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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편
‘4박5일 심양록’ 본 글 집은 서두에서 이미 밝혔듯이 이미 발간이 된 내 글 집 ‘조선의 꽃 열하일기’ 탈고를 마치고 그 기념으로 심양을 찾은 덕분에 태어난 글 집이다. 그로 연암 박지원에게 우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게 순서상 맞다. 내 글 집 ‘조선의 꽃 열하일기’의 부록 쯤 될 것이라 하겠는데 글 집 발간이 순탄하지 않았다. 우선 돈이 문제였다. 그간 책 열 권 이상을 내다보니 아내가 돈을 안준다. 당연한 처사다. 2013년부터서는 국가에서 주는 수혜에 힘입어 연차적으로 책을 낼 수 있었는데 2015년 말 그 끈이 모두 떨어지고 말았다.
한 가닥 희망이라면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라는 내 글 집이 한국출판 문화산업 진흥회에서 세종도서로 선정되는 길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나를 거역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만 둘 위인이 아니다. 책 발간과 관련한 일련의 과정을 글로 고스란히 남겼다. 책은 또 다른 내 자식과 진배없다. 한 빛을 머금고 태어난 내 책은 그러기에 나로선 고마움이고 값진 삶의 가치이다. 그 즐거움이 지금도 사탕 깨물듯 달콤하기 이를 데 없으며 귀여움에 바스러진다. 두고두고 기억하고자 태생에 이르는 글을 덧붙인다., 생의 즐거움이기에 더욱 더.
1. 2015 8 11 일기
맨 처음 책을 낼 때 그 희열감은 말로 다 못한다. 나도 저자가 되는 거야. 책방에 버젓이 걸릴 내 이름 석자.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후회하고 만다.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여부족하고 거슬리고 어줍다. 글은 역시 묵혀두고 한참을 생각하고 심사숙고해야 한다. 한 명의 독자만이라도 즐겁게 읽어준다면. 근근이 버티는 의미 한 마디지만 기실 택도 아닌 소리다.
몇 번의 실패 덕분인지 맨 나중에 낸 책이 그래도 좀 낫다. 나로선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하지만 들인 돈과 시간이 얼마냐. 이제는 집식구들마저 책 트라우마를 발생한다. 숫제 무시하는 투다. 저 방에 쌓인 책 좀 봐. 하지만 이번에도 어리석게 시리 분주하게 열심히 글구멍을 다 채웠다. 집착하다보면 망령이 든 것인지 채권 찍 듯 또 호기에 차 이 정도라면 최소 천 명의 독자는 즐겁겠지 한다.
아직 남은 홀린 중독의 여파를 몰아 과감히 출판사에 주사위를 던졌다. 그런데 그 날부터 영 잠이 오지 않는다. 도취한 약효가 이제야 다한 모양이다. 연암 박지원이 말했다. 저술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학문을 갖추기가 어렵고, 공정하고 밝은 안목을 갖추는 게 어려우며, 자료를 총괄하는 역량을 갖추기가 어려우며, 명쾌한 판단력을 갖추는게 어렵다. 내 글을 대비해 본다. 재주 학문 식견.
아무래도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를 또 남발했나 보다. 지금 나는 내 글 ‘조선의 꽃 열하일기’ 글 99편을 목전에 두고 밤낮으로 야누스 환상에 시달린다. 낼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다. 그래도 명분이 글쟁이인데 글을 안 쓰기는 그렇고 글만 그냥 쓰다 말까. 요즘 글쟁이는 그래서 서럽다. (2015 8 11)
2. 2015년 11월 27일의 일기
얼마 전 안도현 시인이 쓴 글을 우연히 신문에서 보았다. 글 제목은 '문학동네’ 손 떼고 떠나는 강태형 대표.' 그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 신춘문예라는 제도는 문학청년들에게 꿈의 과녁이다. 해마다 11월이면 펜 하나 달랑 들고 세계를 접수하는 꿈에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1981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신문사에서 당선 통보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나는 길에서 같은 대학 문학서클 선배를 만났다.
“형, 아직 연락받았다는 사람 없어요?” 선배가 무덤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미 당선소감까지 써서 벽에 턱 붙여 놓은 터였다. 그 선배와 내가 주축이 되어 만든 서클에서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에이스’였다. 나는 스무 살이었지만 한 해 전에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한 이력이 있는 터라 의기양양해 있었다. 그날도 우리는 습관처럼 술을 마셨다.“상금 받아서 외상 술값을 갚아야 하는데….” 그 선배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며칠만 더 기다려 보자.”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는 벌써 당선되었다는 전보를 받아 놓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선배가 198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게 되는 강태형이었다. 선배는 복학생이었지만 ‘에이스’에 대한 예의로 끝내 입을 다물었고, 그날 술값을 냈을 것이다.
