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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은 이시대에 굿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무 중에 가장 오래된 나무는 은행나무라고 한다.
나무 역사상 최고령의 나무이므로 이미 자연생태계에서 도태되어 사라졌어야 할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건재하게 살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굿에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너무 오래되어 벌써 다른 종교에 도태되어 살아졌어야 하는데 아직도 은밀한 음모를 꾸미듯이 기층문화로서
건재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굿의 역사를 추적해 보면 그 시원을 마고에 둘 수 있고, 따라서 그 역사를 14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마고라는 이름 고姑자에서 무당을 추론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그 시대에 시루가 나오고 신대가 나온다.
한반도에서 쌀농사가 15000년 전에 시작되었으므로 14000년 전에 시루에 떡과 밥을 쪄서 마고가 기도하는
데에 제물로 썼음을 고姑자에서 밝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무당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역사의 시작을 더듬어 보면 단군조선 제3세 가륵단군
때임을 알 수 있다.
제2세 부루단군이 돌아가시자 나이든 여인들이 부루단지를 만들어 모시고 기도를 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그때 8명의 여인에게 신이 내려 첫 무당이 탄생하였다.
그러므로 무당이 행해 온 우리 굿의 역사는 4188년이나 된다.
가륵단군은 그가 제3세 단군으로 등극한 기해 원년(BC 2182)에 삼육대례三六大禮의 예법을 정한다.
삼육대례란 제사지낼 때 절하는 예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국중대회國中大會인 굿을 할 때의 예법이 이때 정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굿인 만큼 굿에 아무리 박해가 가해진다고 해도 뿌리가 뽑힐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다 시피 단군조선의 국중대회인 굿은 불교, 유고,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만신창이가 되어,
지금은 조선왕조시대의 형식으로 전해 오는 굿만이 살아 있어서, 그 정확한 본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그 본모습-본색-정체성을 살리는데 주력해야 할 것으로 본다.
굿의 청체성을 살리는 데엔 황해도굿이 택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 상고시대 역사에서 황해도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고조선이 진시황 8년에 진에게 멸망하면서,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제47대 고열가단군이 황해도 구월
산에 은거하여, 단군조선 이후의 역사가 중원과 만주일대와 한반도에서 동시에 전개되기 시작했기 때문
이다.
단군조선 때에는 나라종교로 덕교德敎를 가지고 있었다.
고열가 단군이 구월산으로 오면서, 덕교를 포교할 수 있는 신사를 지었다고 보는데, 이 신사에 해당하는 것이
후대에 삼성사三聖祠로 알려진 삼성당이다.
삼성당에서 우리의 국조인 한인천제, 한웅천왕, 단군왕검 세 분을 모시고 제사해 왔는데, 제사의 형식이 굿
이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당주가 여무였고, 여무는 당시에 가장 세금을 많이 냈던 정승판서와 같은 수준의 세금을 낼 수 있었던 경제적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태종 때 하륜이 삼성당에 모신 신상을 폐지하고 위패를 모시자고 주청을 올리자, 태종이 이를 받아들여 위패
를 모시고 제사지내게 되었다.
삼성당에 위패를 모신 것은 유교식 제사를 지내자는 의도에서 였다.
조정에서 당상관을 제관으로 임명하여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으니, 유교식 삼헌관 제사를 지낸 것이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초와 향을 내렸을 뿐이고, 제물을 장만하는 것은 당주인 무당의 몫이었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기 전까지 제사의 형식이 굿었다고 볼 수 있다.
나라에서 평양에 삼성사를 옮겨짓고, 구월산의 삼성당을 폐지하였다. 굿하는 사당을 없애자는 의도였다.
삼성당을 폐지하자, 상성당이 있는 문화현에 크게 괴질이 돌아, 문화현이 폐허가 되고 말았다고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삼성당에서 행했던 굿의 기능이 괴질의 예방에도 있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부루단군이 창부로 등장하는 창부굿을 행하였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삼성당에서 굿을 했다면 어떠한 굿을 했을까?
후조선조 말에 누군가 써서 전하기 시작한 <무당내력>(서울대학 규장각 소장, 가람선생 수집문고)에 따르면,
굿을 할 때 반드시 단군왕검을 청배해야 하는 굿거리로, 제석거리(칠성굿, 혹은 칠성제석굿, 칠성거리),
대거리(대감굿, 대감거리), 감응청배(초부정·초감흥굿, 감흥거리), 별성거리(호구별상굿, 호구별상거리),
성조거리(성조굿)의 5가지 를 들었다.
