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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여행10 - 만제키 운하를 출발해 산속으로 들어가 가네다성터에 오르다!
2024년 1월 26일 대마도(對馬 쓰시마) 히타카쓰 (比田勝) 의 hotel DAEMADO hitakatsu 에 서
일어나 일출을 보고는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체크아웃을 한후 “히토츠바타고 렌터카”
로 가서 차량을 인수하는데..... 렌터카는 차량에 기름을 완전히 만땅으로 채워서 주니 좋습니다.
한시간을 달려서 에보시타케 전망대 에 도착해 계단을 올라 구경하고 다시 달려서 만제키
운하 에 도착하는데, 만제키세토 (万関瀬戸) 는 쓰시마섬(나가사키현 쓰시마시)의
중앙부를 아소만과 미우라만을 사이에 두고 있는 길이 500m 짜리의 운하로 1900년
러일 전쟁을 앞두고 길이 500미터 운하를 파서 쓰시마 해전 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만제키바시 (万関橋, 만관교) 로 운하를 건너 남섬으로 달려서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데 여긴 도로가
좁은지라 도중에 차가 마주치면 누가 피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 될수도 있어 마음이 조마조마
한데... 여긴 미쓰시마마치 로 외진 산길이라 다행이 찾는 차들이 없어 무사히 산속 깊은 곳에 차를
주차한 다음 20여분간 산길을 오르는데 입구에 방문객이 사용하라고 지팡이 를 놓아둔게 인상적 입니다.
참으로 가파른 산길을 15분 정도 오르니 드디어 언덕이 나타나고 길은 산 허리를 돌아
가는데..... 오른쪽은 절벽으로 저 아래 아소만 이 보이며 조금 더 걸으니
드디어 무느진 성벽이 보이고 드디어 가나타노키 (金田城 가네다성) 남문 에 도착합니다.
죠야마산 (城山) 의 8부 능선에서 시작해 산 정상에 까지 쌓은 험준한 성은 663년에 백강 전투에서
당나라 수군 패해 철수한 왜군으로, 당시 태자였던 나카노오에가 나당 연합군의 일본 침공 에
대비해 망명해온 백제인들을 동원해 667년에 완성 했다니 그럼 백제식(조선식) 산성 인가 봅니다?
가나타노키(金田城 가네다성) 는 절벽을 끼고 능선을 따라 3개의 계곡을 감싸안는 산성 으로
나당연합군의 보복 침공에 대비해 치쿠젠(후쿠오카) 의 오노죠(大野城), 히젠(사가현)
의 기죠(椽城) 와 동일한 조선식(백제식) 산성 이며 1982년 국가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대마도 는 한일 양국의 접경지로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백제가 멸망하고 부여성과 웅진성(공주)
이 항복하니 의자왕과 왕족에 귀족등 1만 3천여명이 당나라로 잡혀간후 당나라군
주력이 철수하자... 도침과 복신이 백제 부흥군 을 일으키면서 왜국에 왕을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제명 여제와 아들인 태자 나카노에는 일본에서 수십년간 거주하던 의자왕의 동생(아들?) 인
풍 왕자 에게 5천 왜군을 주어 백제로 나가 왕위 를 잇게 한후 수도를 나라 아스카에서
후쿠오카로 옮기고는 총동원령을 반포해 663년에 3만 대군을 1천척 배 에 태워 백제로 보냅니다.
하지만 왜군 함대는 백강(금강) 하구에서 당나라 함대로 부터 화공 을 당해 대패하고는 철수
하면서 수많은 백제인들이 왜군을 따라 일본 열도로 망명해 오자 왜군은 나당연합군
이 뒤를 쫓아 일본을 침공할 것에 대비해 각지에 백제인들을 동원해 산성 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 중에 쓰시마에 카네다성(金田城) 을 쌓았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고 원나라의 일본침공 당시
원나라군에게 성이 공격당한 적이 있으며, 또 수백년후 조선시대에 조선군으로
부터 침공 을 당한 적이 있으며, 반대로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의 조선 침공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고려가 몽골의 앞잡이 가 되어 말을 기르고 900척 함선을 만들며 식량을 제공하고 배를 운할할 선원을 제공
해서 일본으로 배를 몰았으며, 게다가 1만명 고려군이 3만명 몽골군의 선두 에 서서 일본을 2차례나
침략 했으니 대마도와 일기도가 침략당해 무참히 짓밟히고 규슈 후쿠오카 등지가 참혹한 피해를 보았는
데....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결국 여몽 침략군을 물리쳤지만 전리품이나 토지를 새로 얻은게 없었습니다.
