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략장군 행용양위 부사과 겸 친군영 별군직 장흥위공 휘 계충 지 묘갈명...
최근 발견한 모암재공(휘 계철, 31세, 행원문중 괴봉공파)의 문집인 모암집 뒷편에 수록된 운수공(휘 계충)의 묘갈명을 옮깁니다.족보의 지장록에도 수록되지 않은 묘갈명입니다.혹여 후손이나 연구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옮기는 것이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복사가 잘 안된 부분은 장흥의 서예가 치인 이봉준선생이 필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계충 (諱 啓忠 31세, 괴봉공파 1853~1931) : 자(字)는 도선(道善), 호(號)는 운수(雲水)이다. 증통정부호군(贈通政副護軍) 행계공(諱 樟)과 淑夫人 인동張氏 사이에서 四子 중, 三子로 태어났다. 1887년 무과 급제(고종(高宗) 24년(1887) 정해(丁亥) 정시2(庭試2) 병과(丙科) 306위)하여 1888년 월선천(越宣薦)하고 1889년 효력부위 수문장(効力副尉 守門將), 1891년 어모장군 순무영별군관(禦侮將軍巡撫營別軍官), 1892년 선략장군 행용양위부사과(宣略將軍行龍驤衛副司果), 1895년 절충장군 행친군별군직(折衝將軍行親軍別軍職) 등을 역임했다. 배(配)는 淑夫人 장흥 馬氏, 淑夫人 해남 尹氏이며, 묘소(墓所)는 행원 牛岩山帽岩內艮坐이다.
묘갈의 찬은 족질인 월남공 (휘 승량 32세 괴봉공파 1884~1963)이 하였습니다.
월남공은 송사 기우만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아들 춘포공(33세 휘 재환)도 한학에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했습니다.
찬은 월남공이 돌아가시기(1963년) 3개월전에 쓰신 것으로 보입니다.
월남공의 후손으로 CJ대한통운에서 상무를 지낸 위상섭 종친이 증손이 됩니다.
재치
1887 고종 25년, 한량위계충무과병과제삼백육인급제출신자
敎旨
閑良魏啓忠武科丙科
第三百六人及第出身者
光緖十二年十二月 日[印]
●내용 및 특징
1887년(고종 25) 12월에 高宗이 武科丙科第三百六人及第出身者 魏啓忠에게 발급한 합격증서(證書)이다. 이 증서는 王의 명령으로 발급되었기 때문에 교지(敎旨)라고 하며 합격증서가 붉은 바탕이었기 때문에 일명(一名) 홍패(紅牌)라고도 불리운다.
☞ 본 교지에서 한량(閑良)은 무예(武藝)를 잘하여 무과(武科)에 응시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한국인물정보에서는 장흥위씨 대종회 홈피에 게재된 본 "홍패" 등 교지(4매)와 公에 대한 기록을 참고 및 근거하여 2017년 10월 30일 무과급제 인물에 등록됨이 확인됩니다.^^
저희 조부님.증조부님의 족적을 파헤쳐주셔서 넘 감사드립니다.
근래 무과 인물 정보에 기록된 운수공(31세 계충)과 유사하게 웅천현감공(22세 정렬)께서도 방촌유물전시관 홍패 근거로 무과 급제 인물에서 수정 보완됨이 확인됩니다.
이러한 사례를 보면 선조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자료 홍보 등에서 후손들의 활동과 역활이 매우 중요합니다.^^
운수공(31세 계충)은 1916년 장흥위씨 4차 족보 병진보 간행시 춘헌공(계반 1848~ 1939)과 함께 도유사를 맡아 주관하였습니다.
월남공(32세 승량)은 1916년 병진보 간행시 젊은 연령(33세) 임에도 교정을 맡아 중요 문사에 참여하였습니다.^^
두 번째 사진 글씨는 프러스펜인 줄 알았는데, ... 만년필 글씨로 보입니다.
지장장록 1024p "통훈대부행보성군수공(25세 혁만)사실"은 종7대손 월남공(승량)이 근추지하다.
내용 중, 외직으로 정의현감을 나갔는데 흉년을 만나 읍민을 구활한 치적이 임금(숙종)에게 알려져 임금이 친필로서 포유하였고 상으로 말 한필을 내리셨으며 얼마 안되어 낙안과 보성군수로 임명되었다. 뒤에 해남, 진도, 대정, 광양 등 현감을 역임하였는데 부임하는 곳마다 모두 비가 세워져 있다.
