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량리 점촌석입니다
베이비오일을 발랐더니 칠흑같이 돌이 어두워졌습니다. 비스듬한 불빛에 돌갗의 단단한 패임은 윤슬처럼 반짝이며, 때로는 칠흑처럼 어두워지기도 하는 밤하늘의 별보다 더 검게 빛납니다.
오늘도 하루 만 보 걷기가 끝났습니다.
겨울임에도 오늘은 선선하고 하늘도 맑고 바람도 잔잔했기에 걷는 내내 편안했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지만, 도시의 밤하늘은 여전히 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눈에 띄는 몇몇 별들은 있지요.
그 별들을 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누군가는 그 별을 삼태성이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오리온자리로 보겠지요.
같은 별일지라도 누가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름과 의미와 맥락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밤하늘의 별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고, 아예 별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도 있겠지요.
혹은 시력이 나빠 별을 볼 수 없는 사람도, 백야처럼 별이 사라진 하늘 아래 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각자의 별, 각자의 시선이 얽혀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또 얼마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별자리일까요.
각자의 우주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거리가 얼마나 먼지 가늠조차 어렵습니다.
그렇게 아득한 생각을 하다 보면 우리 삶이 한낱 일장춘몽인지, 아니면 배움의 학교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리면, 작년과 올해 내가 몰입했던 많은 일들이 헛된 기억의 조각인지, 아니면 배움과 익힘의 한 페이지인지 알 수 없습니다.
생활 속 에피소드들이 단순히 내용의 반복일 뿐인지, 혹은 어떤 맥락의 종이 넘김인지도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본 유튜브의 짧은 영상이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차를 몰고 가다가 자기 차보다 빨리 달리는 닭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닭을 따라 속도를 내었는데도 닭은 여전히 그를 앞질렀다고 하더군요.
신기한 마음에 그 닭의 주인을 찾아가 닭을 사고 싶다고 했답니다.
값을 제시하며 흥정을 했지만, 주인은 닭을 팔 수 없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유를 묻자, 주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잡히지도 않는 닭인데, 어떻게 팔겠어요?"
이 영상을 보고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혹시 잡히지 않는 빠른 닭에 마음을 빼앗겨 살아온 것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 닭을 발견했다는 사실도 신기하지만, 잡아먹지도 길들이지도 못할 닭을 잡으려 애쓴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이었을지요.
그 닭의 주인이 정말 닭의 주인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닭이 나에게 잡히는 순간 그 닭은 이미 그 닭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절벽을 걸어가는 길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절벽 위를 걸어갈 때, 사실 내 발 아래 닿는 땅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절벽 바깥에는 내가 밟지 않을 여분의 길이 늘어져 있습니다.
그것들은 왜 존재하는 걸까요.
익히 알듯이 선택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일까요.
그래서 내가 자유의지로 디딜 돌들을 고르며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요.
그러나 지나고 보면, 그 선택들이 내 의지였는지 아니면 원래 정해진 길이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게 예정된 길과 선택의 길이 얽히면서,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이 하나둘 추가됩니다.
삶이란 결국 그렇게 흘러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지나온 절벽의 여분 길을 되돌아보며 그것이 필요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지나가다 놓치고 간 흔적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길의 존재가 가르침을 주는 것인지, 아니면 길을 걸으며 찾아오는 가능성의 배신으로 얻는 깨달음인지도 모호합니다.
결국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그 길이 필요했는지 혹은 불필요했는지를 고민하지만, 어쩌면 그런 고민조차 공허할 뿐입니다.
그렇게 절벽길을 걸으며 남은 것은 줄거리뿐입니다.
그 줄거리 자체가 배움의 교과서였을까요?
아니면 발걸음의 선택과 후회가 가르침의 시험지였을까요?
물론 배움과 가르침과는 무관한 우연의 조각들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그리고 그렇게 길들여지는 것이 삶이라면, 이 생각들이 또한 공허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 겨울 한복판에서, 내가 지나온 길을 곱씹으며 생각을 마칩니다.
지나온 모든 것이 헛된 일일 수도, 혹은 배움의 과정이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내 삶의 일부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몇억 년을 건너왔든 저 별빛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고, 몇 생애를 건너왔든 나는 이 찰나와 조우합니다.
이 영원 아래 순간은 서로를 품고 확장되면서, 결국 나에게 수렴됩니다.
어쩌면 삶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찾아 헤매는 과정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별들은 정해진 자리에 머물며 빛을 내지만, 우리는 길 위에서 수많은 갈림길을 지나며 끊임없이 삶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는 답을 찾아 나서지만, 때로는 그 답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삶이란 선택의 연속이면서도, 때때로 피할 수 없는 길의 연장선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정해진 길을 걷든, 새 길을 만들어 가든,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길을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별빛이 수억 년을 건너와 지금 나의 눈에 담기듯,
나 또한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며 누군가의 삶 속에 흔적을 남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삶의 의미란, 바로 그렇게 서로의 길이 엮이고 스쳐 지나가는 순간순간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이 길 위에서 나의 발걸음을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