首丘初心 수구초심 이라 했던가.
사람은 누구나 나고 자란 고향이 있다.
내 고향은 충남 아산시 선장면 가산1 리다.
친필 원고.
아산시 염치읍(현충사)에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부터 살던 生家가
있고, 아산시 음봉면에 이충무공 묘가 있다.
아산시 둔포면에 윤보선 전 대통령의 生家가 있고 그 근방에 묘지도 자리하고
있다.
아산시 인주면에는 조선 최고의 과학자로서 세종대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장영실 묘소가 있는데, 세계 최초의 측우기를 발명한 그의 본관은 아산이다.
일본 아오모리(靑山)의 묘지에 있던 것을 1924년 9월11일 현재의 위치인 충남
아산시 영인면 아산 리로 무덤을 옮긴 김옥균 묘소도 있다.
온양온천, 도고온천, 아산온천으로 유명한 곳이 아산이다.
그러고 보면 나 태어난 아산은, 역사적으로 보나 지리적으로 보나 꽤나 좋은
여건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1962년 여덟 살 때, 가산1 리(일명 '단쟁이 마을') 에서 작은 아버지가 살고 있는
부천으로 떠나왔다.
53년 만에 탯줄 묻은 고향 마을을 찾기 위해 배낭을 메고 가산 디지털역에서
신창(1호선 종점) 行에 올랐다.
지금이야 온양온천역까지 전철이 개통되어 2시간이면 가서 온천에 몸 담그고
바로 올라올 수 있는 거리지만, 당시(60년 대 초) 이사 올 때는 완행열차라 덜커덩
거리며 하루 종일 걸린 것으로 기억 속에 있다.
2시간 만에 온양온천역에 내려 보니 간밤에 눈이 조금 내렸나 보다.
2시간마다 배차 시간이 있는 가산리 버스를 1시간 기다려 승차하니 버스안에
는 10여 명의 나이 많은 승객만이 앉아 있었다.
"기사 아저씨, 53년 만에 고향 마을 가산 리 가는데요,얼마나 걸리나요?"
"1시간 정도 걸리는구먼유"
그때 중간에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누구네 찾아 가남유"
"이름 대면 다 아세요?"
"알고 마다유, 지가 설 세면 팔십 다섯인디 안팎 동네 모르는 사람이 있남유"
이럴 땐 아는 사람 만나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제 또래 쯤 되는 수영이네 찾으려고요"
"이, 알고 말구먼유,지가 가새 리(가산2리의 또 다른 이름) 끝에까지 가니 께, 그전
궁평 리에서 내리셔 논길로 쭉 따라 가면 돼유"
53년 만에 처음 가는 길이긴 해도, 어릴 적 무슨 행사가 있을 때 부모님 손에
이끌려 두어 번 찾은 적이 생각나고, 그 뒤 친척이 부천으로 올라와 커가는 우리
를 보고 안심하면서 내려갔던 일이 몇 차례 있었긴 하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 친구 모임 부부 동반 차 도고온천(아산 도고면)에 하룻밤
묵었을 때, 고향 가는 선장면 이정표를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올라간 적도 있고,
가족끼리 아산온천까지 왔으면서도 일행 때문에 고향 길 팻말만 확인하고 아쉬움
으로 돌아섰기도 하고, 외암 민속마을(아산시 송악면 외암리)과 현충사(아산 염치읍),
공세리 성당(아산 인주면 공세리) 까지 둘러보면서 눈길만 주었을 뿐, 그냥 돌아선
마음을 여기서 어떻게 표현 한단 말인가.
그래, 언제 혼자라도 한번 찾으마 별렀던 게 회갑을 맞이한 지금이었던 것이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시 한눈을 팔고 있자니 버스가 선장면에 들어서고 있었다.
갑자기 아산이 낳은 맹주상 詩人의 〈선장을 지나〉가 창밖으로 스친다.
선장을 지나
맹주상
선장.... 친구는 장날 큰 소주병에 석유를 받아
자전거에 실코 오다가 넘어져 그 귀한 석유를
신작로에 다 쏟았다고 했다.... 쇠파니골 아래
뽀얗게 먼지 일던 토막사 그 자갈길에 철썩 주저 앉아
친구는 엉엉 울었다고 했다. 석유 냄새가 그 길에서
다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다고 했다.
서럽게도 울었다고 했다...
아까 할머니가 일러 준대로 궁평 리에 내려 길 가장자리가 눈으로 희끗 보이는
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평온하고 아담한 '단쟁이 마을'이 저 만치 보였다.
'단쟁이 마을'이라 불리게 된 것은 옛날 이 마을에 붉은 정자가 있었다 하여
그렇게 불렸다 한다.