"
난 솔직히 그 글을 괜히 봤다 싶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에 '고구려 9백년의 자취소리' 라는 글 집을 세종 교양도서 선정이란 경쟁속에 불쑥 들이밀었다. 작년에 용케 신라 천년의 자취소리라는 글 집이 세종도서로 선정되는 바람에 바람이 잔뜩 들어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신라보다는 가뿐히 쓴 고구려 였기에 기대가 자못 컸다. 더욱이 초판 발행본이 동이 나는 쾌거를 이루었기에 안도현과도 같은 에이스 심정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 아침 결과는 처참했다. 차라리 아주 통쾌하였다. 나의 불길한 예감을 통렬히 명중했으니 말이다. 프로필에 수필가라 한 함자가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무슨 고대역사 학회라도 들어둘 걸 그랬나 싶기도 하고 순간 별 생각이 다 든다. 솔직히 애석하다. 그 글 집 첫머리에 '많이 배웠고 많이 생각하여 너무 고맙다. 나는 그것으로도 만족이다. ' 이 말은 순전히 거짓말인 셈이다. 하지만 이쯤으로 크게 낙심하지는 않을 테다.
요즘 3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는 나란 존재라는 생각을 갖곤 한다. 돌이켜보면 역사가 일깨운 글 농사가 제법 쏠쏠하다. 근무처 밥벌이(경주 양성자 가속기 사업) 로 파견을 나갔다가 거듬거듬하다보니 신라 글 집을 내게 됐고 더불어 바듯하게 꼬아진 함수풀이 같은 고구려를 자연 추적하게도 되었고 범죄 망 좁히듯 그 고구려를 파헤치던 중에 나는 또 열하일기를 만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역사속에서 인문학 속에서의 인간의 겁 없고 겁 많은 숫한 존재를 보았고 그러면서 나란 존재를 새삼 또 느끼게도 되었다. 위험천만이 역사에서는 꽤 의미 있고 중요하지 싶다. 어떻든 역사를 배우는 예의로서 술값도 들일 필요 없이 마냥 늘어나는 머릿속 상상인 바에야 이보다 더할 기쁨이 어디 있을까. 언제 내가 돈 벌자고 책을 썼냐. 마음을 갈자고 글을 썼지. 열하 책 교정을 다시 시작한다.
'책 한 권 분량으로 600페이지를 넘기면 곤란합니다... '출판사 말대로 페이지를 제한할 수밖에는 없지만 넘치는 분량이란 유쾌한 비명이 아닌가. 고구려가 망한 것은 자중지란 때문이지 힘 때문이 아니다. 겁 없는 내 마음도 변함없이 마찬가지다. 다음에는 꼭 에이스.. 화이팅이다.
3. 2015 12 21아침에 일기
지난 주 토요일 마음먹은 대로 서울을 다녀왔다. 참 오랜만에 찾은 서울이다. 동숭동에 예술가의 집, 나는 그곳에서 연행에 관련한 강의를 듣고 그들과 교류를 하고 싶어서다.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들이 그토록 연경을 가고자 한 것은 왜 인줄 아는가. 상인들은 장사를 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동원을 했지만 선비들은 돈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 물론 들고 갈 은자를 허용을 해주었으니 물건을 사와 되팔아 큰 이문을 남길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이는 선비의 자존이기도 하고 상공을 무시한 조선의 시대상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 시대만은 지금과 다르게 돈을 경시하였다는 이야기도 된다. 연암도 빈 푸대자루를 들고 갔다고 그의 글에 적고 있다. 가난한 그로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대신 그는 머릿속에 든 지식과 사고를 펼쳐 보이고 또 더 많은 지식을 얻고자 붓과 종이 먹을 잔뜩 준비했다. 평생 닦은 유교경전을 가늠해보는 것이 조선선비들에게는 큰 열망이고 꿈이었다.
나 역시도 지난 주 토요일, 그간 내가 열하일기에 쏟은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펼쳐 보이고 싶었다. 나중 강의가 끝나고 좌담형식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일신수필이란 제목을 부친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 대목을 말하길래 나로선 당연한 것이지만 그에게도 그 날짜가 당연한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어찌 그 날짜를 그렇게 똑똑히 기억하십니까.
