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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상)
창설과 시대적 배경
17세기말 프랑스는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혼란과 가난으로 비참했다. 특히 전 국민의 90%를 넘는 농민들의 처지는 더욱 불행했다.
삶을 유지하고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물질적 요건도 미흡했을 뿐더러 더욱 심각한 것은 정신적인 황폐함이었다. 교회와 신자들은 유리돼 있었고 사람들은 신앙과 신앙에 바탕을 둔 삶을 잃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좀더 가까이 가야할 시대적인 요청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존재했던 전통적인 수도회들은 수도자적인 엄격한 교육으로 인해 새롭게 요구되는 봉사활동의 범위가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방문회」가 창설되어 병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기도 했지만 이들도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교회법이 여자 수도자들의 방문 활동을 금지함에 따라 봉쇄 생활로 돌아가야 했다.
1625년 「애덕의 딸 수녀회」를 시작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 병자 간호, 어린이들의 교육이라는 민중적 필요에 적극적으로 응할 수 있는 새로운 양식의 수도회들이 시작됐다. 여기서 「애덕」은 봉쇄수도원의 관상과 고행에 대비되는 자선활동으로서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활동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봉쇄 수도회의 벽을 넘어 여성들이 아이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새로운 「길」이었으며 흡사 사도 바오로가 유다인의 벽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구원의 소식을 전한 것과 비견될 수 있는 놀라운 변화였다. 새로운 수도생활의 형태는 프랑스 전체에 비상한 영향을 주었고 17세기 프랑스 전역에 교육과 병자 간호에 봉사하는 자매들의 공동체들이 급속하게 확산됐다.
프랑스 영성학파
나아가 이들의 활동은 17세기 들어 새롭게 일어난 영성적 쇄신의 자양분을 한껏 흡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들어 프랑스에는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 대거 배출됐고 이들은 소위 「프랑스 영성학파」라 불리우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자, 사목자, 선교사들이었다.
이 학파는 피정과 재교육을 위한 세미나 등을 통해 사제들을 복음화하고 신자들을 교육했으며 신학교를 열었다.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복음과 함께 바오로 서간에 깊이 심취한 프랑스 영성학파는 영성적 쇄신을 이끌어냈으며 16세기 전멸된 「가톨릭 생활」이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도록 지도했다. 당시의 영적 토양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즉 교회 생활의 모든 국면, 곧 전례, 신학, 철학, 전교사업 및 영성 등에서 이 프랑스 신학자들과 성직자들에 의해 강한 추진력과 방향을 제시받았던 것이다.
수녀회의 창설과 루이 쇼베 신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창설자인 루이 쇼베 신부는 프랑스 교회가 「복음화」의 꽃을 활짝 피우는 바로 이러한 영성적, 사목적 흐름 속에서 양성된 사제였다.
쇼베 신부는 지극히 평범한 본당 사제였으나 경건하고 학식과 사목적인 면에서 훌륭하게 균형잡힌 인물이었다. 그는 본당 신자들을 돌보면서 다른 대부분의 프랑스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버려진 환자들, 교육받지 못한 어린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우리의 사도직 첫 터전은 주위에 산재하고 있는 마을들이었다. 우리의 첫 사명은 여아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방문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를 높이기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다른 공동체들 뒤에서 이삭을 줍는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회칙 초안 제1장)
1696년 작은 마을 르베빌라 슈나르의 본당 신부였던 그는 처음으로 마을 처녀 4명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 그 중 마리안 드 티는 2대 원장이자 수녀회의 공동 창립자로 간주된다. 귀족 출신으로 높은 교육 수준과 열정으로 수녀회를 위해 헌신한 마리안 드 티는 아무런 문서도 남겨두지 않은 루이 쇼베 신부를 대신해 자신들의 정신을 이렇게 요약했다.
『교회의 유익과 이웃의 필요를 위하여 하느님께 나 자신을 바친다.』
이렇게 창립된 작은 공동체가 점점 자라나 확산되기 시작했고 쇼베 신부는 이를 샬트르 교구에 위탁했다.
그리고 1708년 샬트르 교구는 이들을 받아들어 공적으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란 이름을 주었다.