동네 경로당에서 이장 선거가 있는 날이라선지 몇 사람이 서성이고 있길래,
"수영이 집이 어디쯤인가요?"
내가 물었다.
"요 삼거리 뒷길로 죽 돌아 내려 가면 끄트머리 집이구먼유"
초로의 농부가 웬 타지 객 인가 싶은 눈길로 일러 주었다.
아, 맞다.
삼거리에 서 있는 집(당시는 마을 전체가 초가)이 53년 전, 이 마을을 이사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살았던 그 집이었다.
보리밥이 먹기 싫어 봉당(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마루를 놓지 않고 흙바닥 그대로 둔
곳)에서 밥투정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쌀밥 두어 숟가락을 올려놓고 어서 먹으라
고 달래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삼거리 좌측이 8살 때까지 살던 초가집(당시)
"이게 누구야, 유일(唯一) 이 아닌 감?"
"예, 유일(어릴 적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부르던 이름)입니다.
고향 마을을 굳건히 지키고 계시니 대단 하시네요"
너른 들판이 보이는 맨 끝 집에 80 중후반의 친척 어르신 노 부부만 덩그러니
집을 지키고 있었다.
"부모가 남의 품팔이만 하니 고생을 면해 볼까 떠난 고향을 이렇게 잘 되어
찾아와 주니 고맙구먼"
"예, 올해 환갑이 되다보니 찾아 뵈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쳐서요"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 떠난 고향을 찾고 싶다더구먼"
내 또래 자식 수영이는 '서울에서 사는데 가끔 농사일 도와주러 내려 온다'고
했다.
"두 늙은이가 아침 먹고 경로당 가면 점심.저녘까지 먹고 오니 반찬이 있어야지,
먼 손님이니 점심 차려 내 올게"
뚝딱뚝딱 내온 점심이 고향이라 푸근한 마음 이어선지,맛있게 비우고 반 그릇
더 먹었다.
"옛날에 차도 없었을 텐데, 어찌 짐을 싸서 이사 갔대요?"
"열일곱 살이던 작은 누이가 막내 업고 이불은 머리에 이고, 어머니는 웬만한
살림살이는 다 남 줘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자네는 여덟
살이니 졸졸 따라가면서 도고온천역까지 몇 시간 걸어갔지 아마"
이건 필시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만약 이 시골에 눌러 살았으면 지금 쯤 어찌 되어 있을까를 생각하니 순간, 감정
이 복받쳐 올랐다.
부모님이 부천으로 이사 가게 된 용기가 무척 궁금한데, 모두 하늘 나라에 계시
니 여쭈어 볼 수도 없고.
찌 들린 '단쟁이 마을'을 청산하고 좀 더 나으려나 싶은 부천으로 떠나왔지만, 다
른 집은 다 전기불인데 우리 집만 오래도록 등잔불을 켜고 살았으니 쉽게 일어 선
다는 것은 만만의 콩떡이었다.
하여, 스무 번도 더 넘을 정도로 셋방살이로 전전하는 통에 고향 생각은 커녕,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그리움과 애틋함만을 고이 간직한 채, 무정한 세월만 흘려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때가 되면 고향 한 번 들르리라 욕망이 꿈틀거렸지만, 그것은 사치였다.
누군들 자신의 고향을 등져 떠나고 싶었겠는가.
고향 마을을 뒤로 하고 걸어 나오는데 친구들하고 내달았던 바다가 아련한 유년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소싯 적 찾았던 바닷가.
두고 온 고향, 탯줄 같은 고향, 자연이 내려 준 '단쟁이 마을'은 내게 그런 곳이다.
나는 제법 오래동안 고향을 찾고 싶었지만, 세상을 산다는 것 자체가 힘겨운 일이다
보니 이제 사(핑계지만) 내 정신의 탯줄을 묻었던 '단쟁이 마을'을 半世紀가 넘은 후 밟았
으니 참 무심도 하지.
그러나 나는 여전히 고향을 기억하고 있다.
초가 지붕과 언덕배기 소가 풀을 뜯는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단쟁이 마을'을.
내가 아산을 그리워하는 것은 여덟 살까지 자라 커온 그 곳에 나의 살던 고향이
있기 때문 일 테다.
내 유년의 기억을 찾아 반세기만의 귀향이라 할지라도.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마음속 고향은
언제나
곱고 아름다운 것 인가 봅니다
어린시절로 돌아 간 듯한 기분 ~~~
선장을 지나
이글도 전체적으로 잘 어울린 것 같습니다
어린시절을 또렷하게 떠올려주는 것이 절묘했습니다
감사 합니다 ~~~
'수구초심' 여우가 죽을 때 자기가 살던 동굴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즉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