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인종이 신봉문 위에 나와 척준경의 군사들에게 “왜 무기를 지니고 왔는가.”라고 묻자 이들은 “적이 궁중에 들어왔다기에 사직을 호위하려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인종은 “아무 탈이 없으니 갑옷을 벗고 해산하라.”라고 명령하며, 왕실 창고에 있던 은폐(銀幣)를 줄에 달아내려 이들에게 하사하였다. 그러자 척준경이 화를 내며 칼을 빼어 들고 화살로 공격하라고 명령하였고, 빗나간 화살이 인종의 앞까지 이르게 된다. 이즈음 이자겸은 그 일당을 시켜 “난을 일으킨 자를 내주지 않으면 궁중이 위험해 질 것”이라며 인종을 협박했다. 인종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이자겸은 궁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얼마 후 개경의 궁성 동쪽 문인 동화문(東華門)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불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번져 궁궐을 모두 태웠다. 산호정, 상춘정, 상화정의 정자 세 곳과 사찰인 내제석원(內帝釋院)의 행랑 수십 간만이 겨우 남았다. 척신 이자겸(李資謙)의 사돈으로, 여진 정벌 당시 윤관과 함께 공을 세웠던 척준경이 궁궐로 들어가기 위해 동화문 행랑에 불을 지른 것이다.
척준경의 화공(火攻)으로 기세가 오른 이자겸 일당은 궁성 안으로 들어가 최탁, 오탁, 권수, 고석, 안보린 등을 살해했다. 인종을 호위하고 서화문(西華門)으로 빠져나가 연덕궁(延德宮)에 이른 오탁은 척준경의 지시를 받은 낭장 장성(張成)의 칼에 맞아 죽었다. 이자겸은 또 지녹연을 고문한 뒤 지방으로 귀양 보냈는데, 충주에 이르러 지녹연이 더 움직이지 못하자 팔다리를 잘라 길가에 묻어 버렸다. 김찬도 먼 지방으로 유배됐다. 당시 인종은 자신도 해를 당할까 두려워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이자겸이 조정 대신들의 비난이 있을까 염려하여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가, 재종형인 이수가 “왕의 조서가 있으나 어찌 감히 그럴 수 있으랴.” 하고 꾸짖자 조서를 인종에게 돌려주었다.
같은 해 3월, 이자겸은 인종을 아예 자신의 집인 중흥택(重興宅) 서원(西院)에 연금하고, 모든 정사를 스스로 주관했다.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엄과 세도가 날로 거세지자, 인종은 다시 이자겸을 제거할 방안을 궁리하였다. 인종은 내의(內醫) 군기소감(軍器小監) 최사전(崔思全)과 상의한 끝에 척준경을 꾀어 이자겸과 이간질시키기로 했다. 이에 인종은 척준경에게 ‘모두가 과인의 죄이다.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보필해 후환이 없도록 하라’라는 내용의 교서를 내린다.
척준경의 마음이 움직이려 할 때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李之彦)의 종이 척준경의 종과 시비를 벌이다 “네 주인이 왕이 있는 자리에 활을 쏘고 궁중에 불을 놓았으니 마땅히 죽을죄를 지었고, 너 역시 관노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를 전해 듣고 척준경은 격노하였다. 이자겸이 사람을 보내 화해를 청했지만, “너희가 난을 일으키고, 어찌 나만 죽어야 된다 하느냐.” 하며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공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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