이후 수녀회는 국제적인 수도회로 성장해 28개국에서 복음화의 꽃을 피우고 있으며 한국에는 1888년에 진출한 이후 1966년 서울 관구와 대구 관구로 분리돼 교육, 의료, 본당 및 해외선교, 사회복지, 특수사도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난 1996년에는 창설 300주년을 경축하고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1월 21일, 박영호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도회 (중)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의 창설자 루이 쇼베 신부는 자신의 사상과 가르침을 담은 단 한쪽의 문헌도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영성과 가르침은 오직 구두로, 또는 행동과 생활 방식을 통해 파악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영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삭을 줍는 자세였다. 당시 수많은 수도 공동체들이 설립되고 운영됐지만 쇼베는 그런 큰 수도회들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하는 작은 곳에서 자신의 소명을 실천했다.
여기에 자신의 공동체가 성장하게 되자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애착심을 버리고 그 공동체를 교구장에게 위임함으로써 드러낸 이탈의 영성은 그의 정신을 도욱 잘 드러낸다.
그의 영성에서 보여지는 것은 잘 익은 열매들을 거둔 후 들판에 버려진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사목에 임했으며 결코 자신을 우선하지 않는 이탈의 자세였던 것이다.
한 권의 문헌도 남겨두지 않은 쇼베신부의 영성은 그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마리안드 티에게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아리안은 유서에서 『교회의 유익과 이웃의 필요를 위해 세속을 떠나 하느님께 나 자신을 바칩니다.』라고 고백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와 그 창설자 루이 쇼베 신부, 그리고 후대 회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영성은 무엇보다 사도 바오로의 정신이다.
쇼베 신부 당시 프랑스에서는 전쟁의 황폐함 후에 사람들은 물질적 결핍으로 인한 가난에 시달렸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앙 생활 자체를 잃었다. 그에 따라 신자 재교육이 가장 시급한 현안의 하나로 손꼽혔고 그 돌파구의 모색이 사도 바오로의 재발견이었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외적으로는 어린이들을 교육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는 활동이었다. 즉 『어린이들을 가르치고 가난한 이와 병든 이들을 방문함으로써 그 마을 사람들의 인간적, 영적 품위를 높이기 위해 일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영혼 구원을 위해 인간 본래의 품위를 끌어올리려는 창설자 쇼베 신부의 사도적 열정과 희생이 기초가 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영성은 근원적으로, 모든 이를 비참에서 구원한 그리스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영성적, 내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파스카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바오로 영성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다. 어떤 처지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해 기쁨과 충만함이 넘쳐나고 그 충만함을 나누는 생활이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물질적인 엄청난 풍요를 누리고 있다. 또 이런 풍요를 더 풍부하게 누리기 위해 무한의 경쟁 속에 살아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물질과 경쟁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반면 그 안에서도 여전히 하느님을 열망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느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쩌면 이러한 인간 상황은 예수 당시에도 마찬가지 일 수 있었다. 당시 물질적 풍요를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누렸고 수많은 다른 종교와 그 종교의 신들이 숭배됐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은 그리스도로 인해 충만함을 느끼게 되고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하심을 체험하면서 어떤 처지에서도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기쁨을 누리며 가진 것이 없어도 부유했다. 더 많이 갖거나 다른 이를 이겨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삭 줍기의 영성 역시 작은 것 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이며 영성이라는 것이 결코 멀리 있는 특정한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과 친교를 맺고 살아가는 정신이다.
사도 바오로의 영성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공동체이다. 인간의 품위와 가치를 강조하면서도 공동체를 존중했다. 현대인들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다. 하지만 오히려 홀로서기에 자신이 없고 공동체에 대한 갈구가 더 큰 것이 현대인들이다. 사도 바오로는 항상 공동체를 형성했다. 「친교의 영성」이 그래서 수도회에 매우 중요한 영성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중심의 파스카 신비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영성의 핵심이며 이는 300여년 동안의 수녀회 역사 안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하느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은 결국 이웃 사랑으로, 특히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가난하고 미소한 이들을 섬기는 가운데 바오로 사도처럼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려는 삶으로 드러나게 된다.