당연 인지한 말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였다. 그 대목이 워낙 중요해 그날만은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날이 현세에 무슨 날인지 모르십니까.' 하니 그뿐 아니라 다들 어리둥절해 한다. 비로소 나는 알 것 같았다. 저마다의 분야가 따로 있구나. 나는 부연 설명을 했다. "그 날은 연암이 처음으로 수필이란 말을 썼기 때문 그 날을 따로 잡아 수필가의 날로 잡고 매년 수필가들이 모여 큰 행사를 합니다." 나로선 당연한 말인데 반응은 의외였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그렇다면 나올 내 책을 위해 장사 좀 해야겠구나 하여 바로 이어서 부연설명을 했다. 그 설명으로 그 자리에서 졸지에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고 금세 스타등극이 되었다. 이 말을 생각하게 된 것은 열하일기에서 심양의 예속재에서 처음 보는 그 동네 젊은이들을 밤에 규합하여 재밌게 논 상황을 읽고 연암이 무슨 재주가 있기에 중국어도 못하는 사람이 단숨에 이를 엎어치기하듯 등에 업고 가능했던 것인가 곰곰이 생각하며 얻어낸 나름의 비책으로 나는 이 책을 꾸릴 행장 속에 간간이 이것을 써먹었다.
물론 사견이지만 그의 글에서 종종 노출되는 것이 또한 그것이기에 내 추측은 거의 정확하다고 나는 믿는다. 유달리 내가 열하일기를 쉽게 논파한 것도 바로 이 덕분이다. 그래서 그게 뭐냐 하는 말씀. 별것 아니다. 이렇게 뜸을 들이는 것은 내년 나올 내 책의 효과를 증가시키기 위해 하는 얕은 술책일 뿐이다. 그의 글 속에 담긴 묘한 뉘앙스의 몇몇 글들, 나는 그의 의도를 한 눈에 알아봤다. 이는 그와 같은 부류로서 느끼는 촉수다.
그는 그가 의도하는 바를 글 곳곳에서 위장하고 있다. 실없는 사람인양 자신을 낮추거나 한낱 입안에 든 밥알이 일시에 쏟아지는 꺼리를 단지 전하려 한 것뿐이라는 둥하며 위장지뢰를 글 곳곳에 매복시켜 놓았다. 분명 시대를 거슬리는 엄청난 위력인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순진한 척 하며 갖은 비방과 예봉을 피하는 어쩔 수 없는 궁여지책이기도 한 것이다.
말술을 허구 헌 날 드시려면 어쩔 수없이 감수하여야 하는 술꾼만의 기질 내지 소질을 그는 위장하여 글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글을 맛깔나게 읽으려면 바로 이 술꾼들의 독특한 양식으로 읽어야 제 맛이다. 천연덕스러운 능청스러움에 푸근한 인간미. 이를 충청도식으로 말하자면 시치미 뚝 떼고 “지는 몰랐시유, 그 말이 그렇게 엄청나게 될 줄은. 참말이유.” 우리들은 알게 모르게 고유의 멋과 전통으로 술꾼의 그 DNA를 포섭하고 현재에 살고 있다. 누가 봐도 시원스러운 단숨에 한 사발 들이키는 걸쭉한 속내를 지닌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작은 잔으로 깔짝거리며 홀짝홀짝 수차에 걸쳐 눈치 살피며 마시지 않는다. 오히려 늦거나 호탕치 아니하면 후래삼배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술꾼 기질로 어디서나 친근했으며 시원하고 호탕했다. 그게 바로 조선의 술꾼이고 소위 말하는 세상 떠돌아다니는 풍류객의 전설이고 사랑방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 말을 하고 호감을 얻은 후 잘하면 내 책도 팔리겠구나 하는 발칙한 상상을 했다. 그 볼썽사나운 의지는 이내 쭈삣한 우쭐함으로 내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어리석음은 이 나이에도 여전하다. 조금만 잘 봐주면 금세 우쭐하고 조금 시답지 않다 싶으면 바로 의기소침해서 주변을 맴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헤어져 종각 영풍문고를 향했다. 내가 찾고자 하는 책들, 이미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책들을 살펴보고 꼭 맞는 것을 사겠다는 요량이었다. 그런데 보는 순간 허물어지고 말았다. 연암이 연경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처음 들른 곳은 바로 유리창이라는 서적센터였다. 당시 건륭제는 사고전서를 만들겠다고 하여 중국 전역에 책들을 다 모아 정리하고 편찬을 하자고 했는데 바로 책들이 모인 장소가 유리창이란 곳이다.
그는 책의 홍수에 질려 절규하고 고독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분명 그는 고독이라고 했다. 내가 찾는 책이 극히 제한된 한 분야라 기껏해야 백 권정도가 꽂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수천 권 중에 너댓 권에 해당한 나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나 역시도 고독했다. 즐거워서도 무기력해서도 한탄하고 한심스러웠다. 연암의 그 기분을 이제 겨우 알듯했다. 그나저나 오늘도 저는 결국 열하에 묻혀서 산 꼴이다. 영화배우가 열연을 하고나면 한동안 영화속 주인공으로 착각되어 고통스럽다고 하더니만 아무래도 내가 그 꼴인 것 같다.
