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옳고 그릇됨을 판결하는 재판은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뜻을 지닌 그런 유명한 재판들도 많이 있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빌라도의 예수에 대한 재판보다 더 유명한 재판은 일찍이 없을 것입니다. 이 재판이 역사적으로 그렇게 유명한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을 재판하였다는 것 때문입니다. 아마 이 같은 재판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단 한 번밖에 없을 재판일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야가 세상으로부터 재판을 받습니다. 이 같은 기현상은 이 땅에 또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재판은 유명한 재판입니다.
또 하나는 이 재판이 역사상 가장 큰 오판을 한 재판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여기서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인 오판을 하고 말았습니다. 실수도 보통 실수가 어닙니다. 빌라도의 단 한 번의 실수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습니다.
그래서 2천년 가까이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곳에서는 으레 빌라도의 오판을 고발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이 얼마나 엄청난 불명예입니까? 두고두고 고발되고, 우리들 자손 대대로 영원히, 빌라도는 그렇게 고발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지도가자 되고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그만큼 책임이 큰 것입니다. 지도자는 일신의 안일보다는 후대의 평가를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후대의 평가를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의식이고 종말 의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가 마땅히 들었어야 할 소리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1. 하나는 군중의 소리입니다.
빌라도라고 양심이 없었을 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양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면 피차에 유익이 됩니다. 그리고 조화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이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불행하게도 자신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에게도 불행을 끼치게 됩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날에는 너희가 나를 잡아 박해하고 죽이며 이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때가 올 것이다.” 이 말씀은 양심의 타락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온 것입니다. 바로 며칠 전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성대하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열렬히 환영하였습니다. 호산나 노래를 부르며 옷을 벗어 땅에 깔고 그 위로 오시라고 환영을 했습니다. 여기서 군중들이 “호산나”하며 노래를 부른 것은 큰 뜻이 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아람어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고 히브리어로는 “주여 청컨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였다는 말이고,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왕으로, 구세주로 영접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예사롭게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는 중요한 부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랬던 그들이 불과 2, 3일 후에는 그 입으로 이번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여기서 두 음성을 동시에 듣습니다. 먼저는 성난 군중의 소리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의 성난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같은 군중의 소리를 터무니없는 주장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군중의 도움이 없이 정권의 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남의 땅에 와서, 남의 백성을 치리해야 하는 정치인입니다. 그들의 소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허점이고 맹점입니다. 이 세상에서 민주주의처럼 좋은 정치 제도도 없습니다. 최고의 이상을 지닌 정치 체제가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도 맹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중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목소리가 큰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치체제입니다. 마땅히 소수의 의견보다는 다수의 의견이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이 제도가 옳게만 이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밖에 모여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군중의 소리는 살인자 바라바는 석방하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소리입니다. 이것이 대다수 군중의 요구입니다. 이것이 지금 빌라도가 듣고 있는 소리입니다. 지금 군중이 요구하고 있는 소리를 따르면 그 대신 죄 없는 예수가 억울하게 죽게 됩니다.
2. 동시에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도 듣게 됩니다.
군중의 요구는 있을 수 없는 요구임을 그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살인자를 석방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이것은 가당치도 않은 요구입니다. 양심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소리입니다. 발라도는 지금 양심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고민합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아니면 군중의 소리를 들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양심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정권을 지킬 것인가. 이것은 현실적인 고민입니다. 장래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이상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따를 것인가, 우리는 흔히 보아 왔듯이 세상의 정치인들은 극히 현실주의자들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빌라도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양심의 소리를 버리고 군중의 소리에 굴복하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를 군중의 손에 넘겨주고는 대야에 물을 떠서 손을 씻으면서 하는 말이 “나는 책임이 없다”하고 책임을 회피합니다. 이것이 역사적인 오판을 하게 된 순간입니다.
그렇게 해서 빌라도는 몇 년 더 권세를 누리기는 했지만, 후대의 많은 사람들과 사가들은 그를 죄인으로, 오판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양심을 버리고 오늘만을 위하여 입신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사람의 표본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이상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후대의 역사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지막에 있을 심판 따위는 염두에도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현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양심이 밥을 먹여줍니까? 세상이 양심 가지고 살아지는 곳입니까? 빌라도는 양심과 현실과의 싸움에서 지혜롭게도 현실을 택한 사람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그의 손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게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입니다.
3. 또 하나는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를 들었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소리도 들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그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결정적인 실수의 요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하게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빌라도에게 권고를 하셨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에게 암시를 주셨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영감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를 죽이지 말라”, “그를 해롭게 하지 말라” 하고 분명하게 주의를 주셨습니다.
19절에 보면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부인이 빌라도를 찾아옵니다. 와서 하는 말이 “예수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당부를 합니다. 간밤의 꿈에 그로 인하여 애를 많이 먹었노라고 남편에게 신신당부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부인을 통해서 그에게 엄중한 암시를 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우둔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직접 환상과 계시와 꿈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눈앞의 이이만을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환상을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나 이익에 너무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환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부인에게 대신 꿈을 통하여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꿈속에서 예수님의 고난 받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 같은 꿈을 꾼 부인이 와서 신신당부를 합니다. “그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마땅히 들었어야 합니다. 빌라도가 그날 아내를 통해서 주었던 당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더라면 그는 위대한 정치가로 길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후대에 두고두고 위인으로 칭송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군중의 소리를 들을 줄은 알았고 양심의 소리도 들을 줄은 알았는데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은 들을 줄을 몰랐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오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별의 별 소리를 다 듣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들을 소리, 듣지 말아야 할 소리, 모두를 다 듣고 삽니다. 때로는 들어서는 안 되는 소리에 솔깃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들어야 할 소리에는 둔감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무지이고, 비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빌라도가 그런 귀를 가졌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