이들 굿은 모두 황해도 철무리굿에 들어있다.
삼성당에서 삼성을 모시는 추모굿(조상굿)을 했다면 이들 5가지 굿을 가지고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철무리굿이라는 말은 ‘철따라 무리지어 하는 굿’이라는 말이다.
철따라 무리지어 하는 굿은 백성들이 모여서 하는 철마지굿이고, 철마지굿은 춘분마지·하지마지·추분마지·
동지마지이다.
이런 굿을 한마디로 줄여 천제·나라굿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천제·나라굿을 부여에서는 영고라고 하였고, 예에서는 무천이라고 하였고, 고구려에서는 동맹이라고
하였다. 단군조선에서는 국중대회·천제라고 하였다.
영고는 북을치며 맞이한다는 뜻이고, 무천은 하늘을 향하여 춤을 춘다는 뜻이고, 동맹은 굿상을 차리고 일월
마지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나라마다 굿을 하는 목적에 따라서 굿을 다르게 말한 것뿐이고, 굿을 한자로 옮겨 쓰는 과정에서
생겨난 오류라고 하겠다.
삼성당에서 조상거리로 썼을 5가지 굿은 우리 굿 가운데에서 나라굿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핵심이 되는 굿
들이다.
이들 굿을 간략하게나마 검토해 보기로 한다.
제석굿으로 불리는 칠성제석굿은 원래 굿의 의미가 칠성굿이었는데, 불교의 제석을 덮어쓰게 되는 바람에
형편없는 굿이 되고 말았지만, 제석을 벗겨내고 칠성을 되살려 구연한다면, 전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최고의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종교적인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놀라운 굿이다.
이 굿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굿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굿을 가진 민족은 우리 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굿에서 되살려내기 위하여, 단군왕검을 청배하여, 그 힘을 빌려, 제석을 벗겨내야 할 것이다.
대감굿에 나오는 대감이라는 말은, 단군왕검이 14살에 웅심국왕의 딸 웅녀에게 장가가서, 비왕으로 있을 때의
관직이름이다.
대감은 지금의 국무총리 정도의 위상에 버금간다.
때문에 대감굿에서 대감의 격을 높여서 구연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를 알지 못하여, 이상스러운
대감으로 비하하였다.
굿을 할 때, 단군왕검을 청배해서, 이 잘못된 점을 바로잡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본다.
초부정·초감흥굿에서의 감흥感興을 한자로 옮겨 쓴다면, 감흥監興이라고 해야 맞는다고 본다.
대감굿에서 보았듯이 감은 대감을 줄인 말이다.
그러므로 대감이신 단군왕검을 모셔 들여 갖가지 부정을 쳐내고, 맺힌 것은 풀고, 화해동심이 되어, 국태민안
으로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감監은 또 검儉의 변음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감흥을 검흥儉興으로 읽을 수 있다고 본다.
검흥의 흥은 곧 단군왕검의 흥이다. 단군왕검을 흥하게 해 드리려면 단군청배를 아니할 수 없다고 본다.
호구별상굿에 등장하는 호구별상은 단순하게 중국의 강남에서 건너온 마마역신정도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아니 될 것으로 본다.
이 마마역신을 물리치기 위하여 단군왕검을 부른다는 것이, 칠성제석굿에서의 단군청배와 대감굿에서의
단군왕검청배와 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5가지 굿거리가 조선왕조시대에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단군왕검시대에 생겨났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별상을 마마역신이 아닌 단군조선을 멸망시킨 진시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신을 누르려면 단군왕검을 청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
마지막으로 성조굿에 등장하는 성조는 단군왕검시대에 왕궁과 주택을 짓는 일을 담당했던 성조 그 분이다.
성조거리에서 단군왕검을 청배함은 나라가 멸망한 조선 사람들이 성조와 함께 쓰러진 단군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염원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우리 굿에는 이렇게 상고시대의 역사가 그대로 숨어 있다.
굿에서 상고시대 역사를 발굴하여 가르치는 일이 무당의 사명 가운데에도 있다고 생각된다.
