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들의 벗인가?
오랜 기다림과 안타까움 속에서 해를 넘긴 2010년 1월 9일 용산참사로 죽어간 영혼들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 망루에 올랐던 다섯 분의 시신이 냉동고에서 해방되어 부드러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유족들의 마음은 조금이나마 위로받고, 삶에 대한 희망의 한끝을 잡을 수 있었다.
1월 20일 새벽 참사 이후 284일 동안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단 건물 앞에서는 추모미사가 거행됐다. '문정현'이라는 한 분의 사제가 시작했으나, 곧 전국의 사제들이 이 미사에 참석해 가엾은 이들과 함께 했다. 사제들은 아예 남일당 건물 앞에 천막을 짓고 205일 동안 여기에 머물며 기도했다. 참사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죽은 이들을 장례 치르게 해달라고 세상에, 그리고 하늘에 빌었다.
비가 억수로 쏟아부었던 날에도, 쨍쨍한 햇살에 목이 타들어가는 날에도, 강풍이 불어 추운 겨울날에도 비닐 한 장에 의지해서 미사를 올렸다. 그러나 사제뿐이 아니었다. 그 자리엔 이름도 나지 않은 숱한 신자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미사에 참석하며 고인들에게 초를 봉헌했다. 천주교인권위원회나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서 날마다 날아오는 용산소식에는 날마다 참석한 사제들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었지만, 평신도들은 그 안에 이름이 박히지 않아도 좋았다. 가난한 이들이 고난받는 현장에서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와 있어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반에 서울대교구 사회사목 담당인 김운회 주교가 용산현장에 방문해 분향을 했다. 막판에는 성탄을 앞두고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인 최기산 주교가 현장에 방문해 성명서를 발표했다. 물론 이것도 고마운 일이지만, 그러나 고위성직자들은 천막에 머물지 않았다. 입김 호호 불어가며 밤 새워 가며 천막에서 다른 사제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단 한 차례의 미사도 집전하지 않았다. 이렇게 용산현장을 방문한 것은 고위성직자들 뿐이 아니다. 정운찬 총리도 용산에 와서 분향하고 유족들을 만났다.
그리고 용산지역이 관할구역에 들어와 있는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은 단 한 차례도 용산을 방문하지 않았다. 명동에서 용산까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그만큼 멀었던 것일까? 물론 교구 사회사목 담당 주교가 다녀갔으니, 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 신부가 내내 용산에 남아 있었으니 교구로서는 할 일을 다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들이 교구장을 대리한다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실제로 이강서 신부의 경우엔 헌신적으로 용산에 투신했으며, 빈민사목위원회는 전폭적으로 유족들을 돌보아주었다.
그러나 여기서 묻고자 하는 것은 사목자(주교)의 형식을 넘어서는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크기'에 대한 것이다. 마음이 앞서면 행동은 뒤따르기 마련이다. 용산참사의 원인이 공권력에게 있느냐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에게 있느냐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그 진상규명이야 요지부동인 검찰과 경찰의 몫이고, 사목자는 무릇 '사람'에게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아파하는 이들의 손을 직접 잡아주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들의 벗이 되어줬는지 묻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용산에서 봉헌된 미사 때마다 반복적으로 인용하는 성경 말씀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입으로만 돈으로만 강도 당한 사람을 돕지 않았다. 가던 길 멈추고 직접 상처를 싸매어 주고 나귀에 태워 묵을 곳으로 안내하고 후일까지 돌보아줄 것을 당부했다. 중요한 것은 직접 보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에서는 첫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고 전한다. 그들이 처음 예수를 따라가자, 예수께서 물었다. "무엇을 찾느냐?" 그때에 그 제자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그분의 처소를 물었다. 그때에 예수께서 하신 말은 "와서 보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지' 먼저 와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용산에서 화상(火傷)당한 채 계셨고, 화상당한 남일당 건물과 유족의 얼굴을 보아야 그분 예수의 측은지심이 가진 정체를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회의 정일우 신부를 찾았다고 한다. 정일부 신부는 '가난한 이들의 대부'라는 제정구 씨와 더불어 철거민들과 함께 지내며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그래서 성탄절 즈음이면 김 추기경은 양평동 철거민촌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서울대교구장을 그만두고나서 소록도 나환자촌을 방문했을 때, 전종선 사목회장이 "멀고 험한 이곳을 4번 이나 찾아와 줘서 고맙다"고 말하자, 추기경은 "고맙다니요. 4번이 아니라 40번을 찾아와도 부족했을 겁니다.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하고 답했다.
