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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사랑 여행 스크랩 백화산 태안 마애삼존불입상과 백화산성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12 14.08.14 05: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태안제1경,백화산

휴가지로 인파가 몰리는 여름이 훌쩍 지나서인지 태안으로 가는 길은 하늘만큼 쾌청했다. 그렇다고 서두를 이유도 없으니 적당히 속도를 내며 태안을 향해 달렸다. 누가 궁금해 하는 것도 아닌데 몰래 떠나듯 훌쩍 나선 여행길. 서울을 벗어난 지 2시간 쯤 지났을 즈음 고대하던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만치 아슴아슴 너울거리는 파도를 외면하고 나는 산 쪽으로 차를 몰았다. 태안 하면 바다가 먼저 떠오르지만 바다 만큼이나 내륙도 아름답다.

태안읍내에서 원북 쪽으로 가다보면 태안군의 진산鎭山이자, 태안 제1경으로 꼽히는 백화산이 나온다. 충청도의 산은 그리 높지 않고 완만한 것이 특징인데, 그중에서도 백화산은 바다로 완만하게 이어져있는 산줄기가 누워있는 여인의 형상을 닮았다. 백화산에 오르면 태안반도의 윤곽이, 그 너머 드넓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멋진 풍광을 기대하며 오르는 산행은 힘들 것 없이 가뿐했다. 태안초등학교에서 출발하는 등산로는 바위와 소나무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져 있다.

백화산이라는 이름은 산의 지세가 마치 흰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해서 명명되었다고 하는데, 산을 뒤덮고 있는 바위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읍 북쪽 3리 지점에 있는데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있다. 군 북쪽 13리 지점에 또 백화산이 있는데, 역시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있어 두 산이 유사하다.’라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말없이전하는참선의진리

산행을 시작하고 머지않아 기암괴석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한 바위가 보였다.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이다. 백화산 중턱 바위에 새겨진 이 마애불은 백제 최고最古의 마애불상이라는 가치를 지녔다. 근엄한 표정의 불상에 익숙한 탓인지 강건한 얼굴, 당당한 신체와 묵중한 법의를 걸치고 있음에도 입가의 옅은 미소는 편안하고 인자하게 다가온다.

마애불은 암벽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는데, 가운데 보살입상菩薩立像을 두고 좌우에 여래입상如來立像을 세웠다. 중앙에 본존불을, 양 측면에 보살상을 세우는 일반적인 배치와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다. 양쪽 여래상 사이에 끼여 있는 듯 뒤쪽에 작게 새겨진 보살상은 양손으로 보주寶珠를 받들고 머리에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썼으며 천의는 어깨를 덮어 내려 무릎 부분에서 교차하며 묵중하게 내려뜨렸다. 둥그스름한 얼굴형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자비와 참선이라는 불교의 진리를 말없이 설파하고 있다.

태안 마애삼존불입상은 여러모로 서산 마애삼존불과 비교된다.‘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상이 더 유명하지만 이곳 태안 마애삼존불은 그 특이한 구조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안타까운 점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인데, 부처의 코와 귀가 아들을 낳거나 병을 고치는데 효험이 있다는 속설 때문에 그동안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이 산중에서 수십 수백만 번 쪼음질을 했을 석공들을 생각하니,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들이 원망스러워진다. 그러다 문득, 불상의 눈빛이 마주 보였다. 이 또한 부질없는 마음일 뿐이라는 너그러운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01 백화산 중턱에 자리한 태을암. 대웅전을 지나 오른쪽 길로 빠지면‘하늘과 통하는 자리’라는 뜻의‘태을통천(太乙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02 태안 마애삼존불입상. 강건한 얼굴, 당당한 신체와 묵중한 법의를 걸치고 있음에도 입가의 옅은 미소는 편안하고 인자하게 다가온다 03 백화산 정상부근에서 만나는 백화산성. 자연석을 일정한 크기로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모습이 정교하고 견고하다.


천년의사연이쌓인석성石城가에서

불상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소나무 숲 너머 드리워진 태안 앞바다. 낙조를 향해가는 오후 햇빛이 금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상까지 갔다가 일몰 때에 맞춰 낙조봉에 도착하려면 조금 서둘러야 했다.

잰걸음으로 20분쯤 올라 도착한 백화산 정상, 백화산성白華山城을 마주했다. 1287년(충렬왕 13)에 축조된 산성은 4면이 절벽인 험준한 곳에 쌓아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도록 했다. 산성의 모습은 정교하고 견고하다. 자연석을 일정한 크기로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것이다. 왜구의 침입을 막고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돌을 쌓았던 민초들의 우직함이 천년 세월을 견딘 산성의 모습과 닮아있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 무너지고 정상부근의 100m 정도만 남아있는데, 성 안쪽에는 우물터와 서산의 북주산과 부석면의 도비산에 연락을 취했던 봉수대지가 남아있다. 그리고 봉수대 아래쪽에는 무너져 내린 돌들이 성벽에 기대어 있는데 오랜 세월 풍우에 의해 마모되어 만들어진 부드러운 곡선이 천년 세월의 아득함을 짐작하게 했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 겨우 때를 맞춰 낙조봉에 도착했다. 그리 높은 지대는 아니지만 태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게다가 북쪽 가로림만에서 남쪽 서산방조제와 천수만에 이르기는 태안반도의 아름다운 해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다.

한쪽에는 낙조봉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는데 조선전기의 문신 신숙주(申淑舟, 1417~1475)가 지은‘풍회도서 미경랑(風回島嶼迷驚浪)’이란 시가 적혀 있었다.‘고개 위에 외로운 성 낙조가에 서 있는데 올라서 바라보니 다만 저 바다 하늘에 떠오르는 듯 보인다 바람 불어 돌아가는 도서가 놀란 물결에 희미하고 땅이 궁벽하니 민가에선 묽은 연기 피어오르네 포를 판지 몇 해에 공을 이루지 못했던고 뉘 능히 나에게 조운 통하는 계책을 말해 주려나 다만 술주 사람 앞에서 취하여 망연히 잊고만 싶구나’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 운하는 1134년(인종 12)에 착공하여 조선중기 임진왜란 직전까지 400여 년간 수많은 인부를 동원해 공사가 진행됐으나, 암반과 토사 등으로 완공하지 못했다. 신숙주는 이곳 백화산성에 올라 안타까운 마음으로 서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산마루를 향해 돌아서보니, 해가 곧 바다에 잠기려 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선 이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가졌을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그 수천겁의 사연이 석양빛과 함께 일렁이고 있는 듯 했다.


글. 성혜경 사진. 김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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