웬만하면 열하일기 속 이야기와 연관 지어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났다. 그래서 이제는 의식적으로라도 그 마법에서 빠져나오려 부지런히 궁리를 한다. 사실 오늘 찾은 서점도 그 때문인데 결국 열하로 되돌아서고 말았다. 이런 형국이면 열하일기 후기로 또 다른 책 한권이 나올 판국이다. 연암이 법고창신이라 했는데 저는 법고에서 여전히 머물고 있는 셈이다. 아니 참 이 글이 창신에 해당되지 않을까.
4. 토마스 집 앞에서 (2015년 12 30일 일기)
어제 6시4분 신탄진서 첫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랐다. 여의도에 한국산업기계진흥회. 그곳을 거쳐야 외국서 들어오는 장비나 기기가 감면감세를 받는다. 요즘은 WTO라 하여 통관에 따른 감세가 미약하지만 과거는 대단했다. 함부로 외국 장비를 못들어오게 통제를 한 덕분으로 국산화가 많이 이루어진 것도 부인을 못한다. 바로 그 협회가 우리의 밥줄을 지킨 파수꾼이라 할 수 있다.
지난번에는 6시46분 기차를 탔는데 오히려 사람이 더 적었다. 이유인 즉 수원에서 무공화호를 이용해 출근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은데 6시40분대 기차로는 지각이 되기 때문 6시 4분 기차만 몰리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수원서부터는 나도 입석으로 바뀌어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전철을 수원서 이용하면 50분이 소요되는데 무궁화호를 이용하면 쉬는 곳도 없어 20분이면 바로 영등포에 온다고 했다.
수원 영통교 근처에 산다는 젊은 친구를 기차 안에서 만났다. 기차를 타려고 뛰어 왔는지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경상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그는 직장이 여의도라고 했다. 그렇게 매일 출근을 하자면 지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는 말 대신 빙그레 웃는다. 고향 떠나 멀리 와서 또 매일 먼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다들 서서 졸고 있다. 고달픈 신역이 바로 느껴졌다. 먹고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세상이다.
영등포역에서 여의도 가는 순환버스를 탔다. 국회의사당이 빤히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지체높은 분들이 사는 곳, 이에 걸맞게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큰 밥거리를 나누는 곳이기도 하다. 그들은 제대로 돈을 나누고 밥벌이는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게 그렇지 않은지 늘 곳은 시끄럽다. 오늘도 아침부터서 피켓을 든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이른 바 억울하다는 말이고 내 밥은 내 밥을 위하여 아우성이다. 해고는 바로 밥을 굶는다는 것이니 딱히 할 말도 없다. 그 놈에 돈이 뭐고 밥이 뭐기에 하는 생각에 조금은 우울해진다.
나는 일을 마치고 출판사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토마스라는 집이 있다. 정확히 뭐하는 집인 줄은 잘 모르지만 줄 선 사람들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밥줄이다. 아직도 밥을 주려면 2시간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긴 줄이다. 우리가 평소 일을 하다가 밥 때를 놓친 경우와 그들의 줄 선 밥줄은 양상이 전혀 다르다. 그들은 그 시간을 놓치면 아예 굶고 만다. 생명 줄과도 같은 밥줄. 밥줄에 선 안도감에 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실로 밥은 소중하면서도 무서운 존재다.
나는 오늘 내 글 집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에게 밥 한 끼라도 대접하고 싶어 가고 있다. 글 한자 한자 실수를 놓치지 말아달라는 공치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연말을 맞아 훈훈한 정을 전하고 싶었다. 그들이 잘 가는 집에 예약을 했다. 신탄진으로 내려 갈 차 시간 때문에도 그렇지만 뭐 대단한 것이라고 같이 동석하기에 조금은 쑥스러울 것 같았다. 출판사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식당아줌마에게 부탁을 했다. 다시 돌아서 영등포역으로 향하는 길 , 휴대폰이 요란스럽게 진동을 했다. 아마 출판사 내 글을 손보는 사람들일 것이다. 일부러 받지를 않았다.
다시 토마스 집 앞, 줄은 더 길게 늘어져 있었고 이제 집안에서는 밥 냄새가 모락모락 새어 나왔다. 토마스가 누굴까. 밥 한 끼로 이 동네를 평정한 그는 이 시대 진정한 성자가 아닐까. 밥은 먹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이란 생각을 모처럼 하게 된다. 이 경우 누가 밥이 무서운 존재라고 할까. 이 세상에 밥벌이는 바로 돈이지만 돈만으로 말할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은 마음 따스한 밥도 알게 모르게 제법 많다.
