잘 생기고 예쁘고 돈 많고 인기 많은 아이돌을 죽자 살자 쫓아다니는 아이에게 구유에 뉘어진 예수님이 매력이 있을까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광야를 산 세례자 요한을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의 세례자 요한을 주윤발이나 워런 버핏, 일론 머스크, 척 피니와 같은 인물들을 들고 싶습니다. 이들은 인기 있는 세계의 거부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광야에 살았던 세례자 요한과 비교하느냐고요? 먼저 돈에 대해 말해볼까요? 이런 사람들은 모두 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실제로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고 기부할 약속을 한 이들입니다. 그래도 잘 먹지 않았겠느냐고요? 워런 버핏은 오래된 집에서 오래된 자동차로 맥도날드에서 4달러도 안 되는 햄버거로 식사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자기 집도 없이 6천 만 원짜리 조립식 주택에 거주합니다. 그래도 명예를 추구했다고요? 워런 버핏은 나이가 들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성공한 것이라 말합니다. 척 피니는 자기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도 나라에서 조사받기 전까지 그가 기부하는 사람인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존경스럽게 보인다면 착한 뜻이 들어온 것입니다. 착한 뜻은 이웃을 사랑하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기에 그런 이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착한 뜻을 가지면 자발적으로 광야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많고 쾌락을 찾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어디서 만났느냐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에서 만났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이휘재나 욘사마 배용준과 같은 같은 나이 또래의 사람들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가난하고 절제되고 멸시받는 삶이 부러워졌던 것입니다. 이는 그 책이 저의 시선을 바꿔놓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이젠 내가 아니라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임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성체에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주일학교 교사 중에 어떤 자매가 수박을 먹는데 빨간 부위가 하나도 없이 갉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왜 저래? 맛있으라고 먹는 건데 저 흰 부분까지 먹다니. 누가 알아준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 책을 읽는 동안 시선이 바뀌었는데, ‘지금 나는 저렇게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저렇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 신앙이 우리를 광야로 나가게 하여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하게 하는 문입니다. 착한 뜻을 가져야 인간이 되신 착한 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발적 광야를 사는 이들을 존경하게 만들어줄 환경에 자신을 먼저 살게 하십시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입니다. 미술 시간에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져갔습니다. 크레파스는 12색, 24색이 있었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색이 있습니다. 검은색, 흰색, 연두색, 갈색, 분홍색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두 색을 중심으로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피부의 색으로 이름을 부르던 크레파스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살색’ 크레파스입니다. 그 살색은 백인의 피부를 뜻하는 하얀색이 아니었습니다. 그 살색은 흑인의 피부를 뜻하는 검은색이 아니었습니다. 그 살색은 황인의 피부를 뜻하는 누런색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크레파스는 살색 크레파스가 아니라, 누런색 크레파스였습니다. 어린 시절에 저는 크레파스의 색을 통해서도 어쩌면 인종을 차별하는 교육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17년 전입니다. 저는 이탈리아 로마 공항에서 캐나다 토론토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고 했습니다. 체크인하는 중에 착오가 있었는지 보안요원이 저를 불렀습니다. 저는 5시간 넘게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유는 저의 외모가 범죄 용의자와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지만 이미 시간은 늦었습니다. 저를 조사하는 요원들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의 외모와 피부색 때문에 인종차별을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인권 주일입니다. 인권 주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모든 인간은 성별, 나이별, 피부의 색으로 차별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 모두는 소중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슬프게도 인류의 역사는 인권 차별의 역사입니다. 인권 차별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가슴 벅차게도 인류의 역사는 인권 차별을 극복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쉰들러 리스트’를 제작했습니다. 폴란드에서 사업하던 독일인 쉰들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소로 끌려가야 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 쉰들러는 자기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죽음의 수용소로 가야 했던 유대인들을 구했습니다. 쉰들러의 선행으로 살아남은 유대인들의 후손이 매년 쉰들러의 무덤을 찾아 경의를 표한다고 합니다. 뉴저지의 뉴튼 수도원에는 마리너스 수사님의 무덤이 있습니다. 마리너스 수사님은 한국전쟁 당시 화물을 운송하는 선장이었습니다. 흥남 부두에서 화물 선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남쪽으로 피난하려는 피난민을 보았습니다. 선장님은 배에 있던 화물을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태웠습니다. 그렇게 배에 오른 14,000명의 피난민은 성탄절인 12월 25일에 거제도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배에서 4명의 아이가 출생했습니다. 마리너스 선장은 하느님의 섭리를 알았고, 수사가 되어서 평생 뉴튼 수도원에서 지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도 그 배에 있었습니다. 미국을 방문했던 문재인 대통령은 마리너스 수사님의 무덤을 참배하였고, 기념식수를 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높은 산은 깎아내고, 골짜기는 메운다.’입니다. 이는 인종, 혈통, 세대, 이념, 사상, 신념, 신분, 종교 때문에 차별과 멸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품성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모습은 끝없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희생과 나눔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것은 바로 하느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닮은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높은 산을 낮게 하고 깊은 골짜기를 메우고 험한 길을 고르게 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험한 산과 거친 들판을 건너고서야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었듯이 우리 안에 직면한 문제들을 풀어내고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일도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우리들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출 때 그래서 우리가 순결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아름다운 기도로 남겨 주었습니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파타피오 (Patapius)
활동년도 : +7세기
신분 : 은수자
지역 :
같은 이름 : 빠따삐오, 빠따삐우스, 파타피우스
성 파타피우스(또는 파타피오)는 원래 이집트 테베(Thebae)의 명문 가문 출신으로 부모로부터 열심한 신앙을 물려받았다.
어려서부터 은수자의 삶을 동경했던 그는 과학, 수학, 철학 등을 배우면서 모든 학문이 추구하는 진리가 하느님께로 귀결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친의 뜻을 따라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교리학교에서 수학한 후 테베로 돌아온 그는 부친이 이미 사망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이집트 사막에서 단식과 기도의 은수생활을 시작하였고, 이후 코린토스(Corinthos)로 가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순례하고는 그곳에서 평범한 수도승으로 살았는데, 이때 치유은사를 받아 많은 이들의 병을 고쳐주었다.
성덕과 기적으로 공경을 받던 그는 83세에 선종하였고, 그의 유해는 제자들의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성 요한 세례자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로부터 1000년 뒤 이슬람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수도자들은 성인의 유해를 몰래 코린토스의 한 작은 은수동굴로 옮겨 동굴 내부의 서쪽 벽면에 숨겨 모셨다.
· 20세기 그의 유해는 그 지방의 한 사제에 의해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정기적으로 성인의 유해가 숨겨진 은수동굴 경당에서 기도하던 사제의 꿈에 성인이 직접 나타나 알려주었다고 한다.
성인의 유해가 발굴된 후 많은 사람들이 성인의 유해를 찾아 기도하며 성인의 전구로 많은 병자들, 특히 암 환자들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 후 성인의 유해는 훼손을 막기 위해 그 사제에 의해 로우트라키(Loutraki)의 집으로 모셔졌고, 1952년 성인이 묻혔던 곳에 성 파타피우스 수녀원이 세워진 후 다시 은수동굴 경당으로 옮겨 모셨다. 그는 특별히 동방교회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