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음
손기만(2021. 9. 신인상. 부산)
새벽의 먼동이 트기도 전에 어머니는 하룻길 장정(長征)을 시작했다. 이십 리 떨어진 과수원에 가서 두 접이 넘는 사과 함지를 머리에 이고 다시 백릿길 비포장도로를 걸어 시골장에 팔고 오셨다. 컴컴한 밤이 되어야 돌아오는 어머니의 삶은 다섯 자식의 교육비를 마련하려는 투쟁 그 자체였다. 어머니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집안 살림은 늘 쪼들렸다.
무엇을 이루려면 노력만으로 부족하다. 더욱이 궁지에서 벗어나려면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는 생각을 바꾸고 사는 방식을 바꾼다. 시골에서는 한계가 있다. 철이 들자 나는 홀로서기를 선언하고 서울로 가기로 했다.
“반드시 너는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초행길 열차를 기다리는 나의 손을 잡고 어머니는 서울만 가면 새로운 길이 마련될 것으로 생각하고 격려해 주었다. 어쩜 속으로는 반신반의하였을지도 모른다.
서울에 막상 왔지만, 실오라기 같은 끈 하나 없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싶지 않아 책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온 고등학생에게 부닥친 현실은 의식주와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한 돈을 버는 것이었다. 돈을 버는 일은 언제 어디서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굴하지 않게 해 준 것은 엄마가 내게 남긴 ‘반드시’라는 세 글자였다.
을지로 3가에 지금은 사라진 명보극장과 스카라극장이 있었다. 극장가는 언제나 상인들과 고객들로 북적거렸다. 장사에 대한 기초 지식도 없으면서 무작정 친구가 하는 것을 보고 손수레 위에 좌판대를 깔았다. 극장 손님들이 좋아하는 땅콩 장사를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늦가을 어느 날 해 질 무렵, 먹구름이 몰려들면서 주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소낙비가 내릴 것만 같다. 노점상을 하던 동수가 소나기가 올 테니 우산 팔자며 큰 소리로 말했다. 수레 위의 물건을 비닐로 덮고 우산 도매집으로 뛰어갔다. 한 뭉치의 우산을 메고 버스정류장 부근으로 오니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사람들은 상점 처마 밑과 건물 입구에서 모여 있었다. 동수는 “우산이요!”하고 큰소리로 외쳤고 사람들은 다투어 우산을 샀다. 나는 우산 뭉치를 안고 뛰어다녔지만 내 우산을 사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산이요!’ 하고 소리를 질러야 할 텐데 우산을 안고 다니기만 한 것이다.
말은 표현이다. 마음이 간절하여도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소리를 내려고 용을 쓸수록 가슴이 벌떡이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내면을 조이고 있는 무엇이 입을 틀어막는다. 하려는 말을 뱉으려 할수록 머리까지 지끈거리고 가슴이 터질 듯해진다.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런 경우를 한두 번은 겪는다.
어린 시절부터 환경적인 영향으로 좀처럼 말을 하지 않는 ‘선택적 함구증’이 내게 있었다.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 부딪히면 몸의 근육이 경직되어버린다. 말이 나오지 못하니 불공평한 대우를 받거나 분노가 일어도 항의 한번 하지 못했다. 성장하면서 더 소심해졌다. 절박한 상황인데도 비 오듯 땀이 흐를 뿐, 입이 열리지 못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마음이 허사가 되었다. 해장국 한 그릇과 군고구마 한 개로 하루를 때웠지만 등록금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다. 절박함이 부족한가? 대담성이 없는 걸까? 큰소리로 외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팔지 못한 우산을 안고 골목길 어귀로 들어서는데 가슴만 들썩일 뿐 눈앞이 가려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도시의 골목은 어둑어둑했다.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번개가 칠 때마다 골목은 밝았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눈물이 났고 좌절감에 목놓아 터뜨린 울음은 우르릉 쾅! 쾅! 연이어 치는 천둥소리에 묻혔다. 처마 끝 하나 없는 도시의 골목길엔 빗물이 넘쳐흘렀다. 우산 다발을 옆구리에 껴안고 인적 없는 골목길을 마구 뛰었다.
“용기를 내라 용기를 내어라.”
어둑한 골목길을 뛰어가는 나의 귀를 때리는 천둥이 엄마의 목소리로 들렸다. 하늘을 향해 목이 터지도록 “엄마! 엄마!”하고 외쳤다. 골목을 벗어날 즈음 ‘엄마’라는 부르짖음은 어느새 “우산이요! 우산이요!”하고 있었다. 골목 끝자락에서 뛰어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사슬에 묶인 죄인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때 생존의 소리가 이것일까. 오래도록 움츠린 가슴에 묻혀있던 핵이 폭발했다.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온갖 노력으로 어떤 경지에 오른 것은 득도라고 한다. 고난과 고통을 죽도록 겪으면 깨달음이 온다. 달(達)과 통(通)이다. 언어장애인이 말문을 트고 난청 장애인이 듣게 된다면 그들에게는 기적에 가깝다. 정신적 해탈만이 득도가 아니라 막힌 소리를 트는 것도 득음이고 득청(得聽)이라 할 수 있다. 마침내 ‘선택적 함구증’을 극복하고 ‘우산이요.’라는 넉 자를 소리 낼 수 있다는 건 내 삶에서 가장 큰 변화이다. 내가 소리를 얻었다. 드디어 나에게 소리의 봇물이 터졌다.
을지로 3가 버스정류장을 향해 뛰었다. “우산이요! 우산 사세요!”라고 어설프지만 당차게 외쳤다. 사람들 앞에서 내 입으로 이렇게 큰소리로 외칠 수 있다니…….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우산을 사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인지 구름은 소낙비를 몰고 동대문 너머 청량리 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길바닥에 우산 다발을 깔고 앉아 멀어져가는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비를 피해있던 사람들은 하나둘 버스를 타고 떠났다. 주위를 돌아보니 비에 젖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래도 편안했다. ‘반드시’와 ‘우산이요’란 일곱 글자를 곱씹는 나의 축축한 등에서는 뜨거운 수증기가 한동안 피어올랐다.
[당선 소감]
바쁜 걸음을 걷는 사람에겐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지난 길보다 앞길이 더 의미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걸음을 잠시 멈추고 온 길을 돌아보았다. 초라하고 가련한 소년이 다가왔다. 왜 이토록 가슴이 아려올까. 나는 지금 그 아이를 따라가고 있다. 나와 독대할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면 좋으련만….
삶의 애환을 웬만큼 축적해야 비로소 인간다운 모습을 갖출 수 있다. 격변의 시대에 생존과 꿈을 향한 갈등에 몸부림치던 소년이 청년이 되고 다시 시니어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난날을 회상하며 쓴 글이 실의에 빠진 이들의 마음에 위안과 용기를 줄 수 있으면 한다.
좌절의 위험이 늘 내 곁을 맴돌았지만, 결코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삶의 투쟁이고 개척의 길이어서다. 내면에 숨어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또 다른 나를 만들고 싶다. 부족한 저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주신 교수님과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첫댓글 손기만 선생님.
2021년 9월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과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수필을 쓰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오래도록 움츠린 가슴에 묻혀있던 핵이 폭발했던 득음의 순간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등단작품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좋은글로 오래오래 만나뵙기를 소망합니다.^^
손기만 선생님
이곳에서 뵙네요. 등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손기만 선생님, 안녕하세요. 축하드립니다.
제가 득음하는 것처럼 그 시절 그 아이를 응원하게 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손기만 선생님.
권위있는 수필전문지 <수필과비평> 9월호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등단작품 <득음>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건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