수도회 창립 192년만인 1888년 4명의 선교 수녀들이 한국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게 된다. 아직 순교자들의 선혈이 마르기도 전인 한국 땅에 최초의 수도회로 자리잡은지 100년이 훌쩍 넘은 오늘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새천년기 새로운 복음화의 요청에 따라 또 새로운 면모로 일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1월 28일, 박영호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샬트르 성바오로 수도회 (하)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708년 샬트르시의 생모리스가로 이전하면서 이곳의 지명과 사도 바오로의 선교열을 본받고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 이름은 1861년 교황 비오9세를 통해 교회 안에서 공인된 이름으로 정착됐다.
이후 여러 곳에 분원을 두고 해외선교에 나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존폐의 위기에 직면했었고 프랑스 국내에서는 속화법으로 인해 또 한차례 중대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꾸준하게 성장해왔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새로운 선교의 보고를 발견한 수녀회는 홍콩, 베트남, 일본에 수녀들을 파견한데 이어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도 1888년 수녀를 파견하게 된다.
수녀들이 제물포에 첫발을 디딘 그 해는 조선왕조가 오랜 쇄국을 포기하고 개항을 단행한지 불과 12년이 지난 때였다. 처음으로 조선 땅에 수녀라는 존재를 알려준 4명의 수녀는 7월 22일 제물포항에 상륙해 정동에서 파스카의 여정을 시작했다.
수녀들은 1894년 제물포에 첫 분원을 설립한 후 평양, 제주도까지 분원을 설립하고 학교 교육, 본당 사목, 의료 사업 등 사도직 활동을 시작했고 대구대교구가 설정된 후 더욱 성장해나갔다.
1948년 한국 관구가 설립된 후 의욕적으로 발전을 도모해온 수녀회는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또다시 혼란과 시련의 시기를 맞는다. 하지만 1960년 첫 한국인 관구장 수녀의 탄생으로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며 쇄신을 도모하던 수녀회는 1967년 서울관구와 대구관구로 분리됐다.
1995년 수도회 창설 300주년을 지내고 새로운 천년기를 맞은 수녀회는 이제 새로운 복음화의 요청에 부응해 어떻게 카리스마를 실현해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차근차근 그 도전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5년 창설 300주년
교회와 수도자들은 오늘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시점에 서 있다. 수녀회는 창설 300주년을 맞아 96년「새로운 복음화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카리스마의 실현」을 주제로 가진 심포지엄에서 현대 사회안에서 카리스마의 실현을 위한 도전과 과제들을 점검했다.
여기에서 수녀회는 우선적 과제들을 신앙교육,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적 사랑, 영성의 심화, 토착화의 사명, 외방선교 등 5가지 측면에서 검토하고 이같은 과제들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심포지엄은 이 과제들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사도적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확고희 해아하며 이 사도적 영성을 심화하기 위해 초기 양성과 개인적, 공동체적 차원의 계속적인 양성이 절실하다고 보았다.
오늘날 수도자는 전문인으로서 양성돼야 한다고 본다. 즉 수도자는 기도와 복음, 친교와 관계의 전문가로 불리우며 이는 수도자 사도직의 존재적 차원을 잘 드러내는 표현들이다. 뿐만 아니라 기능적 전문인으로서의 양성 또한 중요한 부분이다. 아울러 이러한 전문가로서의 양성이 이뤄지는 장은 바로 공동체이다.
사도적 수도자는 세상 안에 살면서 세속화의 도전을 받게 마련이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현대 세상에 맞게 봉사하려면 현대의 도구에 능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응 가운데 복음적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며 따라서 전보다 더욱 영성을 강화해야 한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300년 역사와 100년이 넘는 한국 수녀회의 역사는 수도회 카리스마의 실현이었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세계를 맞아 수녀회는 새로운 복음화의 요청에 부응하고 무엇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내적 쇄신, 사도적 수도자로서의 확고한 수도신학을 바탕으로 한 의식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교회의 유익과 세상의 필요를 위해」투신하기 위해 노력하며 활동을 통해서만 아니라 존재 자체를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증거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수녀회가 되기 위해 현대 사회의 도전에 나서고 있다.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상)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일하라」는 생활 표어로 인류복음화에 기여하고 있는 포교 성베네딕도 대구 수녀원(원장=이명희 수녀), 수녀원은 올해로 한국진출 76주년, 대구 수녀원 설립 51주년을 맞는다.
