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JTBC '비정상회담' 출연. 이탈리아 남자 알베르토 몬디가 들려주는 진짜 이탈리아 축구 이야기.
[알베르토의 칼럼] 유일무이한 진정한 ‘마에스트로’, 안드레아 피를로2017.11.13 오전 10:20
해외축구 알베르토 몬디 방송인. JTBC '비정상회담' 출연. 이탈리아 남자 알베르토 몬디가 들려주는 진짜 이탈리아 축구 이야기.
피를로가 아주 어린 나이에 프로선수로서 커리어를 시작하던 대략 20여 년 전, 그가 이탈리아에서 연 매출 2천만 유로 이상의 견실한 중견 철강 기업인 ELG Steel의 창업자 루이지 피를로의 아들이라는 점이 주로 회자되곤 했다. 하지만 이 부잣집 도련님은 차후 축구선수로 훨씬 더 큰 부를 축적할 운명이었다. 1995년 5월 21일, 그가 고작 16세에 데뷔를 한 브레시아에서 프로 선수로서의 초기 몇 년간 활약하면서 그는 ‘브레시아산(産) 메트로놈’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브레시아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라 브레시아 팀에서 뛰면서 필드에서는 모든 팀의 선수들에게 정확한 템포를 부여하고 액션을 취하게 하는 그는 메트로놈같이 흐트러짐이 없는 어린 선수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밀란과 유벤투스의 유니폼을 입고 뛰면서 세계 최고로 인정받게 된 후부터 피를로는 마치 자신의 플레이를 통해 남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배우게 만드는 인물, 즉 ‘마에스트로 (거장, 스승)’라고 불리우기 시작했다. 피를로는 여러 별명들 외에도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여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부잣집 도련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는 세련된 축구 테크닉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언제나 겸손하고 모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들이나 난처한 순간들에 자신만의 가치를 잘 드러내 보였고, 또 승리하는 법을 아는 인물이었다. 피를로가 지난 23년 간 이루어 온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를 세계 최고로 위대한 선수이자 현대 이탈리아 축구의 전설로 만들어 준 빛나는 몇몇 장면들을 다시 되짚어 보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이탈리아 축구팬들에게 불멸의 존재로 남아있는 안드레아 피를로를 ‘축구계의 마에스트로’로 만들어준 그의 커리어의 황금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유로 2000 U-21 대회. 2000년 여름, 겨우 21세의 피를로는 어릴 때부터 열렬히 응원하던 인테르 소속의 선수였다. 하지만 그는 네라주리의 캄피오네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고 1년간 레지나 소속으로 임대를 떠나 상당히 괜찮은 시즌을 막 보내고 돌아온 참이었다. 이탈리아 U-21 대표팀의 감독 마르코 타르델리는 슬로바키아에서 열리는 유로 2000 U-21 대회에 그를 소집하였다. 여기서 그는 마침내 자신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능력이란 니콜라 벤톨라 (Nicola Ventola)와 잔니 코만디니 (Gianni Comandini)로 짜여진 투톱의 바로 아래 트레콰르티스타로 뛰는 것이었고, 그의 어시스트와 플레이에 힘입어 이탈리아는 결승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결승에서 체코를 맞아 2골을 터트리며 승리하면서 유로 2000 U-21 대회를 마무리지었다. 총 3골로 토너먼트 득점왕을 차지한 것은 덤이었다. 당시 아직 세리에 A에서 두드러진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세계 수준의 이 경험을 바탕으로 피를로는 자신이 전 유럽의 젊은 유망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 중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며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2001년 브레시아 임대 그는 인테르에서 2년차를 맞았다. 유로 U-21 대회 우승을 이끈 감독인 마르코 타르델리가 네라주리의 벤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를로는 여전히 주전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이전 팀 브레시아로 임대를 떠나게 된다. 바로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의 축구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두 사람과 만났다. 