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17장 1-11절
설교제목 : 새 이름을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건강하셨습니까? 태양의 열기가 조금은 수그러져 마음이 가벼워진 듯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그러지지 않는 전쟁의 불꽃과 세계경제의 불확실성, 국내의 복잡한 상황들 속에서 C.G. 융이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광포한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하면서 동시대 사건에 대한 글들의 에필로그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원형이 의식적으로 현실로 운반되지 않으면, 그것이 바람직한 형태로 실현될 것이라는 보장이 전혀 없으며, 오히려 파괴적인 퇴행의 위험이 더욱 커진다. 마치 정신이 그런 파괴적인 가능성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의식을 부여한 것처럼 보인다.”[Jung CG(1970) : CW.10, Civilization in Transi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Princeton, para.475.]
집단과 개인 안에서 발현되었던 전쟁과 광포의 신이자 에로스의 신이기도한 보탄의 원형이 의식적으로 현실에 운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파괴적인 퇴행, 즉 광포한 전쟁을 경험한 것이었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세계 역시 코로나 이후에 이 바이러스의 작용은 원형의 배열이라 할 수 있고, 이 배열을 의식적으로 통찰하지 못한다면 우리 세계는 이런 파괴적인 퇴행을 경험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파괴적인 가능성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보다 넓은 의식의 확대가 필요함을 알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외적 내적 경험을 의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의 삶은 퇴행적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새 이름
아브람은 75세에 하나님께서 펼치진 미래의 지도를 들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모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변부족국가에 자신의 명예도 생겼고, 부도 어느 정도 축척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사래의 몸에서 난 본처 소생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99세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역동적인 변환이 활성화되었고, 새로운 완전한 수에 다다르기 전의 무르익은 정점의 시간이 도래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없이 살아라. 나와 너 사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나는 너와 언약을 세우고 약속한다. 너는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는 너의 이름이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다(1-5).”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전능한 하나님이시니 나에게 순종하며 살 것을 당부합니다. 전능한 하나님은 원어로, 엘샤다이(אל שדי)라고 이름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이 엘샤다이는 자연의 법칙을 초월하는 특성, 인간이 고통과 절망 속에 있을 때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창 35:11, 출 6:3, 욥 40:2). 이런 용례로 볼 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떤 관념이나 먼 우주에 계신 존재가 아니라 시공간에 침투하셔서 활동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단단하게 동여맬 수 있는 든든한 존재이심을 드러냅니다. 엄청난 능력으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수퍼맨 같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고통 속에서 찾아오시어 새로운 삶의 문을 열게 하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자기 원형상이 시공간의 물리적 세계로 침투하는 동시성적 사건에 개입되는 초월성향과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구별되게 살 것을 아브람에 주문합니다. 순종한다는 말은 그런 하나님의 목소리를 따르고 분별력을 가지고 삶을 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명예도 얻고, 부도 제법 누리고, 권력을 생기면, 대개 자아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외부세계의 목소리만을 추종하여 따르고자 합니다. 그러면 내면 세계와 본능적 세계와는 멀어지고 오히려 부적절한 내적 상들이 한 개체를 괴롭힙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실상입니다. 어쩌면 이는 아브람에게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능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주문을 넣고 있습니다. 우리의 따라야할, 순복해야할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자 내면의 목소리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라 말씀하시며 너와 나 사이에 언약을 몸소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보다 확실한 계약관계를 설정하시면서 그의 이름을 바꾸어주십니다. 너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너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존재의 정체성과 위력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아브람의 뜻은 존귀한 아버지라면, 아브라함은 많은 사람의 아버지, 열국의 아버지란 의미입니다. 한 가족이나 한 개체에 속한 이름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뿌리와 근본으로서 이름을 변경해 주십니다.
때로 우리는 나의 이름이 호명되는 꿈을 꾸곤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고 그 이름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고히 할 것을 주문하는 내용들입니다. 어떤 분은 꿈에서 낭떨어지 벼랑 같은 곳에 서 있고, 또다른 절벽이 앞에 있는데 보이지 않는 상황인데, 저 너머에서 자신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절망과 외로움, 더 이상 삶을 진전할 수 없는 벼랑 끝에서 존재의 이름이 호명됨으로써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각인시키고, 내가 누구인지를 재각성시키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아브람은 이제 옛 이름은 벗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었음을 각인시킵니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니, 너의 존재의 정체성에 걸맞는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운명의 배열이 너에게 일어났음을 반드시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우리에게는 어떤 새이름이 주어졌는지 깊이 있게 통찰하며 변환된 그 이름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할례의 의미 : 희생
하나님은 언약을 맺음으로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너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남자는 모두 할례로 약속의 증표를 삼고, 할례가 너와 네 뒤에 오는 너의 자손과 세우는 지켜야 할 계약임을 일러주십니다. 할례가 언약의 표임을 확실히 합니다. 여러분,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의 표피를 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전에 동물의 희생을 통해 계약을 맺었다면, 이번에는 직접 인간의 몸에 영원한 언약이 각인하도록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전에는 본능적 충동의 희생을 전제로 한 계약이었다면 이제는 인간의 몸의 생식기의 희생을 통한 계약입니다. 이는 보다 높은 단계에서, 발전된 형태에서 언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종교학자들은 이런 할례가 원래 어린이 희생을 대신한 것임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할례는 큰 전환점을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가부장적 영적 원리가 최고의 가치로서 모권사회, 모성신에 충성하던 내용을 대체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바울은 할례와 모성신을 섬기는 거세의식에 대하여 비판하는 내용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손 할례당(katatome)을 삼가라로 전합니다(빌 3:2). 할례, 페리토메(peritome)와는 구분됩니다. 손 할례당은 모신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스스로 칼로 도리고 거세하는 사람들을 일컬었습니다. 결국 이 할례 의식은 보다 높은 영적 발전 단계에서 하나님을 향한 희생으로의 전환을 가리킵니다.
이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할례의 이미지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변형된 심리적 태도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생식기는 창조력과 생식력의 기관입니다. 이 창조력을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보다 높은 목적에 이바지하라는 의미입니다. 본능적 충동의 희생을 넘어서 보다 높은 목적에 나의 창조력과 생산력이 사용될 때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런 특성을 신명기 10장 16절에서 보다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
자아의 욕망과 교만, 충동을 희생하여 자신의 창조력을 전체정신의 목적에 이바지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할례는 자기 희생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는 인간에게는 두려움이지마나 반드시 통과해야할 당위성입니다.
자기희생에 대한 두려움은 모든 자아 속에 깊이 숨겨져 있고, 이 두려움은 종종 온 힘을 다해 분출하는 무의식적 세력에 대한 불안정하게 통제된 요구일 뿐이다. 자기 실현(개성화)을 위해 분투하는 자는 누구나 이 위험스런 통로를 피할 수 없다...[Jung C.G(1969) : Psychology and Religion, CW.11, Princeton University Press, Princeton, para.849.]
오늘날 우리 시대는 자아의 팽창된 욕망을 채우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보다 높은 목적에 왜 자아를 희생해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빈약한 정신적 수준에서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의 할례, 영적 할례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영적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이 지난한 과정을 용기있게 살아낼 수 있는 복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