전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베네딕도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실현하고 있는 영성은 바로 공동체 삶과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19세기 말,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선교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한 독일 보이론 베네딕도 회원 안드레아스 암라인 신부는 1884년 포교 베네딕도 수도회를 설립했다.
다음 해에는 수녀회가 설립됐고, 수녀회의 모원은 독일 뚜찡(Tutzing)으로 옮겨 정착했다.
암라인 신부도 마찬가지로 수도회의 선교활동이 베네딕도회의 전통에 따른 수도 공동체 앞에서 그 공동체의 삶에 힘입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특정 활동을 목표로 설립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수도생활이 허락된다면, 그들의 봉헌생활 그대로를 세상 안에서 보여주고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도직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직,간접적인 선교활동을 펼쳐나간다.
특히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만연한 현실에서 서로를 더 잘 섬기는 삼위일체 공동체의 신비,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공동체가 함께 생활함으로써 특히나 전례가 중시되고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공동 성무일도(Opus Dei), 영적독서(Lectio Divina)와 노동이라는 생활리듬 속에서 하느님 중심의 영성을 구체화한다. 공동기도는 모든 선교활동의 가장 큰 뒷받침이 된다. 때문에 포교 성베네딕도 대구 수녀원도 4명 이상의 공동생활이 용이한 의료사도직과 교육사도직에 우선 힘을 쏟게 된다.
포교 성베네딕도 여자 수녀회의 초대 총장인 비르깃다 코르프 수녀는 아프리카 남부, 브라질, 필리핀 등지에 수녀들을 파견했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인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때는 1925년, 당시 원산교구장이자 덕원 감목 대리구 교구장이던 보니파시오 싸우어 주교의 초처으로 4명의 독일 수녀가 파견됐다. 그리고 2년후의 1927년 원산분원은 정식 수녀원 본원(Priory)로 승격됐다.
한국에서의 활동은 교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후 무료 진료소, 빈민학교 유치원 등지서 일하고, 가난한 이들은 물론 청각장애자 등 장애인도 함께 돌봤다. 북한에서의 선교활동은 원산본원을 중심으로 5개 분원에서 활발히 이뤄졌는데 이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잃는 결과를 맞는다.
일본군의 횡포에 이어 49년에는 공산당에 의해 수녀원이 폐쇄, 한국 수녀들은 강제해산 당한다. 20여명의 독일 수녀들은 다른 신부, 수사들과 함께 5년간 평안북도 강계군 진천에서 죄수 아닌 죄수로 피눈물나는 강제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당시의 참혹했던 수용소 생활과 「죽음의 행진」으로 일컫는 피란길의 고통은 살아남은 여러 신부, 수사, 수녀들의 피란기, 회고록, 담화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50년 12월, 월남한 한국인 수녀들은 부산에서 극적으로 모여 다시 수도생활을 시작한다. 미국의 삯빨래, 삯바느질 등으로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던 중 최덕홍 주교의 도움으로 대구 남산동 주교관으로 보금자리를 옮겨 남한에서의 새순을 틔운다. 54년 1월 본국으로 송황됐던 독일 수녀들은 55년 다시 남한으로 파견돼 선교활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52년에는 공평동에 남한에서의 첫 분원을 마련하고 성 안토니오 의원을 개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면서 전교를 시작했다. 남한에서 지원자들은 갈수록 늘어 신암동 분원과 함께 파티마 의원을 개원했는데 이것이 현재의 대구 파티마 병원의 시작이다.
현재 대구 수녀원은 대구광역시 북구 사수동에 자리잡고 있다. 85년 12월에는 지금의 위치로 본원과 수련소를 이전했고, 수녀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수녀원을 분가하기로 결정하고 87년 포교 성베네딕도 서울 수녀원을 설립했다. 대구 수녀원에는 총 334명(2000년 6월 통계)이 함께 수도생활을 꾸려가고 있다.
