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론 제3 편) ADD의 시제추진의 혁혁한 공적
<청와대의 시제지시>
박정희는 주위의 올 반대에 개의치 않고 부품공장 건설로 방산육성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기본병기 시제를 지시하였다.
청와대 지사는 댸통령 지시공문이었다.
청와대가 지시한 1차 시제품은 칼빈 :10정, M1: 2정, 기관총 M1919 A4: 5정, M1919 A6: 5정 , 박격포 60mm
4문: 81mm :72문, 로켓트포 3.5인치 A1 : 2문과 B1 : 2문, 수류탄 :300발, 대인지뢰 :20발, 대전차지뢰 :20 발이었다.
기간은 11월 17일에 시작하여 연내에 완성하는 것이었으므로 45일의 기일밖에 없었다.
지시를 받은 71년 당시의 국방과학 연구소(ADD, Agency for Defence Development)에는 경험 있는 연구인력도 없었고 기술도 없고 시설도 없는 상태였다.
오원철 수석은 ADD를 국가 최고의 연구소로 올려 연구인력을 확보하가 위하여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더니 박정희 대통령은 월급을 KIST의 2배를 책정하라고 하셨 다.
초대 신응균 소장을 거쳐 2대 심문택 박사 당시에는 소장직급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올려 연구소의 독립을 유지토록 하였다.
이상과 같은 박정희 대통령의 배려로 ADD에 국내외서 애국심에 불탄 젊은 과학 기술자들이 모여들었다.
ADD의 조직 강화와 기술자들의 노고로 1차시제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자 청와대는 계속하여 72년 1월 초 3월 말을 목표일로 하는 2차시제를 지시하였다.
청와대의 두 번의 시제 지시에는 모두 완성기간이 있었다. 1차시제는 71년 말에 끝내는 45일간이었고 2차시제는 73년 1월에 시작해서 3월 말에 끝내는 90일간이었다.
따라서 시간과 싸워 번개처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어 " 번개사업"이라는 작전명을 붙였다.
병기를 처음으로 제작하려면 제작설계도면이 있어야 했다. 미국의 병기이므로 미국에 설계도면을 요구했으나 비밀이라고 주지를 안 했다.
ADD 기술진은 제품을 가지고 설계도면을 만드는 역설계(Reverse Engineering)로 제작 도면을 만들어 해결하였다.
시제를 할려니 원자재도 없고 공구도 없고 원자재도 없었다. 윈자재는 청계천 철물상과 일선부대에 가서 고물병기를 얻어 해결하고 어떤 품목은 일본에서 긴급 도입하였다.
ADD의 시제는 제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능을 시험하는 시사회를 거쳐야 하는데 1차는 자체시사, 2차는 공개 시사, 3차는 VIP 시사였다.
2차 공개 시사회에는 청와대 방산담당 비서관이 참석하여 시사결과를 보고 하게 되어 있어서 필자와 이석표 비서관이 참석하였다.
20mm 대공 발칸포가 불발이었다. 모두 포대옆에 모였다.
ADD 연구관이 덮개를 열었다. 펑하고 폭발하면서 가열됐던 파편하나가 이석표 비서관 가슴에 꽂혔다. 같이 갔던 동료가 순직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 살려야 된다고 하셨지만 눈을 감은 지 사흘 만에 가셨다.
ADD의 시제 시사 시 일어난 사고는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그의 묘소는 지금도 ADD 본관 정문앞에 있다.
박정희는 ADD의 병기 시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시고 VIP 시사회에 반드시 참석하셨다.
VIP 3차 시사회시 대전차 지뢰 시사시 캐터필러 뭉치 하나가 박정희 대통령 VIP 텐트 위로 날아갔다. 옆자리에 앉은 유재흥 국방장관이 벌떡 일어서며 커디란 소리로 "시사중지!" 했다.
대통령은 "위력이 세군! 계속해" 하셔서 시사는 계속되고 시사회는 무사히 끝났다.
