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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 역본의도 ; 괘변도
▣ 괘변도(卦變圖)
『彖傳에 或以卦變으로 爲說하니 今作此圖하여 以明之라 蓋易中之一義요 非턛卦作易之本指也니라』
『 〈단전(彖傳)〉에 혹 괘변(卦變)으로써 설명한 것이 있으므로 지금 이 그림을 만들어 밝혔다.
《주역(周易)》 가운데 한 가지의 뜻이고, 괘(卦)를 긋고 역(易)을 지은 본뜻은 아니다.』
『&Jpic120_1.tif凡一陰一陽之卦 各六 皆自復즗而來L』『&Jpic120_2.tif凡二陰二陽之卦 各十有五 皆自臨遯而來L』『&Jpic121_3.tif凡三陰三陽之卦 各二十 皆自泰否而來L』『&Jpic122_4.tif凡四陰四陽之卦 各十有五 皆自大壯觀
而來L』『&Jpic123_5.tif凡五陰五陽之卦 各六 皆自´7剝而來L』
『右는 易之圖九라 有天地自然之易하며 有伏羲之易하며 有文王周公之易하며 有孔子之易하니 自伏羲以上으로는
皆无文字하고 只有圖턛하여 最宜深玩하니 可見作易本原精微之意요 文王以下는 方有文字하니 卽今之周易이라
然讀者亦宜各就本文消息이요 不可便以孔子之說로 爲文王之說也니라』
『 이상은 역(易)의 도식 아홉 가지이다.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역(易)이 있고 복희(伏羲)의 역(易)이 있고
문왕(文王)•주공(周公)의 역(易)이 있고 공자(孔子)의 역(易)이 있으니, 복희(伏羲) 이전에는 모두 문자(文字)가
없고 다만 획을 그린 것만 있어서 가장 깊이 완미해야 하니 이렇게 하여야 역(易)을 지은 본원의 정미(精微)한 뜻을
볼 수 있으며, 문왕(文王) 이후에는 비로소 문자가 있었으니, 곧 지금의 《주역(周易)》이다.
그러나 읽는 자가 또한 각기 본문(本文)을 가지고 소식(消息)『[이리저리 연구함]』해야 할 것이요,
곧 공자(孔子)의 말씀을 문왕(文王)의 말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附錄】董銖問 近略考卦變컨대 以彖辭考之하면 說卦變者 凡九卦니 蓋言成卦之由하니 凡彖辭는 不取成卦之由면
則不言所變之爻라 程子는 專以乾坤言變卦나 然只是上下兩體皆變者可通이요 若只一體變者則不通이라 兩體變者는
凡七卦니 隨, 蠱, 賁, 咸, 恒, 漸, 渙이 是也요 一體變者는 兩卦니 訟, 无妄이 是也라 七卦中에 取剛來下柔, 剛上柔下
之類者는 可通이요 至一體變者則以來爲自外來라 故로 說得有촦라 大凡卦變은 須觀兩體上下爲變이라야 方知其所由
以成之卦니이다』
『 동수(董銖)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 “근간에 대략 괘변(卦變)을 상고해보니, 단사(彖辭)를 가지고 살펴보면 괘변(卦變)을 말한 것이 모두 아홉 괘
(卦)인 바, 성괘(成卦)의 이유를 말하였으니, 무릇 단사(彖辭)는 성괘(成卦)의 이유를 취하지 않았으면 변한 바의
효(爻)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자(程子)는 오로지 건(乾)•곤(坤)을 가지고 괘변(卦變)을 말씀하였으나 다만 상(上)•하(下)의 두 체(體)가 모두
변한 것이라야 통할 수 있고 만약 다만 한 체(體)만 변하면 통하지 않습니다.』
『 두 체(體)가 변한 것은 모두 일곱 괘(卦)이니 수(隨)•고(蠱)•비(賁)•함(咸)•항(恒)•점(漸)•환(渙)이 이것이며,
한 체(體)만 변한 것은 두 괘(卦)이니 송(訟)•무망(无妄)이 이것입니다.
일곱 괘(卦) 중에 강(剛)이 와서 유(柔)에게 낮추거나 강(剛)이 올라가고 유(柔)가 내려온 것을 취한 유(類)는 통할
수 있으나, 한 체(體)만 변한 것에 이르러서는 오는 것을 밖으로부터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설명이 막힘이 있습니다. 대체로 괘변(卦變)은 모름지기 상(上)•하(下) 두 체(體)가 변한 것을 보아야
비로소 말미암아 이루어진 괘(卦)를 알 수 있습니다.”』
『朱子曰 便是此處說得有촦라 且程傳賁卦所云 豈有乾坤重而爲泰하고 又自泰而變爲賁之理리오하시니 若其說果然
이면 則所謂乾坤變而爲六子와 八卦重而爲六十四가 皆由乾坤而變者리니 其說이 不得而通矣라 蓋有則俱有니 自一
턛而二요 二而四요 四而八而八卦成이요 八而十六이요 十六而三十二요 三十二而六十四而重卦備라 故로 有八卦則
有六十四矣니 此康節所謂先天者也라 若震一索而得男以下는 乃是已有此卦了에 就此卦生出此義니 皆所謂後天之學
也라 今所謂卦變者는 亦是有卦之後에 聖人見得有此象이라 故로 發於彖辭하시니 安得謂之乾坤重而爲是卦하면 則
更不可變而爲他卦耶아 若論先天하면 一卦亦无요 旣턛之後에 乾一, 兌二, 離三, 震四로 至坤居末하니 又安有乾坤變
而爲六子之理리오 凡今易中所言은 皆是後天之易耳라 以此로 見得康節先天後天之說이 最爲有功이니라』
『 주자(朱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곧 이러한 부분이 설명이 막힌다.
또 《정전(程傳)》의 비괘(賁卦)에 이르기를 ‘어찌 건(乾)•곤(坤)이 거듭하여 태괘(泰卦)가 되고 또 태괘(泰卦)로
부터 변하여 비괘(賁卦)가 될 리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만약 그 말씀이 과연 옳다면 이른바 ‘건(乾)•곤(坤)이
변하여 육자(六子)가 되었다’는 것과 ‘팔괘(八卦)가 거듭하여 64괘(卦)가 되었다’는 것이 모두 건(乾)•곤(坤)으로
말미암아 변한 것일 것이니, 그 말씀이 통할 수 없다.』
『 있으면 함께 있는 것이니, 한 획으로부터 2가 되고 2에서 4가 되고 4에서 8이 되어 팔괘(八卦)가 이루어지고,
8에서 16이 되고 16에서 32가 되고 32에서 64가 되어 중괘(重卦)가 갖추어졌다.
그러므로 팔괘(八卦)가 있으면 64괘(卦)가 있는 것이니, 이는 강절(康節)의 이른바 선천(先天)이라는 것이다.
진(震)이 첫 번째 구하여 남자를 얻었다는 것과 같은 것 이하는 바로 이미 이 괘(卦)가 있음에 이 괘(卦)에 나아가
이러한 뜻을 낸 것이니, 모두 이른바 후천(後天)의 학(學)이라는 것이다.』
『 이제 이른바 ‘괘변(卦變)’이라는 것은 또한 이 괘(卦)가 있은 뒤에 성인(聖人)이 이러한 상(象)이 있음을 보신
것이다.
그러므로 단사(彖辭)에 말씀하신 것이니, 어찌 ‘건(乾)•곤(坤)이 거듭하여 이 괘(卦)가 되었으면 다시 변하여 딴
괘(卦)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선천(先天)을 논한다면 한 괘(卦)도 없으며, 이미 괘(卦)를 그은 뒤에는 건(乾)이 1, 태(兌)가 2, 이(離)가 3,
진(震)이 4로부터 곤(坤)이 끝에 위치하는 데에 이르니, 또 어찌 건(乾)•곤(坤)이 변하여 육자(六子)가 될 리가
있겠는가.
무릇 지금 《주역(周易)》 가운데에 말한 것은 모두 후천(後天)의 역(易)이다.
이로써 강절(康節)의 선천(先天)•후천(後天)의 말씀이 가장 공(功)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太極, 兩儀, 四象, 八卦者는 伏羲턛卦之法也니 說卦의 天地定位로 至坤以藏之는 以見伏羲所턛八卦之位也요
帝出乎震以下는 文王이 卽伏羲已成之卦하여 而推其義類之辭也라 如卦變圖의 剛來柔進之類는 亦是就卦已成後에
用意推說하여 以見此爲自彼卦而來耳요 非眞先有彼卦而後에 方有此卦也라 古註에 說賁卦自泰卦而來라한대 先儒
非之하여 以爲乾坤合而爲泰하니 豈有泰復變爲賁之理리오하니 殊不知若論伏羲턛卦면 則六十四卦一時俱了하여
雖乾坤이라도 亦无能生諸卦之理요 若如文王孔子之說이면 則縱橫曲直이 反覆相生하여 无所不可라 要在看得活絡
하여 无所拘泥하니 則无不通耳니라』
『 태극(太極)•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는 복희(伏羲)가 괘(卦)를 그은 법이니, 〈설괘전(說卦傳)〉의
‘천지정위(天地定位)’로부터 ‘곤이장지(坤以藏之)’에 이르기까지는 복희(伏羲)가 그은 팔괘(八卦)의 자리를 나타낸
것이요, ‘제출호진(帝出乎震)’ 이하는 문왕(文王)이 복희(伏羲)가 이미 만들어 놓은 괘(卦)를 가지고 그 의(義)와
유(類)를 미루어 말씀한 것이다.
예컨대 괘변도(卦變圖)에 강(剛)이 오고 유(柔)가 나아갔다는 유(類)와 같은 것은 또한 괘(卦)가 이미 이루어진 뒤에
뜻을 미루어 말씀하여 이 괘(卦)가 저 괘(卦)로부터 왔음을 나타냈을 뿐이요, 참으로 먼저 저 괘(卦)가 있은 뒤에
비로소 이 괘(卦)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 옛 주석에 비괘(賁卦)가 태괘(泰卦)로부터 왔다고 설명하였는데, 선유(先儒)가 이를 비판하여 이르기를 “건
(乾)•곤(坤)이 합하여 태괘(泰卦)가 되었으니, 어찌 태괘(泰卦)가 다시 변하여 비괘(賁卦)가 될 리가 있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만약 복희(伏羲)가 괘(卦)를 그은 것으로 논한다면 64괘(卦)가 모두 일시에 완료되어 비록 건(乾)•
곤(坤)이라도 여러 괘(卦)를 낳을 이치가 없고, 만약 문왕(文王)과 공자(孔子)의 말씀과 같이 한다면 종횡(縱橫)과 곡직
(曲直)이 반복하여 상생(相生)해서 불가함이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요컨대 능동적(能動的)으로 보아 구애되거나 집착하는 바가 없음에 달려있으니, 이렇게 하면 통하지 않음이 없다.』
『○ 伊川은 不取卦變之說하여 至『柔來而文剛, 剛自外來而爲主於內주:유래이문강』諸處에 皆牽强說了하고 王輔
嗣卦變은 又變得不自然이러니 某之說은 却覺得有自然氣象하여 只是換了一爻라 非是聖人이 合下作卦如此요 自是
卦成了에 自然有此象이니라』
『 이천(伊川)은 괘변(卦變)의 말씀을 취하지 아니하여 유(柔)가 와서 강(剛)을 문식(文飾)했다는 것과 강(剛)이
밖으로부터 와서 안에 주(主)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여러 부분에 대하여 모두 견강부회하여 설명하였고,
왕보사(王輔嗣)의 괘변(卦變)은 또 변함이 자연스럽지 못하였는데, 나『[주자(朱子)]』의 말은 자연스러운 기상이
있음을 깨달아 다만 한 효(爻)만 바꿀 뿐이다.
이는 성인(聖人)이 합하(合下)『[당초(當初)]』 괘(卦)를 만들 때에 이와 같이 한 것이 아니요, 저절로 괘(卦)가
이루어진 뒤에 자연히 이러한 기상이 있는 것이다.』
『○ 朱漢上易卦變은 只變到三爻而止하여 於卦辭에 多有不通處러니 某更推盡去하여 方通이라 如无妄剛自外來而
爲主於內는 只是初剛이 自訟二移下來요 晉柔進而上行은 只是五柔自觀四¬\上去니 此等類는 按漢上卦變이면 則
通不得이니라』
『 주한상(朱漢上)의 역괘변(易卦變)은 다만 변함이 세 효(爻)에만 그쳐서 괘사(卦辭)에 통하지 않는 부분이 많이
있었는데, 내 다시 미루어 다해서 비로소 통하게 되었다.
