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12,1-8.11-14; 1코린 11,23-26; 요한 13,1-15
+ 찬미 예수님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하실 건가요? 아마도 갖고 있는 통장과 물건들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남기고 싶은 말들을 가다듬어 볼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일 것입니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이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신 첫날, 남의 집 마구간 구유를 첫 잠자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나실 때는, 또다시 남의 집을 빌려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는, 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감옥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성체성사를 세워주십니다. 제1독서에서 들은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땅을 탈출하기 전날 파스카 음식을 먹었고,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발라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2독서에서 들은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를 기념하시며 빵과 포도주를 주시고, 이것이 ‘너희를 위한 몸’이고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말씀에 따라 교회는 2천 년간 예수님을 기억하며 이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파스카 식사는 이집트에서의 지긋지긋한 종살이의 마지막 날 식사를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제 더 이상 노예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대와 환희에 부풀어 있는 이 순간에, 주님께서 일어서시더니 종들이나 하던 일을 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샌들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고, 그래서 발이 무척 더러웠습니다.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가면, 먼저 그 집 종이 나와서 손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십니다. 당신께서 돌아가실 때가 24시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일은, 이처럼 발을 씻어주신 일입니다.
왜 발을 씻어주셨을까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서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우리는 ‘섬김의 리더십’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정치인들도, 사목자들도 ‘여러분을 섬기겠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일을, 이제 주인이 종에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발을 씻어주신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 2,6-8)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스스로 낮추신 것이고, 실제로 죽으신 것은 그러한 낮추심의 절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자들 앞에서 엎드려 발을 씻어주신 것은 이러한 낮추심과 사랑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거부하면, 주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발을 씻어주신 것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드러내기를 꺼려 하는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우리가 드러내기 꺼려 하는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새로 태어나게 하십니다. 베드로가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하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 말씀은 세례로 새로 태어난 우리 모두 깨끗하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계속해서 비가 내렸는데요, 저는 이 비를,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발을 씻어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판공성사까지 받아 놓고도 또다시 막연한 죄책감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너희는 깨끗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교우분들의 발을 씻어 드리면 좋겠지만, 대표로 열두 분만 발씻김 예식에 모시게 되었는데요, 이분들께는 저와 보좌 신부님이 발을 씻어 드리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발을 씻어주신다고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작년에는 어르신들 열두 분을 대표로 모셨는데, 올해는 초등학생 두 명, 중고등부 두 명, 청년 두 명을 제비로 뽑았고, 중장년 세 분과 어르신 세 분으로 열두 분의 대표를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돌아가시기 전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셨는데, 우리가 바로 그들입니다. 물론 오늘 나오지 못한 우리 가족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가족으로 여기 모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며 우리도 서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댁에 가셔서 가족끼리 서로의 발을 씻어주신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안 하실 거죠? 발을 씻어주신다면 제일 좋겠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못하신다면, ‘발을 씻는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기도해 보시고 그 일을 하시면 좋겠습니다. 집에 있는 가족뿐 아니라 성당에 모인 우리 가족들도 서로 ‘내가 저 사람에게 발을 씻어주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기도하시고 실천하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아마 거창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대단히 작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시기에 열매는 클 것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https://youtu.be/oEa5DYILVwE?si=uHhazWxXyA1NgW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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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첸조 체베르키오(1470-1544),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