그 해 브레시아에는 선수 커리어를 마무리해가던 로베르토 바조가 뛰고 있었다. 피를로는 이탈리아 역대 축구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선수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배우는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브레시아를 이끌던 카를로 마쪼네 감독은 다리 사이로 볼을 컨트롤하는 피를로가 특별함을 단박에 알아차리고는 그를 주전으로 못박았다. 그렇게 마쪼네 감독은 피를로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어 준 그 역할을 창시했다. 피를로를 전방 공격수들의 뒤에 두는 트레콰르티스타로 뛰는 대신 수비수들의 바로 앞자리까지 끌어내려 고전적 개념의 레지스타처럼 뛰면서 로베르토 바조와 동시 기용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마쪼네 감독의 예상은 적중했고 피를로와 바조는 스펙터클한 장면들을 만들어내면서 브레시아를 무려 리그 7위까지 끌어올리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모든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그 해의 가장 멋졌던 장면은 2001년 4월 유벤투스를 상대로 벌인 경기일 것이다. 피를로는 수비를 파고 나가는 바조를 보고 미드필드를 넘어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40미터짜리 완벽한 롱패스를 날려주었다. 바조는 날아오는 볼을 오른발 바깥쪽으로 받아 멈춘 뒤 상대 골키퍼였던 반 데 사르를 차분하게 제치고 바조 자신조차 자신의 커리어 전체에서 가장 멋졌다고 자부하는 골을 터트리게 된다. 2001년 여름 안첼로티를 만나다 이후 AC 밀란은 같은 구장을 쓰면서 사촌간이나 마찬가지인 인테르가 피를로를 기용하지 않는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즉각 그를 350억 리라(약 1800만 유로)에 영입한다. 당시 감독이던 카를로 안첼로티는 피를로를 수비 라인 앞에 배치하는데 그것은 그가 수비수들로부터 볼을 받아 어떤 플레이든지 간에 즉각 전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독은 마시모 암브로시니와 젠나로 가투소라는 저돌적인 수비형 미드필더 두 명을 피를로의 옆에 붙여 4-3-1-2 포메이션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듬해 밀란에는 후이 코스타와 히바우두라는 대형 선수들이 이적해 오지만 안첼로티는 피를로를 내치기는커녕 오히려 피를로를 수비수 앞에 두고 그의 양 쪽에 가투소와 셰도르프를 붙여준 뒤, 후이 코스타와 히바우두를 원톱인 쉐브첸코나 필리포 인자기 아래에 받치는 일명 ‘크리스마스 트리’ 전술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안첼로티의 이러한 전술적 현명함에 힘입어 피를로는 캄피오네로 가득한 이 팀에서 모든 플레이를 지휘하는 레지스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2003년 여름, 유벤투스를 상대로 자신의 첫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따낼 수 있었다. 세계적 수준에 어울리는 축구선수로서의 커리어가 시작된 것이다. 2005년 이스탄불에서의 결승 밀란 이적 후 4년간 1번의 스쿠데토, 1번의 코파 이탈리아, 1번의 챔피언스 리그, 1번의 이탈리아 수페르코파, UEFA 슈퍼컵까지 모두 들어올린 후 2004-2005 시즌에 밀란은 또 한 번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올랐고 이스탄불에서 맞이할 상대는 리버풀이었다. 전반이 끝났을 무렵, 밀란은 이미 말디니와 크레스포의 두 골로 3-0 으로 앞서고 있었으나 후반 54분부터 고작 6분 만에 제라드, 슈미체르, 사비 알론소에게 연달아 골을 얻어맞고 3-3 동점 상황이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지금도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피를로와 세르징요, 셰브첸코의 승부차기 실축으로 인해 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을 그야말로 리버풀에서 ‘선물’하고야 말았다. 이 경기 직후 26세에 불과했던 피를로는 진지하게 축구계 은퇴를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대해 피를로는 이렇게 밝혔다. “(이스탄불에서의 결승전 이후) 나는 더이상 내가 축구선수나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도 생각이 들지 않았고, 심지어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들여다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독일 월드컵 이스탄불에서의 실망스러웠던 결승전 이후로 피를로는 좌절하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다시 일어서 축구화 끈을 동여매었다. 