예컨대 무망괘(无妄卦)에 강(剛)이 밖으로부터 와서 안에 주(主)가 되었다는 것과 같은 것은 다만 초효(初爻)의
강(剛)이 송괘(訟卦)의 이효(二爻)로부터 옮겨온 것이며, 진괘(晉卦)에 유(柔)가 나아가 위로 간다는 것은 다만 오효
(五爻)의 유(柔)가 관괘(觀卦)의 사효(四爻)로부터 차례로 올라간 것이니, 이러한 유(類)는 주한상(朱漢上)의
괘변(卦變)을 살펴보면 통하지 않는다.』
『○ 卦有兩樣生하여 有從兩儀四象加倍生來底하고 有卦中互換自生一卦底하니 互換成卦는 不過換兩爻라 這般變
卦는 伊川破之로되 及到那剛來而得中하여는 却推不行이라 大率在就義理上看하면 不過如『剛自外來而得中,
分剛上而文柔주:강자외래이득중』等處看이요 其餘는 多在占處用也라 賁變節之象은 這雖无緊要나 然後面에
有數處彖辭하니 不如此看이면 无來處하여 解不得이니라』
『 괘(卦)에는 두 가지의 생겨남이 있어서 양의(兩儀)와 사상(四象)으로부터 배(倍)를 더하여 생겨난 것이 있고,
괘(卦) 가운데에 호환(互換)하여 스스로 한 괘(卦)를 낳은 것이 있으니, 호환(互換)하여 괘(卦)를 이루는 것은 두
효(爻)를 바꿈에 불과하다.
이러한 변괘(變卦)는 이천(伊川)이 설파하였으나 강(剛)이 와서 중(中)을 얻었다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미루어 갈
수가 없다. 대체로 의리상에 나아가 보아야 할 곳은 강(剛)이 밖으로부터 와서 중(中)을 얻었다는 곳과 강(剛)을
나누어 위로 올라가 유(柔)를 문식했다는 곳 등과 같은 부분을 봄에 불과하고 그 나머지는 대부분 점치는 곳에서
활용한다. 비괘(賁卦)『[『&gua22.tif』]』가 절괘(節卦)『[『&gua60.tif』]』로 변한 상(象)은 비록 긴요한 것은
없으나 후면에 여러 곳의 단사(彖辭)가 있으니, 이처럼 보지 않으면 온 곳이 없어서 해석할 수가 없다.』
*주역 ; 역설강령(易說綱領) ①
▣ 역설강령(易說綱領) ①
『程子曰 上天之載 無聲無臭하니 其體則謂之易이요 其理則謂之道요 其用則謂之神이라』
『 정자(程子)가 말씀하였다. “상천(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니, 그 체(體)는 역(易)이라 이르고 그
이치는 도(道)라 이르고 그 용(用)은 신(神)이라 이른다.”』
『○ 陰陽闔闢이 便是易이니 一闔一闢을 謂之變이니라』
『 음(陰)•양(陽)이 닫히고 열림이 곧 역(易)이니, 한번 열리고 한번 닫힘을 변(變)이라 이른다.』
『○ 命之曰易이면 便有理하니 若安排定이면 則更有甚理리오 天地陰陽之變이 便如二扇磨하여 升降盈虛剛柔가
初未嘗停息하니 陽常盈하고 陰常虧라 故로 便不齊하니 譬如磨旣行이면 齒都不齊요 旣不齊면 便生出萬變이라 故
로 物之不齊는 物之情也어늘 而莊周는 强要齊物이나 然而物終不齊也라 堯夫有言 泥空終是著『(착)』이요 齊物到
頭爭이라하니라』
『 명명하여 역(易)이라 하였으면 곧 이치가 있는 것이니, 만약 안배하여 정한다면 다시 무슨 이치가 있겠는가.
천지(天地) 음양(陰陽)의 변화는 곧 두 짝의 맷돌과 같아서 승(升)•강(降)과 영허(盈虛)와 강유(剛柔)가 애당초
일찍이 멈추거나 쉰 적이 없으니, 양(陽)은 항상 가득차고 음(陰)은 항상 부족하다.
그러므로 똑같지 않으니, 비유하면 맷돌이 이미 돌면 이『〔齒〕』가 모두 똑같이 맞지 않고, 이미 똑같이 맞지 않으면
곧 만 가지 변화를 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물건이 똑같지 않음은 물건의 실정(實情)인데 장주(莊周)는 억지로 물건을 똑같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물건은 끝내 똑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요부(堯夫)『[소강절(邵康節)]』가 말씀하기를 “공(空)에 빠지면
끝내 집착하게 되고, 물건을 똑같게 하려 하면 이르는 곳마다 다투게 된다.” 하였다.』
『○ 易中엔 只言反復往來上下하니라』
『 역(易) 가운데에는 다만 반복하고 오고감과 오르내림을 말하였다.』
『○ 作易者 自天地幽明으로 至于昆蟲草木微細히 無不合하니라』
『 역(易)을 지은 것은 천지(天地)의 유명(幽明)으로부터 곤충과 초목의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부합되지
않음이 없다.』
『○ 聖人之道는 如『河圖洛書주:하도낙서』 其始는 止於턛上에 便出義러니 後之人이 旣重卦하고 又繫辭하나
求之에 未必得其理니라』
『 성인(聖人)의 도(道)는 비유하면 하도(河圖)•낙서(洛書)가 처음에는 다만 획 위에서 곧 뜻을 내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괘(卦)를 거듭하고 말을 달았으나 구함에 반드시 그 이치를 얻지 못하는 것과 같다.』
『○ 因見賣兎者하시고 曰 聖人이 見河圖洛書而턛八卦라 然何必圖書리오 只看此兎라도 亦可作八卦하니 數便此
中可起라 古聖人이 只取神物之至著者耳시니 只如樹木에도 亦可見數니라』
『 토끼를 파는 자를 보시고는 말씀하였다.』
『 “성인(聖人)이 하도(河圖)•낙서(洛書)를 보고 팔괘(八卦)를 그었다.
그러나 하필 하도(河圖)•낙서(洛書) 뿐이겠는가. 다만 이 토끼만 보고도 팔괘(八卦)를 만들 수 있으니, 수(數)가 곧
이 가운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옛 성인(聖人)이 다만 지극히 드러난 신물(神物)을 취하셨을 뿐이니, 다만 수목(樹木) 같은 것에서도 수(數)를 볼
수 있다.”』
『○ 張쥺中이 問易之義 本起於數잇가 曰 謂義起於數則非也라 有理而後有象하고 有象而後有數하니 易은 因象以
知數하니 得其義하면 則象數在其中矣라 必欲窮象之隱微하고 盡數之毫忽인댄 乃尋流逐末이라 術家之所尙이요
非儒者之所務也니 管輅, 郭璞之學이 是也니라 又曰 理无形也라 故로 因象以明理하고 理見乎辭矣니 則可由辭以
觀象이라 故로 曰得其義하면 則象數在其中矣라하니라』
『 장굉중(張쥺中)이 “역(易)의 뜻이 본래 수(數)에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의(義)『[의의(意義)]』가 수(數)에서 생겼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이치가 있은 뒤에 상(象)이 있고 상(象)이
있은 뒤에 수(數)가 있으니, 역(易)은 상(象)으로 인하여 수(數)를 아는 것이니, 그 의(義)를 알면 상(象)•수(數)는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반드시 상(象)의 은미함을 다하고 수(數)의 세미함을 다하고자 한다면 이는 바로 말류(末流)를 찾고 지엽을 좇는
것이니, 술가(術家)에서 숭상하는 것이요 유가(儒家)에서 힘쓰는 것이 아닌 바, 관로(管輅)와 곽박(郭璞)의 학문이
이러한 것이다.”』
『 또 말씀하였다.』
『 “이치는 형체가 없기 때문에 상(象)으로 인하여 이치를 밝혔으며, 이치는 말에 나타나니,
말로 인하여 상(象)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의(義)을 알면 상(象)•수(數)가 그 가운데에 있다고 한 것이다.”』
『○ 謂堯夫曰 知易數爲知天가 知易理爲知天가하시니 堯夫云 還須知易理爲知天이라하니라』
『 요부(堯夫)에게 말하기를 “역(易)의 수(數)를 아는 것을 하늘을 안다고 하는가? 역(易)의 이(理)를 아는 것을
하늘을 안다고 하는가?” 하니, 요부(堯夫)는 “모름지기 역(易)의 이(理)를 알아야 하늘을 안다고 한다.” 하였다.』
『○ 尹焞이 問 易乾坤二卦면 斯可矣니잇가 曰 聖人이 設六十四卦, 三百八十四爻로되 後世에 尙不能了하니 乾坤
二卦로 豈能盡也리오 旣而『(오)』曰 子以爲何人分上事오 對曰 聖人分上事니이다 曰 若聖人分上事면 則乾坤二
卦亦不須니 況六十四卦乎아』
『 윤순(尹焞)이 “역(易)은 건(乾)•곤(坤) 두 괘(卦)면 됩니까?”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성인(聖人)이 64괘(卦)와
384효(爻)를 만들어 놓았는데도 후세에서는 오히려 다 알지 못하니, 건(乾)•곤(坤) 두 괘(卦)로 어찌 다할 수 있겠
는가.” 하였다.
이윽고 말씀하기를 “자네는 어떤 사람의 신분에 해당하는 일을 물은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성인(聖人)의
신분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하였다. 이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 “만약 성인(聖人)의 신분에 해당하는 일이라면 건(乾)•곤(坤) 두 괘(卦)도 필요 없으니, 하물며 64괘(卦)이겠
는가.”』
『○ 看易엔 且要知時라 凡六爻 人人有用하여 聖人은 自有聖人用하고 賢人은 自有賢人用하고 衆人은 自有衆人用
하고 學者는 自有學者用하고 君有君用하고 臣有臣用하여 无所不通이니라』
『 역(易)을 볼 때에는 우선 때를 알아야 한다. 무릇 여섯 효(爻)는 사람마다 용도가 있어서 성인(聖人)은 성인
(聖人)의 용도가 있고 현인(賢人)은 현인(賢人)의 용도가 있고 중인(衆人)은 중인(衆人)의 용도가 있고 배우는
자는 배우는 자의 용도가 있고 군주는 군주의 용도가 있고 신하는 신하의 용도가 있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
『○ 觀易에 須看時然後에 觀逐爻之才니라 一爻之間에 常包函『(含)』數意어늘 聖人이 常取其重者而爲之辭로되
亦有易中에 言之已多일새 取其未嘗言者하니 亦不必重事라 又有且言其時하고 不及其爻之才하니 皆臨時參考라
須先看卦라야 乃看得繫辭니라』
『 역(易)을 볼 때에는 모름지기 때를 보아야 하고 그런 뒤에는 효(爻)마다의 재질을 보아야 한다.
한 효(爻)의 사이에는 항상 몇 가지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성인(聖人)은 항상 그중에 중요한 것을 취하여 말씀
하였으나, 또 《주역(周易)》 가운데에 말한 것이 이미 많으므로 일찍이 말하지 않은 것을 취한 경우가 있으니,
또한 반드시 중요한 일은 아니다.
또 우선 그 때만 말하고 효(爻)의 재질을 언급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모두 때에 따라 참고하여야 한다.
모름지기 먼저 괘(卦)를 보아야 괘(卦)에 붙인 말을 알 수가 있다.』
『○ 大抵卦爻始立에 義旣具하니 卽聖人이 別起義以錯綜之라 如春秋時已前엔 旣已立例러니 到近後來하여는
書得全別一般事라 便書得別有意思하니 若依前例觀之하면 殊失之也니라』
『 대저 괘(卦)•효(爻)가 처음 섬에 의(義)가 이미 갖추어져 있으니, 성인(聖人)이 별도로 의(義)를 일으켜서
착종(錯綜)『[이리저리 종합함]』하였다.