내 글을 정성껏 봐주는 그들에게 밥 한 끼는 약소하고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돈을 떠나 내 자식을 잘 부탁한다고 맡긴 것이 아닌가. 이른 새벽 출발한 서울길이라 출출했지만 토마스의 훈훈한 기운 때문인지 마음은 한결 따뜻했다. 더불어 내 자식이 영등포에 어느 출판사 단칸방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만 같았다. (2015년 12 30일 ‘조선의 꽃 열하일기’ 내 글 집 편집을 보러 가는 길에)
5. ‘조선의 꽃 열하일기’ 발간에 즈음하여 (2016 3 31일 아침에)
글을 쓴 지 제법 긴 세월이다. 술발로는 해갈이 여부족이라 택한 글의 길이었다. 쓰다 보니 글맵시도 달라진다. 어느 때는 일기쓰듯 매일 끄적 끄적 거렸다. 다작을 하는 내 경우 테크닉만 는 것 같은 우려감도 있기는 하다. 그래도 많이 달라진 내 글 솜씨다. 어릴 적 특별활동이라는 게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의외의 선택인데 특별활동으로 나는 맨 처음 야구 반을 택했었다.
순전히 이는 아버지가 사준 글러브 때문이었다. 남보다 먼저 글러브를 쥔 경험이 곧 자질은 아닌 것인데 소질에 대한 무지가 빚은 결과였다. 딱딱한 야구공이 나는 무엇보다도 무서웠으며 당시 왼손잡이를 위한 배려는 없었다. 왼손잡이 그리고 무서웠던 것이 나로서는 천만다행인 셈이다. 그 다음 선택한 것이 문예반이다. 이 또한 소질을 쫓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책이 좋아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엄마라는 주제를 주고 글을 써보라고 했는데 나는 제대로 글구멍을 채우지 못했다. 하지만 중학교 들어가서도 나는 또 문예반을 택했다. 그런 나는 백일장에 참가는커녕 교내에서도 이름 한 번 오르지 못하고 중학교를 마쳤다. 내 소질은 기실 문예와는 거리가 있는 셈이었다. 중학생 때 안양과 서울을 잇는 큰 안양대교( 나중 그 대교는 1977년 물난리로 끊어지고 말았다.) 가 개통 될 무렵 친구들 몇이 구경을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여직 내 기억 속에 있다. 한 친구는 장래 교수가 되겠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는 파일럿을 꿈꾼다고 했다. 나는 이에 대하여선 한 번도 생각해 본적도 없으면서 천연덕스럽게 소설가가 되겠다고 했다. 그 무렵 나는 박종화의 금삼의 피를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무렵의 의식이 그냥 헛것에 닿는 맹목적은 아닌 것도 같다.
친구는 대학 때 ROTC로 육군항공부대에 들어가 파일럿을 하고자 했고 다른 친구는 치과의사에서 전업을 하여 그의 말대로 끝내 교수가 되었다. 파일럿이 되려던 친구는 체력 테스트에서 아깝게 떨어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육군 대령 제대로 엇비슷한 길을 걸어간 셈이다. 나만 특이한 케이스가 아닐까. 공학으로 먹고 살던 놈이 어느 날부터서 갑자기 글을 쓴다고 억지춘향 글에 매달려 지금에 이르니 말이다.
그래도 그 다리위에서 말한 대로 모두들 꿈 가까이 다가간 것도 같다. 이순의 나이 나는 글을 가까이 한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젊었을 때는 ‘무엇을 위해서’ 노력해야 했지만, 더 이상은 세상에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감도, 어떻게든 세상과 어울려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으니 그야말로 좋은 시절이 도래한 것이 아닌가. 비로소 '나는 누구이며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실체에 관해 제대로 알아볼 좋은 때를 맞이한 것이다.
과연 문예반이 내 소질이었는지 제대로 알아 볼 좋은 기회다. 십여 년의 수련 생활이 내게 준 선물은 그야말로 값진 튼실함이다. 기교라 할 것도 될 것이지만 여느 기술처럼 글에도 노하우란 게 있다. 단지 감성의 재질로서만 충만이 안 되는 것이 글이다. 어려운 해법은 나도 잘 모르고 어려우니 차치하고 쉬운 말로도 기본적인 요건에 대해서는 설명이 가능하다. 제일 중요한 것은 참신성이나 절제의 미학이다. 참신성은 바로 의외성의 흥미로움을 말한다.