앞으로 나라굿을 한다면, 이들 5가지 굿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이 굿을 대중화시키고 활성화하여 우선 공연예술을 만들어 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굿이 살아갈 수 있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물론 종교적인 제의는 종교적인 제의로 그대로 살리고 말이다.
무당사회에서 경관만신을 대체하게 될 인터넷
무당사회에서는 굿을 띄어오는 무당을 경관만신이라고 한다. 손님이 점을 치다가 무당이 굿을 하라고
하면 굿을 하게 됨으로, 점을 잘 치는 무당이 손님으로부터 굿을 잘 띄게 되어 있다.
굿을 잘 띄면 그 무당 밑에 다른 무당들이 모이게 되어 있고 하나의 무당권역이 형성된다.
그가 관록이 있는 무당이라면 굿을 가지고 그의 세력을 넓히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무당권력이
생기게 되고, 무당권력의 정점에 있게 되는 사람이 경관만신이 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점을 잘 치는 사람이 경관만신이다.
그래서 만신의 첫째 요건은 점을 잘 치는 일이다. 역사에 보면 점을 잘 쳐서 기록으로 남은 사람은
있지만 굿 잘해서 역사에 기록으로 남은 사람은 없다.
점이 국가 안위와 직결되기 때문에 역사에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국가가 위기에 빠질 때는 여러 위기상황이 징조로 나타나게 된다.
조선왕조가 망하게 되었을 때도 산과 들이 타들어 갈만큼 가물었고, 하늘에서는 새가 떼로 몰려
전쟁을 치러 죽은 새들이 땅에 즐비하게 떨어졌다.
당시에 무당이 아니더라도 백성들은 대부분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을 예견하였다.
명성황후가 임오군란을 피하여 노원의 국망산 밑으로 피난했을 때, 그때 그 고장의 무당이 그가
환궁하게 될 날을 알려주었고, 그는 무당이 알려준 그날 환궁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는 그 무당에게 진령군이라는 당호를 내리고 늘 가까이 하여 갖가지 불미스런 스캔들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진령군처럼 나라굿을 띄어 행하는 사람이 경관만신이다.
나라굿이라는 말은 이미 단군왕검시대에 해왔던 국중대회國中大會를 한글로 바꾸어 부른 말이다.
국중을 줄이면 궂이라는 말이 되고, 이 말이 굿을 의미하는 구지龜旨나 구시와 음이 닮았으므로
그냥 나라굿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굿이라고 할 때는 관청에서 지급하는 국고를 받아서 굿을 행하고, 또 고위관리가
참석하여 제관이 되는 굿이라야 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나라굿을 할 수 있을 날이 단군조선을 세운 시월상달 초사흗날, 즉 개천제開天祭 날이다.
그러므로 지금 무당이 자기들끼리 부르는 나라굿은 실제로 나라굿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굿이다.
서울에서 나라굿을 하는 사람을 예로 들면, 개천제 때 국조이신 한인 한웅 단군왕검 세분에게 제사
드리는 삼조제례三祖祭禮를 마치고 이어서 굿을 행하는 박인호씨를 들 수 있다.
강북구청에서 강북문화원을 통하여 국고를 지원하고 또한 나라의 관리인 구청장이 제관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관경境管이라는 말은 ‘삼한관경경관만신三韓觀境境管萬神’을 줄인 말로 볼 수 있다.
삼한은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배달나라를 세운 한웅천왕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삼한관경본기三韓觀境本紀>라고 하였다.
나라를 3개의 권역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삼한이라고 했던 것이다.
중원中原, 숙신肅愼, 서역西域의 3권역인데, 한반도는 중원에 속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대에 한웅천왕은 중원에서 태백산에 제사지내기 위하여 숙신으로 가야 하였다.
숙신을 달리 비서갑斐西岬이라고도 하였다.
한웅천왕은 천제를 지내러 갈 때 명두明斗-천부삼인각경天符三印刻鏡을 앞세우고 풍물패를 뒤에
세우고 태백산을 향하여 떠났다.
이때 천부인각경이 삼한의 경계를 허무는 징표였다고 볼 수 있다.
천부인각경-명두에는 해, 달,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다.
해, 달, 북두칠성의 운행에 국경이 없듯이 한웅천왕의 행차에도 국경이 없었음을 나타낸 것이었던
것이다.