예를 들면 춘추시대(春秋時代) 이전에 이미 예(例)를 세워 놓았었는데, 근래에 이르러서는 글이 완전히 일반(一般)
『[일종(一種)]』의 일과 달라져서 글을 씀에 별도의 뜻이 있으니, 만약 이전의 예(例)에 의거하여 보면 자못 뜻을
잃게 된다.』
『○ 凡看書에 各有門庭하니 詩, 易, 春秋는 不可逐句看이요 尙書, 論語는 可以逐句看이라 聖人用意深處 全在繫
辭요 詩書는 乃格言이니라』
『 무릇 책을 볼 때에는 각각 문정(門庭)이 있으니, 《시경(詩經)》•《역경(易經)》•《춘추(春秋)》는 글귀마다
하나하나 볼 수 없고, 《상서(尙書)》와 《논어(論語)》는 글귀마다 하나하나 볼 수 있다. 성인(聖人)이 뜻을 씀이
깊은 부분은 완전히 〈계사전(繫辭傳)〉에 있고, 《시경(詩經)》와 《서경(書經)》은 바로 격언(格言)이다.』
『○ 古之學者 皆有傳授하니 如聖人作經은 本欲明道나 今人이 若不先明義理하면 不可治經이니 蓋不得傳授之意
云爾라 如繫辭는 本欲明易이나 若不先求卦義하면 則看繫辭不得이니라』
『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모두 전수(傳授)함이 있었으니, 성인(聖人)이 경(經)을 지은 것은 본래 도(道)를 밝히
고자 해서이나, 지금 사람들이 만약 먼저 의리(義理)를 밝게 알지 못하면 경(經)을 다룰 수가 없으니, 전수(傳授)
한 뜻을 알지 못하게 된다. 〈계사전(繫辭傳)〉은 본래 역(易)을 밝히고자 한 것이나, 만약 먼저 괘(卦)의 뜻을
찾지 않는다면 계사(繫辭)를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 易學은 後來에 曾子, 子夏煞到上面也시니라』
『 역학(易學)은 후래에 증자(曾子)와 자하(子夏)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 由孟子하면 可以觀易이니라』
『 맹자(孟子)를 따르면 역(易)을 볼 수 있다.』
『○ 今時人은 看易에 皆不識得易是何物이요 只就上穿鑿이라 若念得不熟與인댄 就上添一德이라도 亦不覺多하고
就上減一德이라도 亦不覺少하리니 譬如不識此틇子하면 若減一隻脚이라도 不覺是少하고 添一隻脚이라도 亦不知
是多하나니 若識則自添減不得也니라』
『 지금 세상 사람들은 역(易)을 볼 때에 모두 역(易)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위에 나아가 천착(穿鑿)
한다. 만약 생각함이 익숙하지 못하다면 그 위에 한 덕(德)을 더하더라도 많아짐을 깨닫지 못하고,
그 위에 한 덕(德)을 감하더라도 적어짐을 깨닫지 못할 것이니, 비유하면 이 책상『〔틇子〕』을 모르면 만약 한
짝의 다리를 줄이더라도 이것이 적어졌음을 깨닫지 못하고, 한 짝의 다리를 더하더라도 이것이 많아졌음을 모르는
것과 같으니, 만약 안다면 스스로 더하거나 빼지 못할 것이다.』
『○ 易은 須是默識心通이니 只窮文義하면 徒費力이니라』
『 역(易)은 모름지기 묵묵히 알고 마음으로 통하여야 하니, 다만 글뜻만을 연구한다면 한갓 힘만 허비할 뿐이다.』
『朱子曰 聖人作易之初엔 蓋是仰觀俯察하여 見得盈乎天地之間이 无非一陰一陽之理하시니 有是理則有是象하고
有是象則其數 便自在這裏하니 非特河圖洛書爲然이라 蓋所謂數者는 콚是氣之分限節度處니 得陽必奇하고 得陰必
偶라 凡物皆然이로되 而圖書爲特巧而著耳라 於是에 聖人因之而턛卦하시니 其始也엔 只是턛一奇以象陽하고 턛
一偶以象陰而已라 但才『(°.)』有兩則便有四하고 才有四則便有八하며 又從而再倍之하면 便是十六이니 蓋自其无
朕之中으로 而无窮之數已具하여 不待安排而其勢有不容已者라 卦턛旣立하면 便有吉凶在裏하니 蓋是陰陽往來交
錯於其間하면 其時則有消長之不同하니 長者便爲主요 消者便爲客이며 事則有當否之或異하니 當者便爲善이요
否者便爲惡이니 卽其主客善惡之辨하여 而吉凶見『(현)』矣라 故曰 八卦定吉凶이라하니라 吉凶旣決定而不差면
則以之立事而大業自此生矣니 此는 聖人作易하사 敎民占筮하여 而以開天下之愚하여 以定天下之志하고 以成天下
之事者 如此라 但自伏羲而上으로는 只有此六턛이요 而未有文字可傳이러니 到文王周公하여 乃繫之以辭라 故曰聖
人設卦觀象하여 繫辭焉而明吉凶이라하니라』
『 주자(朱子)가 말씀하였다.』
『 “성인(聖人)이 역(易)을 만든 시초에는 우러러 관찰하고 굽어 살펴서 천지 사이에 가득한 것이 모두 한 양(陽)
과 한 음(陰)의 이치 아님이 없음을 보셨으니, 이치가 있으면 상(象)이 있고 상(象)이 있으면 그 수(數)가 곧 그
속에 있으니, 비단 하도(河圖)•낙서(洛書)만이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수(數)라는 것은 다만 기(氣)의 분한(分限)과 절도(節度)가 있는 부분이니, 양(陽)을 얻으면 반드시 기(奇)
가 되고 음(陰)을 얻으면 반드시 우(偶)가 된다.
모든 사물이 다 그렇지만 하도(河圖)•낙서(洛書)가 특별히 정교하고 잘 드러난다.
이에 성인(聖人)이 이로 인하여 괘(卦)를 그으셨으니, 처음에는 다만 한 기(奇)를 그어 양(陽)을 상징하고 한 우
(偶)를 그어 음(陰)을 상징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만 잠시 둘이 있으면 곧 넷이 있고 잠시 넷이 있으면 곧 여덟이 있으며 또 따라서 다시 배(倍)를 하면 곧
열 여섯이 되니, 조짐이 없는 가운데로부터 무궁한 수(數)가 이미 갖추어져 굳이 안배(安排)하지 않아도 그
형세가 그칠 수 없다.』
『 괘(卦)의 획(턛)이 이미 확립되면 곧 길흉(吉凶)이 그 속에 있으니, 음양(陰陽)이 왕래하여 그 사이에서 섞이면
때에는 사라지고 자라남의 같지 않음이 있으니 자라나는 것이 주(主)가 되고 사라지는 것이 객(客)이 되며,
일에는 마땅하고 마땅하지 않음의 혹 다름이 있으니 마땅한 것이 선(善)이 되고 마땅하지 않은 것이 악(惡)이 되니,
주객(主客)과 선악(善惡)의 구분에 나아가 길흉(吉凶)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팔괘(八卦)가 길흉(吉凶)을 정한다’고 말한 것이다. 길흉(吉凶)이 결정되어 어그러지지 않으면 이로써
일을 세워서 대업(大業)이 이로부터 생기게 되니, 이는 성인(聖人)이 역(易)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점서(占筮)를
가르쳐서 천하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개도(開導)하여 천하(天下)의 뜻을 정하고 천하(天下)의 일을 이루어지게
함이 이와 같은 것이다.』
『 다만 복희(伏羲) 이전에는 오직 여섯 획만이 있을 뿐이고 전할 만한 문자(文字)가 없었는데,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에 이르러 비로소 말씀을 붙였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괘(卦)를 만들고 상(象)을 관찰하여 말을 붙여서 길흉(吉凶)을 밝혔다’고 한 것이다.』
『蓋是卦之未턛也엔 因觀天地自然之法象而턛이요 及其旣턛也하여는 一卦自有一卦之象하니 象은 謂有箇形似也라
故로 聖人이 卽其象而命之名하시니 以爻之進退而言은 則如剝復之類요 以其形之肖似而言은 則如鼎井之類니 此是
伏羲卽卦體之全하여 而立箇名이 如此라 及文王하여 觀卦體之象而爲之彖辭하시고 周公은 視卦爻之變而爲之爻辭
하시니 而吉凶之象이 益著矣니라』
『 이 괘(卦)를 긋기 전에는 천지(天地) 자연(自然)의 법상(法象)을 보고서 괘효(卦爻)를 그었는데, 이미 괘(卦)를
그음에 이르러는 한 괘(卦)에는 자연 한 괘(卦)의 상(象)이 있으니, 상(象)은 형체와 유사한 것이 있음을 이른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그 상(象)에 나아가 괘(卦)의 이름을 명명(命名)하였으니, 효(爻)의 나아가고 물러감을
가지고 말한 것은 박괘(剝卦)와 복괘(復卦) 같은 유(類)이며, 형체의 유사함을 가지고 말한 것은 정괘(鼎卦)와
정괘(井卦) 같은 유(類)이니, 이는 복희(伏羲)가 괘체(卦體) 전체를 가지고 이름을 붙인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문왕(文王)에 이르러 괘체(卦體)의 상(象)을 보고 단사(彖辭)를 만드시고 주공(周公)은 괘(卦)의 효(爻)가 변함을
보고 효사(爻辭)를 만드시니, 길흉(吉凶)의 상(象)이 더욱 드러나게 되었다.』
『大率天下之道는 只是善惡而已라 但所居之位不同하고 所處之時旣異로되 而其幾甚微하여 只爲天下之人이 不能
曉會일새 所以聖人이 因此占筮之法以曉人하여 使人居則觀象玩辭하고 動則觀變玩占하여 不迷於是非得失之途케
하시니 所以是書를 夏商周皆用之라 其所言雖不同하고 其辭雖不可盡見이나 然皆太卜之官이 掌之하여 以爲占筮
之用이라 有所謂繇辭者하니 左氏所載에 尤可見古人用易處라 蓋其所謂象者는 皆是假此衆人共曉之物하여 以形容
此事之理하여 使人知所取舍『(捨)』而已라 故로 自伏羲而文王周公이 雖自略而詳이나 所謂占筮之用則一이니 蓋
卽那占筮之中하여 而所以處置是事之理가 便在那裏了라 故로 其法이 若粗淺이나 而隨人賢愚하여 皆得其用이라
蓋文王이 雖是有定象, 有定辭나 皆是虛說此箇地頭에 合是如此處置요 初不컖著物上이라 故로 一卦一爻足以包無窮
之事하니 不可只以一事指定說이라 他裏面에도 也有指一事說處하니 如利建侯, 利用祭祀之類요 其他는 皆不是指一
事說이니 此所以見易之爲用이 無所不該, 無所不킂하니 但看人如何用之耳라 到得夫子하여는 方始純以理言하시니
雖未必是羲文本意나 而事上說理는 亦是如此라 但不可便以夫子之說로 爲文王之說也니라』
『 대체로 천하(天下)의 도(道)는 다만 선(善)과 악(惡)일 뿐이다. 다만 거한 바의 위치가 똑같지 않고 처한 바의
때가 이미 다른데, 그 기미가 매우 은미하여 다만 천하 사람들이 이것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이 이 점서(占筮)하는 법(法)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깨우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居)할 때
에는 상(象)을 보고 말을 살펴보며, 동(動)할 때에는 변화(變化)를 보고 점(占)을 살펴보아서 시비(是非)와 득실
(得失)의 길에 어둡지 않게 하셨으니, 이 때문에 이 책을 하(夏)•상(商)•주(周)가 모두 쓴 것이다.
말한 내용이 비록 똑같지 않고 글을 비록 다 볼 수 없으나 모두 태복(太卜)의 관원이 관장하여 점서(占筮)에 활용
하였다.
