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자승의 재치가 빛나는 울산바위 전설
울산바위가 울산에서 왔다는 전설이 있자 조선왕조 때 한참 유생들의 기세가 등등하던 어느 때
울산부사가 설악산에 탐승을 왔다가 이곳에서 울산바위의 전설을 듣고 승려들을 골탕먹여 치부(致富)해 볼 꾀를 냈다.
부사는 신흥사에 들러 주지를 불러 "너는 어찌하여 내 고을에 있던 울산바위가 너의 사찰림에 와 있는데도
지세(地稅)를 이제까지 물지 않느냐? 몇해를 기다려도 지세를 가지고 오는 낌새가 없기에 오늘은 직접 지세를 받으러 왔다"고 호통을 쳤다.
이에 유생들 횡포에 기가 죽어 있던 신흥사 주지는 그해부터 울산부사에게 울산바위의 지세를 물기로 그 자리에서 승낙하고 말았다.
그해부터 막대한 지세를 물다보니 신흥사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으며, 주지승의 근심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갔다.
주지는 막대한 지세에 근심만 늘어나는데, 어느날 주지승의 근심을 곁에서 지켜본 동자승이
"앞으로 울산에서 울산바위 지세를 받으러 오거든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라고 자신했다. 얼마 뒤 울산에서 사람이 오자 동자승은 "지금까지 억울한 지세를 물어왔으나
이미 문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금년부터는 물어줄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말했다.
동자승은 "울산바위에는 나무 한그루 풀한포기 나지 않아 우리에게는 큰 손해일뿐이니
울산바위를 도로 울산으로 옮겨 가든지 하라"고 말했다. 울산서 온 사람도 도리가 궁해 "네말대로 울산바위를 울산으로 옮겨 가겠는데,
타고 남은 재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묶어주면 바위를 옮기겠다"고 요구했다.
이에 동자승은 마을사람들과 절간 승려들을 동원해 며칠동안 새끼를 꼬게 해 울산바위를 칭칭감았다.
그리고 광솔에 불을 붙여 새끼를 다 태워버리니 울산바위는 재로된 새끼로 얽혀지게 되었다.
그리고는 울산사람에게 약속대로 했으니 바위를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자 울산사람은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금강산으로 가던 울산 바위
외설악 신흥사 앞에서 서북계곡으로 따라 올라가 내원암을 지나
산마루에 올라서면 엄청난 암산이 가로막고 있다. 이 산이 바로 울산바위이다.
조물주가 강원도 땅에다 천하의 명산 하나를 만들되 산봉의 수를 꼭 1만2천으로 할 계획을 세우고
각 지방의 산봉 중에서 준초하기로나 웅대하기로나 남의 눈을 끌만한 산에게 영을 내려
모월모일 모시를 기한으로 금강산쪽으로 오면 심사하여 합격한 산에 대하여는 용모에 알맞은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이에 전국 각처의 수많은 산들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모두 모여 들었다.
이때 경상도 울산(蔚山) 땅에 둘레가 10리나 되며 웅장한 바위인 '울산바위'도 금강산으로 떠나왔다.
그러나 태백산령을 걸어오는데 워낙 몸집이 육중해 빨리 걸을 수 없어 온힘을 다해 걸었으나
설악산 지금의 울산바위 있는 근처까지 와 기진맥진해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쉰 뒤에 다음날 다시 육중한 몸을 끌며, 금강산에 가서 조물주를 만나기로 했다.
다음날 울산바위가 금강산 어귀에 들어섰으나 이미 1만2천봉이 다 찼기 때문에 자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돌아가는 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면 주위의 웃음거리가 될 것으로 생각한 바위는 어젯밤 쉬던 곳을 생각했다.
어차피 금강산에서 단역을 하느니, 외설악에서 주역 노릇을 하자는 생각으로 울산바위는 현재 외설악 중턱에 자리잡았다.
이 전설과는 달리 울산(鬱山)바위의 울(鬱)은 울타리를 뜻하는 말로 울산(蔚山)의 울(蔚)자와는 완전히 글자가 다르다.
다만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울산에서 왔기에 울산바위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울산바위는 울타리처럼 생겼다는 의미에서
울산바위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현실성 있다.
옛날 조물주가 금강산의 경관을 빼어나게 빚으려고 전국의 잘 생긴 바위는
모두 금강산으로 모이도록 불렀는데, 경상도 울산에 있었던 큰 바위도 그 말을 듣고
금강산으로 길을 떠났으나 워낙 덩치가 크고 몸이 무거워 느림보 걸음걸이다 보니
설악산에 이르렀을 때 이미 금강산은 모두 다 만들어진 후라서 금강산에
가보지도 못하고 울산바위는 현재의 위치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는 얘기입니다.