이들은 선교활동도 80년대 이전까지 해외원조 등을 받기만 하는 상황에서 90년대 들어 교회가 아닌 나누는 교회의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3월 4일, 주정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포교 성베네딕도 수녀회 (하)
남한에 정착 후 포교 성 베네딕도 대구 수녀원(이하 대구 수녀원)은 꾸준한 발전을 거듭, 본당선교.해외선교. 성미술등 총 12가지의 다양한 사도직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 툿찡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로마 총원 산하에는 13개 수녀원 본원이 속해 있는데 그중 분원이 가장 많은 수녀원이 대구 수녀원(25개). 그중 대구 파티마 병원은 수녀원에 속한 가장 큰 분원이다. 북한 선교 시절 가난한 이들과 가장 가까이 접하며 봉사활동을 펼칠 수 있는 사도직은 의료 부분이었다. 초창기 선교활동 시작 때부터 중점적으로 실현해 오던 교육사도직과 함께 의료사도직은 여전히 큰 위상을 차지 하고 있다. 또 마산 파티마 병원 운영과 함께 현재 창원 병원이 시공 중이고, 중국의 애민병원 건립에도 큰 힘을 보탰다.
대구 수녀원은 처음 선교를 시작했던 원산에서 다시 선교 할 수 있기를 갈망하며 북방선교정책과 북한 돕기운동에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기도와 협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중국 애민병원도 중국과의 교류와 활동이 결국 북한 선교 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그것을 희망하면서 건립에 적극 나섰던 것이다.
교육사도직 활동으로는 김천 성의,여자 중.종합고등학교, 함창 상지여자중.종합고등학교를 비롯해 8개의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본당사도직활동으로는 브라질 상파울로와 미국 LA 등을 포함 총 24개 본당에서 선교를 하고 있다.
현재 대구수녀원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힘을 기울이는 활동은 성서사도직. 수녀원의 성서교육은 지역 선교 및 신자 재교육의 일환으로 1983년 3월 파티마 육아상담실에서 가진 어머니 성서모임이 그 시작이다.
모임은 갈수록 커져 85년에는 어버이 성서모임으로 개칭 하고 대구대교구로부터 공식인가를 받았다. 99년까지 졸업생은 총 4600여명을 넘어셨으며, 95년 시작된 구미성서학교는 총 2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현재 재학생이 600여명 가량이다.
성서교육에 대한 열의는 미국 LA에서도 활발히 실현되고 있다. 대구지역에서 빠스카 청년성서모임을 시작한 것도 대구 수녀원이 최초. 현재 청년성서모임은 대구대교구를 비롯한 타 수도회에서 담당하고 있다.
또한 대구 수녀원에서는 성서교육이 단순한 공부에 그치지 않고 말씀의 생활화와 더욱 깊은 영적묵상으로 이끌기 위해 생활성서 강의와 함께 묵상나누기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다. 현재 수녀들을 대상으로 묵상나누기를 실천.교육하고 있으며 신자들이 말씀을 묵상에서 실천하는데 도움을 줄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다.
대구 수녀원은 칠곡 연화리에 피정의 집과 난치성 결핵환자 요양시설 '보금자리, 경남 창원 장애인종합복지관도 각각 운영하고 있다.
본원에서의 사도직 활동은 성상제작 및 성미술, 제의 제작, 번역 및 저술활동, 농장 운영 등으로 이뤄진다. 특히 본원 농장에서는 직접 약초를 재배해 파티마 병원 등의 생약 제재로 공급하고 있다.
해외선교에 있어서도 큰 발전을 보이고 있다. 80년대 이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교회의 모습으로 변모, 대구 수녀원에서는 해외교포사목을 위한 선교사 외에도 아프리카, 미국, 독일, 중국 등지에 20여명의 수녀들을 파견했다.
수녀원에서는 각 분과별로 모임 및 교육을 가지고 이러한 여러 사도직활동의 발전에 힘을 쏟는다. 특히 1977년 이후 수도적 재양성 프로그램을 강화, 종신서원자의 정기 교육을 비롯해 노인 수녀들의 재교육을 위한 '갈릴리모임' 등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활발히 운영 중이다.
이 모든 사도직 활동은 공동생활과 기도생활의 조화에서 힘을 얻는다. 대구수녀원도 그들의 봉헌생활 그대로를 세상 안에서 보여줌으로써, 그 봉헌생활을 보고 그리스도를 알게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선교활동을 펼친다.