바로 이듬해 그의 모든 노력이 한 번에 보상을 받는 일이 일어난다. 마르첼로 리피 감독은 독일 월드컵에 나갈 멤버로 피를로를 소집하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역시 피를로-가투소의 미드필더 콤비를 그대로 활용하기로 한다. 전자는 이탈리아의 플레이에 창조성을 부여하고 실행에 옮기는 역할이었으며, 후자는 상대의 플레이를 부수고 볼을 탈취하는 역할이었다. 피를로는 연일 놀라운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중요한 순간에는 가장 결정적이고 믿을 만한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준결승에서 이탈리아는 홈팀 독일과 맞닥뜨렸다. 90분간 두 팀은 0-0으로 승부를 내지 못하고 연장으로 돌입하였다. 경기가 거의 끝나갈 119분경 피를로는 페널티 에어리어 거의 모서리에서 볼을 받아 슈팅을 하려는 듯한 페인트를 건 후 에어리어 안에 있던 파비오 그로쏘에게 기가 막힌 패스를 넣어주었고 그는 이것을 받아 경기를 결정짓는 결승골을 터트렸다. 결승전에서는 프랑스와 맞붙었다. 전 세계가 지단에게 주목하고 있었으나 프랑스 선수들에게 축구를 가르쳐준 ‘마에스트로’ 노릇을 한 것은 외려 피를로였다. 처음엔 마테라치의 1-1 동점골을 만드는 코너킥을 올려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연장전이 끝나고서, 피를로는 드디어 챔피언스 리그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승부차기를 실축했던 그 악몽을 지워버리게 된다. 이탈리아의 첫번째 승부차기 키커라는 책임을 받들고 킥을 성공시켰다. 그렇게 5명의 키커들은 승부차기를 모두 완벽하게 성공시키며 이탈리아를 네 번째로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월드컵이 끝난 후 이탈리아 팀 감독인 마르첼로 리피는 이렇게 말했다. “피를로는 말이 없는 조용한 리더다. 그는 (입이 아니라) 발로 말할 뿐이다.” 2007년 아테네에서의 복수 그 이듬해는 피를로에게 더더욱 만족스러운 한 해였다. 밀란이 또 한 번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올랐고 리버풀과 재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모든 것이 바뀌었다. 리버풀의 골키퍼였던 페페 레이나를 꼼짝못하게 만든 피를로의 프리킥으로부터 밀란의 공격수였던 인자기는 의도치 않게 첫 골을 얻어냈다. 그는 게임을 만들어가는 역할 뿐만 아니라 마스체라노, 사비 알론소, 스티븐 제라드로 구성된 리버풀의 단단하기 그지 없는 중원진을 무기력하게 막아내는 롤까지도 수행했다. 밀란이 2-0으로 승리하면서 피를로는 자신의 커리어상 두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뤄냈고, 그 해 팀 동료였던 카카가 수상한 발롱 도흐 후보에서 5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더할 나위없이 피를로는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선수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유벤투스에서의 도전 2011년 5월 밀란에서 9번째 트로피인 2010-2011 스쿠데토를 차지한 후 32세의 피를로는 계약 종료를 앞두고 있었다. 그는 3년 간의 재계약을 바랬지만 밀란은 1년 계약을 제시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 감독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는 피를로보다 암브로시니와 반 봄멜을 더욱 선호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밀란은 피를로의 선수 생명이 거의 끝난 것으로 여겼다. 팀은 유벤투스에서 27세의 미드필더 자원인 알베르토 아퀼라니를 받고 그를 유벤투스로 넘기는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유벤투스는 세리에 B에서 승격한 지 1년 밖에 안됐고, 리그 7위에 그치는 부진을 보였던 반면, 밀란은 갓 스쿠데토를 따냈던 상황이라 누가 보아도 ‘노장’ 피를로를 보내고 아퀼라니 같은 젊은 미드필더를 받는 것은 합리적인 딜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유벤투스의 신임 감독 안토니오 콘테는 새로운 팀을 구성하고 싶어했다. 모든 이들이 피를로는 이제 나이들고 느려졌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콘테는 새로운 유벤투스를 지휘하는 임무를 그에게 맏기기로 하고 피를로를 중심으로 한 스쿼드를 구성하였다. 