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지팡이
서 미 애
두 개의 지팡이가 나란히 장충체육관 입구를 향해 걷고 있다.
하나는 새우처럼 한쪽 등이 굽은 할머니의 지팡이고 또 하나는 다리를 절룩거리는 사십대 주부의 지팡이다. 그 지팡이를 짚은 두 사람은 고부 사이이다. 장충체육관에는 추석을 맞아 부모님을 위한‘효’ 공연이 있다. 70년대, 가요계의 스타이던 남진 씨를 비롯한 현철, 박해미, 김수희 씨가 나오는 4인 4색의 쇼 뮤지컬 공연이다. 공연에 앞서 부모님의 사진을 올려 달라는 어떤 이벤트가 있었다. 며느리인 나는 공연을 좋아하시는 어머님을 위해 언젠가
찍어 둔 어머님 사진을 올렸고, 그것이 운 좋게 뽑혀 공연에 초대가 된 것이다. 마음이 들뜬 어머님은 올 하나 흐트러짐 없이 곱게 빗은 머리에 옥비녀로 단장하시곤 지팡이를 짚으셨다.
어머님의 연세는 일흔아홉이시다. 작은 키에 깡마른 체구인 어머님은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오셨다. 시댁은 저녁때거리가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안이었다. 아버님 열한 살 때, 아버님의 엄마인 할머니가 신 내림을 받아 집안에서 쫓겨났고, 그러므로 더욱 가난에 허덕이며 간간이 주는 큰집 도움으로 살았다고 한다. 엄마 사랑을 잃어버린 아버님은 이유 없이 아팠고, 시골 장정(壯丁)이 평생 쌀 한 가마니도 질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약했다니 어머님의 고생은 더욱 심했다. 어머님은 다섯 남매를 낳았지만 몸조리가 무언지도 모르고 퉁퉁 부은 몸으로 들판에 나가 일을 했으며, 그동안 아버님이 받아 온 도움의 보답으로 날마다 큰집에 가서 절구에 벼 방아를 찧어 주어야 했다. 그 벼가 무려 서른여섯 마지기에서 거두어들인 양이었다니. 어머님은 까만 하늘에 뜬 달 속의 옥 토기와 견주기라도 하는 양 매일 밤 그렇게 절구질을 했다.
밤새 문풍지를 흔들던 차가운 겨울바람은 어머님 홑치마 속을 들락거리며 온몸을 조여들게 하였고, 얼음같이 찬 냇물에 한 동이씩의 빨래까지 해주어야 했던 어머님은 큰집 가정부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일해 주고도 허기를 달랜 것은 겨우 죽 한 그릇이었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혹사만 시킨 어머님의 뼛속은 지금, 바람 든 무처럼 구멍이 숭숭 하다. 골다공증이 심해 사소한 넘어짐에도 다리와 허리가 골절되고, 천정만 멍하니 바라보고 누워 몇 달씩을 고생한 적도 여러 번이다. 몇 년 전에는 교통사고까지 당해 부러진 넓적다리에 철심을 박는 수술과 장 파열수술까지 연거푸 하였으니, 언제나 푸른 소나무처럼 정정하시던 몸이, 잎 마름의 해충을 입은 것처럼 쇠약해지심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어머님이 지팡이를 짚게 된 것은 그때부터다.
내가 지팡이를 짚게 된 내력은, 여섯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백일을 지나면서 앓은 소아마비로 말미암아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여섯 살이 될 때까지 무릎이 발인 냥 기어만 다녔는데, 학교 갈 무렵이 가까워지자 아버지는 산에서 만들어 오신 두 개의 오동나무 지팡이로 걸음연습을 시켰다. 아버지의 부축과 함께 일어서긴 했지만, 발을 떼려면 힘없는 다리는 자꾸만 앞으로 쓰러질 뿐이었다. 무릎에 피 마를 날 없는 연습은 계속되어 드디어 내 발바닥에도 흙을 묻히게 되었다. 하늘이 한결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두 개의 지팡이에 의해 입학을 했는데, 짓궂은 아이들의 장난이 그만 하나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곧 다시 만들어 주겠다던 아버지는 자꾸만 뒤로 미루셨고, 그것이 하나의 지팡이에 적응시키려는 속뜻임을 나중에 알았다. 이후 그 하나의 지팡이는 한결같은 나의 그림자였고, 또 나의 상징이기도 했다.
공장에서 기숙사 생활을 할 때였다.
