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2월 1일이네요. 오늘이 12월 1일입니다. 교회력으로 말하면 새롭게 시작하는 대림절 첫째 주일이요. 교회력이 뭘까요? 처치 캘린더 이거는 1년에 시간을 그리스도와 함께 맞춰진 시간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해를 사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복음에 맞춰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2024년이 끝나가죠. 2025년이 오죠. 또 2026년이 옵니다.
여러분이 10살이 되고 20살이 되고 30살이 되고 40살이 되고 50 60 70 80 90 이렇게 우리가 세월을 사는데 이 삶을 살 때 그리스도에게서 시작을 하고 그리스도에게 갑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해서 세상이 아니고 그리스도에서 시작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가는데 그 과정도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라 하는 거죠. 이 삶에 있어서 여러분 기쁨과 감사가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력의 첫 번째는 여기 그림에서 보듯이 대림절이에요. 영어로는 여러분 들어봤을 겁니다. 어드벤트 대리운전인데 이 대림절은 성탄절 12월 25일 성탄절 이전에 4번의 선데이 4번의 주위를 가리키고 날짜로 하면 24번 이 24일이 됩니다. 교회에 따라서 한 주에 하나씩 촛불을 붙이는데 촛불을 총 4개의 촛불을 켜고 각각 소망, 평화, 기쁨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여기도 있죠. 뒤에 이쪽에서는 잘 안 보일 텐데 여기에서는 잘 보이죠. 초가 빨간 건 4개 그리고 하얀 거 하나인데 하얀 거는 25일날 붙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4개는 한 주에 하나씩 오늘도 하나를 붙였다고 해요. 이 촛불은 교회에서만 붙이지 않고 또 가정에서도 붙일 수가 있어요. 그래서 날이 점점 짧아지고 반면에 밤은 점점 길어가는 때에 세상을 환하게 하시고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하시고 세상의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는 주님의 오심을 생각하면서 소망과 평화와 기쁨과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다 하는 그 기간이 이 대림절 기간입니다.
여러분들 모두 대림절 기간을 그 뜻에 맞춰서 잘 보내서 여러분 삶에 지금 말한 이 소망과 평화와 기쁨과 사랑이 가득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대림절에 갖는 소망, 이 소망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실현될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소망이에요. 그 중에는 본문이 말하고 있는 공의로운 왕의 오심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15절인데 우리가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날 그때 내가 다윗의 댁에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며
이 말씀에 따르면 정의와 공의가 없거나 정의와 공의가 필요한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어요. 비슷한 말씀이 거의 비슷한 말씀이 앞에 23장에도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배경이 말씀의 배경이 여기와 좀 다릅니다. 거기에서는 이스라엘 내에서 부패한 목자들을 배경으로 해요.
그런데 33장까지 오면 이제는 이스라엘의 왕들만 아니라 제사장, 선지자 백성들 그리고 이방 세계들 모든 사람들의 죄에 대한 고발이 배경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씀하시는 이 공의로운 가지 공의와 정의를 행하실 그 왕은 이스라엘만을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세상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온 세상을 위해서 오시고 이스라엘에게만 아니라 온 세상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실 분이라는 것이죠.
그가 누구십니까?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죠. 이미 다 알고 있는 답입니다. 우리가 함께 찬양했듯이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그를 믿는 사람에게 당연히 그렇지만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공의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공의가 될 수 있느냐고 질문을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알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불의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렇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가 될 수 있는가 물을 수 있고 유대인들이나 무슬림들 그리고 어떤 다른 어떤 종교인에게도 이것은 쉬운 얘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은 하나님의 공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그들에게는 공의 정의라는 것이 미리 정해진 개념이기 때문에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고정된 답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공예를 연결, 하나님의 공예를 연결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정의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생각해 보세요. 정의 저스티스 라이처스 뉴스 여기 정의하고 공이 되는데 둘 사이에 미묘한 의미 차이는 있지만 오늘은 하나로 보고 정의가 무엇인가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이라고 하면 받은 대로 갚아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전에 많이 말하듯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으로 갚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을 합니다. 가장 원시적인 정의의 개념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다음에는 죄에 따라서 형기를 정하고 벌을 정하고 그리고 감옥에 가두는 거지요. 1년짜리 10년짜리 50년짜리 이런 식으로 감옥에 가두는 것이에요. 대부분의 현대 국가들에서 취하는 정의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로 정의를 생각하면 성경이 말하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정의와 공의를 충분히 잘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본문에서 말하는 정의와 공의에는 회복하고 살려낸다는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을 감싸고 있는 예레미야에는 회복을 에 관한 말씀이 굉장히 많아요. 앞에 있는 6절에서 8절만 보아도 그 안에는 치유 이 세 절 안에 치유, 은혜, 회복 세움, 깨끗이 함 사 이런 말씀이 담겨 있어요.