따라서 이들은 내적 침묵과 거룩한 독서에서 나온 전례로써 이 세상에 감동을 주며 참된 것을 증거한다. 또 서로를 존중하고 섬기는 공동체적 삶을 통해 공동체가 현대사회의 자유주의, 개인주의, 가정과 공동체 분열에 대답하고 새로운 사도직에도 마음을 개방하도록 노력한다.
구체적으로는 여타 베네딕도회와 연계해 여성과 인권문제, 복음의 토착화, 타종교와의 대화, 북방선교 등 에 꾸준한 노력을 기울인다(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제10차 총회 메시지 참조).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상)
창설자와 수도회 영성
한국교회에 외국 선교사들의 손길이 곳곳에 펼쳐지고 있을 때, 당시 제2대 평양지목구장이었던 요안 에드워드 모리스 몬시뇰(1889∼1987)은 최초의 한국인수도회를 창설할 것을 결심했다. 강완숙(골롬바), 이순희(루갈다) 등 여성순교성인들의 발자취를 볼 때 모리스 몬시뇰은 한국교회의 복음화에 여성의 역할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당시 한국에 진출해 있던 미국 메리놀 수녀회 선교사들이 한국문화 이해와 언어소통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한국인선교사들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이같은 요청에 따라 한국 자체에서 수녀회가 탄생하게 됐다. 바로 1932년 6월 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축일 날 봉헌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이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과 온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봉사하기 위해(회헌 1조)」 창설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외국인 선교사와 함께 이 땅의 복음화 기틀을 다져가기 시작했다.
1930년 평양지목구장으로 선출된 모리스 몬시뇰은 1914년 사제품을 받고 21년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23년 한국선교사로 임명된 모리스 몬시뇰은 평양 영유본당사목을 비롯해 선교사들을 위한 어학원을 세웠다.
또 한국인 성직자와 수도자 성소에 큰 관심을 가졌던 몬시뇰은 양기섭·강영걸 신부, 제5대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가 사제품을 받고 교구 사제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 이뿐 아니라 신학생을 로마와 일본으로 유학보내기도 했다.
이같은 노력과 함께 모리스 몬시뇰은 한국인 수녀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24년 한국으로 진출한 메리놀회 제노베파, 실베스텔, 프란치스카, 장정온 수녀에게 수련을 위탁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지원자 수는 급속히 늘었고, 마침내 1938년 2월 18일 교황청으로부터 수녀원 창립 및 회헌을 인준받게 됐다.
모리스 몬시뇰의 선교열의는 수도회 창설뿐 아니라 34년 월간잡지 「가톨릭연구」 창간으로 이어졌고, 평양지목구 가톨릭운동연맹을 조직해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활성화하고 문맹퇴치, 계몽에 힘썼다. 그가 평양지목구장 몬시뇰로 임명될 때만 해도 9개본당, 65개 공소, 신자수 7천여명이었던 교세가 6년만에 19개 본당 134개 공소, 17738명으로 증가했다.
신사참배에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그는 재임 6년만에 지목구장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59년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선교사로 재임명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지도, 강화·답동본당 보좌를 지냈다.
30년 넘게 해외선교에 힘을 쏟았던 그는 건강악화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고 1987년 98세의 일기로 선종했다. 이같은 모리스 몬시뇰과 초창기 메리놀회 수도자들의 열의와 노력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한국교회 창설의 자립정신과 순교의 전통을 수도회의 정신으로 이어가고 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의 창립정신은 성 아우구스띠노 규칙과 회헌,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의 사도적 모범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마음을 드높이는 기도정신과 한마음 한뜻으로 가족 공동체를 이루는 공동체 정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정도까지 자아를 포기하는 선교정신」으로 요약된다.