밀란이 ‘마에스트로’를 라이벌 유벤투스로 팔아넘긴 것은 어마어마한 실수였다는 것을 모두가 인지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피를로가 나이들고 느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처럼 보였다. 유벤투스에서의 첫 시즌에 그는 유럽 전체에서 패스 성공과 어시스트에 관련한 기록을 다시 썼다. 총 3198회의 패스와 414회의 롱패스를 시도해 그 중 86.9%를 완벽하게 성공시켰던 것이다. 다른 팀 미드필더들은 고작해야 2000회 언저리에 머물 뿐이었다. 이 사실은 피를로가 그야말로 유벤투스의 모든 플레이에 실제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축구의 모든 플레이를 구상하고 쌓아올리는 축구계의 건축가, 말 그대로 진정한 플레이메이커였다. 유벤투스에서의 4년간 콘테 하에서도, 알레그리 하에서도 그는 부동의 주전이었다. 4번의 스쿠데토와 1번의 코파 이탈리아, 두 번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를 따 내며 세리에 A에서 가장 많은 프리킥 골을 성공시킨 선수가 되었다. 그의 28골은 시니사 미하일로비치와 같은 기록이었다. 매번 누군가 완벽한 프리킥 성공 비결에 대해 물으면 항상 피를로는 다음과 대답했다. “브레시아 시절 로베르토 바조를 보며 배웠다.” 유일한 맞수 지난 20년 간, 테크닉이나 전술적 이해도, 플레이 수행 능력 등의 차원에서 피를로와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가 있다면 바르셀로나의 차비라고들 말한다. 이 두 선수는 언제나 선수로서 서로에게 자극제가 되어왔고 모든 이들이 이 둘을 축구사 역대 최고로 위대한 레지스타로 손꼽고 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각기 다른 대회의 결승전에서 차비와 맞닥뜨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피를로의 커리어가 여전히 최고였을 것이다. 2012년 폴란드-우크라이나 유로 대회에서 피를로는 대단한 폼을 유지했다. 8강전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믿을 수 없는 ‘파넨카 킥’으로 승부차기를 성공시켰다. 이어 준결승에서 독일을 맞아 2-1의 승리를 거두는 동안 중원을 완벽히 지배했다. 매 경기마다 피를로는 UEFA 의 ‘맨 오브 더 매치’로 거명될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결승전에서 스페인을 맞아 피를로는 차비를 상대로 경기를 이끌어가지 못했다. 스페인 선수들은 이탈리아 선수들보다 더 폼이 좋았고 더 많이 뛰었다, 4-0의 승리와 함께 유럽 대항전 타이틀을 가져간 것은 스페인이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서로 축하를 건네기 위해 맞부둥켜안은 두 선수들은 바로 피를로와 차비였다. 2014-15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이와 비슷한 역사가 일어났다. 유벤투스는 피를로의 대단한 퍼포먼스에 힘입어 준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누르고 손쉽게 결승에 선착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스페인 선수들은 치열했던 승부 끝에 3-1의 승리를 거두며 비안코네리의 위대한 미드필더의 꿈을 산산조각내 버렸다. 차비는 후반에만 투입되어 뛰었지만 경기가 끝난 후, 마치 축구 천재들 사이에서만 비밀스럽게 나눌 수 있는 우정의 증표로 피를로를 찾아가 포옹을 나누었다. 미국 2015년 36세를 맞은 피를로는 이탈리아 리그에서 버티기엔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하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싶다는 바람으로 뉴욕으로 날아가 메이저 리그 사커의 뉴욕 시티에 입단하였다. 세련되기 그지없는 테크닉으로 미국의 팬들을 매혹시킨 2년이 지나고, 피를로에게도, 서로 다른 두 동반자에게서 얻은 네 명의 자식들에게 자신의 가족이 경영하는 여러 회사들을 나눠 물려받아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피를로 가문이 경영하는 회사 중에는 브레시아 근교의 포도원에서 상당히 좋은 퀄리티의 유기농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로 명성이 알려진 ‘소치에타 아그리콜라 프라툼 콜러’도 있었다. 축구팀을 이끌고 지휘하는 리더로 지난 23년을 보내왔던 피를로는 축구팀처럼 회사를 경영하는 데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비즈니스에서나 필드에서 그가 늘 보여주었던 겸손함과 정확함,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감각을 잃지 않는 그에게 영광의 찬사를 돌린다. 번역: 구지훈 사진 제공: 게티 이미지
기사제공 알베르토 몬디 방송인. JTBC '비정상회담' 출연. 이탈리아 남자 알베르토 몬디가 들려주는 진짜 이탈리아 축구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