그러니까 주께서 하나님께서 세우실 이 공의로운 목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그가 행할 정의와 공의에는 죄를 사하고 깨끗하게 하고 고치고 회복하고 세우는 그러한 복잡한 과정이 함께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의 사법 시스템으로 말하자면 회복적 사법 아니면 회복적 정의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그거하고 똑같아요. 영어로 레스토러티브 저스트리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법조에 그거와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어요. 2011년 그러니까 지금부터 13년 전이죠. 2011년 7월 30일에 노팅엄의 신의 중심 그래서 한 사람이 맞고 쓰러져서 죽는 사건이 있었어요. 쓰러진 사람은 28살 제임스 호지킨슨이라는 사람이고, 그리고 때린 사람은 19살 제이콥 던이라는 사람이에요. 둘은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입니다. 제임스는 그날이 토요일인데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이제 잉글랜드하고 인디아가 크리켓 하는 경기를 보았고 그리고 술도 마셨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마지막으로 마지막 퍼에 들렀는데 여기에서 이제 사고가 나기 시작한 겁니다.
이 제이콥의 친구들이 제임스 동생의 선글라스를 뺏어간 거예요. 그래서 제임스가 따라 나갔습니다. 뺏어간 거는 다른 게 아니고 선글라스를 가져간다기보다는 그냥 싸우려고 뺏어간 거예요. 그걸 모르고 제임스가 따라갔고 그리고 실랑이가 있는 딸 사이에 제이코비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서 제임스에게 제임스를 때렸어요.
딱 한 방 원 펀치 들었는데 느낌이 안 좋았습니다. 그리고 제이크업은 바로 도망을 갔지만 쓰러진 제임스는 병원으로 갔고 9일 동안 코마 상태에 있다가 결국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이 달아난 제이콥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정의의 문제가 들어온 겁니다. 간신히 한 달 동안 숨어 지냈어요.
그런데 한 달 후에 고발하는 친구가 있어서 이제 잡혔고 30개월의 형을 받았습니다. 부모한테는 제임스의 부모한테는 말도 안 되는 형이지만 30개월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살인의 의도가 없었고 다른 요인들이 참작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제이콥이 감옥에 갔어요. 그리고 자기는 그냥 운이 나빴다. 그냥 한 대만 때렸다. 뉘우침은 전혀 없었고 그리고 자기를 밀고 한 친구들에게 복수하기로 마음을 다짐을 하고 있었던 것이요. 그리고 그 30개월 중에서도 단 13개월만 생활을 하고 감옥을 나와서 출소를 했어요.
제임스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여기에는 정의가 없다고 할 수가 있어요. 당시 여기 가만 보면 자기 아들의 생명과 그리고 그 생명을 앗아간 이에 벌이 매치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임스의 부모님의 마음에도 화가 분노가 가득한 거죠.
그런데 이 제이홉이 출소한 후에 앞에서 말한 이 회복의 정의가를 통해서 이게 시스템적으로 있는데 이 시스템을 통해서 제임스의 부모님과 그리고 제이꼽이 소통을 시작을 한 겁니다. 제임스의 부모님이 시간이 지나가지만 이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그래도 한 번 이해하려고 노력을 하기 시작을 한 것이죠. 제이콥이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아니면 어떤 인간인가 왜 내 아들을 때렸는가 이런 것들이 궁금해서 알고 싶었던 것이에요.
데이코버는 출소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응하지 않아도 됐지만 하겠다고 동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굴은 보지 않고 서로 편지로 2년 6개월의 시간을 함께 보냈어요. 그렇게 시작한 소통에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제임스 부모님이 물었지요.
