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뮤지엄에서 새로운 전시가 열렸다. 저번 전시는 혐오라는 주제로 조금은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작품들로 가득했다면, 이번 전시는 전 전시와 연계되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혐오를 이야기한다. 물론, 전 전시가 나쁘다는 이야긴 아니다. 왜냐하면 확실히 혐오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찌푸린 거고, 그 점에서 전시는 성공적이었으니까. 이번 전시는 적나라하던 혐오보단, 은은한 이야기로 꾸며져 조금은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이번 포도뮤지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포도뮤지엄의 두번째 기획전 / 전시기간 2022년 7월 5일 (화)부터 2023년 7월 3일(월)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매주 화요일 휴무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는 *디아스포라와 다양한 층위의 소수자가 처한 소외와 어려움에 공감하고, 진정한 공존과 포용의 의미를 모색하려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끊임없는 이동과 정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이유로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쌓여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 이 순간도 많은 사람들은 생존이나 안전을 위해, 혹은 자유와 경쟁력을 얻기 위해 낯선 세계를 향해 떠난다. 국적과 비자, 체류, 허가와 같은 개념은 역사가 길지 않으며 그리 공고한 구분도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경계를 나누는 일은 늘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 짓고 누군가를 경계선 밖으로 밀어내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전시는 우리가 만든 약속과 믿음이 혹시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했다. 전시를 통해 서로 다른 정체성으로 구분되기 이전에 하나의 별에서 함께 사는 생명으로서 우리가 가진 수많은 공통점을 상기해 보자. 우리는 모두 언젠가 어딘가에서 이방인이나 소수자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디아스포라
흩어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는 말)
첫 번째 작품 <T1, 이동하는 사람들>, 두 번째 작품 <머물 수 없는 공간>
T1 <이동하는 사람들>
반투명한 장막 저편에 쉬지 않고 움직이며 이동하는 사람들. 그림자만으로는 이들의 출신지와 목적지를 추측하기 어렵다. 한 겹 뒤의 우리는 모두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사람들>의 실제 출연자는 다양한 인종과 연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생김새나 피부색, 옷차림을 볼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다름을 걷어내고 닮음을 정확히 인지할 수 있다.
이배경 <머물 수 없는 공간>, 2022
6개 채널 영상 속 흰색의 육면체들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무한히 확장되는 인공의 시공간을 만들어 낸다. 마치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한가운데 홀로 떠 있는 듯한 착시는 관객에게 막막한 두려움과 함께 평온의 경험을 선사한다. 끊임없이 일렁이는 수많은 개별의 육면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된 파도처럼 확장과 포용의 감각을 일깨운다.
첫 번째 사진 <T3, 아메리칸드림 620>, 두 번째 <짜여진 연대기> 세 번째, 네 번째 사진 <주소, 2008>
T3. <아메리칸드림 620>
바닥에 늘어선 러버덕. 이 오리들이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미국 애리조나 관세국경보호청에서는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기 위해 사막을 횡단하는 이민자와 망명 신청자들로부터 압수하거나 수거한 물건들을 보관하는데, 이 620km의 '죽음의 사막'에선 매년 수백 개의 러버덕이 발견된다. 목숨을 걸고 사막을 횡단해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뒤에 오는 이들에게 방향을 알려줄 수 있도록 러버덕을 이정표로 사용하기 때문에.
리나 칼라트 <짜여진 연대기>, 2015
시야를 압도하는 대형 설치 작품은 이주 노동의 경로와 흐름을 추적하여 색색의 전선을 철조망처럼 직조한 세계 지도이다. 가느다란 선으로 촘촘한 그물처럼 연결된 세계는 이동과 경계가 파생시킨 사회적 긴장 상태와 사회적 함의를 공감각적으로 표현한다.
알프레도 &이자벨 아퀼리잔 <주소>, 2008
부부이자 듀오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알프레도와 이자벨은 2006년 다섯 명의 자녀들과 필리핀에서 호주로 이주했다. 이민의 경험은 이들의 작업 방식과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소>는 개인 물품이 들어있는 상자 140개를 쌓아 올려 만든 대형 설치 작품이다. 한 사람의 살림살이가 빈틈없이 접혀 들어가 있는 각 상자의 크기는 50 x 50 x 50cm로 필리핀에서 세금이 면세되는 우체국 소포 상자의 규격을 가리킨다. 이 고단한 물건들이 누적되어 지어진 커다란 집은 디아스포라 시대를 살아가는 공동체의 연대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첫 번째 <땅을 딛고 바다를 지나>, 두 번째 <사진 신부>, 세 번째 <T4, 주소 터널>, 네 번째 <T5,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T5,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전시와 동명의 애니메이션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는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낯선 존재들이 찾아오면서 일어나는 긴장과 경계, 그러나 결국은 하나의 돌 위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땅 위에 그어진 금을 지우고 부서진 마음을 모으는 내용이다. 서로 다름보다 같음을 발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은 애니메이션은 포도뮤지엄이 기획하고, 미술가 최수진과 뮤지션 나이트오프가 협업해 제작됐다.
요코 오노, 채색의 바다
요코 오노 <채색의 바다>, 1960/2022
채색의 바다는 모든 존재를 위해 열려있는 경계 없는 장소이다. 백색의 적막한 공간과 빈 보트가 놓인 풍경은 시간이 지나면서 관객이 직접 벽에 쓴 메시지로 이내 푸른 바다와 같은 거대한 캔버스로 변모할 것이다. 자유롭게 완성되어가는 공간은 관객 참여 작품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과 그 다채로운 흔적을 반영한다. 소외를 경험했던 세상의 모든 이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로 채색의 바다를 채워 보자.
우고 론디노네 <고독한 단어들>, 2016
포도뮤지엄 2층 우고 론니노네 고독한 단어들을 끝으로 전시는 마무리된다. 제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채 깊은 휴식에 빠져 있는 30여 명의 과아대. 알록달록 화려한 의상을 입고 진한 화장을 한 광대들의 지친 모습은 유쾌해 보이다가도 묘한 애잔함을 자아낸다. 마치 우리의 인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