이른바 주사(繇辭)라는 것이 있으니, 《좌씨전(左氏傳)》의 기록에서 더욱 옛사람이 역(易)을 활용한 부분을 볼
수 있다.』
『 이른바 상(象)이란 것은 모두 여러 사람들이 함께 알 수 있는 사물을 빌어서 이 일의 이치를 형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취사(取捨)할 바를 알게 하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복희(伏羲)로부터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에 이르기까지 비록 간략함에서 상세하게 되었으나 이른바
점서(占筮)의 쓰임은 똑같으니, 점서(占筮)의 가운데에 나아가 이 일을 처치하는 도리가 곧 이 속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그 법(法)이 거칠고 천근(淺近)한 듯하나 사람의 현우(賢愚)에 따라 모두 그 쓰임을 얻는 것이다.』
『 문왕(文王)은 비록 정(定)한 상(象)이 있고 정(定)한 말씀이 있으나 모두 이러한 곳에서는 마땅히 이와 같이
처치해야 한다는 것을 가설(假說)했을 뿐이요, 애당초 사물의 위에 고착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한 괘(卦)와 한 효(爻)가 족히 무궁한 일들을 포함할 수 있으니, 다만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지정하여 말
할 수 없다. 저 이면(裏面)에 또한 한 가지 일을 지정하여 말한 곳이 있으니, 예를 들면 ‘제후(諸侯)를 세움이
이롭다’는 것과 ‘제사(祭祀)에 씀이 이롭다’는 유(類)와 같은 것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한 가지 일을 지정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역(易)의 쓰임이 포함하지 않는 바가 없고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음을 볼 수 있으니,
다만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를 볼 뿐이다.』
『 부자(夫子)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순전히 이치로써 말씀하였으니, 비록 반드시 복희(伏羲)와 문왕(文王)의
본의(本意)는 아니나 일에 나아가 이치를 말한 것은 또한 이와 같다. 다만 부자(夫子)의 말씀을 문왕(文王)의 말씀
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 天地之間에 別有甚事리오 只是陰與陽兩箇字니 看是甚쬱物事 都離不得이라 只就身上體看컨대 才『(°.)』
開眼하면 不是陰이면 便是陽이니 密콵콵在這裏하여 都不著得別物事라 不是仁이면 便是義요 不是剛이면 便是柔
며 只自家要做向前이면 便是陽이요 才收退면 便是陰이며 意思才動이면 便是陽이요 才靜이면 便是陰이니 未消
別看이요 只是一動一靜이 便是陰陽이라 伏羲只因此턛卦하여 以示人하시니 若只就一陰一陽이면 又不足以該衆理
일새 於是에 錯綜爲六十四卦, 三百八十四爻하니 初只是許多卦爻러니 後來聖人이 又繫許多辭在下라 如他書는
則元有這事라야 方說出這箇道理로되 易則未曾有此事하고 先假託都說在這裏하니라 又曰 陰陽은 是氣니 才有
此理하면 便有此氣하고 才有此氣하면 便有此理라 天下萬事萬物이 何者不出於此理며 何者不出於陰陽이리오』
『 천지(天地)의 사이에 별도로 무슨 일이 있겠는가. 다만 음(陰)과 양(陽) 두 글자가 있을 뿐이니, 보건대 어떤
물건이든 모두 여기에서 떠날 수가 없다.
다만 자신의 몸에 나아가 체념(體念)해 보건대 잠시 눈을 뜨면 음(陰)이 아니면 곧 양(陽)이니, 빽빽이 이 속에
붙어 있어 다른 사물은 모두 붙어 있을 수가 없다.
인(仁)이 아니면 곧 의(義)이고 강(剛)이 아니면 곧 유(柔)이며, 다만 자신이 앞으로 향하고자 하면 곧 양(陽)이고
잠시 거두어 물러가면 음(陰)이며, 의사(意思)가 잠시 동(動)하면 곧 양(陽)이고 잠시 정(靜)하면 곧 음(陰)이니,
별도로 볼 것이 없고 다만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함이 곧 음양(陰陽)일 뿐이다.』
『 복희(伏羲)는 다만 이것을 인하여 괘(卦)를 그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으니, 만약 다만 한 음(陰)과 한 양(陽)
에 나아가면 또 여러 이치를 포괄할 수 없으므로 이에 착종(錯綜)하여 64괘(卦)와 384효(爻)를 만들었으니,
처음에는 다만 허다한 괘(卦)와 효(爻) 뿐이었는데, 뒤에 성인(聖人)이 또 허다한 말씀을 그 아래에 붙인 것이다.
다른 책으로 말하면 원래 이러한 일이 있어야 비로소 이러한 도리를 말하였는데, 역(易)은 일찍이 이러한 일이
있지 않았으나 먼저 가탁하여 모두 그 안에 설명해 놓았다.”』
『 또 말씀하였다.』
『 “음양(陰陽)은 기(氣)이니, 잠시 이 이(理)가 있으면 곧 이 기(氣)가 있으며 잠시 이 기(氣)가 있으면 곧 이
이(理)가 있다. 천하(天下)의 만사(萬事) 만물(萬物)이 어느 것인들 이(理)에서 나오지 않았으며 어느 것인들
음양(陰陽)에서 나오지 않았겠는가.”』
『○ 易은 只是陰陽錯綜하여 交換代易이라 莊生曰 易以道陰陽이라하니 不爲无見이니 如奇偶剛柔는 便只是陰陽
做了易이니라』
『 역(易)은 다만 음양(陰陽)이 착종(錯綜)하여 교환하고 대역(代易)하였다. 장생(莊生)이 말하기를 “역(易)
으로써 음양(陰陽)을 말하였다.” 하였으니, 소견이 없는 것이 아니다. 기우(奇偶)와 강유(剛柔) 같은 것은 곧
다만 음양(陰陽)이 역(易)을 만든 것이다.』
『○ 易은 是陰陽屈伸하여 隨時變易이라 大抵古今에 有大闔闢,小闔闢이어늘 今人은 說易에 都無着摸라 聖人이
便於六十四卦에 只以陰陽奇偶로 寫出來하시니 至於所以爲陰陽, 爲古今하여는 乃是此道理니라』
『 역(易)은 음양(陰陽)이 굴신(屈伸)하여 때에 따라 변역(變易)하는 것이다. 대체로 고금(古今)에는 큰 여닫힘과
작은 여닫힘이 있는데, 지금 사람들은 역(易)을 말할 때에 모두 종잡을 수가 없으므로 성인(聖人)이 곧 64괘(卦)
에서 다만 음양(陰陽)의 기우(奇偶)만 가지고 써내셨으니, 음양(陰陽)이 되고 고금(古今)이 된 까닭에 이르러는
이것이 바로 도리이다.』
『○ 龜山이 過黃亭詹季魯家러니 季魯問易한대 龜山이 取一張紙하여 턛箇圈子하여 用墨塗其半하고 云這便是易
이라하니 此說이 極好라 易은 只是一陰一陽이 做出許多般樣이니라』
『 구산(龜山)이 황정(黃亭) 첨계로(詹季魯)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계로(季魯)가 역(易)을 묻자, 구산(龜山)이
한 장의 종이를 취하여 동그라미를 그린 다음 먹으로 그 반을 칠하고 말씀하기를 “이것이 곧 역(易)이다.” 하였
으니, 이 말씀이 매우 좋다. 역(易)은 다만 한 음(陰)과 한 양(陽)이 허다한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潔靜精微之謂易이니 自是不惹着事요 只懸空說一樣道理하니 不比似他書의 各着事上說이라 所以後來道家
取之하여 與老子爲類하니 便是老子說話도 也不就事上說이니라 又曰 潔靜精微는 是不犯手니라』
『 깨끗하고 고요하고 정미한 것을 역(易)이라 이르니, 이는 어떤 일에 고착되어 있지 않고 다만 한 가지의
도리를 가공(架空)하여 말하였으니, 다른 책에서 각각 어떤 일에 고착하여 설명한 것과는 비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뒤에 도가(道家)가 취하여 《노자(老子)》와 같은 부류로 만들었으니, 《노자(老子)》의 말도 일 위에
나아가 말하지 않았다.』
『 또 말씀하기를 “깨끗하고 고요하고 정미하다는 것은 손을 대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 問卦下之辭爲彖辭어늘 左傳以爲繇辭는 何也오 曰 此只是彖辭라 故로 孔子曰 知『(智)』者觀其彖辭면 則思
過半矣라하시니라 如元亨利貞은 乃文王所繫卦下之辭니 以斷一卦之吉凶이라 此名彖辭니 彖은 斷也니 陸氏音中
語所謂彖之經也요 大哉乾元以下는 孔子釋經之辭니 亦謂之彖이니 所謂彖之傳也라 爻下之辭에 如潛龍勿用은
乃周公所繫之辭니 以斷一爻之吉凶也며 天行健君子以自彊不息은 所謂大象之傳이요 潛龍勿用陽在下也는 所謂小
象之傳이니 皆孔子所作也라 天尊地卑以下는 孔子所述繫辭之傳이니 通論一經之大體凡例니 无經可附일새 而自
分上繫下繫也라 左氏所謂繇字從系하니 疑亦是言繫辭니 繫辭者는 於卦下에 繫之以辭也라』
『 “괘(卦) 아래의 말을 단사(彖辭)라 하는데, 《좌전(左傳)》에서는 주사(繇辭)라고 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이는 다만 단사(彖辭)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지혜로운 자가 단사(彖辭)를 보면 생각함이
반을 넘을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예컨대 ‘원형이정(元亨利貞)’은 바로 문왕(文王)이 괘(卦) 아래에 다신 말씀이니, 한 괘(卦)의 길흉(吉凶)을 결단한
것이다. 이것을 단사(彖辭)라 이름하는데 단(彖)은 결단함이니, 육씨(陸氏)『[육덕명(陸德明)]』의 음(音)
『[오경음(五經音)]』 가운데 이른바 단(彖)의 경(經)이라는 것이며, ‘대재건원(大哉乾元)’ 이하는 공자(孔子)가
경(經)을 해석한 말씀인데 또한 단(彖)이라 이르니, 이른바 단(彖)의 전(傳)이라는 것이다.
효(爻) 아래의 말에 ‘잠룡물용(潛龍勿用)’과 같은 것은 바로 주공(周公)이 다신 말씀이니 한 효(爻)의 길흉(吉凶)을
결단한 것이며, ‘천행건군자이자강불식(天行健君子以自彊不息)’은 이른바 대상(大象)의 전(傳)이고 ‘잠룡물용양재
하야(潛龍勿用陽在下也)’는 이른바 소상(小象)의 전(傳)이니, 모두 공자(孔子)가 지으신 것이다.
‘천존지비(天尊地卑)’ 이하는 공자(孔子)가 기술한 계사(繫辭)의 전(傳)이니, 경(經) 전체의 대체(大體)와 범례(凡例)
를 통론한 것인데, 경(經)에 붙일 만한 데가 없으므로 상계(上繫)•하계(下繫)『[계사상전(繫辭上傳)•하전(下傳)]』
로 나눈 것이다. 좌씨(左氏)의 이른바 주자(繇字)는 계(系)를 따랐으니, 의심컨대 또한 계사(繫辭)를 말한 듯하니,
계사(繫辭)는 괘(卦) 아래에 말을 단 것이다.”』
*주역 ; 역설강령(易說綱領) ②
▣ 역설강령(易說綱領) ②
『○ 通書云 聖人之精을 턛卦以示하고 聖人之縕을 因卦以發이라하니 精은 是聖人本意요 縕은 是偏傍帶來道理라
如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는 是聖人本意底요 如文言, 繫辭等孔子之言은 皆是因而發底니
不可一例作重看이니라』
『 《통서(通書)》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의 정(精)을 괘(卦)를 그어 보여주고 성인(聖人)의 온축(縕蓄)을 괘(卦)
로 인하여 발명하였다.” 하였으니, 정(精)은 성인(聖人)의 본의(本意)이고 온(縕)은 그에 부수(附隨)된 도리이다.