그다음 날 담당관을 불러서 물어본 결과 "혹시나 해서 지뢰
하나를 더 묻어 뒀다"는 뒷얘기가 있다
71년 ADD가 번개사업을 위해 주야간 근무할 당시 ADD는 궁정동에 마련한 임시건물에서 야간에 불을 환히 밝히고 근무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밤늦게 (10시 이후 ) 귀청 하시다가 제한송전에 의거 심야 전기사용 금지규정을 위반하고 전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조사를 시켰다.
ADD가 번개사업을 위하여 돌관작업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오수석에게 저녁식사 하시금을 주라고 하신 일도 있다.
시제품이 만들어지면 대통령 집무실 옆에 전시하여 두고 출입하는 분들에게 설명하며 자랑하셨다.
이리하여 ADD가 주동이 되어 우리 손으로 완벽한 시제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엽전이 못한다고 비하하던 것을 자신감을 갖고 만들어 낸 것이다.
ADD의 병기의 시제의 목적은 군의 전력증강에 도움이 되는 병기와 장비를 양산하는 방산으로 진입하게 되어 ADD는 기업체에 의한 양산에 기술지도를 하였다.
제4편 한국의 방위산업에 대한 미군의 반대
박정희는 방산육성에 대하여 미국의 협조를 기대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닉슨의 괌 독트린이 아시아 각국의 방어책임은 각국에 있다 하고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이 자주국방을 위하여 시제를 시작으로 방산육성에 착수한다고 하니까 주한 미군 사령관 명의로 미국은 반대하였다.
미국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 한국을 방어해 주니까 방산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북을 공격하려고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반대했다.
오원철 수석이 대통령께 미국의 주한 미군사령관이 한국의 방산을 반대한다고 보고 드렸다.
박정희는 보고를 받자 말자 "한국의 방위산업은 이미 설치된 2개 사단의 향토 예비군에 기본병기를 제공하기 위함이지 북을 공격하기 위하여 전력강화를 위한 방위산업 육성이 아니다"라고 설명하라고 하셨다.
오수석은 대통령의 기발한 위트에 감탄하며 미국의 반대를 설득 무마시켰다.
한국의 방위산업은 법령에서도 군에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군이란 현역군과 예비군을 말하나 실지로는 현역군이었다. 한국의 재정능력이 예비군 끼지 무장화할 능력은 전연 없었다.
한때 예비군 창고에 M1 칼빈이 공급된 것은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하여 M16이 현역에 공급됨으로써 M1과 칼빈이 도태되어 향토 예비군 창고에 훈련용으로 보관토록 된 것이다.
60만 대군의 현대화를 위한 M16 소총 생산은 미국과의 FMS 프로젝트에 의거 M16생산자인 콜트와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여 우리 돈 우리 기술로 국방부 조병창을 건설하였다.
공모로 모집한 기계기술자 27명이 미국 콜트사에서 제작기술 훈련을 받아 M16 조병창은 연간 10 만정 생산공장을 준공시켜 4년 만인 78년에 60 만정을 생산하는 빛나는 기록을 세웠다.( 국방부 조병창 생산부장 강영택 비서관 증언)
그 후 국방부 M16 조병창은 민영화되어 대우정밀이 인수하였고 탄환은 풍산금속이 만드는 신화를 만들었다.
박정희의 방산육성에 대한 애착과 인간의 육아과정과 같은 것이어서 박정희가 하계휴가시 진해 저도에 휴가 하실 때는 언제나 창원 기계단지의 방산과 중화학공장을 시찰하고 건의사항을 해결해 주셨다. 때로는 병역혜택도 주어졌다.
실무자였던 필자는 시찰 스케줄을 작성하였는데 샘플하나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박정희는 이와 더불어 방산공장에 보낼 기능사를 양성하는 기계 공고( 예 부산 기계공고)에도 들러셔서 학생들을 격려하시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부지런한 대통령 박정희를 어디든지 불 수 있었다. 이리하여 영도자의 비전과 집념에 따라 국가기관이 총동원되어 ADD 본관 건물 앞에 놓인 "국방의 초석"을 구축한 것이다.
(방산 4편 끝)
2024.11.16 김광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