수필은 진솔하여야 하지만 참신성은 당연한 것이고 물론 소설도 가상적이지만 새로움이어야 한다. 뻔히 아는 글은 매력이 없다. 시야 말로 반 이상이 참신한 상징성이 아닌가. 글은 읽고서 남기는 게 있어야 한다. 임팩트다. 그런 글은 시대 조류에 맞춰 가능한 짤막해야 하며 독자에게 훈계조나 획일성을 강조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이것이 관건이다. 쉽게 노견되고 그로 딱딱해진다. 글은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워야 한다. 서정성을 말한다.
또한 속으로는 웃을지언정 천연덕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듯 감정 표출을 자제해야 한다. 웃고 우는 것은 독자의 차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때 맞춰 단숨에 눈물이 쏙 빠질 정도의 감정의 유출을 이루도록 진지해야 한다. 바로 감성의 극치와 절제의 미학이 거기에 있다. 아마도 이는 모든 글쟁이들이 갖는 과제이며 또한 작가라면 모름지기 극복할 마음의 자세가 아닐까싶다. 말이 그렇지 이 기법이 쉬운 것은 아니다. 수필을 접하다 보면 매우 난처한 것이 작가의 처신이다.
자신을 중심으로 글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설정이 실은 어렵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함몰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자기 자랑을 일삼은 글은 글도 아니다. 설령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으면 이 또한 눈치 못 차리게 은근히 넌지시 말해야 한다. 이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글의 원천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자명하다. 글이란 바로 생각의 흔적이다. 박경리 선생의 ‘ 멀리 나는 도요새 ’란 글에서 말한 대목이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다.
<삶에 대한 애환과 생명에 대한 깊은 통찰력 없이 생각의 샘에 물이 괼 수는 없는 것이다. >
생각하지 않고서 글을 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생각만으로 글이 되지는 않는다. 샘의 맑은 물처럼 정갈한 글을 얻고자 한다면 거르고 또 걸러 맑은 물만 흘러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맑아지려니 자성이 자연 따라오게 되어 있다. 나는 이 사실을 요즘 꽤 실감하고 있다. 폭포수 처럼 쏟아지는 생각의 말미를 어찌 가두고 다듬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실로 중요하다. 글을 버릴 줄도 알고 고루함을 과감히 탈피도 해야 한다. 얼마 전 나는 ‘조선의 꽃 열하일기’ 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글 집을 내기 전 나는 ‘우수문화콘텐츠 선정’이라는 모 국가 처에 응모를 했었다. 나름 수필적 요소를 가미하여 썼다는 참신성의 우쭐함을 내세워 내심 자신만만했었다. 하지만 낙방을 했다. 장장 600페이지의 글구멍을 밤낮 채운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 낭패감은 실로 컸다. 응모분야로 문학이 아니고 역사 문화를 선택한 것이 폐단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 전공이 역사 쪽이 아니라 위원들이 알아서 제쳐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정이 든 만큼 볼 의욕도 안 생겨 한 동안 열하일기 원고를 처박아 버렸다. 그러면서도 공들인 마음이 아까워 차마 밀치지는 못해 다시 살펴 본 열하일기였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떨어진 이유를 제대로 알았다. 아직도 미진하기는 여전하지만 만약 응모에서 채택이 되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가치 떨어지는 고만고만한 글 집으로서 태생이 될 과오를 낳을 뻔 했다. 애벌레가 고치를 뚫고 나갈 때 조그만 구멍으로 힘들게 나오는데 쉽게 나가면 날개의 힘이 없다고 한말이 실감이 난다.
애벌레는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 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올해는 ‘조선선비 최부의 표해록’이라는 글로 응모를 또 했다. 역시 또 낙방했다. 하지만 작년처럼 낙심하지는 않는다. 다시 보고 고치고 고칠 기회가 내게 또 주어진 것이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은 140번,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38번,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는 12번 거절당했다. 흥미롭게도 위대한 작가들은 대부분 거절을 수차례 경험했지 않은가.
거절은 오히려 그들의 의지를 강화시키고 결의를 다지게 하여 성공의 길로 인도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글 성과는 의외로 유배 길에서 얻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정약용도 김만중도 김정희도 모두 그렇다. 낙심천만은 오히려 삶을 북돋고 새 방향을 일깨우기도 한다. 글은 생각을 대변하는 묵도의 길이다. 켜켜이 쌓인 낙심은 응결된 글로 해방구를 찾고 그만큼 생각이 또 깊어지기도 하는 것이다.삶이란 높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정진하는 것이다. 글도 마찬가지다. 박경리 선생의 ‘멀리 나는 도요새’ 란 수필이 청량한 가을 아래 영롱하게 빛나는 이슬처럼 오늘 내게 반짝이며 그렇게 말하고 있다.