교황이 되자마자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소집했던 요한 23세 교황은 평생을 변방에서 고생하다가 1953년 베네치아교구 교구장이 되자, 취임한 지 며칠 되지 않아 공장지대에 찾아가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했다. 이듬해 부활절에도 항구의 노동자들과 미사를 드렸다. 교황이 되고 나서는, 성탄절에 밤비노 예수 아동병원을 찾았으며, 이튿날 레지나 첼리 감옥을 방문해서 "여러분이 내게 올 수 없어서 내가 여러분에게 왔습니다"하고 인사했다. 1,200명이나 되는 죄수들에게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나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서류상으로 측근으로부터 보고받는 것만으로는 가난하고 억울한 이들의 마음이 전해지지 않는다. 직접 무릎을 맞대고 보아야 한다.
용산참사 문제가 논란거리가 되던 지난 성탄절 즈음, 가톨릭교회의 각 교구장들이 발표한 성탄메시지 중에서 제주교구만 빼면 그 어디서도 용산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대전교구만은 세종시 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현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제주교구의 강우일 주교는 메시지의 대부분을 용산문제에 할애하고 있으며, 제주 해군기지 유치 문제를 덧붙였다.
강우일 주교는 "용산참사는 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수십 년 생업을 일구며 살아온 이들을 단 하루 만에 공권력을 동원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이며 "용산만이 아니라 전국 이백여 곳에서 주민들의 기본적인 생존권과 공동체의 이익은 외면한 채 오로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재개발 사업들이 무분별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알다시피 용산 유가족들을 제일 먼저 만나서 위로금까지 전달해 준 분이 강우일 주교다.
장례 이후, 종교인들 진정성 다시 가늠해 봐야 한다
지난 해 12월 30일 '극적으로' 서울시와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와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례비와 보상금 문제가 타결되었고, 정운찬 총리의 '유감' 표명으로 사태는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정작 진상규명의 과제는 한치도 진전되지 않았다. 3,000 쪽 수사기록은 공개되지 않았고, 고인들은 여전히 '도심 테러리스트'라는 억울한 너울을 쓰고 있다. 수배자와 구속자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일년 가까이 끌어온 이 사태로 유족들은 지칠대로 지쳤고,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이제는 고인들을 하느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래서 장례 결정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지난 1월 6일 마지막으로 열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용산 미사에서, 사제단은 이것으로 천막기도회와 매일미사를 마친다고 했다. 그럼에도 아직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았으니 "계속 기도해 줄 것"을 참석자들에게 당부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라는 말일까? 각자 일상으로 돌아가서 진상규명이 되기를 기도하면 문제가 마무리될지 두고 볼 일이다. 후속 대안 없이 마치는 미사를 지켜보면서 고맙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용산참사 문제를 해를 넘기기 전에 매듭짓고자 하는 뜻은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와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유족들 모두의 바람이었고, 다른 뜻에서 서울시 역시 연내 처리를 원했다. 지난 2009년 한해는 용산참사와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또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으로 내내 초상집 분위기였다. 누구라도 말그대로 '새해'를 맞이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용산참사 연내 해결을 이끌어내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종교인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이 종교인들의 모임을 이끌어낸 것은 사실상 정진석 추기경이었다고 한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사전에 서울시와 서울대교구 관리국장 조학문 신부 사이에 교감이 먼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정진석 추기경의 재가 아래 천주교회에서 주선한 종교인 모임이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열리고, 종교인들의 권유로 용산문제 타결을 위한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런데 교구 관리국이란 무엇하는 곳인가? 