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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홍(마지막 황태자 이석전하의 따님)
생년월일: 1974년 서울 출생 직업: 영화배우,CF모델
학력: 정신여고 – 한성대학교 가족관계: 1남 2녀중 장녀.
부친: 이석전하 모친: 독고정희님.
태어난 곳: 창덕궁 낙선재에서 출생.(2004년 30세까지 창덕궁에서 살았음)
본적: 서울특별시 경복궁.
증조할아버지: 고종황제.증조할머니: 명성황후.
작은할아버지: 순종황제.작은할머니: 순정효황후 윤비.
큰할아버지: 영친왕 전하.큰할머니: 이방자 여사. 친할아버지: 의친왕 전하.
대한제국 황족회가 최근 30대 황위 계승자로 의친왕의 둘째 딸 이해원 옹주를 추대해 화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고종의 증손녀가 연예
계에 데뷔에 20여명 생존한 것으로 알려진 황손들의 세상살이가 새삼 관심을 끌고 있다.
'경복궁'(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번지)을 본적으로 하는 화제의 주인공은 올해 서른 두 살 된 이홍. 몇 편의 영화에 단막 출연한 경험
이 있는 그는 지난 8월 초 KTF 광고를 촬영하면서 연예계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할아버지는 고종 황제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화군(의
친왕) 이강이고, 의친왕의 11번째 아들인 아버지는 이석 황실보존 국민연합회 회장이다. 아버지는 국민가요 '비둘기 집'으로 잘 알려
진 가수이자 군인, 수도승 등으로 인생역정을 겪었고, 지금은 전북 전주에 있는 한옥마을 승광재에서 생활하며 전주대, 전북대, 충청
대 등에서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경복궁 옆 궁정동 칠궁에서 태어난 이홍은 79년부터 10년간 미국에서 거주했으며 한성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뒤 잠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일본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꿈을 디자인하는 여자'라고 자신을 정의하는 이홍은 요즘 청소년캠프 운영이사로
있는 서울 금호동의 영광교회로 출근하고 있다. 연기와 함께 평생 사회 봉사활동을 병행하고 싶다고.
이홍이 세 살 때 아버지와 이혼한 어머니 독고정희씨는 미국으로 이민, 뉴욕에 살았다. 이홍은 덕분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외가에
서 할머니 손에 자랐다. 뉴욕의 백화점에 근무하던 어머니는 1년에 한번 정도 귀국하다 이홍이 중3 때 영구 귀국해 현재는 패션업계
에서 일하고 있다. 이홍의 어머니는 독고씨는 "네 안에 있는 능력은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다"면서 이홍이 어릴 적부터 미술, 피아
노, 수영, 승마, 리듬체조 등 10여 가지 예·체능을 배우게 했다.
이홍은 자신이 황실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알았다. 어느 날 어머니가 '중학교 때부터는 국사를 제대로 배울 테니
까 이제는 너도 알고 있어야 한다'면서 증조할아버지가 고종이시고, 아버지는 '사동궁 세자'로 불렸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었다고.
이홍은 큰어머니 이방자 여사(영친왕의 부인)가 지어준 돌 옷을 입고 자랐다.
아버지와 처음 만난 것은 대학입시를 6개월 앞둔 19세 고3 때.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이홍은 "반갑기도 했지만 상당히 혼란스러웠
다"고 당시 심경을 토로했다.
이홍은 의상 자문에 일부 참여한 MBC 드라마 '궁'을 시청하며 연기자의 꿈을 키웠다고. 지난 7월 5일엔 아버지와 함께 영화 '한반
도'의 VIP 시사회에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강우석 감독은 이홍에 훌륭한 영화배우가 되라는 덕담을 해주었다.
♣ 고종황제의 후손들 ♣
조선의 마지막 황제 고종에게는 정실부인 명성황후외 7명의 귀인과 4명의 후궁이 있었다.
그러니까 도합 1비 11첩을 두고 있었는데 여기서 소생한 자식들이 아들9명에 딸4명 모두 13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어려서 모두 죽고 아들3명과 딸1명만이 살아남았다. 명성황후 소생 아들(순종)과 귀인엄씨 소생 아들(영친
왕) 귀인장씨 소생 아들(의친왕)그리고 귀인양씨 소생 덕혜옹주가 있었어요.
고종은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등을 비밀리에 밀사(헤이그 밀사사건)로 파견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과 친일파의 압력으
로 강제로 퇴위를 당하게 되었으며 1907년 황태자로 있던 순종이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허울뿐인 순종은 황위에 올랐으나 원래 심신이 나약하고 자식도 무 하여 황태자를 이복동생인 영친왕에게 양위하여 재위기간
은 3년 밖게 되지 않았다.