<출세라는, 돈을 번다는 상자에 넣어진 사고방식, 그 상자는 일본의 전자제품같이 날로 작아져 간다. 그 상자에서 뛰쳐나온 자만이 우주를 느끼고 높이, 멀리 나는 도요새의 그 뜨거운 생명을 알게 될 것이다. 생명은 우주를 포옹하고 간다. 인간도 초목도 벌레까지, 그리고 우리는 도달하는 것이 아니며 영원히 가는 것이다. 옛날 노인이 말하기를 이야기는 거짓말이라도 노래는 다 참말이다, 오늘 글을 잘 쓴다는 전문가들보다 옛 노인이 먼저 더 정직하게 예술의 본질을 체득했던 것이었을까.
생명의 원천인 흙 한 줌보다 지폐 한 장이 소중하다는 생활 철학에 찌든 현실에서는 문안과 문밖이 있을 뿐 하늘도 없고 땅도 없다. 따라서 문안에서는 쓸모 없는 지식을 채워 머리통만 커졌지 삽자루 하나 안 잡는 왜소한 인간을, 한 분야만 파고들어서 한 부분밖에는 볼 수 없는 무식한 전문가를 양산하고 문밖에서는 자신의 삶을 장난감 망가뜨리듯 어렵잖게 내동댕이치는 추세가 현저한데이들 양자가 어찌 높이 멀리 나는 도요새를 알까보냐.>
** 조선의 꽃 열하일기는 출판사와 내가 각각 반부담 하여 출간을 했다.
내 글은 이런 특징이 있다.
1)이번 책은 660페이지로 거의 두 권 분량이다. 책 한권으로 다 알아보라고 일부러 한 권으로.
2)2도 칼라로 연암의 글은 노란색 글로 구분을 해 쉽게 눈에 띄고 보기 편하도록 했다.
3)열하를 다녀온 여정 말고도 그의 삶에 대해서도 연암집을 포함시켜 열하일기와 연관을 시켰다.
4)그간 열하 책이 번역본 아니면 현장 추적 사진등을 포한한 형식인데 내 책은 문학적 특성이 느껴지도록 꾸몄다.
5)다른 연행록과 비교를 하여 다양성을 구비했다.
6)그의 일신수필에서 비롯하여 수필이란 말이 나온 점을 상기하여 수필적 문체를 시종 사용하여 읽기 쉽게 꾸몄다.
7)8명 이상 단체 구입자가 희망하면 출간 예정인 최부의 표해록과 더불어 설명회를 조촐하게 해줄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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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제일 주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실은 이것이다. 나와 그는 시대만 다를 뿐 똑같은 전통적인 술꾼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술꾼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지만 연암은 술집 간판뿐 아니라 표정까지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연히 그의 글은 조선 술꾼의 취향으로 읽어야 제 맛이다. 천의무봉 재질의 글발에 말 술을 마다하지 않는 술 발 덕분 그의 글은 더욱 빛이 났다.
그의 글 샘은 주경야취(酒耕夜醉)로부터 발원한다. 술을 마시면 펄펄 날았다. 취할수록 맑아지는 글샘. 신라시대의 후래삼배( 後來三盃: 三盞一去) 주령구(酒令具)가 후세에 이르러 이렇게 번창할 줄 누가 알았던가. 날로 진화하는 술꾼의 역사, 술꾼들은 그 시대와 다를 바 없이 오늘도 변함없이 오늘을 술로 푼다. 갖은 고초 속에서도 술꾼의 전통은 날로 유려하기만 한 것이다. 그의 아들 박종채는 과정록(過庭錄)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선친의 글은 유실된 것이 많다. 주금책 3편의 경우는 동년배나 장로(長老)들 중에 그 구어(句語)를 외어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세상에 널리 퍼져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가 그 권(卷)을 비워 두어 훗날 써서 메꾸기를 기다리노니, 혹시 동호자(同好者)가 본다면 수고를 아끼지 말고 등사하여 돌려주기를 바란다. 이는 당세의 대아 군자(大雅君子)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주금책’이란 바로 술을 금하는 방법이라는 책이다. 술이라면 징글징글하다 면서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이 조선 술꾼의 전통이다. 아무튼 그 누구든 주금책이란 책을 찾으면 연암의 아들 박종채에게 연락을 주기 바란다. 술꾼의 전통은 쭉 이어져야 하니까.