이를 위해 수도자들은 매일 미사와 시간기도, 성체조배, 십자가의 길 등의 기도와 활동, 노동과 휴식, 기쁨과 괴로움을 나누는 공동체 정신을 실현하며 69년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8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중)
서울 성북구 정릉 3동 산1-15번지, 서울 높은 산자락에 위치한 수녀원에 이르면 도심의 분주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수도자들의 그윽한 영성의 향기만 고요 속에 묻어 나온다. 산사의 침묵 가운데 유일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수녀원 정면에 자리한 수련원 증축공사장에서 나오는 조용한 소음뿐이다. 인부들도 수녀원 분위기에 젖은 탓인지 사람들의 소리는 쉬이 들리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첫 방인 수도회로서 수도자들의 역할이 컸기에 현재 수련원을 넓혀야할 만큼 수도자들이 많이 늘어났다. 이같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는 크게 창설기·시련기·재건기·발전기 나뉘어 오늘에 이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31년 평양 영유읍 상수구리 257번지에 기와집 2채를 매입하고 5명의 지원자를 양성하면서 본격적인 수도회의 역사는 시작된다. 모리스 몬시뇰에 의해 태어나 수도회 첫 서원식이 있기까지의 창설기에는 메리놀 수녀회 제노베파 수녀를 비롯해 실베스텔 수녀, 프란치스카 데레사 수녀, 장정온 수녀가 수녀양성을 맡았다. 상수리 모원에서 공동생활을 함께한 수도자들은 모두 17명. 이들은 선교수녀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초창기 일손이 모자라는 본당에 나가 성가를 가르치고 어린이들의 교리를 맡기도 했다. 36년에는 창설자인 모리스 몬시뇰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38년 2월 18일 교황청으로부터 수녀회 창립 및 회헌을 인준받았다.
수녀원이 창설된 지 꼬박 6년만에 교황청의 인준을 받은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이를 계기로 평양 관후리, 대신리, 서포, 평안북도 비현, 신의주, 마전동 본당과 평양교구 내 학교, 사회복지 시설 등에서 폭넓은 선교활동을 펼쳤다.
초창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 수도생활과 더불어 선교를 해왔던 11명의 수녀들은 1940년 6월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축일날 제1회 서원식을 맞게됐다. 한국교회가 낳은 수녀회의 맏딸이 된 것이다.
41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사태가 악화되면서 메리놀 선교사 전원이 본국으로 떠나면서 수도회는 시련기를 맞는다. 이로써 한국인 메리놀 선교사 장정온 수녀만 남았고 장수녀는 제4대평양 대목구장 오세 주교로부터 원장 임명을 받았다. 일제하의 힘든 상황에서 수녀회를 이어가던 중 45년 광복의 기쁨을 맞았지만 이것도 잠시뿐, 수도회 첫 종신서원 예정자 면담이 있었던 49년 홍용호 주교가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수도회 건물과 재산은 몰수당하고 수녀들은 강제해산됐다. 50년에는 장정온 수녀도 공산당에게 피납됐고 결국 11명의 서원수녀와 1명의 수련자를 북녘에 남겨둔채 17명의 서원수녀와 3명의 수련자들만 남하했다.
부산으로 내려온 수녀들은 제2대 원장 강베드로 수녀와 함께 부산 대청동독립 가옥을 신축해 본원으로 사용하면서 남한에서 재건기를 맞이했다. 다시 수련소를 재건했고 53년에는 청주로 최초의 분원을 파견하면서 수도회 선교활동을 이어갔다. 서울 흑석동으로 다시 본원을 옮긴 55년, 당시 춘천교구장이었던 구주교의 도움으로 춘천 효자동에 수련소를 재개했고 부산, 인천, 서울, 강원도 등지에서 본당·교육 사도직을 진행해갔다.
57년에는 드디어 제1차 총회를 개최할 수 있었고 파물라 수녀를 3대 총원장으로 선출했다.
서독 파다본 교구에 의료 및 본당사도직을 위해 수녀 4명과 지원자 36명을 외국으로 파견하기도 했던 수도회는 같은 해인 62년 서울 정릉으로 본원을 이전하고 69년에는 재단법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로 독립재단 인가를 받았다.
남한에서 평양교구 소속으로 활동을 해왔던 수도회는 70년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과 평양교구 캐롤 교구장간의 협약으로 통일이 될 때까지 서울대교구 소속 수도회가 됐다. 현재 본원에 자리한 이후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창설자의 정신을 이어 당시 복음말씀에 목말라하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가톨릭성서모임을 전개, 전국적으로 성서사도직을 확대해나갔다. 한민족과 온인류를 위해 선교영역을 넓혀갔던 수도회는 83년 부산 영도 성모의 집을 개원하면서 수도회 첫 빈민사목을 시작했고 현재 미국, 중국까지 선교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장정온 초대원장으로부터 시작된 수도회의 역사가 현재 13대 총원장인 김숙자 수녀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1년 4월 22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하)
'우리 민족과 온 인류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창립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본당사도직을 중심으로 교회와 사회 전 영역에서 광범위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다.
