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평양교구 안주본당
본당 설립 연도 :1930년
소재지 옛 지명 :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북문리
현 지명 :평안남도 안주시 등방산동
마지막 주임 : 이경호(1948.9~1950.6)
묘향산에서 발원한 청천강은 평안남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든다. 청천강 하류를 따라 좁은 유역 평야가 발달했는데, 이 평야가 안주평야다.
곧잘 수해도 발생했지만, 얼마나 풍요로웠는지 ‘안주’(安州)라는 지명이 붙었다. 청천강 사이로 남쪽은 청남, 북쪽은 청북이라고 불렸는데, 청남이 안주, 청북이 박천을 가리킨다.
1866년 병인년 박해 당시 안주 태생인 김자당(안토니오)이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영세하고 입교한 뒤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살다가
1866년 9월 평양 관아에서 나온 포졸에게 체포돼 양화진, 곧 절두산으로 끌려가 60세를 일기로 참수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그 뒤로 안주 천주교회사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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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이 안주본당 사제관, 뒤쪽으로 6·25 전쟁으로 파괴되기 전 백상루가 보인다. 1977년 복원된 백상루는 북한의 국보 31호다. |
안주에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해진 건 1927년의 일이다. 함경북도 나남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이인근(타대오)이 안주읍으로 전임되면서부터로, 그의 전교와 함께 영유본당에서 전교사 박정걸(요셉)과 곽 안나가 파견돼 활동했다.
하지만 이미 1900년대 초 개신교가 진출해 한창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기에 교세는 크게 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안주의 발전 가능성에 주목한 평양지목구는 1930년에 안주본당을 설립하고 3년 뒤 성당을 신축했다.
1934년에는 빈민 가정의 자녀를 위한 성모학교를 세웠고, 1935년에는 성모병원을 설립해 복지사업을 펼쳐 교세가 크게 신장했다.
해마다 무료로 교육 혜택을 받는 아이들이 200여 명, 성모병원을 통해 치료를 받는 환자가 연인원 6000여 명이나 됐다. 이에 따라 1937년 무렵엔 본당 공동체의 교세가 1000명에 이르렀다.
1945년 4월 일제 압제에 시달리던 안주본당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분원이 본당에 설치되면서 전교에 큰 활력소가 됐고, 해방 뒤엔 우리말 공부 교실을 열어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다고 전해진다.
(40) 평양교구 정주본당
본당 설립 연도 : 1936년
소재지 옛 지명 : 평안북도 정주읍 성외동
현 지명 : 평안북도 정주시 성남동
마지막 주임 : 강영걸(1944.4~1944.11)
청천강 하류에 끝자락을 걸친 평북 정주는 경의선이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평양과 신의주의 중간 지점에 있다. 그랬기에 인근 평야와 산악지대에서 나오는 농산물과 임산물, 광산 자원의 집산지로 유명했다.
정주는 본래 천도교의 교세가 큰 지역이었지만 1928년 서울에서 이주해 온 임기수(가누토) 등이 복음을 전하면서 천주교 공동체가 만들어졌고,
박천공소 출신의 민 요세피나와 남편 유화봉, 안주본당에서 파견한 김 모니카 전교사의 활동으로 본당 설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7년 5월에 닷새 동안 정주에서 열린 농기구박람회 때는 성화전이 열리기도 했다. 수천 명이 동원된 박람회 행사에 성화전을 열어 천주교에 대한 인식을 높였는데, 길거리 선교에 진저리를 내던 정주 사람들에게 성화전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39년 들어 정주본당은 신자 수가 200명에 육박하고, 예비신자도 300명에 이르는 성장세를 보였다. 이에 정주역 앞에 세 들어 쓰던 성당을 새로 짓기로 하고, 읍내 높은 곳에 구매해 뒀던 땅에 공사비 1만 3000여 원을 들여 성당을 신축했다.
신심 강화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 1939년 2월엔 남녀 전교사와 신자들을 대상으로 묵상회를 개최, 신앙을 돈독하게 했다.
태평양전쟁이 벌어지면서 비현본당 공소로 격하됐다가 1944년 8개월간 강영걸 신부가 사목한 것을 마지막으로 침묵의 교회가 됐다.
오세택 기자 (평화신문)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매주 화요일 저녁 7시 명동대성당에서 북녘땅 57개 본당 중 두 곳씩 지향에 두고 미사를 봉헌합니다. 5월 3일은 평양교구 안주본당과 정주본당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