********************************************************출판사 광고 글
‘조선 문학의 꽃’으로 찬사를 보내도 부족할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그럼에도 일반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한문으로 표기된 원전(原典)은 물론, 번역본조차도 손에 잡게 되면 우선 그 방대한 분량에 주눅이 든다. 물론 그중 극히 일부 기록이나 작품들은 이미 교과서에 소개되어 작품의 존재나 내용도 익숙한 몇몇은 있지만, 여전히 『열하일기』는 오갈 든 것처럼 쉬이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에 조성원 작가가 에세이 영역 속으로 끌어들여, 좀 더 쉽게 흥미를 발산시키고 그의 사색을 호흡하며 감상과 해설을 쓰듯 엮어 [조선의 꽃, 열하일기]로 재 탄생시켰다. 따라서 연암과 저자, 독자들이 함께 즐거운 여행을 하듯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정조대왕의 문체반정에도 조선 최고의 찬사로 남다
정조(正祖)에 의해 1792년 시작된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있었다. 이는 '불온한 문체를 올바른 것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왕명에 의해 진행된 이 반정은 일종의 '지적 검열'에 해당한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와중에서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문체반정의 바람을 일으킨 진앙'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에게도 '열렬한 탄사와 저주 어린 비난을 동시에 받은' 박지원의 글들을 모은 문집은 그가 죽은 지 한참 뒤인 190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출간된다.
박지원은 조선 최고의 작가였다. 1780년 쓴 [열하일기]는, 후학들의 수백 권 ‘신 열하일기’로 재탄생하더라도 각자 그 풍미를 부여해줄 만큼 조선 지성의 다이아몬드요, 영원한 거작이다. 따라서 [열하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대중 속으로 깊이 들어감으로써, 국민의 정성 함양에 기여하는 스테디셀러가 될 가치를 지녔다. 평생 이 한 권의 책만 읽어도 독서 인생으로서 부족함이 없을 만큼 역량 있는 책이기도 한 것이다.
연암의 [열하일기]는 조선의 르네상스 진앙이며 조선의 심정적 베스트셀러이다. 조성원의 [조선의 꽃, 열하일기]를 통해 독자는 이제라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열하로 가는 길은 가슴 떨리는 조선 문학의 순례이다.
저자 에세이집
『2천년 로마 이야기』(에세이)
『2천년 스페인 이야기』(선우미디어)
『아내는 밥이다』(2013년 한국문화예술위 창작지원 도서)
『신라 천년의 자취소리』(2014년 세종도서)
『고구려 9백 년의 자취소리』(이상 해드림출판사) 외 6권
수상
문학저널 창작문학상 2회 수상
제1회 소운문학상 수상(수필문학상)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 아르코창작지원금 수혜
『신라 천년의 자취소리』2014년 세종 도서 교양부문 선정 도서
한국수필가협회 제5회 인산기행수필문학상
현)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 재직 중/ 현 그린에세이 편집위원.
**연암의 모습은 실학박물관 소장으로 허가를 득하였다.
**** 교보문고에 접속하기가 귀찮으시다면 02 2612-5552(해드림출판사 편집국 임영숙 선생)에 전화를 하시면 바로 주문이 가능합니다...
조성원 지음
면수 660쪽 |사이즈152*225| ISBN 979-11-5634-133-8 |03910
| 값 18,000원 | 2016년 3월 30일 출간 | 역사 | 한국 |
목차
1. 심양, 성경 그리고 봉천1 ____________________
2. 심양, 성경 그리고 봉천2 ____________________
3. 서탑 도문로 거리__________________________
4. 심양고궁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5. 심양에서 첫날 밤__________________________
6. 하얼빈 역에서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7. 하얼빈 소피아 성당_________________________
8. 북간도라는 곳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9. 위만황궁박물관'(僞滿皇宮博物館) 1____________
10.위만황궁박물관'(僞滿皇宮博物館) 2____________
11. 신흥 무관학교와 만주 군관학교 .________
12. 장춘역과 장춘 서역________________________
13. 북릉 공원에서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4. 전통의 의미
15. 서탑 조선족 시장에서_______________________
16. 보이차 이야기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7. 랴오닝 박물관을 찾아서____________________
18. 오늘은 곤죽 신세_________________________
19. 태평스런 그들을 보며_____________________
20. 모란관 여인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1. 훈허강을 건너며__________________________
22. 혼하 그리고 요동_________________________
23. 요동에 이르러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4. 백탑 아래에서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5. 백탑파에서 세시봉까지 ___________________
26. 천산 가는 길에___________________________
27. 千山에서 索道를 타며 ____________________
28. 인절미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9. 백두산을 생각하며_________________________
30. 옥불원에서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1. 가자! 황금 삼각지대로_____________________
32. 메르스가 주는 상상 ________________________
33. 지란지교를 꿈꾸며 1______________________
34. 지란지교를 꿈꾸며 2______________________
35. 심양서 돌아오는 날________________________
36. 압록강을 건너 간 사람들__________________
37. 애국과 애족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맺는 말 (여행은 새로움이다.)
부록
첫댓글 1주일 몸살로 헤매는 동안 글이 많이 올라와 있군요........이런 열정이 아직 남아있다니 부럽기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