예컨대 “역(易)에 태극(太極)이 있으니,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兩儀)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四象)이
팔괘(八卦)를 낳았다.”는 것과 같은 것은 성인(聖人)의 본의(本意)이고, 〈문언전(文言傳)〉과 〈계사전(繫辭傳)〉
등과 같은 공자(孔子)의 말씀은 모두 인하여 발명(發明)한 것이니, 일례(一例)로 중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 易之有象은 其取之有所從하고 其推之有所用하니 非苟爲寓言也라 然兩漢諸儒는 必欲究其所從하니 則旣滯
泥而不通이요 王弼以來는 直欲推其所用하니 則又疎略而無據하니 二者는 皆失之一偏而不能闕其所疑之過也라
且以一端論之컨대 乾之爲馬와 坤之爲牛는 說卦에 有明文矣요 馬之爲健과 牛之爲順은 在物에 有常理矣로되 至
於案文責卦하여 若屯之有馬而無乾하고 離之有牛而無坤하며 乾之六龍則或疑於震하고 坤之牝馬則當反爲乾하
여는 是皆有不可曉者라 是以로 漢儒求之說卦而不得일새 則遂相與創爲『互體變卦五行納甲飛伏之法주:호체변괘
오행납갑비복지법』하여 參互以求하여 而幸其偶合하니 其說雖詳이나 然其不可通者는 終不可通이요 其可通者도
又皆傅會穿鑿而非有自然之勢라 雖其一二之適然而無待於巧說者는 爲若可信이나 然上無所關於義理之本源하고
下無所資於人事之訓戒하니 則又何必苦心極力하여 以求於此而欲必得之哉아 故로 王弼曰 義苟應健이면 何必乾
이라야 乃爲馬며 爻苟合順이면 何必坤이라야 乃爲牛리오하고 而程子亦曰 理無形也라 故假象以顯義라하시니
此其所以破先儒膠固支離之失而開後學玩辭玩占之方이 則至矣라 然觀其意하면 又似直以易之取象으로 無復有所自
來하여 但如詩之比興, 孟子之譬喩而已니 如此면 則是說卦之作이 爲无所與於易이요 而近取諸身과 遠取諸物者도
亦剩語矣라 故로 疑其說이 亦若有未盡者라 因竊論之컨대 以爲易之取象이 固必有所自來하여 而其爲說이 必已具
於太卜之官이러니 顧今에 不可復考하니 則姑闕之하고 而直據辭中之象하여 以求象中之意하여 使足以爲訓戒而決
吉凶을 如王氏程子與吾本義之云者면 其亦可矣라 固不必深求其象之所自來나 然亦不可謂假設而遽欲忘之也니라』
『 역(易)의 상(象)은 그 취함이 소종래(所從來)가 있고 그 미룸이 활용하는 바가 있으니, 구차하게 말을 붙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양한(兩漢)의 제유(諸儒)들은 반드시 그 소종래(所從來)를 연구하고자 하였으니 이미 막혀서 통하지 못
하고, 왕필(王弼) 이후는 다만 그 활용하는 것만을 미루고자 하였으니 또 소략하여 근거함이 없으니, 두 가지는
모두 한 쪽에 잃어서 의심스러운 것을 빼놓지 못한 잘못이다.』
『 우선 한 가지를 가지고 논한다면 건(乾)이 말『〔馬〕』이 됨과 곤(坤)이 소『〔牛〕』가 됨은 〈설괘전(說卦傳)〉
에 분명한 글이 있고, 말의 굳셈과 소의 순함은 물건에 있어 떳떳한 이치이다.
그러나 글을 상고하고 괘(卦)를 찾아봄에 둔괘(屯卦)에는 말이 있으나 건(乾)이 없고, 이괘(離卦)에는 소가 있으나
곤(坤)이 없으며, 건괘(乾卦)의 육룡(六龍)은 혹 진괘(震卦)인가 의심스럽고, 곤괘(坤卦)의 빈마(牝馬)는 마땅히
도리어 건(乾)이 될듯 함에 이르러는 이는 모두 깨달을 수 없는 점이다.』
『 이 때문에 한유(漢儒)들이 〈설괘전(說卦傳)〉에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으므로 마침내 호체(互體)•변괘(變卦)•
오행(五行)•납갑(納甲)•비복(飛伏)의 법(法)을 창조하여 서로 찾아 우연히 부합하기를 바랐으니, 그 말이 비록
상세하나 통할 수 없는 것은 끝내 통할 수 없고, 통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천착(穿鑿)하여
자연의 형세가 아니다.
비록 한두 가지가 우연히 맞아서 공교한 말이 필요없는 것은 믿을 만할 듯하나, 위로는 의리(義理)의 본원(本源)에
관계되는 바가 없고 아래로는 인사(人事)의 훈계(訓戒)에 도움되는 바가 없으니, 또 하필 고심하고 힘을 다해서
이것을 구하여 반드시 알고자 하겠는가.』
『 그러므로 왕필(王弼)이 말하기를 “뜻이 만일 건(健)이어야 한다면 하필 건(乾)이라야 비로소 말이 되며 효(爻)
가 만일 순(順)이어야 한다면 하필 곤(坤)이라야 비로소 소가 되겠는가.” 하였고, 정자(程子)도 말씀하기를
“이치는 형체가 없으므로 상(象)을 빌어 뜻을 나타냈다.” 하셨으니,
이는 선유(先儒)들의 고루하고 지리한 잘못을 깨뜨려 후학(後學)들에게 말을 살피고 점을 보는 방법을 개도(開導)
해 줌이 지극한 것이다.』
『 그러나 그 뜻을 관찰하면 또 다만 역(易)에서 상(象)을 취한 것을 다시는 유래(由來)한 바가 없어서 다만
시(詩)의 비(比)•흥(興)과 맹자(孟子)의 비유와 같이 여길 뿐인 듯하니, 이와 같다면 〈설괘전(說卦傳)〉을 지은
것이 역(易)과 관계되는 바가 없고, ‘가까이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물건에서 취했다’는 것도 또한 쓸데없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그 말이 또한 미진함이 있는 듯하다.』
『 인하여 적이 논하건대 역(易)에서 상(象)을 취한 것이 진실로 반드시 유래(由來)한 바가 있어 그 해설이 반드시
이미 태복(太卜)의 관원에게 갖추어져 있었는데, 다만 지금에는 다시 상고할 수 없으니, 우선 이것은 빼놓고 다만
말 가운데의 상(象)을 근거하여 상(象) 가운데의 뜻을 찾아, 훈계(訓戒)로 삼고 길흉(吉凶)을 결단하게 하기를
왕씨(王氏)와 정자(程子)와 나의 《본의(本義)》에 말한 것처럼 하면 또한 가(可)할 것이다.
진실로 굳이 그 상(象)의 유래(由來)를 깊이 찾을 것이 없으나 또한 가설(假設)했다고 생각하여 대번에 잊고자
해서도 안될 것이다.』
『○ 伏羲턛八卦하시니 只此數턛이 該盡天下萬物之理라 學者於言上會得者는 淺하고 於象上會得者는 深이어늘
王輔嗣, 伊川은 皆不信象하니 如今에 却不敢如此說이요 只可說道不及見這箇了며 且從象以下說은 免得穿鑿이라
某嘗作易象說하니 大率以簡治繁이요 不以繁御簡이로라』
『 복희(伏羲)가 팔괘(八卦)를 그으셨으니, 다만 이 몇 획이 천하(天下) 만물(萬物)의 이치를 다 포함하였다.
배우는 자가 말에서 이해하는 것은 얕고 상(象)에서 이해하는 것은 깊은데, 왕보사(王輔嗣)『[왕필(王弼)]』와
이천(伊川)은 모두 상(象)을 믿지 않았으니, 지금에 감히 이처럼 말하지는 못하겠고 다만 ‘이러한 것을 미처 보지
못하였고, 또 상(象)으로부터 이하의 말씀은 천착함을 면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내 일찍이 역(易)의 상(象)에 대한 해설(解說)을 지었는데, 대체로 간략함으로써 번다함을 다스렸고 번다함으로써
간략함을 다스리지는 않았다.』
『○ 易之象이 似有三樣이라 有本턛自有之象하니 如奇턛象陽, 偶턛象陰이 是也요 有實取諸物之象하니 如乾坤
六子를 以天地雷風之類로 象之 是也요 有只是聖人이 以意自取那象來하여 明是義者하니 如白馬翰如, 載鬼一車
之類 是也니라』
『 역(易)의 상(象)은 세 가지가 있는 듯하다. 본획(本턛)에 스스로 가지고 있는 상(象)이 있으니 기(奇)의 획은
양(陽)을 상징하고 우(偶)의 획은 음(陰)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며, 실제로 여러 물건의 상(象)을 취한
것이 있으니 건(乾)•곤(坤)과 육자(六子)를 천(天)•지(地)•뇌(雷)•풍(風)의 유(類)로 상징한 것과 같은 것이 이것
이며, 다만 성인(聖人)이 자신의 뜻으로 상(象)을 취하여 이 뜻을 밝힌 것이 있으니 ‘백마(白馬)가 나는 듯하다’는
것과 ‘귀신을 한 수레에 가득히 실었다’는 것과 같은 유(類)가 이것이다.』
『○ 看易에 若是줮定象去看이면 便滋味長이요 若只恁地懸空看이면 也沒甚意思니라 又曰 說易에 得其理면 則象
數在其中하니 固是如此나 然«3流以觀하면 却須先見象數的當下落이라야 方說得理 不走作이니 不然하여 事無實
證이면 則虛理易差也리라』
『 역(易)을 볼 때에 만약 정해진 상(象)에 의거하여 보면 곧 재미가 많아지며, 만약 다만 이렇게 공중에 매달아
놓고 보면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 또 말씀하였다.』
『 “역(易)을 설명할 때에 그 이치를 알면 상(象)•수(數)가 그 가운데에 들어 있으니, 진실로 이와 같이 하여야
하나 흐름을 거슬러 관찰할 경우에는 모름지기 먼저 상(象)•수(數)를 적당하게 놓음을 보아야 비로소 이치를
말한 것이 다른 데로 달려가지 않게 되니, 그렇지 아니하여 일에 실증(實證)이 없으면 헛된 이치라서 잘못되기가
쉬울 것이다.”』
『○ 上古之時엔 民心昧然하여 不知吉凶所在라 故로 聖人作易하여 敎之卜筮하여 吉則行之하고 凶則避之하니 此
是開物成務之道라 故로 繫辭云 以通天下之志하며 以定天下之業하며 以斷天下之疑라하니 正謂此也라 初但有占
而無文하여 往往如今人用『火珠林起課者주:화주림기과자』相似하여 但用其爻而不用其辭하니 則知古人占不待
辭而後見吉凶이라 至孔子하여는 又恐人不知其所以然이라 故로 又復逐爻解之하사 謂此爻所以吉者는 謂以中正
也요 此爻所以凶者는 謂不當位也를 明言之하여 使人易曉爾라 至如文言之類하여는 却又就上面發明道理하시니
非是聖人本意니 知此라야 方可學易이니라』
『 상고(上古)시대에는 민심(民心)이 어두워서 길흉(吉凶)의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역(易)을 만들어 복서(卜筮)를 가르쳐서 길하면 행하고 흉하면 피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물건을 열어주고 일을 이루는 도(道)이다. 그러므로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천하의 뜻을 통하고 천하의
업(業)을 정하고 천하의 의심을 결단한다.”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 처음에는 다만 점(占)만 있고 글이 없어서 왕왕 지금 사람들이 화주림(火珠林)을 가지고 점을 치는 것과 서로
유사해서 다만 그 효(爻)만 쓰고 그 말은 쓰지 않았으니, 옛 사람들은 점을 칠 때에 굳이 말을 기다린 뒤에 길흉
(吉凶)을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공자(孔子)에 이르러서는 또 사람들이 그 소이연(所以然)을 모를까 두려워
하였다.
그러므로 또 다시 효(爻)마다 해석하여 이 효(爻)가 길한 까닭은 중정(中正)하기 때문이요, 이 효(爻)가 흉한 까닭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기 쉽게 한 것이다.
〈문언전(文言傳)〉과 같은 유(類)에 이르러서는 또 그 상면(上面)에 나아가 도리를 발명하였으니,
이것은 성인(聖人)의 본의(本意)가 아니다. 이것을 알아야 비로소 역(易)을 배울 수 있다.』
『○ 聖人一部易은 皆是假借虛設之辭니 蓋緣天下之理 若正說出이면 便只作一件用일새라 唯以象言하면 則當卜
筮之時에 看是甚事都來應得이니라』
『 성인(聖人)의 한 부(部)의 역(易)은 모두 빌어서 가설(假設)한 말씀이니, 천하의 이치를 만약 바로 말하면 곧
다만 한 가지 쓰임만 되기 때문이다. 오직 상(象)으로 말하면 복서(卜筮)할 때에 무슨 일이든 모두 응용할 수
있음을 볼 것이다.』
『○ 上古之易은 方是『利用厚生이러니 周易에 始有正德意주:이용후생』라 如利貞은 是敎人利於貞正이요 貞吉은
是敎人貞正則吉이며 至孔子하여는 則說得道理又多하시니라』
『 상고(上古)의 역(易)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이었는데 《주역(周易)》에 비로소 정덕(正德)의 뜻이 있게 되었다.
