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9일 연중 제9주간 금요일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37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양반의 후예로 사느라고
사람들은 가문을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세계에 많은 성씨가 있습니다. 2000년 통계에 의하면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는 성씨는 이(李)씨라고 합니다. 이 씨는 중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데 중국 사람들의 약 7.4%에 해당하는 9,600여만 명이나 된답니다. 그 다음은 왕(王)씨와 장(張)씨의 순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씨를 쓰고 있답니다. 그건 중국 사람들의 인구가 가장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金)씨들이 가장 많은데 전 국민의 21.6%나 되는 사람들이 김 씨 성을 쓰고 있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 씨 성이 14.8%, 박(朴)씨 성이 8.5%정도 된답니다. 그런데 한국의 성씨가 이렇게 특정 성씨에 몰린 것은 세계적으로 특이한 현상인데 이는 양반이 되기 위해서 또한 왕족의 대우를 받고자하는 특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양반이 되고 싶은 욕심과 왕족이 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문의 중요성과 가문을 중시하는 관습이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양반으로 살기는 상(常)사람으로 사는 것보다 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많은 법도와 그 많은 체통 때문에 많이 복잡하였고, 자연스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그 양반의 후예로 사느라고 많이 고생하였습니다. 그런 생활이 몸에 배어서 지금도 아주 힘든 것도 있지만 좋은 것도 있습니다. 집안의 어른들이나 할머니께서는 양반이 상스러운 말을 쓸 수 없다고 항상 조심하게 하셨습니다. 한 번은 아주 어려서 어른들 앞에서 ‘아버지’라고 했다가 꾸중을 들었습니다. ‘아비’라고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양반의 걸음걸이와 말씨를 가지고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언제나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설날 세배를 다니는데 천한 신분의 사람에게 세배했다고 꾸중도 들었고, 양반의 후손이 체통 없이 길에서 음식을 먹고 돌아다닌다고 걱정도 들었고, 큰절을 하는데 읍을 잘못한다고 지적도 받았고, 신발을 끌고 간다고, 팔꿈치를 밥상에 얹는다고, 무릎을 꿇거나 양반다리를 하고 앉지 않는다고 혼도 많이 났습니다. 특히 가장 잘못하는 것은 욕을 하거나 존댓말을 쓰지 않으면 종아리를 맞아야 했습니다. 지금 아이들이 욕을 쉽게 하는 것을 보면 괜히 부끄럽고 얼굴을 다시 쳐다봅니다. 학생들이 말을 함부로 하면 도저히 이해하지를 못할 뿐만 아니라 가정교육이나 어른들의 상스러움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른들이라도 속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함부로 말하거나, 욕설을 하는 사람은 색안경을 쓰고 쳐다봅니다. 그러나 말은 하나의 버릇이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말로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아야 하겠다고 생각한답니다.
옷을 제대로 입지 않으면 그날은 걱정을 들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통해서 몸에 밴 생활은 지금까지 내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반면에 허례와 허식에 젖어있거나 체통만 살피는 잘못된 삶을 살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감정을 절제하고,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을 격의 없이 터트릴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혼생활에서도 그 예의와 체통과 격식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어렵게 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많이 후회하고 있답니다.
그래서 나는 양반이라는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며, 누구누구의 몇 대 손이며, 몇 대조 할아버지가 무슨 벼슬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행동과 말하는 것이 양반다운지 먼저 살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념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서 금방 알아볼 수 있으며, 여자들의 옷차림이나 화장에서도 나타난다고 믿고 있게 되었습니다. 양반은 절대로 화장을 짙게 하지 않는다고 배웠고, 미사에 참례할 때에도 화장을 어떻게 하는지, 복장은 어떠한지 자주 살펴보고 있답니다. 그리고 적어도 미사에 참례할 때는 복장을 단정히 해야 한다고 인식되어 있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쓸데없는 것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내 고집을 피우고, 예의범절을 따지고, 집안의 가문을 따지고, 행실이나 말씨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못된 버릇은 나도 모르게 남아 있답니다. 이런 나의 생각과 관념은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과 다름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구세주는 왕족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나, 하느님께서는 양반의 가문이나 왕족에게 구세주를 보내실 것이라는 생각과 이스라엘의 정통 왕가에서만 구세주가 태어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구세주는 적어도 왕도인 예루살렘에서 나올 것이며, 갈릴래아나 나자렛과 같은 시골이나 장사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고정관념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의 저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다윗 가문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그 사실을 부각시키려고 복음서에 족보를 기록하고, 가문을 내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구세주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무엇보다도 먼저 내세우게 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구세주를 새로운 이스라엘의 왕으로 생각하는 오랜 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때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실을 인정하시면서도 당신을 다윗 왕이 ‘주님’이라고 호칭한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리고 후손에게 ‘주님’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상기시키십니다. 왕이 되면 왕의 친족들도 왕에 대하여 ‘주상’(主上)이라고 호칭합니다. 그러나 왕이 자신을 종으로 격하하여 말하는 것은 위계질서와 신분계급사회가 분명하였던 우리나라나 이스라엘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메시아라고 확신한다면 다윗 왕이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정확한 호칭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족보에 의해서 다윗왕의 후손이라고 부각 되는 것보다는 메시아, 구세주, 그리스도라는 신분이 정확한 것입니다. 다윗가문은 왕위쟁탈전을 불러일으킨 대표적인 가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왕위쟁탈전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어 각 영주들은 불안한 것입니다. 그런 세상의 왕위쟁탈을 벌일 인물로 예수님을 치부하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며, 메시아의 신분에 적절치 못한 호칭일 것입니다.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서 그 후예라는 것에 긍지를 가지고 살았던 그 동안의 삶을 많이 반성한답니다. 이제는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명문가로 다시 태어나서 주님의 왕자와 공주로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결국 우리는 새로운 왕족으로 세례를 받으면서 태어났습니다.
저희를 새로운 왕족으로 불러주시고, 주님의 혈통에 참여토록 허락하신 아버지 하느님, 그 동안 변변치 못한 집안의 후손으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허울과 체통으로 살았던 삶을 반성하오니 주님 용서하여 주소서. 이제는 당신의 새로운 혈통의 자손으로 당신의 자녀답게 살고자 하오니 성령을 보내주시어 저희가 당신의 고귀한 자녀답게 처신하게 하소서. 저희의 말과 생각과 행실이 당신을 닮아서 거룩하게 이끌어 주소서. 엄위하신 자비의 주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