막부는 자비로 무구를 준비해 전쟁에 참가한 고쿠닌들에게 보상을 못하니 빚에 파산한 고쿠닌들이
원성이 자자하자 기회를 잡은 고다이고왕(천황) 이 반란을 부추기니 막부가 힘을 잃으면서
중앙정부의 힘이 변방에 미치지 못하자 왜구들이 복수를 명분삼아 고려를 600차례나 침공 해
강화도가 함락당하고 개성까지 위협을 당하니.... 고려와 조선은 3차에 걸쳐 대마도 정벌에 나섭니다.
조선 국조정토록에 기록된 쓰시마섬 3차 전투 기록을 요약하면.... 6월 임진일, 두지포에 상륙하여 왜구
50여 명과 교전 - 왜구를 추격해 배 129척을 빼앗아 20척을 남기고 불사름, 가옥 1,939호를 불사름,
왜구 114명을 참하고 21명을 사로잡음, 漢人(중국인) 132명을 구출 - 훈내곶에 목책을 치고
주둔, 편장을 보내 가옥 68호, 배 15척을 불사름, 왜구 9명을 참수, 漢人(한인)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
니노군으로 진격 - 좌군절제사 박실이 매복 에 당하여 선상으로 퇴각, 편장 박홍신, 박무양, 김해,
김회와 군사 180명(실록기록) 이 전사/ 편장 김효성이 추격에 저항하자 추격군이 물러남-
7월 병오일, 거제로 귀환 - 쓰시마 섬 원정은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막판에 좌군 절제사
박실(朴實) 이 쓰시마 도주가 이끄는 군대와 조우해서 180명 사상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2만 병력 규모로 보면 참패라 하기는 어려우나 피해를 입은건 사실이니, 박실의 패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상륙후 왜구를 상대해 승승장구하면서 방심 했던 것.... 그리고 줄곧 패배하던
쓰시마섬의 왜구는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름 없었지만, 쓰시마 도주와 무사들이 개입하면서
태세를 재정비하고 지리에 익숙한 장점을 살려 방어전 을 전개한 것에서 패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패전은 조선군 퇴각의 결정적인 원인이 아니었으니 방어에 주력하는 적을 상대하면 장기전 이
될 수 밖에 없는데, 그 때는 태풍이 올 시기 가 다가오고 있었고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상태 에서
자칫 지원군, 보급, 퇴로가 전부 끊길 수가 있으니 곤란한 상황에 빠지기 전에 재빨리 퇴각한 것입니다.
이때 쓰시마 섬 정벌 은 조선으로 약탈 나간 왜구들의 빈집털이 가 되었으니... 이 왜구들은
충청도에 있는 수군 진영을 기습해 각종 물자와 함선을 약탈하고 귀환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은 왜구들이 쓰시마 섬에 도달하기 전에 다시 공격하도록 지시합니다.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군은 임무를 완수(?) 하고 거제도에 도착한 상태인데 군사들이 지쳤고,
마침 태풍이 오는 듯한 날씨여서 신하들은 군사를 재정비 할 것을 요청했고, 태종의
새로운 명령을 받은 사자가 거제에 도착했을때 군사들이 쓰시마로 출발하려고
했지만 그날 밤에 풍랑이 몰아쳐 전함이 파손되고 유실 되었으며 군사 일부가 사망 합니다.
그러자 상왕 태종은 병조판서를 시켜 글을 지어 항복한 왜인들을 쓰시마로 돌려 보냈으니 쓰시마 도주에게
회유책 을 쓴 것으로, 원정 성공 과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서 중앙집권으로 안정 되니 왜구의 수는 이전에
비해 격감해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조선의 물질적 양보 (세견선이 오면 쌀과 콩을 주다) 하에 일본과
조선간의 평화적 교류가 활발해지니 세종실록 이후 성종 때까지 왜구 관련 기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유럽의 역사와 비교해보면, 르네상스 시기 지중해를 횡행했던 이슬람 바르바리 해적 을 토벌하기 위해 유럽
나라들은 몇차례나 토벌 했지만 오스만 터키 제국에서 은근히 밀어주는 통에 효과가 없었고 심지어
본거지 튀니스나 알제 같은 곳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긴 했지만 비용만 막대하게 들뿐, 약탈은 계속 되었습니다.