당시에 제관을 천왕이라고 하였으므로 한웅천왕은 제관이었다. 그는 제관이자 만신이었다.
그가 만신이었기 때문에 굿을 하며 풍이족(구려족)의 하나님인 구황대주九皇大主를 모시기 위하여
‘하늘 문’, ‘삼한관경의 문’, ‘태백산의 문’을 열수 있었다.
경관만신의 경관이라는 말에는 이렇게 배달나라시대의 천왕제제관天王制祭官의 역사가 숨어 있다.
배달나라의 역사가 5900년이나 됨으로 관경만신의 역사도 5900년이나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천왕제제관은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경관이라는 말은 무가사설에 나오는 천왕이라는 말과
함께 살아남아서 무당사회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늘날 경관만신이 되는 사람은 그가 천왕제시대의 제관이었던 천왕을 대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엄청난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경관만신이 되다 보니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일을 따오고 돈을 추렴하는 거간처럼 그가 하는 생각이나 역할이 형편
없이 전락해 버렸다. 그러므로 갖가지 병폐가 생겨나고 있다.
애동이만신이 굿을 띄어오는 경우에는 원로만신들의 착복의 기회가 되고, 중견만신이 굿을 띄어
오는 경우에는 중견만신들 사이에 시기와 질시의 대상이 되어 뒤에서 물고 뜯기가 일수이다.
그래서 온갖 험담이 입에서 입으로 확대재생산 되어 떠돌아다닌다.
굿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가기도 하는데, 일부 영험하다고 알려진 무당이 굿을 독식하여 굿 값을
올리는 데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또한 굿을 하는 무당과 굿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무당이 생긴다.
무당의 기본소양인 점치는 일에 영검함이 떨어지고 무책임한 말을 남발하는 경우도 생겨, 무당의
질적인 하락현상을 보이게 된다.
무당사회에서 가장 목불인견이 되는 것이 신어머니가 무당을 양산하여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경우이다.
신이 영험한 신이라면 이러한 신성모독神聖冒瀆을 언제까지나 방치해 두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어떠한 형태로든 신의 벌을 받게 되리라고 본다.
무당은 지금까지 그가 가졌던 생각을 바꾸든가 모두 버려야 한다.
잎으로 1인 1컴퓨터시대가 될 것이므로 작은 신은 무당에게로 가고 큰 신은 인터넷을 통하여 무당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에게로 가서 무당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큰 신의 지배를 받는 인터넷이 무당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무당사회가 점을 잘 치는 무당이 굿을 띄는 경관만신의 시대였다면 앞으로의 시대는
그러한 시대는 가고 인터넷이 경관만신을 대신하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다.
아니 벌써 그러한 시대가 와 있다.
시대적 요청에 의하여 점을 잘 치는 무당도 인터넷을 활용하지 않으면 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축소되게 될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무당은 누구나 다 인터넷에서 인터넷을 움직이는 큰 신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무당이 인터넷을 활용하려한다.
그러나 이용하려고만 하고 자기가 거두어들이는 이익의 피드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서
수익의 배분이라는 경제정의가 전혀 실천이 되지 않고 있다.
무당이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이 문제이다. 무당이 인터넷의 소통과 이미지 개선을 통하여
100만원의 수익이 발생했다면, 이 부분이 인터넷의 작업에 의하여 이루어진 부분임으로, 인터넷의
작업 부분에 대하여 적은 일부라도 배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인터넷에서 의미 없는 자선사업에 투자하고 셈이고, 무당은 자기 의 영업
수익의 보장을 위하여 발생하는 인터넷의 손해에 대하여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고 개선이 되지 않으면, 인터넷은 무당이 인터넷을 이용만하고 과실의 분배를
하지 않으려 한다고 판단하여 냉엄한 경제원리를 적용하여 광고를 중단하고 사이트를 내려버리게
될 것이다. 그 순간에 지금까지 무당이 받아 온 약발은 그것으로 끝이 될 것이다.
광고를 중단하고 사이트를 내리는 순간에 손님은 급속히 찾지 않게 될 것이다.
인터넷 문화가 소통과 이미지가 결합된 문화이므로 소통이 단절되면 이미지도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터넷에 의지해 온 손님들은 여기에 무엇인가 반드시 문제가 있다고 보고 다시는 그 무당을
검색하려 들지 않게 될 것이다. 무당이 이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노중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