수도회 창립초기부터 의료사도직과 사회복지 사도직을 병행해온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교구 청소년 사도직을 비롯해 80년대 이후에는 노인, 장애인 등 사회복지분야, 90년대는 도시빈민, 외방, 북방선교까지 참여하고 있다.
전국 14개 교구 85개 본당에 171명의 수녀를 파견하고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독일, 미국 등 해외교포본당에도 수녀를 파견, 본당사제를 도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돕고 있다.
파견된 수녀들은 본당의 특성과 지역이 필요로 하는 일에 주력하지만 수도회의 특별 카리스마인 성서공부를 통한 신자재교육에도 힘을 쏟는다. 본당사도직과 함께 중점적으로 펼치고 있는 또 다른 사도직은 지난 30년동안 수도자들의 수도생활은 물론 제반 사도직 활동에서 영성적인 뒷받침을 해온 성서사도직이다. 수도회는 수도자 양성초기부터 성서 그룹공부와 성서 40주간으로 성서교육을 실시해 신자들의 교육에 앞서 수도자들의 영성생활을 풍요롭게 한다.
이같은 성서사도직은 당시 수도자들이 교회 내 성서 전문 학자들을 찾아 다니며 자문과 도움을 받아 수녀원 내에서 시험단계를 거쳐 1972년 대학생을 중심으로 처음 시도됐다. 이듬해부터 전국 대학생들에게 급속도로 확산됐던 성서모임은 74년부터 직장인들과 어버이들이 참여하면서 어버이 성서모임으로 정식 발족됐고 '가톨릭성서모임'으로 개칭했다.
가톨릭 대학생 성서모임은 87년 서울대교구 소속 청년 성서모임으로 전환됐고, 어버이 성서모임은 수도회에서 관할하고 있다.
성서모임과 아울러 수도회는 성서모임 가족지였던 '성서와 함께'를 84년부터 월간잡지로 발간하면서 성서관련 전문 잡지로 자리를 굳히며, 성서 및 영성서적도 펴내고 있다.
본당·성서사도직과 함께 시대의 요청에 따라 교육, 의료사도직을 병행해온 수도회는 다수의 유치원과 어린이 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남 성모병원, 북한 신포 원전 의무실 등 3개 병원 원목실에서도 일하고 있다. 서울, 전주 교도소 등지에서 교정사도직도 수행하고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바오로 선교, 무료급식소, 가출소녀쉼터, 공부방 등 빈민사도직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장애인, 양로원도 운영도 하고있는 수도회는 한국교회가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따라 페루 리마의 쵸시카 교구에 수녀를 파견하고 94년부터 외방선교를 시작했다. 5명의 수녀가 빈민지역인 깐떼 그란도에서 공소사목과 사회사목, 보건소를 돕고 있으며 루린 교구의 비야 엘 살바도르 지역에서도 선교활동을 하고있다. 이와 함께 북방선교를 위해 중국 길림성 용정시 용정본당과 제일 유치원에 수녀를 파견하고 있다.
다양한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의 새천년기 또다른 선교 영역은 북한선교다. 평양에 모원을 두고 있는 수도회는 북한을 새로운 선교지가 아닌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받아들이고 입회 때부터 북한선교를 공동체의 소명으로 인식하는데 뜻을 같이하고 있다. 따라서 수도회의 북한선교 방향은 주교회의 민족화해 위원회와 뜻을 같이하며 공조체제를 이루고 있다.
50여년간 신앙의 불모지가 된 북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도회는 외방선교와 사회복지, 빈민사목 등 사회선교의 경험을 선교의 발판으로 삼고있다. 또한 북한사회와 주민들을 이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의식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북한선교의 디딤돌이 될 수 있도록 수녀를 파견하고 있다.
1932년 5명으로 시작된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는 현재 476명(수련자 제외)의 수도가족들이 70년의 역사를 이어가며 수덕을 쌓는 수도생활과 함께 민족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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