고종의 셋째아들(원래는 7번째 아들) 영친왕은 황태자의 신분으로 일본에 인질로 끌려가 일본황실의 옹주 이방자(이 마사코)와 강제
로 결혼해 두아들을 낳았고 이들이 낳은 큰아들 이진은 어려서 고국방문길에 죽고 막내인 이구(마지막 황세손)는 우크라이나계 미
국여자 줄리아와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다.
이들과 달리 고종의 둘째 아들 의친왕 이강은 성격이 호탕하고 자유분방하여 1비 13첩을 두었으며 슬하에 12남9녀 라는 많은 자손을
남겼습니다.
의친왕의 장남 이건(용길)씨는 오래전에 일본으로 귀화해 일본인과 결혼하고 일본군대에서 근무하다 숨졌으며
둘째이우(성길)씨는 대원군의 손자 준용씨가 아들이 없자 대원군의 증손자로 양자 입적했으며 일본군에 입대하여 소좌계급까지 올랐
다가 19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때 사망했는데 그의 부인 박찬주씨는 귀국하여 운현궁에서 살다 1995년 사망했다.
토목공학과를 나온 둘째 이우씨의 아들 이청씨(63)는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1990년 귀국 어머니가 살던 운현궁을 서울시에 넘기고 현
재 북아현동에 살고 있다
3남 이방(흥길)씨는 어려서 병사했으며 4남 이창(창길)씨는 안평대군 가문의 양자로 입적했으나 포장마차 등 어렵게 살다가 사망하였
고 5남 이주(수길)씨는 농대를 졸업, 허정내각때 문화재 관리소장을 지냈으며 전주이씨 종약원 이사장을 지냈고 1982년 사망했다
그의 부인 김신덕씨(77)는 현재 개포동 1단지 시영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그리고 아들 한주씨는 일본에서 의류업을 하고있다 하
는군요
6남 이곤(명길)씨는 국회사무처 수위와 홍릉 관리인을 지내다 1984년 죽었으며 부인 황경생씨가 아들과함께 살고 있는데 아들 이준
씨(38)는 외판원을 하고있다고.
7남인 이광(형길)씨는 교사로 근무하다가 부산에서 물에빠져 익사하였고 8남인 이현(경길)씨는 아버지의 묘소인 화양리 의왕묘소 관
리인을 했으며 수년전 수원의 양로원에서 죽었는데 그는 덕수궁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1945년까지 덕수궁에 살았던 실질적인 덕수궁 주인이었어요.
9남 이갑(충길)씨는 1980년에 이민을 가서 미국 롱에서 잡화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 의친왕의 장례식 날 홀연히 나타나 의친
왕이 아버지라고 주장하였으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자
어머니 별명이 깨떡어미" 라고 주장하여 아버님의 본부인인 덕인당 김씨에게 자식으로 인정받기도 하였지요.
10남 이석(영길)씨는 외국어대 서반어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이석이란 이름으로 가수를 하다가 1989년 귀국해 강남의 카페에서 노
래를 부르며 동심참치 집을 운영하였으나 신통치 않아 지금은 황실문화재단 총재로 전주 한옥마을 승광재에 살고 있다
11남 이환(문길)씨는 1985년 미국으로 이민을가 미국 산호세에서 노동일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으며 12남 이정(정길)씨는 미국 로스
앤젤리스에서 자동차정비공으로 일하고 있는데 자식은 없다
딸들은 의친왕이 살아있을 때는 제대로 교육비를 지원받고 양반가문으로 시집을 갈수 있었으나 이들이 시집을 간 양반가문 또한 몰락
하여 어렵고 궁핍한 처지로 살았다고 합니다.
첫딸 이영(해완)씨는 결혼은 하였으나 자식없이 일찍 죽고 둘째 이진(해원)씨는 강원도 강릉의 둘째아들 집에 살다가 수년전 미국 LA
의 방송기술자로 일하는 큰아들한테 갔다 하는데 몇년 전 귀국하여 황실재산 찾기에 몰두한다 합니다.
