異端의 追憶 #90,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눈물이 난다. 이 영화가...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꼭 한번 관람하기를 권하고 싶다. 영화속에서 ‘덕수’는 철수하는 흥남부두 미수송선 승선과정에서 아버지와 막내여동생을 잃어버리고 어린 나이에 온갖 풍상을 겪으며 가장으로 살아가다가 파독광부로 선발되어 서독으로 돈벌이를 떠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둠밖에 없는 지하 탄광속에서 죽음을 넘나들어가며 오직 가족을 위해서 묵묵히 일하는 광부가 되었고 ‘영자’ 역시 가족을 위해 서독까지 일하러 온 파독간호원이다. 온갖 험한 일을 뒤치다꺼리하고 시신까지 닦아가면서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했던 파독간호원 ‘영자’. . . 나는 영화속의 ‘영자’를 보면서 세칭 동방교의 ‘파독 간호원 사건’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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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기에 복음병원에 근무하던 간호원 한명이 주학교회에 전도되어 들어왔다. 본명은 잊었지만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은 ‘실라’였다. 수줍음이 많아 여성스럽고 복스럽게 생긴 간호원이었는데 그녀가 다시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조무사 한 사람을 전도하여 데리고 오기도 했다. 그후 ‘실라’는 서울의 대기처로 들어갔는데 이후 소식은 알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 파독 간호원으로 독일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세칭 동방교의 신자였던 간호원들이 수십명이나 독일로 가서 억척스레 일해서 받은 월급을 수 년동안 가족들에게 보내지 않고 몽땅 세칭 동방교로 송금하는 바람에 가족들에 의해 진정서가 접수되어 검찰이 수사에 나섰던 ‘세칭 동방교 파독 간호원 사건’이 터졌는데 그녀들중의 한명이 된 것이 아닌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이단의 추억 # 22, 주학교회’ 중에서)
그때 세칭 동방교의 '수원정' 제2성전, 즉 용산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주로 여고생, 여대생들이었는데 이화여대, 숙명여대에 다니는 멀쩡한 대학생들이 상당수 있었다. 여대생들은 나이로는 대부분 나와 비슷한 내 또래들이었다. 그래도 당시의 그곳에서의 분위기는 ‘전도사님‘이라고 불리는 막강한 자리가 내 위치였다. 절대복종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구원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듯 한, 감히 함부로 상대할 수 없는 구름위의 자리인 것이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전도사님의 말씀은 곧 진리인 것이고 설령 무슨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복종하는가 아니 하는가 시험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강력한 절대복종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그때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원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의 한명에게 병원 직인이 찍힌 백지 진단서를 3장 가져오라고 말했다.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도 묻지않고 이튿날 바로 가져왔다. 절대복종인 것이다. 거기에 내 이름을 적어넣고 영어로 된 무슨 이상한 병명을 적어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의 도망을 위한 준비작업인 것이다.
(이단의 추억 # 48, 마지막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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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가 담당하고 있던 세칭 동방교의 '수원정' 제2성전(용산교회)에 대학의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원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의 한명에게 병원 직인이 찍힌 백지 진단서를 3장 가져오라고 말했다.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도 묻지않고 이튿날 바로 가져왔다. 절대복종인 것이다. 바로 그 간호원들을 포함해서 세칭 동방교에 입교한 많은 간호원들이 독일로 갔을 것이다.
외화벌이가 절실하던 그 시절 광부와 간호원들이 독일로 가서 외화를 벌어 본국으로 송금하던, 그때는 애환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세칭 동방교에 함몰 되어버린 그들이 독일까지 가서 중환자를 뒷바라지하고 시신을 닦으면서까지 뼈빠지게 일하고 받은 급료를 자기 집으로 송금하지않고 몽땅 세칭 동방교로 송금해 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가족들이 난리가 났다.
일말의 의문도 없이 절대 복종하는 믿음으로 직인이 찍힌 백지 진단서 3장을 나에게 가져다 주었던 예쁘고 상냥하던 그 간호사님, 어느 세월에 혹시 이 글 접할날이 있을까, 이순을 넘긴 지금쯤 예쁜 손자, 손녀들 귀여서 하면서 편안한 여생을 보내고 있으면 좋으련만.
(‘이단의 추억 # 53, 파독 간호원 사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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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칭 동방교의 파독간호원 30여명이 험한일 마다않고 일해서 받은 월급을 몽땅 동방교로 송금한 돈이 1970년대 당시 화폐단위로 무려 4억여원에 달했다고 한다. 실로 엄청난 돈이었다. 영화속에서의 ‘영자’를 보면서 나는 주학교회의 ‘실라’를 떠올렸고, 일말의 의문도 없이 절대 복종하는 믿음으로 직인이 찍힌 백지 진단서 3장을 나에게 가져다 주었던 예쁘고 상냥하던 수원정 제2성전(용산교회)의 그 간호원들을 떠올렸다. 지금쯤 어디에선가 후덕한 노년을 보내고 있으면 좋으련만...
(당시의 파독간호원들 사진, 왼쪽에서부터 네번째의 간호원이 어쩌면 주학교회의 '실라'같은 인상을 주는 아가씨다.)
첫댓글
그 파독 간호사들에게 보낸 사람들이 제가 있을 때의 독일 유학생들이었습니다. 나이가 근 10년 터울이 되는 늙은 여자들과 결혼을 시키고 뒷바라지와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부부의 사랑이 있었을까요? 그래도 자식들은 있어서 부산에서 만난 적도 있었지요. 그들이 국내에 와서 김국장의 뒤를 이어 동방교의 실권을 잠시 장악했다가 동방교에 분열이 난 것으로 알고 있네요. 동방교 창시자인 노광공의 허황한 이력을 인정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구성민들의 반발.... 분열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 겁니다. 일관된 교리나 주장이 엇갈리는 단체! 그게 이단의 실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