도대체 왜 그렇게 했느냐? 제이콥이 생각할 수 있는 답은 이거였어요. 그냥 친구들한테 전화를 받았다.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해서 전화를 받고 와서 그 상황을 보고 그냥 때렸다 이렇게 대답을 한 거죠. 그러니까 제임스 부모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제이코 그에게는 자기를 돌아보는 계기가 시작이 된 거예요. 자기가 그때 왜 그랬는지 도대체 무엇이 자기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곰곰이 생각을 하기 시작을 한 것이죠. 그래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마약과 폭력과 범죄가 많은 지역에서 자랐고, 7살 때 부모가 이혼을 했고 엄마는 일을 자기와 동생을 위해서 일은 하지만 알코올 중독자였고 그래서 일찍부터 학교에서 문제의 아들과 어울렸고 공부에는 관심이 없다 라고 말해서 학교에서 쫓겨나고 14살 때부터 학교 밖에서 알코올 마약 싸움에 빠졌던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정말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그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큰 심각한 해가 될 것임을 전혀 몰랐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변명하고 비방하던 자리에서 떠나서 이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기 시작을 한 것이죠. 엄마가 자기 때문에 직장을 잃게 되고 또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 그거보다는 제임스의 부모가 그에게 보여준 극일과 관심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제임스의 부모님들을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제임스를 위해서 학교에 가겠다 공부를 하겠다. 시험을 보겠다 그래서 대학을 가겠다 이렇게 했습니다. 13년이 지난 지금 그는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있고 책도 썼고 그리고 청소년 교육에도 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정의가 이루어진 것일까요? 적어도 제임스의 부모에게는 그런 것 같습니다.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도무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용서할 수 없지만 제이코비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인생의 방향을 튼 것을 존중을 하고 그리고 떠나간 아들도 회복적 정의를 통해서 얻게 된 이 제이콥의 결과에 대해서 기뻤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는 것이죠.
보니까 제이콥의 제임스의 엄마인 주아는 제이콥을 거의 아들처럼 대하는 것 같습니다. 제이콥의 경우는 그럼 어떨까요? 제임스 부모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아까 말한 이 회복 정의 시스템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여전히 마약과 싸움의 세상에 살면서 남에게 해를 끼치고 아무 죄책감도 없이 살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세상에서 떠났고 더 나아가서 그 세계의 잘못을 이제 확실히 알리고 청소년들도 거기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위치에 있는 것이죠. 참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렇죠 그러나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나누고 싶은 내용은 다음 세 가지예요.
첫 번째로 우리 청소년들이나 청년들 그리고 장년들도 싸움은 어떤 경우라도 피하라 라는 것이 내가 싸움에 자신이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다치지 않으면 나로 인해서 누군가 다칠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한 방에 원펀치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는 것이 지금 제이콥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청년들 원덜랜드 가죠. 그런 곳에서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있다면 그냥 피하세요. 싸움을 잘하는 누구누구도 거기 피해야 됩니다. 그리고 팝 같은 데는 특히 더더욱 그래요.
술 많이 마시고 취하는 자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싸움은 어떤 경우라도 피하라.
둘째로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이 제이콥이 속했던 어둠에 그 세상보다 사실은 더 어두웠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러냐 하면 그때는 재판관도 왕동 모두 다 부패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제이콥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평한 재판을 해 줄 수 없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이 그때보다 이 부분에 있어 조금이라도 나은 것이 있다면 정의와 공의를 강조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것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고, 또 그를 믿고 따르는 그를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잘 기억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제이콥이 참여한 이 회복 정의라는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와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둘 다 죄인을 멸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둘 다 징벌만 아니라 고치고 다시 세우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제입국가 제임스의 경우는 비록 한 사람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로 인해서 다른 한 사람은 어둠의 세상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정의가 회복적으로 실현된 것이라는 것이에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 해를 지나면서 억울하고 화나는 일을 겪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지금까지 평생을 살면서 아직도 해결하지 않은 억울함이 이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복의 정의에 관한 오늘의 말씀을 여러분들이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를 주님으로 따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는 한 사람을 위해서만 죽으신 게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고, 그는 피할 수 있는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그 길을 가신 분입니다. 그분을 우리가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바랍니다. 먼저 나의 잘못에 대해서 또 서로의 잘못을 대함에 있어서 더 나아가서는 이 세상을 향하여서 예수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이콥과 제임스를 잘 생각을 하세요. 거기는 생명에 관련된 일입니다. 우리는 그것도 극복이 되었어요.
우리는 생명이 아니고 너무나 작은 것 때문에 말 하나 때문에 표정 하나 때문에 속에 화를 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잘 기억을 하세요. 하나님의 공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언제나 영원토록 지켜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