덕분에 모로코의 술탄 은 해적질로 잡아온 수십만명의 유럽인 노예 들을 거느리고 베르사유
궁전 못지않은 호화로운 궁전을 건립하며 오스만 제국 못지 않은 하렘 을 거느렸다고
하는데..... 이 북아프리카 해적들이 겨우 토벌된 것은 산업혁명 시기였던 19세기 초 였습니다.
게다가 남중국해의 베트남/ 중국계 해적 같은 경우 중국 황제들이 해적 두목들에게
벼슬 을 주는 식으로 무마한 경우도 상당히 있었으니..... 대표적인 예가
정일수 이니 이와 비교하면 조선은 나름대로 왜구 소탕에 성공한 셈이라 할 수도....
쓰시마섬 영주는 조선 왕의 신하 이면서 막부 다이묘 라는, 두 직위를 동시에 가졌으니 변방사라 할수 있으며
원정 성공 이후, 조선은 강경책 대신에 회유책을 써서 무역을 허가 했으니 쓰시마는 일본과 조선 두 나라
사이를 무역하면서 조일 무역의 중개지가 되었고, 수많은 쓰시마 도민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외국인이 조선 땅에 들어와서 사는걸 조선 정부가 곱게 볼리가 없었고 경상도 해안 인근에 삼포
(부산, 울산, 진해) 를 신설해 무역량을 줄였지만, 16세기까지 쓰시마는 목면과 곡물을 수입하고
은, 동, 물소 뿔, 유황, 후추 등을 제공하면서 중개인으로서의 지위 를 누렸으니.... 곡물생산량이
1만석에 불과하던 쓰시마는 조선과의 무역(밀무역이 다수?) 으로 수입을 2배 이상 불릴 수 있었습니다.
한편, 쓰시마 섬의 영주는 쓰시마 슈고(守護 수호) 를 몇 차례 지낸 규슈 북부의 다이묘 쇼니(少弐)씨
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는데, 쇼니씨는 무로마치 막부시대 내내 스오 (周防 야마구치현) 의
백제계 후손 오우치(大內)씨와 맞싸웠으나 열세에 놓여 몇번씩 다이묘가 전사하고 영지가 약탈당합니다.
이때 쇼니씨는 쓰시마 섬으로 도망 쳤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자기 본거지(후쿠오카)를 회복해
오우치씨와 싸움 을 이어나갔는데, 그러나 쇼니씨는 오우치씨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사쓰마의 시마즈씨가 북진 하면서 방어에 공을 세운 가신 류조지씨의 하극상 으로
멸망했고, 쇼니씨와의 관계를 통해 규슈 본토에 진출하려던 쓰시마 섬의 공작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오닌의 난 이후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가 무너지고, 일본 상인들은 무역의 확장을 요구하며 중종
5년 (1510년) 부산포, 내이포, 염포 의 삼포에서 쓰시마 도주의 지원을 받아 폭동(삼포왜란)
을 일으켰으니.... 삼포왜란은 15일 만에 진압 되었고 이로 인해 양국의 외교가 일시적으로 단절됩니다.
일본에서 직접 중개를 하여 2년만에 관계를 회복하는데 임신약조 이며, 무역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었고 이에
쓰시마 도민들은 반발하는 구조가 반복되어 30차례 정도의 왜변 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비변사가 설치
되기도 했는데, 실록에는 꾸준히 쓰시마를 '간사하고 교활하다' 고 평가하는데 이러한 경험에 따른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정규군의 전면적 침략전쟁에서 선봉 을 맡기도 했지만
이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압박으로 인해 쓰시마가 말려들어간 것인데....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 였으니, 쓰시마가 원정 참가를 거부하면 쓰시마섬 부터 결단납니다.
쓰시마 도주의 입장에서 두 나라가 전쟁 나서 좋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으니, 쓰시마는 조선- 쓰시마-
일본의 중개무역 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입장이었는데... 조선이 일본에게 져서 망하면 그대로
무너지고 조선이 이겨도 일본과 교역할리 없으니 무역은 무너지고 회복에 엄청난 시간이 걸립니다.