어느 일요일, 집에 다니러 갔더니 엄마는 "어젯밤 꿈에 지팡이가 보여서 네가 꼭 올 것 같았다"며 반겨주셨다. 이렇듯 내 지팡이는 엄마의 꿈에도 딸보다 먼저 보일 정도로 분신이 된 것이다. 그 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편물 기술을 배우려고 서울로 올라와 회식이 있던 어느 날, 술 취한 남자들의 싸움으로 지팡이가 두 동강나는 아픔을 또 겪었다. 억수 같은 비가 내리는 밤, 비참한 내 눈물을 하염없이 빗물에 씻은 날이기도 하다. 몸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만큼의 우여곡절과 함께 기술을 익히고, 번 돈 대부분은 동생들의 학비로 보내며 생활은 빠듯했지만 보람은 컸다. 그러한 시간은 흘러 스물일곱에 결혼을 했다. 사백만 원짜리 단칸방에서의 신혼생활은 달콤할 겨를도 없이 맞벌이에 나섰고, 아이나 제대로 키울까 라는 걱정과는 달리, 나는 두 딸을 키우면서도 또 다른 기술을 배웠다. 문고리를 채워놓은 방에서 일하는 엄마와 함께 놀아야 했던 아이들의 머리에는, 하얀 고깔모자 같은 먼지가 소복이 쌓이기도 했다. 아이들을 어머님께 맡긴 후, 오르내림이 불편한 공포의 버스를 타고 몇 년간 출퇴근도 했다. 덕분에 결혼 7년 6개월 만에 열일곱 평작은 아파트가 내게로 왔고, 베란다에 작업장도 꾸몄다. 나는 지금도 니트 옷을 만드는 ‘사시’ 라는 기술로 집에서 일을 하고 있다.
공연이 있는 날은 마침 일감이 없어 홀가분한 마음으로 갈 수 있었다. 출연가수들의 활짝 웃는 모습이 담긴 대형 포스터가 걸린 장충체육관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효’ 공연답게 관객들 대부분은 부모님들이다. “어머니 조심하세요.” 잦은 골절을 당하는 어머님이 행여 사람들에게 밀려 넘어질까 걱정이었다. “나는 괜찮여. 너나 조심혀라.” 어머님은 또 불편한 며느리가 걱정이다. 이렇듯 두 개의 지팡이를 각각 짚은 고부는 서로 걱정하며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삿갓처럼 둥근 체육관 천정은 무지갯빛 오색 천을 주름치마 두르듯 했고. 양옆으로 작은 스크린이 설치된 무대가 웅장하다. 사람들은 자꾸 밀려와 김밥 속처럼 빈자리를 꼭꼭 채워나갔다. 어머님의 눈동자도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기에 바쁘다.
드디어, 무대 앞에 드리워진 휘장이 올라가고, 화려한 조명이 번쩍거리며 신나는 음악은 쿵쿵거렸다. 공연은 남진 씨의 ‘님 과 함께’ 라는 노래로 시작되었다. 객석에서는 ‘우와~’ 환호와 박수가 터지고, 사람들은 흥겨움으로 어깨를 출렁거렸다. 흥이 많은 나도 힘껏 손뼉을 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머님도 부르세요. 다 아는 노래잖아요.” 노래를 곧잘 하시는 어머님이 가만히 계시기에 함께 따라 부르길 원했지만, 이제는 목소리도 가라앉아 노래가 안 나온다며 끝내 한 곡도 부르지 못하셨다. 수술 후, 자꾸 저리고 붓는 발이 또 불편하신가 보다. 의자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고 계신 어머님의 손을 가만히 빼고 내가 대신 주물러 드리려 하니 앙상한 뼈만 남은 발이 한 손에 쥐어진다. 순간, 이 작고 앙상한 발을 늘 동동거리며 고달프고도 서럽게 살아오신 어머님의 일생이 주제넘게도 가여운 생각이 들었다. 그 세월 속에 사그라진 몸은 이제 지팡이를 친구로 들여 놓으시고, 다리가 아프니 네 심정을 알겠다며 나를 더욱 살갑게 대해 주신다.
옆에 세워 놓은 내 지팡이를 가만히 내려다본다. 친구들의 장난에 부러지고, 싸움판에 흉기가 되어 부러지기도 했던 지팡이다. 미끄러운 눈길과 질척거리는 빗길에 함께 넘어지기도 하며, 온갖 수난으로 내 삶을 잘 지탱해 준 지팡이는 이제 나의 부끄러움이 아니다. 장애를 비관하며 주저앉아 울지 않았고, 편견의 눈동자가 벌처럼 쏘는 세상 속에서 더디고 힘들지만 쉬지 않고 걸었다. 외롭고 고독하고 또한 고통과 아픔과 시련의 길이었지만 슬기롭게 헤쳐 왔다고 생각하는 나는 지금 행복하다.
비록, 내 등에 한 번 업어 키우지는 못했지만, 내 젖을 먹고 자란 두 딸은 장애를 가진 엄마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절룩거리는 모습이 보기 싫어 쇼윈도조차 쳐다보지 않던 내가, 당당하게 나를 거울에 비춰보기도 한다. 내 존재의 가치가 가장 빛나는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며, 나는 이제 내 곁에서 항상 나를 지탱해 준 지팡이처럼, 한 남자가 필요로 하는 아내로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찾는 아이들의 엄마로서, 또 한집안의 며느리로서 내 가족의 지팡이가 되었다.
공연은 끝나고, 질박하게 살아온 두 여인인 등 굽은 시어머니와 절룩거리는 며느리가 공연장을 빠져나온다. “덕분에 구경 잘 혔다.” 빼놓지 않는 어머님의 인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두 개의 지팡이가 정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