서울대교구 홈페이지에 보면, "관리국은 교구 재단 관리, 산하 기관 재산 관리의 감독, 교구 예산·결산 집행, 산하 단체 예산·결산 조정과 파악, 법인 관계에 해당되는 세무 업무를 수행합니다. 교구청 운영 유지, 중요한 재산 대장과 증빙 문서의 보존 관리, 건축 관계 및 토지 매매 등의 관련 업무, 교구 묘지 관리, 성지 보존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한다고 나와 있다. 용산참사를 하등 관련이 없는 부서장이 처음에 중재에 나섰다는 점에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느껴진다. 서울대교구 입장에서는 명동성당 개발사업 등 서울시와 연루된 사업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CBS 등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번 협상 타결에 한국교회봉사단 김종생 사무처장을 비롯한 종교계 3인이 중재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었으며, 서울시와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인명진 목사 등 정부와 중재단을 연결해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명진 목사는 전 한나라당 윤리위원장 출신이며, 종교인들이 서울시의 자문위원단을 구성해 지원 활동을 벌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 이번에 협상을 도운 종교인들은 용산참사범국민대책위원회나 남일당에서 천막기도회를 이어온 사제들과는 사실상 상관없이 서울시의 요구에 따라 협상을 추진해 온 셈이다. 게다가 여기에 참가한 김종생 사무처장이나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장인 김용태 신부나 용산참사 현장에 머무는 이들과 얼마나 교감을 나누고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지난 2009년 12월 8일 정진석 추기경은 명동성당 내 집무실에서 저서 <햇빛 쏟아지는 언덕에서> 출간에 관련된 기자간담회 도중 용산참사에 대한 질문을 받고 “유족들이 아직 장례도 못 치르고 있어 안타깝다. 매일 잊지 않고 있다. 잊을 수가 없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속히 장례식을 올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진상규명이다. 누군가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진실이 드러나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산에서는 30일 이후 누구나 이번 협상을 '반쪽 타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한쪽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었지만, 다른 한쪽 가슴은 여전히 아픈 게 유가족들이다. 결국 중재에 나섰던 종교인들이나 교회, 정진석 추기경이 장례 이후에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그 진정성이 가름될 것이다. 올 6월에 있을 서울시장 선거에 다시 출마하겠다는 오세훈 시장의 걸림돌을 없애준 데 지나지 않을 수도 있고, 정말 용산참사로 고통받는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에 대한 연민 어린 연대감을 보여줄 수도 있다.
우리가 교회다...라고 조심스레 불러본다
한편 이번 용산참사를 계기로 지난 284일 동안 남일당 앞에서 열린 미사를 바라보면서, 새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교회의 탄생이었다. 못난 국민들이 못난 대통령을 세우고 못난 평신도들이 못난 사제와 주교를 만드는 것처럼, 뜻있는 국민들이 제대로 된 지도자를 택하고, 의식있는 평신도들이 새로운 교회를 건설한다. 미사 참석자들은 아마 서로에게 놀랐을 것이다. 30년 전 광주가 한때 시민들에 의해 해방구가 되었듯이, 지난 일년 동안 남일당 건물 주변은 해방된 교회로 기능했다. 주교가 없었지만, 사제가 있었고, 사제가 없더라도 평신도들이 기도회를 계속했을 것이다.
교구의 장벽을 넘어, 제도권의 허위의식을 넘어, 사제-수도자-평신도의 위계질서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게 없어도 교회는 가능하다는 믿음, "내 이름으로 둘이나 셋이 있는 곳에 나도 그 가운데 있겠다"던 예수의 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복음적인가?"였다. 그분이 아파하시는 통점(痛點)이 어느 구석인지, 그분이 사랑하시던 이들이 어떤 이들인지 몸으로 겪을 수 있는 기회였다.
용산문제가 타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미사 참석자들은 기뻐하면서도 못내 아쉬워 했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나죠?"하는 말 속에 그 의미가 담겨 있다. 그들은 본당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소통과 친교의 경험을 용산에서 맛보았기 때문이다. 해방하시는 하느님,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자매형제로 엮어주시는 분을 그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말과 더불어, '우리가 교회'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발음해 본다. 우리가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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