한편 설악산 유람길에 나셨던 울산 고을의 원님이 울산바위에 얽힌 전설을 듣고
신흥사 스님에게 울산 바위는 울산 고을의 소유인데 신흥사가 차지했으니
그 대가로 세를 내라고 하여 해마다 세를 받아 갔는데 어느 해인가
신흥사의 동자승이 이제부터는 세를 줄 수 없으니 울산바위를 울산으로 도로 가져 가라고 한 바
이에 울산 고을 원님이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 주면 가져가겠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은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에 많이 자라고 있는 풀(草)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매 새끼를 불로 태워 재로 꼰 새끼로 바위를 묶었지만
울산 고을의 원님은 이 바위를 가져갈 수 없었으려니와
더 이상 울산바위에 대한 세를 내라는 말도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는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가 한자로 ‘묶을 속(束)’자와 ‘풀 초(草)’자를 써서
속초(束草)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오늘날 속초의 지명 유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이며
한편으로는 계조암에서 보면 울산바위가 마치 울(울타리 즉 담)같아 보이는데,.
그래서 '울같은 산바위'란 뜻으로 '울산바위'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는데,
뒤의 얘기가 더 신빙성이 있지만 재미는 앞의 얘기가 더 재미 있습니다.
그 바위가 실제로 울산에서 자기 혼자서 옮겨져 왔다는 얘기를
믿을 분은 한 사람도 없겠지만 좌우간 재미가 있잖아요?
**신화 전설 민담
-울산 바위(강원도 설악산) -
설악산에 가면 계조암이란 바위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울산바위도 볼 수 있는데 이에 얽힌 두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옛날 산신령이 금강산 봉우리를 만드려고 전국의 큰 바위들을 불러 들였다.
울산에서도 바위 하나가 길을떠났다. 그 바위는 설악산 쯤 와서는 그만 하룻밤을 편히 쉬었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길을 떠나려 했는데
금강산의 봉우리가 그날밤 자정으로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금강산 신령의 사자로부터 들었다. 울산바위는
울면서 너무나 안타까워 했다. 그걸 본 사자는 설악산도 금강산보다 못해도 절경이니 이곳에서 머무르라고 권했다.
그리하여 울산바위는 지금껏 설악산에 있고 바위 밑 흐르는 물은 그때의 일때문에 흐르는
눈물이라 한다.
**이 울산바위에 얽힌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때는 조선시대. 울산의 원님이 설악산에 있는 신흥사에 울산바위의 세금을 받으러 갔다.
울산에 있던 바위가 그곳에 있으니 세금을 내라는 명목이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요구였지만
당시 사회적 풍조가 억불숭유 인지라 하는 수 없이 신흥사는 매년 추수한 곡물을 거의 다 내야 했다.
그래서 점점 신흥사의 경제는 쓰러져갔다.
그런데 어느날 절의 동자승이 주지스님의 근심어린 모습을 보자 까닭을 물었으나 주지스님은 아무말도 않으려 했다.
그러다 동자승의 계속적인 물음에 모든 일을 들려주었다. 말을 들은 동자승은 다음번 세를 받으러 올땐 자기에게 맡겨 달라고 하였다.
그 해 ... 어김없이 울산원님이 찾아왔다.
"울산바위때문에 그자리에 곡식도 심지 못하고 있으니 피해를 입는 것은 우리요.
세금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우리란 말입니다. 세금을 내기 싫으면 당장 바위를 파 가시오.
" 동자승은 또박 또박 말하였다. 말은 맞았으나 지금껏 세를 받아간 원님은 체면상 그냥 갈 수 없었다.
"좋다. 다음에 가져 갈테니 옮길수 있도록 새끼를 태운 재로 바위를 묶어 놓아라.
" 그렇게 원님은 울산으로 돌아갔지만 신흥사엔 또다른 고민이 생겼다.
`새끼를 태운 재로 어떻게 바위를 묶는다 말인가!' 그러나 동자승은 흔들림 없이 바위로 갔다.
새끼줄을 소금에 절여 그것을 먼저 바위에 감았다. 그런후 기름을 묻혀 불을 붙였다.
소금에 절인 탓이라 것만 시커멓게 되고 속은 타지 않았다.
정말 재로 바위에 감은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약속된 날 원님은 자신있게 들어섰다. 하지만 바위에 가서 그 모습을 보고는 망신을 안은채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