예컨대 ‘이정(利貞)’은 사람들에게 정정(貞正)함이 이로움을 가르친 것이고 ‘정길(貞吉)’은 사람들에게 정정(貞正)
하면 길함을 가르친 것이며, 공자(孔子)에 이르러서는 도리를 설명한 것이 더욱 많으시다.』
『○ 易은 只是設箇卦象하여 以明吉凶而已요 更無他說이니라 又曰 易은 是箇有道理底『卦影주:괘영』이니 易以卜
筮作이나 許多理 便也在裏하니라』
『 역(易)은 다만 괘(卦)와 상(象)을 만들어 길흉(吉凶)을 밝혔을 뿐이요, 다시 다른 이론이 없다.』
『 또 말씀하였다.』
『 “역(易)은 도리가 있는 괘영(卦影)이니, 역(易)은 복서(卜筮)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나 허다한 도리가 곧 또한
이 가운데에 들어있다.”』
『○ 易은 本卜筮之書라 後人은 以爲止於卜筮러니 至王弼하여 用老莊解하여 後人은 便只以爲理而不以爲卜筮라
하니 亦非라 想當初伏羲턛卦之時에 偶見得一是陽, 二是陰하여 從而턛放하시니 那裏엔 只是陽爲吉, 陰爲凶이요
无文字러니 後에 文王이 見其不可曉故로 爲之作彖辭하시고 或占得爻處에 不可曉故로 周公이 爲之作爻辭하시고
又不可曉故로 孔子爲之作十翼하시니 皆解當初之意라 今人은 不看卦爻하고 而看繫辭하니 是猶不看『刑統주:
형통』而看刑統之序例也니 安能曉리오 今人이 須以卜筮之書看之라야 方得이니 不然이면 不可看易이니라』
『 역(易)은 본래 복서(卜筮)하는 책이므로 후인(後人)들은 다만 복서(卜筮)하기 위한 것이라 여겼었는데,
왕필(王弼)에 이르러 노(老)•장(莊)을 가지고 해석하여 후인(後人)들은 곧 다만 도리(道理)를 위한 것이요 복서
(卜筮)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또한 잘못이다.』
『 생각컨대 당초에 복희(伏羲)가 괘(卦)를 그을 때에 우연히 일(一)이 양(陽)이고 이(二)가 음(陰)임을 보고서
따라 그렸으니, 이 속에는 다만 양(陽)은 길함이 되고 음(陰)은 흉함이 될 뿐이요 문자(文字)가 없었다.
그러다가 뒤에 문왕(文王)이 이해할 수 없음을 보셨기 때문에 이를 위해 단사(彖辭)를 지으셨고, 혹 점을 쳐서
효(爻)를 얻은 곳에 이해할 수 없으므로 주공(周公)이 이를 위해 효사(爻辭)를 지으셨으며, 그래도 이해할 수 없으
므로 공자(孔子)가 이를 위해 십익(十翼)을 지으셨으니, 모두 당초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 지금 사람들은 괘(卦)와 효(爻)를 보지 않고 계사(繫辭)만을 보니, 이는 마치 《형통(刑統)》을 보지 않고
《형통(刑統)》의 서문(序文)과 범례(凡例)만을 보는 격이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은 모름지기
복서(卜筮)하는 책으로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역(易)을 볼 수 없을 것이다.』
『○ 易은 只是爲卜筮而作이라 故로 周禮에 分明言太卜掌三易하니 連山, 歸藏, 周易이라 古人은 於卜筮之官에
立之凡數人이요 秦은 去古未遠이라 故로 周易亦以卜筮라하여 得不焚이어늘 今人은 才說易是卜筮之書라하면
便以爲辱累了易하며 見夫子說許多道理하고 便以爲易只是說道理라하니 殊不知其言吉凶悔吝이 皆有理하여 而其
敎人之意 无不在也라 而今所以難理會는 時蓋緣亡了那卜筮之法이니 如太卜掌三易之法連山, 歸藏, 周易하여 便是
別有理會周易之法이어늘 而今에 却只有上下經兩篇하여 皆不見許多法了하니 所以難理會라 今人은 却道聖人言理
에 而其中因有卜筮之說이라하니 他說理後에 說從那卜筮上來做쬱오』
『 역(易)은 다만 복서(卜筮)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주례(周禮)》에 분명히 “태복(太卜)이 세 역(易)을 관장하였으니, 연산(連山)•귀장(歸藏)•주역(周易)
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옛사람은 복서(卜筮)하는 관원을 세울 적에 모두 여러 명이었고, 진(秦)나라는 옛날과 거리가 멀지 않았던 까닭에
《주역(周易)》 또한 복서(卜筮)하는 책이라 하여 불태우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역(易)이 복서(卜筮)하는 책이라고 말하면 곧 역(易)을 욕되게 하고 누를 끼치는
것이라고 말하며, 부자(夫子)께서 허다한 도리를 말씀한 것을 보고는 곧 이르기를 “역(易)은 다만 도리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니, 역(易)에서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을 말한 것이 모두 이치가 있어서 사람을 가르친 뜻이 들어
있지 않음이 없음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에 이해하기 어려운 까닭은 복서(卜筮)하는 법이 없어졌기 때문이니, 예컨대 태복(太卜)이 삼역(三易)의 법(法)
인 연산(連山)•귀장(歸藏)•주역(周易)을 관장한 것과 같아서 별도로 《주역(周易)》을 이해하는 법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상경(上經)•하경(下經) 두 편만 있어 허다한 법식을 모두 볼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성인(聖人)이 도리(道理)를 말할 적에 이로 인하여 그 가운데에 복서(卜筮)하는 말이 있게 되었다.”
라고 말하니, 이는 성인(聖人)이 도리를 말한 뒤에 설명이 복서상(卜筮上)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말인가.』
『○ 易은 只是與人卜筮하여 以決疑惑이니 若道理當爲면 固是便爲요 若道理不當爲면 自是不可做니 何用更占이리오
却是有一樣事 或吉或凶或兩岐道理하여 處置不得일새 所以用占이니라』
『 역(易)은 다만 사람에게 복서(卜筮)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 의혹을 결단하게 한 것이니, 만약 도리(道理)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면 진실로 곧 해야 하고, 만약 도리(道理)에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일이면 자연히 하지
말아야 하니, 이와 같다면 어찌 다시 점칠 것이 있겠는가. 이는 한 가지 일이 혹 길하기도 하고 혹 흉하기도 하며
혹 두 갈래 도리(道理)여서 처치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점(占)을 사용하는 것이다.』
『○ 今學者諱言易本爲卜筮作하여 須要說做爲義理作하니 若果爲義理作時엔 何不直述一件文字 如中庸大學之
書하여 言義理以曉人하고 須得턛八卦則甚고』
『 지금 배우는 자들은 역(易)이 본래 복서(卜筮)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라고 말하기를 꺼려서 모름지기 의리
(義理)를 위하여 지은 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니, 만약 과연 의리(義理)를 위하여 지었다고 할 경우에는 어찌하여
한 건(件)의 문자(文字)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책과 같은 것을 곧바로 기술해서 의리(義理)를 말하여
사람을 깨우치지 않고, 모름지기 팔괘(八卦)를 그어놓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 陽爻多吉하고 陰爻多凶하나 又看他所處之地位如何라 易中엔 大槪陽吉而陰凶이로되 間亦有陽凶而陰吉者는
何故오 蓋有當爲, 有不當爲하니 若當爲而不爲하고 不當爲而爲之하면 雖陽이나 亦凶이니라』
『 양효(陽爻)는 길함이 많고 음효(陰爻)는 흉함이 많으나 또 그 처한 바의 자리가 어떠한가를 보아야 한다.
역(易) 가운데에는 대체로 양(陽)이 길하고 음(陰)이 흉하나, 중간에는 또한 양(陽)이 흉하고 음(陰)이 길한
경우가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있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니,
만약 마땅히 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한다면 비록 양(陽)이라도 흉하다.』
『○ 易中엔 却是貞吉이요 不曾有不貞吉이며 都是利貞이요 不曾說利不貞이라 如占得乾卦하면 固是大亨이나
下則云利貞이라하니 蓋正則利요 不正則不利니 至理之權輿와 聖人之至敎가 寓其間矣라 大率是爲君子設이요
非小人盜賊所得竊取而用이라 橫渠云 易爲君子謀요 不爲小人謀라하시니 極好니라』
『 역(易) 가운데에는 ‘정(貞)하면 길하다’고 하였고 일찍이 ‘정(貞)하지 않으면 길하다’고 한 것은 없으며, 모두
‘정(貞)함이 이롭다’ 하였고 일찍이 ‘정(貞)하지 않은 것이 이롭다’고 말한 것은 없다.
예를 들면 점을 쳐서 건괘(乾卦)를 얻으면 진실로 크게 형통하나 아래에 ‘정(貞)함이 이롭다’고 말하였으니,
바르면 이롭고 바르지 않으면 이롭지 않은 것이니, 지극한 이치의 권여(權輿)『[시초]』와 성인(聖人)의 지극한
가르침이 이 사이에 붙어 있다.』
『 대체로 이 역(易)은 군자(君子)를 위하여 만든 것이요 소인(小人)과 도적들이 절취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횡거(橫渠)가 말씀하기를 “역(易)은 군자(君子)를 위하여 꾀한 것이요 소인(小人)을 위하여 꾀한 것이
아니다.” 하셨으니, 매우 좋다.』
『○ 易中利字는 多爲占者設이라 如利涉大川은 是利於行舟也요 利有攸往은 是利於啓行也요 利用祭祀, 利用享
祀는 是卜祭吉이요 田獲三狐, 田獲三品은 是卜田吉이요 公用享于天子는 是卜朝覲吉이요 利建侯는 是卜立君吉
이요 利用爲依遷國은 是卜遷國吉이요 利用侵伐은 是卜侵伐吉之類라』
『 역(易) 가운데의 이자(利字)는 점치는 자를 위하여 베푼 것이 많다. 예를 들면 ‘이섭대천(利涉大川)’은 배를
운행함에 이로운 것이고, ‘이유유왕(利有攸往)’은 계행(啓行)『[길을 떠남]』에 이로운 것이고, ‘이용제사(利用
祭祀)’와 ‘이용향사(利用享祀)’는 제사를 점침에 길한 것이고, ‘전획삼호(田獲三狐)’와 ‘전획삼품(田獲三品)’은
사냥을 점침에 길한 것이고, ‘공용향우천자(公用享于天子)’는 조근(朝覲)을 점침에 길한 것이고, ‘이건후(利建侯)’
는 군주를 세움을 점침에 길한 것이고, ‘이용위의천국(利用爲依遷國)’은 국도(國都)를 옮김을 점침에 길한 것이고,
‘이용침벌(利用侵伐)’은 침벌(侵伐)을 점침에 길한 것과 같은 유(類)이다.』
『○ 今人讀易에 當分爲三等看이라 伏羲之易은 如未有許多彖象文言說話면 方見得易之本意 只是要作卜筮用이라
如伏羲턛卦에 那裏有許多文字言語리오 只是某卦有某象하니 如乾有乾之象하고 坤有坤之象而已라 今人은 說易에
未曾明乾坤之象하고 便先說乾坤之理하니 所以說得都无情理라 及文王周公하여 分爲六十四卦하시고 添入乾元亨
利貞, 坤元亨利牝馬之貞하시니 早不是伏羲之意요 已是文王周公이 自說出一般道理了라 然猶是就人占處說하시니
如占得乾卦면 則大亨而利於正耳라 及孔子繫易하사 作彖象文言하사는 則以元亨利貞으로 爲乾之四德하시니 又非
文王之易矣니라』
『 지금 사람들은 역(易)을 읽을 적에 마땅히 세 등급으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복희(伏羲)의 역(易)은 만일
허다한 〈단전(彖傳)〉•〈상전(象傳)〉•〈문언전(文言傳)〉 등의 말이 없다면 비로소 역(易)의 본의(本意)가
다만 복서(卜筮)에 쓰고자 한 것임을 볼 것이다.
복희(伏羲)가 괘(卦)를 그을 적에 어찌 그 속에 허다한 문자(文字)와 언어(言語)가 있었겠는가.