3녀 이찬(해춘)씨는 운전기사로 일하는 서울 명일동의 아들집에 살고 있고 4녀 이숙(해숙)씨는 일찍 사망하였으며 5녀 이공(해경)씨
는 음악학과를 졸업한뒤 6.25직후 도미 미국 아시아도서관에서 일하며 독신으로 살고 있다
6녀 이장(희자)씨는 전남 순천에 거주하고 있으며 7녀 이용(해란)씨는 1982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현재 LA에서 봉제공장을 하고 있
다. 8녀 이현(해련)씨는 선릉관광묘원을 운영하는 남편과 분당에 살고있다 하는데 9녀 이민(창희)씨는 미국 산호세에서 어렵게 살고
있다. 특히 셋째 이찬(해춘)씨는 어머니가 궁녀출신으로 안암동에 살았는데 학교가 끝나면 매일 사동궁에 들어가 아버지 의왕께 문안
인사를 드렸으며 사동궁(현재 종로예식장터)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양관, 사랑방 등 10여개의 큰 집이 있었다.특히 큰어머니
인 덕인당 김씨는 작은부인이 7명씩이나 되는 집안을 잘 통솔했는데 일제시대 때만해도 부인과 자식마다 1인당 당시돈 1백원씩 계산
해 생활비를 대주었다고 하는군요
해춘씨는『왕손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우스운 일처럼 돼버렸지만 지금도 궁중사극에 나오는 의상들을 보면 옛날생각이나 TV를
끈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는 1931년에 옛 대마도(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와 강제로 정략 결혼을 하여 1932년
에 딸 소마사에(정혜)를 낳았으나 1955년에 이혼하였고 196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에서 거주하다가
1989년 사망했고.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다.
아무튼 많은 황손중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영친왕의 둘째아들 이구(마지막 황세손)씨와 의친왕의 열째아들 이석(영길)씨 이지요
영친왕과 이방자여사의 외아들인 이구씨는 일본에서 공대를 졸업한뒤 1963년 귀국 사업을 시작하다가 1979년 6월 부도가 나면서 일
본으로 되돌아갔으며 우크라이나계 미국여성인 쥴리아씨와 결혼했으나 어머니는 일본인이고 부인도 미국인이라는 종친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이혼했으며 현재 일본에서 특별한 직업없이 공대 동기생인 점성가 여자와 살고 있으나 그는 영친왕의 직계로 황실(마지
막 황세손)을 대표할수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의친왕의 열째아들 이석(영길)씨 황손이라 원래 호적이 없어서 6.25때 친척아저씨의 도움으로 호적을 만들어 배급을 타먹을
근거를 만들었다 하는데 그는 사동궁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아버지가 사동궁을 팔아 넘긴뒤 해방뒤부터는 아버지의 별장이 있던 혜
화동의 성낙원과 별궁(풍문여고 뒷편)을 거쳐 칠궁에서 살았다 하네요 1979년까지 칠궁에서 형님인 이현(경길)씨 내외와 함께 살았는
데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 그옆에 영빈관을 지으면서 개포동의 15평 아파트 한 채 씩을 받고 내쫒겼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석(영길)씨는 생활고로 인해 대학 재학중에도 DJ일을 보았고 가수의 길을 걷게 되는데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워
커힐 호텔에서 밤무대 가수로 일하기도 했지요 이후 방송 MC와 건전가요 가수로서 계속 활동 하면서 입지를 굳혔으나 이때 왕족이
광대를 해서 돈을 번다고 집안 어른들에게 불려가 혼지검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나 홀로 분연히 일어나 월남 전쟁에도 참전했고 "비둘기 집"이라는 건전가요를 불러 유명해졌으며 첫째부인 독고정희와의
사이에서 첫딸 이홍이 태어났고 둘째부인 김진옥에게서 둘째딸 이진이 태어났으며 큰딸 이홍은 미국에서 탈랜트를 하고 있고 둘째 딸
이진도 미국에서 도예가의 길을 걷고 있다.
2005년부터 전주대 사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황실문화재단" 총재로 전주에서 일하고 있지요 전주시청 소유의 승광재(전주이씨의 조
선왕조 설립이전의 사저)에 거주하고 있답니다.
영길씨는 말하기를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적이 없다 오직 일제가 강점했고 서류를 위조했을 뿐"이라며 황실복원운동에
나서고 있어요. 시대착오적인 행동일진 몰라도 1994년 6월 "대한황실 종정부"를 구성하여 대한제국 황실복원운동을 열심히 추진하고
있지요
그는 "꿈같은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연중 49차례나 열리는 조선 왕조의 제향에 참석하고 있으며 조선왕조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누비
기도 하지요
대구에 광무제(고종)과 융희제(순종)를 모신 이제묘를 찾아 제향을 지내고 포항의 대보등대 천정에 새겨진 황실상징 「오얏 문장」
을 확인해주기도 했지요 서울교대의 안천교수라는 후원자를 만나 황실복원의 이론적 바탕을 마련한 그는 지금도 『황실을 복원 합시
다』라고 외치며 다닌다 고합니다.
오늘[5.4]은 이석전하 독고정희여사님 고희연에 민요 두어곡을 불러드리기로 했습니다.
공연중에는 못 찍고 ... ...마무리 후에...
그저......꽃을 보면 좋아서리^^
첫댓글 두루두루 안다니는 곳이 없구만!
좋은 일 많이하고 즐겁게 지내니 보기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