<면주·지장록 등 선대 기록과 승정원일기, 교지 비교 추정>
장흥위문 내 관직을 역임한 선조의 행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동보 면주, 지장록, 충의록 등 각종 기록에서는 관직 제수, 역임지역, 내용 등 여러 기록에서 승정원일기와 차이점이 확인된다.
1)정의현감 이전에 낙안군수를 제수(除授)함이 확인된다. 지장록 내용의 외직의 해남현감·진도군수·대정현감·광양현감 제수 사실이 승정원일기에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또한 현 해당 시•군(문화원)에 의뢰해서 역대 군수(현감) 인명 등 역임 자료도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조선시대에서는 외관직 제수시 향피(鄕避)제를 원칙으로 하였다. 해남현감은 1675년에 公의 선친(先親) 해남현감공(24세 天相, 1635~ 1683)이 역임을 하여 당대 시대 상황에 의하면 부자(父子)를 동일 관직에 제수할 수 없었다고 사료됩니다.
진도군수 역임 관련된 기록으로는 1711년(숙종 37) 2월 19일 진도군에서 군기(軍器)를 점열(點閱)할 때 화약이 터져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전라도순무사 권상유의 장계에 대한 전교 내용 중, “巡營軍官前郡守 魏赫萬”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진도군수 역임 사실이 아니고 1710년 12월 21일 낙안군수에 제수한 사실에 의거 前 郡守로 기록함이 확인됩니다.
2)1710년(숙종36) 12월 21일 낙안군수에 제수했습니다. 1711년(숙종37) 1월 초5일에 全羅道觀察使가 軍官 魏赫萬에게 발급한 현존한 전령에 의하면 새로 제수된 낙안군수(樂安郡守)는 조사(朝辭)하지 말고 부임(赴任)하라는 내용의 전령이 현존하여 이를 근거하면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음이 확인되며, 순천시의 역대 낙안군수 자료에서도 인명이 없습니다.
3)승정원일기에는 1725년(영조1) 12월 4일 보성군수 관직에 제수했습니다. 1726년(영조2) 1월 26일 신병으로 부임하기 어려운 魏赫萬의 罷黜 등을 청하는 吏批의 啓가 확인되어 취임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며, 보성군(문화원) 자료에서도 역대 군수 인명에 자료가 없음이 확인되었습니다.
4)승정원일기 근거 1705년(숙종 31) 2월 28일 임치첨사에 제수가 확인되며, 무안군청(문화원)에는 역대 임치첨사에 대한 상세한 기록 자료가 없어 재임기간을 알 수 없으나, 해제면 임수리에 공의 선정비 등 5기가 세워져 있습니다.
5)1716년(숙종42) 1월 23일 정의현감에 제수가 확인되며, 2002년 제주문화원에서 간행한 〃濟州史人名事典〃408p에 公은 정의현감에 1716년(숙종42) 3월부터 1718년 4월까지 역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서귀포 표선면에 선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근거로 보성군수공에 대한 지장록 내용 중,
해남현감·진도군수·대정현감·광양현감 등 역임하였다는 기록은 오기로 판단됩니다.
특히 승정원일기에 관직 제수사실이 없고, 현재의 해남군청, 진도문화원, 제주도청, 광양시청에 현감(군수) 역임 사실을 의뢰하여 확인하였으나, 4곳 모두 간행한 자료에서 공의 인명이 없었습니다.^^
묘갈명은 흔히 묘갈명을 지었던 분의 문집에 실리지 않나요?
야운 위이환
그래서...이상합니다...???
재치(財痴) 위현동 님.
짐작컨대 치인 서예가가 굳이 일부만 필사를 할 리가 있습니까.
문집 뒤에 남긴 묘갈명이니까 합리적인 사고이면 이는 후손이 썼을 것입니다.
위상섭 님
중현아우,
뼈대있는 가문의 후예네요.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문집은 여러 글을 남겨(유고) 후손이 간행하는 사례가 대부분 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의 글이 적거나, 후손이 문집을 간행하지 않은 경우 등등에서 가까운 근친 혈족의 뛰어난 문장의 글에 포함되어 있는 사례도 있습니다.
이러한 대표적 사례가 금당별곡의 작가는 수우옹공(24세 세직) 이었으나, 公은 유고문집이 없습니다. 이 금당별곡 기행가사가 삼종제의 삼족당공(24세 세보)의 유고집에 남겨져 있어 후손들과 역사학계에서는 기행가사 금당별곡을 삼족당공 작품으로 혼동하였던 사례가 있었습니다..참고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