다만 아무 괘(卦)에는 아무 상(象)이 있었을 뿐이니, 건괘(乾卦)는 건괘(乾卦)의 상(象)이 있고 곤괘(坤卦)는
곤괘(坤卦)의 상(象)이 있을 뿐임과 같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역(易)을 설명함에 일찍이 건(乾)•곤(坤)의 상(象)은 밝히지 않고 곧 먼저 건(乾)•곤(坤)의
이치만 말하니, 이 때문에 말하는 것이 모두 정(情)과 이치가 없는 것이다.』
『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에 이르러 나누어 64괘(卦)를 만드시고 ‘건원형이정(乾元亨利貞)’이라는 것과 ‘곤원형
이빈마지정(坤元亨利牝馬之貞)’이라는 것을 더 넣었으니, 이것은 복희(伏羲)의 뜻이 아니요, 이미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이 따로 한 가지 도리를 말씀해 낸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사람들이 점치는 곳에 나아가 말씀하였으니, 예컨대 점(占)을 쳐서 건괘(乾卦)를 얻으면 크게 형통
하고 정(貞)함이 이롭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역(易)에 말을 다시어 〈단전(彖傳)〉•〈상전(象傳)〉
•〈문언전(文言傳)〉을 지음에 이르러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을 건괘(乾卦)의 네 가지 덕(德)으로 삼으셨으니,
이는 또 문왕(文王)의 역(易)이 아니다.』
*주역 ; 역설강령(易說綱領) ③
▣ 역설강령(易說綱領) ③
『○ 讀易之法은 竊疑卦爻之辭는 本爲卜筮者斷吉凶而具訓戒러니 至彖象文言之作하여 始因其吉凶訓戒之意하여
而推說其義理以明之라 後人은 但見孔子所說義理하고 而不復推本文王周公之本意하여 因鄙卜筮하여 以爲不足言
이라하여 而其所以言者 遂遠於日用之實하여 類皆牽合委曲하여 偏主一事而言하고 无復包含該貫曲暢旁通之妙
하니 若但如此면 則聖人이 當時에 自可別作一書하여 明言義理하여 以詔後世니 何用假託卦象하여 爲此艱深隱晦
之辭乎아 故로 今欲凡讀一卦一爻인댄 便如占筮所得하여 虛心以求其辭義之所指하여 以爲吉凶可否之決然後에
考其象之所以然者하고 求其理之所以然者하여 推之於事하면 使上自王公으로 下至民庶히 所以修身治國에 皆有
可用이라 私竊以爲如此求之라야 似得三聖之遺意로라』
『 《주역(周易)》을 읽는 법은 저으기 의심『[생각]』하건대 괘(卦)와 효(爻)의 말은 본래 복서(卜筮)하는 자를
위하여 길흉(吉凶)을 결단하고 훈계(訓戒)하는 말을 갖추어 놓은 것이었는데, 〈단전(彖傳)〉•〈상전(象傳)〉•
〈문언전(文言傳)〉을 지음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길흉(吉凶)과 훈계(訓戒)하는 뜻을 인하여 의리(義理)를 미루어
밝힌 것인 듯하다.』
『 후인(後人)은 다만 공자(孔子)가 말씀한 의리(義理)만 보고 다시는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본의(本意)를
미루지 않고는 인하여 복서(卜筮)를 비루하게 여겨 굳이 말할 것이 못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말하는 것이 마침내 일용(日用)의 실제(實際)와 거리가 멀어 대체로 모두 끌어다 맞추고 왜곡해서 편벽
되이 한 가지 일만을 주장하여 말하고, 다시는 포함하여 관통하고 곡창(曲暢)하여 사방으로 통하는 묘함이 없으니,
만약 다만 이와 같다면 성인(聖人)이 당시에 스스로 따로 한 책을 지어서 의리(義理)를 분명히 말씀하여 후세를
가르쳤을 것이니, 어찌 괘상(卦象)에 가탁하여 이처럼 어렵고 심오하고 은미한 말씀을 하였겠는가.』
『 그러므로 이제 무릇 한 괘(卦)와 한 효(爻)를 읽고자 할진댄 곧 점서(占筮)하여 얻은 것처럼 여겨서 마음을
비우고 말한 뜻이 가리키는 바를 찾아서 길흉(吉凶)과 가부(可否)를 결정한 뒤에 그 상(象)의 소이연(所以然)을
상고하고 그 이치의 소이연(所以然)을 찾아서 일에 미루어야 할 것이니, 이렇게 하면 위로는 왕공(王公)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庶民)에 이르기까지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림에 모두 쓸 수가 있을 것이다. 사사로이 생각하건대
이렇게 찾아야 세 성인(聖人)이 남기신 뜻을 얻을 듯하다.』
『○ 孔子之易은 非文王之易이요 文王之易은 非伏羲之易이며 伊川易傳은 自是程氏之易也라 故로 學者且依古易
次第하여 先讀本文이면 則見本旨矣리라』
『 공자(孔子)의 역(易)은 문왕(文王)의 역(易)이 아니고 문왕(文王)의 역(易)은 복희(伏羲)의 역(易)이 아니며,
이천(伊川)의 《역전(易傳)》은 따로 정씨(程氏)의 역(易)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우선 옛 역(易)의 차례에
따라 먼저 본문(本文)을 읽으면 본지(本旨)를 보게 될 것이다.』
『○ 看易에 須是看他未턛卦已前에 是È-生模樣이니 却就這裏하여 看他許多卦爻象數 非是杜撰이요 都是合如此라
未턛已前은 便是寂然不動이라 喜怒哀樂未發之中으로 只是箇至虛至靜而已러니 忽然在這至虛至靜之中하여 有箇象
하여 方說出許多象數吉凶道理하니 所以禮曰潔靜精微易敎也라 蓋易之爲書 是懸空做出來라 如書는 便眞箇有這政
事謀謨라야 方做出書來하고 詩는 便眞箇有這人情風俗이라야 方做出詩來로되 易은 却都无這已往底事하고 只是懸
空做底라 未有爻턛之先엔 在易則渾然一理요 在人則湛然一心이며 旣有爻턛이면 方見得這爻是如何, 這爻又是如何
라 然而皆是就這至虛至靜中하여 做出許多象數來니 此其所以靈이니라』
『 역(易)을 볼 적에는 모름지기 저 괘(卦)를 긋기 이전에 어떤 모양이었는가를 보아야 하니, 이 속에 나아가
허다한 괘효(卦爻)와 상수(象數)가 두찬(杜撰)한 것이 아니고, 모두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함을 보아야 한다.
괘(卦)를 긋기 이전은 곧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아서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지 않은 중(中)으로,
다만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정(靜)할 뿐이었는데, 홀연히 이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정(靜)한 가운데에
이러한 상(象)이 있어서 비로소 허다한 상수(象數)의 길흉(吉凶)과 도리(道理)를 말하였으니,
이 때문에 《예기(禮記)》에 “깨끗하고 고요하고 정미한 것이 역(易)의 가르침이다.”라고 한 것이다.』
『 《주역(周易)》 책은 가공(架空)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예컨대 《서경(書經)》은 곧 참으로 정사(政事)와 모모
(謀謨)가 있어야 비로소 《서경(書經)》을 지어내었고, 《시경(詩經)》은 참으로 인정(人情)과 풍속(風俗)이
있어야 비로소 《시경(詩經)》을 지어내었으나, 《주역(周易)》은 모두 이왕(已往)에 이러한 일이 없었고 다만
가공(架空)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효(爻)의 획(턛)이 있기 이전에는 역(易)에 있어서는 혼연(渾然)한 한 이치이고 사람에게 있어서는 잠연(湛然)한
한 마음이며, 이미 효(爻)의 획(턛)이 있게 되면 비로소 이 효(爻)는 어떠한 것이고 이 효(爻)는 또 어떠한 것인지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모두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정(靜)한 가운데에 나아가 허다한 상수(象數)를 지어낸 것이니,
이 때문에 신령스러운 것이다.』
『○ 易은 須是錯綜看이니 天下事无不出於此라 善惡是非得失로 以至於屈伸消長盛衰히 看甚事都出於此라 伏羲
以前엔 不知如何占考요 至伏羲하여 將陰陽兩箇하여 턛卦以示人하여 使人於此에 占考吉凶禍福케하시니 一턛爲
陽이요 二턛爲陰이며 一턛爲奇요 二턛爲偶하여 遂爲八卦하고 又錯綜爲六十四卦하니 凡三百八十四爻라 文王이
又爲之彖辭하여 以釋其義하시니 无非陰陽消長盛衰屈伸之理니 聖人之所以學者는 學此而已니라』
『 역(易)은 모름지기 착종(錯綜)『[이리저리 종합함]』하여 보아야 하니, 천하(天下)의 일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
선악(善惡)•시비(是非)•득실(得失)로부터 굴신(屈伸)•소장(消長)•성쇠(盛衰)에 이르기까지 어떤 일이든 모두
여기에서 나옴을 볼 수 있다. 복희(伏羲) 이전에는 어떻게 점(占)을 쳐서 상고했는지 알 수 없고,
복희(伏羲)에 이르러서는 음(陰)•양(陽) 두 개를 가지고 괘(卦)를 그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점(占)을 쳐서 길흉(吉凶), 화복(禍福)을 상고하게 하였으니, 한 획이 양(陽)이 되고 두 획이 음(陰)이
되며 한 획이 기(奇)가 되고 두 획이 우(偶)가 되어 마침내 팔괘(八卦)가 되고 또 착종(錯綜)하여 64괘(卦)가 되니,
모두 384효(爻)이다. 문왕(文王)이 또 단사(彖辭)를 지어 그 뜻을 해석하셨는데,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고
성쇠(盛衰)하고 굴신(屈伸)하는 이치가 아닌 것이 없으니, 성인(聖人)이 배우는 것은 이것을 배운 것일 뿐이다.』
『○ 易은 最難看하니 其爲書也 廣大悉備하여 包涵萬理하여 无所不有어니와 其實은 是古者卜筮書니 不必只說理
요 象數亦可說이니 初不曾滯於一偏이라 某近看易하니 見得聖人이 本无許多勞攘이어늘 自是後世一向妄意增減
하여 便要作一說하여 以强通其義일새 所以聖人經旨 愈見不明이라 且如解易엔 只是添虛字去하여 迎過意來라야
便得이어늘 今人은 解易에 乃去添他實字하여 却是借他做己意說了하며 又恐或者一說이 有以破之하여 其勢不得不
支離更爲一說하여 以護吝之하여 說千說萬이나 與易全不相干이라 此書는 本是難看底物이니 不可將小巧去說이요
又不可將大話去說이니라』
『 역(易)은 가장 보기가 어려우니, 책의 내용이 광대(廣大)하여 모두 갖추어져서 만 가지 이치를 포함하여 있지
않은 것이 없으나, 그 실제는 옛날에 복서(卜筮)하던 책이니,
반드시 다만 이치만 말한 것이 아니요, 상수(象數)도 말할 수 있는 바, 애당초 일찍이 한 쪽에 치우친 것이 아니다.』
『 내가 근래에 역(易)을 보니, 성인(聖人)이 본래 허다하게 수고함이 없으셨는데, 후세에 한결같이 망령된 뜻으로
증감(增減)하여 곧 한 말을 지어내어 그 뜻을 억지로 통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의 경지(經旨)
『[경전의 뜻]』가 더욱 밝지 못하게 됨을 보는 것이다.』
『 또 역(易)을 해석함에는 다만 허자(虛字)를 더하여 뜻을 맞이해 와야 비로소 알 수 있는데, 지금 사람들은 역(易)
을 해석할 적에 마침내 실자(實字)를 더하여 저것을 빌어 자기의 뜻으로 삼아 말하며, 또 혹자의 일설(一說)이
이것을 깨뜨릴까 두려워하여, 그 형세가 지리하게 다시 일설(一說)을 만들어 비호하고 아끼지 않을 수가 없어서
천 가지를 말하고 만 가지를 말하나 역(易)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 책은 본래 보기 어려운 물건이니, 작은 지혜를 가지고 말해서도 안되며 또 큰 말을 가지고 말해서도 안 된다.』
『○ 易은 難看하니 不比他書라 易說一箇物은 非眞是一箇物이니 如說龍은 非眞龍이라 若他書則眞是實이니 孝悌는
便是孝悌요 仁은 便是仁이어니와 易中엔 多有不可曉處니라』
『 역(易)은 보기가 어려우니, 다른 책에 견줄 수가 없다. 역(易)에 하나의 사물을 말한 것은 진실로 하나의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니, 용(龍)을 말함은 진짜 용(龍)이 아닌 것과 같다. 다른 책으로 말하면 참으로 진실한 것이어서