결국 이겨도 져도 쓰시마에겐 전혀 득이 없는 전쟁 이었으며 거기에 일본에서도 가장 농업 생산량
이 딸리던 쓰시마 입장에서는 전쟁을 하러 오는 엄청난 수의 일본군에게 머무를 숙영지
를 제공하고 군량을 제공 해야 하는게 어려운지라 쓰시마는 전쟁을 막으려고 무진 노력 했습니다.
1590년에는 일본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도주 소 요시토시가 선조에게 조총 2 점을 진상 하였는데,
이미 화포 무기를 지닌 조선은 총통에 비해 위력이 약한 조총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당시 조총은 연사력이 떨어지고 위력이 약한지라 조선은 오다 노부나가가 개발한 3단 교대
사격술 등을 개발하지 못했으니.... 익숙한 활이 더 연사력이 좋다고 판단해 조총을 도입하지 않았습니다.
매일이 전쟁이던 일본은 연사력이 떨어지는 조총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3교대 사격술 을 개발하여 조총의
약점을 극복했으니, 결국 조선은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야 조총의 장점을 인식하고 도입하게 됩니다.
오다 노부나가 는 1875년 나가시노전투에서 일본 최강의 기마군단인 다케다군의 기마 돌격에 대해 3단
사격술로 전멸 시켰으니...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는 충주에서 신립의 조선군을 이 전술로 몰살 시킵니다!
또 유명한 '명으로 가고자 하니 길을 빌려 달라 (假道入明)' 라는 문구도 쓰시마 도주가 조작한 것
으로, 원래 문구는 '명을 정벌하려 하니 길을 안내하라 (征明嚮導)' 였으니, 쓰시마 도주가
택도 없는 무례한 요구를 조선이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다소 완화된 표현으로 조작
했던 것이며, 쓰시마인들은 뱃길 안내를 위해 끌려가 다시 돌아오지 못한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쓰시마섬은 7년 전쟁 동안 식량이 부족해 기아에 시달리면서 고생했으니, 그래서인지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점령할 경우 농사가 가능한 거제도를 영지로 받기로 했습니다.
강항의 《간양록》 을 보면 양국 사이에서 투잡을 뛰면서 이익 을 취하는 쓰시마 섬의 어쩔수 없는
삶이 한일 양국 모두에게 안좋게 보였는지, 쓰시마 섬 관련된 부분에서는 결코 좋은 소리가 안 나옵니다.
간양록에 실린 일본 승려의 증언에는, 평시에 조선에 오는 일본 사절들 상당수는 실제로는 쓰시마
도주 개인이 보낸 것이고, 왜국의 국서(倭國書) 란 것도 다 쓰시마 도주의 거짓 수작 이며
심지어 임진왜란 이전 김성일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승려가 조선 통역에게
사정을 듣고 쓰시마 도주의 속임수를 알려 주려다가 쓰시마섬 통역에게 제지당한 일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도에 각 지역별 영주들이 상경해 묵는 수도의 집 마저도 쓰시마 도주에게는
없으니, 소 요시토시는 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집 근처 여관에서 잠시 유숙해야 했고,
"일본 본토 사람은 악착스럽지만 교활하지는 않은데..... 쓰시마 놈들은 악착스럽기는 덜
하나 간사스러운 꾀 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는 등의 안 좋은 대우와 시선에 대한 기록들이 넘칩니다.
위에서 말한 국서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쓰시마 섬이 왜란 이후 먹고 살기 위해 조선에 무역
재개를 요청 하는데, 조선이 그래줄리가 없었지만 북방의 여진족 이 흥하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쇄환 해야 했기 때문에, 국교 재개에 의지를 보일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불구대천의 원수들이라 욕하면서도 '쓰시마 섬만은 허락할 수도?' 라고 말을 흘리면서 쓰시마
를 설레게 했고, 쓰시마가 포로 일부를 석방 하면서 간절히 요구하니까 일단 조선은
사명당 유정을 '탐적사(探賊使)' 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파견하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접견합니다.