효제(孝悌)는 곧 효제(孝悌)이고 인(仁)은 곧 인(仁)이나, 역(易) 가운데에는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다.』
『○ 易은 難看하니 無箇言語可形容得이라 蓋爻辭는 是說箇影象在那裏하여 无所不包니라』
『 역(易)은 보기가 어려우니, 말로 형용할 수가 없다. 효사(爻辭)는 영상(影象)이 이 속에 있음을 말하여 포함하지
않는 바가 없다.』
『○ 看易엔 須著四日看一卦니 一日은 看卦辭彖象하고 兩日은 看六爻하고 一日은 統看이라야 方子細니라 又曰
和靖學易에 一日只看一爻하니 此物事成一片하여 動著便都成片하리니 如何看一爻得이리오 又曰 先就乾坤二卦上
하여 看得本意了면 則後面은 皆有通路니라』
『 역(易)을 볼 때에는 모름지기 4일에 한 괘(卦)를 보아야 하니, 하루는 괘사(卦辭)와 〈단전(彖傳)〉•
〈상전(象傳)〉을 보고 이틀은 여섯 효(爻)를 보고 하루는 통합하여 보아야 비로소 자세하게 볼 수 있다.』
『 또 말씀하였다.』
『 “화정(和靖)『[윤순(尹焞)]』은 역(易)을 배울 적에 하루에 다만 한 효(爻)를 보았으니, 이는 사물이 한 쪽을
이루는 것이어서 동함에 모두 한쪽을 이룰 것이니, 어떻게 한 효(爻)만 볼 수 있겠는가.”』
『 또 말씀하였다.』
『 “먼저 건(乾)•곤(坤) 두 괘(卦) 위에 나아가 본의(本意)를 보면 후면은 모두 통하는 길이 있게 된다.”』
『○ 易은 大槪欲人恐懼修省이니 今學易엔 非必待遇事而占하여 方有所戒요 只平居玩味하여 看他所說道理가 於
自家所處地位에 合是如何라 故로 云居則觀其象而玩其辭하고 動則觀其變而玩其占이라하니 孔子所謂學易은 正
是平日常常學之라 想見聖人之所讀은 異乎人之所謂讀하여 想見胸中에 洞然於易之理하여 无纖毫蔽處라 故로 云
『可以无大過주:가이무대과』라하시니라』
『 역(易)은 대개 사람들로 하여금 공구(恐懼)하고 수성(修省)하게 하고자 한 것이니, 지금 역(易)을 배울 때에는
반드시 일을 만나 점치기를 기다려서 비로소 경계하는 바를 두는 것이 아니요, 다만 평상시에 음미하여 저 역(易)
에서 말한 도리가 자신이 처한 지위에 마땅히 어떠한가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거(居)할 때에는 상(象)을 보고 말을 살펴보며, 동(動)할 때에는 변(變)을 보고 점(占)을 살펴
본다.” 하였으니, 공자(孔子)의 이른바 역(易)을 배운다는 것은 바로 평소에 항상 배우는 것이다. 상상해 보건대
성인(聖人)이 읽는 것은 일반인의 이른바 읽는다는 것과는 달라서 가슴속에 역(易)의 이치를 통하여 털끝 만큼도
가리운 곳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큰 허물이 없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 讀易之法은 先讀正經하여 不曉면 則將彖象繫辭來解니라 又曰 易爻辭는 如『籤辭주:첨사』하니라』
『 역(易)을 읽는 법은 먼저 정경(正經)『[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가리킴]』을 읽어서 깨닫지 못하면
〈단전(彖傳)〉•〈상전(象傳)〉•〈계사전(繫辭傳)〉 등을 가져다가 해석해야 한다.』
『 또 말씀하였다.』
『 “역(易)의 효사(爻辭)는 첨사(籤辭)와 같다.”』
『○ 問易如何讀이닛가 曰 只要虛其心하여 以求其義요 不要執己見讀이니 他書亦然이니라』
『 “역(易)을 어떻게 읽어야 합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다만 마음을 비워 그 뜻을 찾으려 해야 할 것이요,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고 읽지 말아야 하니, 다른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러하다.”』
『○ 問讀易에 未能浹洽은 何也오 曰 此須是此心虛明寧靜이면 自然道理流通하여 方包羅得許多義理라 蓋易은
不比詩書하니 他是說盡天下後世无窮无盡底事理하니 只一兩字 便是一箇道理라 又人須是經歷天下許多事變하고
讀易이라야 方知各有一理하여 精審端正이어늘 今旣未盡經歷하니 非是此心大段虛明寧靜이면 如何見得이리오
此不可不自勉也니라 又曰 如今에 不曾經歷得許多事過하면 都自?他道理不着이니 若便去看이라도 也卒未得他
受用이니라 孔子晩而好易하시니 可見這書卒未可理會니라』
『 “역(易)을 읽음에 푹 배어들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모름지기 이 마음이 허명(虛明)하여 편안하고 고요하면 자연 도리(道理)가 유통되어 허다한 의리(義理)를
포괄하게 된다. 역(易)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비할 수가 없으니, 천하 후세의 무궁무진한 사리
(事理)를 다 말하였는 바, 다만 한두 글자가 곧 하나의 도리이다. 또 사람들이 모름지기 천하의 허다한 사변(事變)
을 거치고 나서 역(易)을 읽어야 비로소 각각 한 이치가 있어서 정밀하고 자세하고 단정함을 알 수 있는데,
이제 이미 허다한 일을 다 겪어보지 않았으니, 이 마음이 대단히 허명(虛明)하여 편안하고 고요한 이가 아니면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스스로 힘쓰지 않을 수 없다.”』
『 또 말씀하였다.』
『 “지금에 일찍이 허다한 일을 겪어 보지 않았으면 도무지 저 도리를 접할 수가 없으니, 만약 곧 가서 보더라도
끝내 받아서 쓸 수가 없을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만년에 역(易)을 좋아하였으니, 이 책은 대번에 이해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問易本義는 何專以卜筮爲主오 曰 且須熟讀正文이요 莫看註解하라 蓋古易은 彖象文言이 各在一處러니 至
王弼하여 始合爲一하니 後世諸儒 遂不敢與移動하니 今難卒說이나 且須熟讀正文하면 久當自悟리라』
『 “역(易)의 《본의(本義)》는 어찌 오로지 복서(卜筮)를 위주로 하였습니까?”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
하였다.』
『 “우선 모름지기 정문(正文)을 익숙히 읽을 것이요 주해(註解)를 보지 말라. 옛 역(易)은 〈단전(彖傳)〉•
〈상전(象傳)〉•〈문언전(文言傳)〉이 각각 따로 있었는데, 왕필(王弼)에 이르러 비로소 합하여 하나로 만드니,
후세의 제유(諸儒)들이 마침내 감히 바꾸지 못하였는바, 지금 갑자기 말하기 어려우나 우선 모름지기 정문(正文)
을 익숙히 읽으면 오래되면 마땅히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 問讀本義에 所釋卦辭를 若看得分明이면 則彖辭之義亦自明이니 只須略提破此是卦義, 此是卦象, 卦體, 卦變
이요 不必更下注脚矣로이다 曰 某當初作此文字時에 正欲如此하니 蓋彖傳은 本是釋經之卦辭니 若看卦辭分明
이면 則彖亦可見이라 但後來에 要重整頓過러니 未及이로니 不知今所解者 能如本意否로라 又曰 某作本義에 欲將
文王卦辭하여 只大綱依文王卦辭略說하고 至其所以然之故하여는 却於孔子彖辭中發之로라 且如大畜利貞, 不家
食吉, 利涉大川은 只是占得大畜者 爲利正, 不家食而吉, 利於涉大川이요 至於剛上而尙賢等處하여는 乃孔子發明
이니 各有所主하니 爻象亦然이라 如此면 則不失文王本意요 又可見孔子之意리라 但而今에 未暇整頓耳로라』
『 “《본의(本義)》를 읽을 적에 해석한 괘사(卦辭)를 만약 분명히 본다면 단사(彖辭)의 뜻 또한 저절로 밝아질
것이니, 모름지기 대략 이것이 괘의(卦義)이고 이것이 괘상(卦象), 이것이 괘체(卦體), 이것이 괘변(卦變)이라는
것만을 들 것이요, 굳이 다시 주각(註脚)에 내려갈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내 당초 이 문자(文字)를 지을 때에 바로 이와 같이 하고자 하였다. 〈단전(彖傳)〉은 본래 경(經)의 괘사(卦辭)
를 해석한 것이니, 만약 괘사(卦辭)를 봄이 분명하다면 〈단전(彖傳)〉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후에 다시 정돈하려고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해석한 것이 본래의 뜻과 같은지는 알지 못하겠다.”』
『 또 말씀하였다.』
『 “내가 《본의(本義)》를 지을 적에 문왕(文王)의 괘사(卦辭)를 가지고 다만 대강 문왕(文王)의 괘사(卦辭)에
의거하여 간략히 해설하고, 그 소이연(所以然)의 연고에 이르러서는 공자(孔子)의 〈단사(彖辭)〉 중에 발명하
고자 하였다. 또 대축괘(大畜卦)의 ‘이정(利貞) 불가식길(不家食吉) 이섭대천(利涉大川)’은 다만 점(占)을 쳐서
대축괘(大畜卦)를 얻은 자는 ‘바름이 이롭고 집안에서 밥을 먹지 않으면 길(吉)하고 대천(大川)을 건넘이 이롭다’는
것이며, ‘강(剛)이 위에 있어 어진이를 높인다’는 등의 부분에 이르러서는 바로 공자(孔子)께서 발명하신 것이니,
각각 주장하는 바가 있는 바, 효상(爻象)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하면 문왕(文王)의 본의(本意)를 잃지 않을 것이요,
또 공자(孔子)의 뜻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 미처 정돈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 某解一部易은 只是作卜筮之書어늘 今人은 說得來太精了하여 更入粗不得이라 如某之說은 雖粗나 却入得精
하여 精義皆在其中하니 若曉得某說이면 則曉得羲文之易이 本是如此요 元未有許多道理在하리니 方不失易之本
意리라 今未曉得聖人作易之本意하고 便先要說道理인댄 縱饒說得好라도 只是與易元不相干이니라』
『 내가 해석한 한 부(部)의 역(易)은 다만 복서(卜筮)하는 책으로 만든 것인데, 지금 사람들은 말을 하는 것이
너무 정미(精微)해서 다시는 소략한 데에 들어갈 수가 없다. 나의 해설과 같은 것은 비록 소략하나 정미함에
들어갈 수가 있어서 정한 뜻이 모두 이 가운데에 들어 있으니, 만약 나의 해설을 깨닫는다면 복희(伏羲)와 문왕
(文王)의 역(易)이 본래 이와 같고 원래 허다한 도리가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니, 비로소 역(易)의 본의
(本意)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제 성인(聖人)이 역(易)을 지은 본의(本意)를 깨닫지 못하고 먼저 도리를 말하려고
하면 비록 말한 것이 좋더라도 다만 역(易)과는 원래 상관이 없게 된다.』
『○ 某之易이 簡略者는 當時에 只是略搭記요 兼文義는 伊川及諸儒皆說了일새 某只就語脈中하여 略牽過這意思
로라』
『 나의 역(易)이 간략한 까닭은 당시에 다만 간략히 기록하였고, 게다가 글뜻은 이천(伊川)과 제유(諸儒)들이
모두 설명하였기 때문에 나는 다만 어맥(語脈) 속에 나아가 간략히 이러한 뜻을 끌어냈을 뿐이다.』
『○ 近得趙子欽書하니 云 語孟은 說極詳이어늘 易은 說太略이라하니 此는 譬如燭籠이 添一條骨이면 則障了一
路明하니 若能盡去其障하여 使之統體光明이면 乃更好하리니 蓋著不得詳說也니라』
『 근간에 조자흠(趙子欽)의 편지를 얻어 보니, 이르기를 “《논어(論語)》와 《맹자(孟子)》는 설명이 지극히
자세한데, 역(易)은 설명이 너무 소략하다.” 하였다.
이는 비유하건대 촛불의 채롱에 한 개의 골간(骨幹)을 더하면 한 가닥의 광명(光明)이 막히는 것과 같으니,
만약 그 막은 것을 모두 제거하여 통체(統體)『[전체]』가 광명(光明)하게 한다면 이에 더욱 좋을 것인 바,
상세히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 看易에 先看某本義了하고 却看程傳하여 以相參考니 如未看他易하고 先看某說이면 却也易看하리니 蓋不爲
他說所汨故也니라』
『 역(易)을 볼 때에는 먼저 나의 《본의(本義)》를 보고 그런 다음 《정전(程傳)》을 보아 서로 참고해야 한다.
만일 다른 역(易)을 보지 않고 먼저 나의 해설을 보면 도리어 보기가 쉬울 것이니, 이는 다른 말에 어지럽힘을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