조선에서는 일본을 명나라의 조공 체제에 편입시키려고 쇼군의 칭호를 '국왕' 으로 바꿔야 한다고
했는데,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먼저 굽히고 들어가는 쪽이 아쉬운 쪽, 즉 국서를 먼저
보내는 쪽이 지고 들어간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니들이 먼저 국서 보내라" 하는 입장을 취합니다.
일본은 이를 당연히 거부했고, "국교 재개하려면 니네가 먼저 국서 보내라" 라고 요구해 양국이 서로 기싸움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속 타는건 쓰시마 섬 이라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국서 위조 였으니 일본이 먼저 국서를
보낸 것 처럼 문서를 쓰고 조선의 요구사항 중 하나였던 "전쟁 당시 왕릉을 도굴한 자를 잡아서 보내라“ 는
항목을 만족시키려고 다른 죄를 지은 죄인을 보내서 '이 놈이 조선 왕릉을 도굴한 놈 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조선은 국서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일본이 먼저 보낸 줄 알고 회답겸 쇄환사
(回答兼刷還使) 를 파견했으니 조선의 사신들이 가져온 국서에 '국서에 답한다' 라는
표현이 있는 것을 확인한 쓰시마 도주는 이 표현 마저 '국서를 보낸다' 라는 문장으로
조작했고 결국 양국의 국교가 회복되고 무역도 제한적이지만 재개되니 이것이 기유약조 입니다.
그런데 1635년에 국서 위조가 공개적으로 들통 나면서 쓰시마가 호되게 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에도
막부는 이를 묵인해 줬고 다른 다이묘들과 로주가 합의하여 대신 감독관을 파견 하면서 양속적
성격이 강했던 쓰시마는 완전히 일본에 편입되어 일본의 대조선 외교 창구 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러일전쟁때 쓰시마 해전 이후 유사시 대한해협을 봉쇄할 목적 으로 이 섬의 최북단에 토요 포대, 그리고
부산시 용호동에 장자등 포대 가 설치되었으니 각 포대당 30km 의 사정거리로 부산과 쓰시마 사이
의 서수로(부산해협)의 폭 50km 를 이 두 포대가 커버 했는데.... 구경 16.1인치(410mm) 45구경
함포 2문 1세트 회전포탑과 이를 운용하기 위한 발전기등 제반시설 및 콘크리트 벙커가 건설되었습니다.
포의 출처는 원래 아마기급 순양전함으로 건조된 아카기에 탑재 되었던 것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따라 아카기가 항공모함으로 개장되면서 분리한 것
이라는 설과, 카가급 전함으로 건조 중단되어 폐기된 토사에서 분리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대마도와 부산 양측 포대 다 연습사격 외에는 실전에서 발포된 적이 없으며, 장자등 포대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 되었지만 토요 포대는 전후에도 살아남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륙한 미군이 포탑을 해체 하여 깊은 원통형의 콘크리트 구조물만 남아있습니다.
여기 가네다성터 는 세종 1년때 2만명 이종무 조선군의 대마도 정벌시 이즈하라 마을과 배들을 불태운후
좌군절제사 박실(朴實) 이 쓰시마군을 추격하다가 매복으로 수백명이 죽은 일을 회상하고는 내려
오니 화장실이 보이는데 차량에 부착된게 인상적인데... 그러고는 산을 나와 다이렉스 미쓰시마 로 갑니다.
그런데 가네다성터 맞은 편에 시라타케 (白嶽山 백악산) 라고 있으니 대마도섬 주민들에게는 영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산까지는 3시간이 소요된다는데 정상에서 보면 몇천미터 되는 산을 오른 것
처럼 주위는 원시림에 둘러쌓여 있으며 엣날부터 신라산 이라고 불리던 것이 시라타케
라고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는데 일본에서 "新(신)과 白(백)은 모두 “시라” 라고 발음하기 때문입니다.
또 근처에는 윤타리랜드 쓰시마 (湯多里ランド) 라고 있으니... 여행사 패키지 단체 관광객
들이 주로 이용하는 온천으로 해수온천 이라는데..... 온천후 피부가 미끌거리는
느낌이 좋다고 하며 대형 식당도 있다고 하고 그 외에도 스시마 그랜드호텔 정면에
다마노유(眞珠の湯) 온천 과 알칼리 온천으로 요금이 저렴한 파루 온천 도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