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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3일 성령강림절 후 스물네 번째 주일예배
성경: 엡5:3-14절(신315)
제목: 빛의 강력한 능력 (나경수 목사)
성도 여러분,
지난 주일 종교개혁 주일에 복음에 나타나는 이신칭의의 능력, 즉 믿는 우리가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나타나는 이신칭의 능력이 우리에게 현재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충분히 다루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의 이해를 위해서 구속사 종말론적 해석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구속사 종말론적 해석은 구약에서 종말(세상 끝)에 심판을 통한 구원의 약속들(언약)이 그리스도의 초림(특히 부활)으로 성취되어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고, 그의 재림으로 완전히 성취되어 그 종말이 완성될 될 것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재림으로 미래의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재에 임하여 있기에 그 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현재 그 나라(내세)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4:20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5:3-14)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와 능력을 확신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각각의 명령(권면)에는 ‘왜냐하면(이유 접속사)’로 시작하는 그 명령의 이유(동기)가 있습니다. 바울은 각각의 명령의 이유를 통하여 우리가 그 명령들을 순종해야 하는 의무감과 그들을 순종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아야 믿음으로 그들을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그 이유, 즉 ‘부정적인 이유(동기)’의 3-6절, ‘긍정적인 이유(동기)’의 7-14a절, 그리고 ‘결론’인 14b절로 나누어 살펴볼 것입니다.
1. 부정적인 이유(동기)에 근거한 권면들입니다(3-6).
첫째, 성적인 죄악의 행위들과 그와 관련된 말들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는 명령과 그 이유(동기) 입니다(3-5).
먼저 명령들입니다(3-4). “음행과 온갖 (성적인) 더러운 것과 (성적인)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그리고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이런 것들이 성도들에게 마땅한 것과 같이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우리 성도들이 그것들을 행하여서든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역시 성도들에게 마땅치 않은 성적인 죄악과 관련된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을 하지 말라,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4)는 권면입니다.
이제 그 이유입니다(5). “(왜냐하면)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여기서 ‘이것’은 5b절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이런 성적인 죄악들을 범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는 것을 알아왔기 때문에 그들을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얻지 못하리니’도 현재형입니다. 이것은 그들을 행하는 자는 현재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누구든지 헛된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과 그 이유(동기) 입니다(6).
먼저 명령입니다(6a)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헛된 말’은 그들을 행하여도 그 나라의 기업을 받을 수 있다고 속이는 말입니다.
이제 그 이유입니다(6b). “(왜냐하면) 이(성적인 죄악)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여기서 ‘임하나니’도 현재형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부정적 이유(5, 6b)는 율법 언약에 따라 이런 죄악들을 행하는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가리키며, 혹시 신자라면 그의 징계를 의미할 것입니다(히12:5-13). 여기서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기에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지혜이며 유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속이는 헛된 말에 속지 마시며, 이런 성적인 죄악들을 범하지 말고, 그것과 관련된 말을 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2. 긍정적이며 강력한 이유(동기)에 근거한 권면들 입니다(7-14a)
첫째, 불순종의 아들들(6)과 함께하지 말라는 명령과 그 이유(동기) 입니다(7-8a).
먼저 명령입니다(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그들을 만나지도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악과 하나님의 진노에도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명령(7)은 ‘그러므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얻지 못하는 것’(5)과 ‘하나님의 진노’(6)라는 부정적 이유에도 근거하지만, 구약의 약속를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성취인 새 언약의 강력하고 긍정적 이유에 기초합니다(8a).
이제 그 이유입니다(8a). “(왜냐하면)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즉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에 불순종의 아들들(6)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7)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둠’은 무지와 죄악과 사망 등을 상징하지만, ‘빛’은 하나님의 지식과 의와 생명 등을 상징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 안에서 빛입니다’(8, 마5:14). 요1:4-5절입니다. “그(만물 창조의 중보자신 말씀, 곧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여기 ‘어둠’은 죄로 인하여 그 빛을 잃어버린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요8:12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어떻게요?
고후4:4-6절입니다. “그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광’(4)은 ‘복음의 광채’(4)이므로 ‘빛’은 ‘영광’과 같은 의미입니다(사60:1).
그렇습니다. 주 예수의 복음(5)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재창조(6)를 통하여 ‘우리가 주 안에서 빛’이 된 것입니다. 4:24절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진리의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된 새 사람의 열매가 ‘진리의 의와 거룩함’인 것은 ‘빛의 열매인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9)과 같기에 ‘빛’은 ‘하나님의 형상’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처럼 주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그의 재창조(구원)로 현재 ‘우리는 주 안에서 빛’입니다. 이것도 구약의 약속의 그의 종말론적 성취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둠과 빛 중에서 어느 것이 강할까요?
빛입니다. 아무리 강한 어둠도 빛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어둠은 도망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둠의 죄악들과 빛인 우리 사이에 누가 이길까요? 빛인 우리가 그들을 당연히 그리고 항상 이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에 실패하곤 할까요?
우리가 주 안에서 빛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하기 때문이거나, 우리 자체가 빛이 아니라 빛이신 주 안에서 그 빛을 나타내는 빛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19-23절입니다.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하여(20) 그리스도에게(21-22a)와 현재 우리(22b-23)에게 나타나고 있는 결과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위해서 만물의 머리이신 그를 주셨고(22), 우리(교회)는 그의 몸으로 만물의 머리이신 주님으로 충만함이거나 하나님으로 충만함입니다(23). 여기서 만물의 주님은 그의 몸인 우리를 그 자신의 생명이나 빛이나 능력이나 지혜 등등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그의 몸인 우리에게 이것을 하시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어둠을 이기라고 하시면, 그것은 주님 자신과 우리에게 고문이며 폭력일 것입니다. 이런 일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빛으로 항상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쉽게) 어둠의 죄악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명령과 그 이유(동기) 입니다(8b-9).
먼저 명령입니다(8b).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이 명령 앞에 ‘그러므로’가 없지만, 내용상으로는 “너희는 주 안에서 빛이라”(8a)는 말씀에 근거한 명령입니다. 즉 너희가 주 안에서 빛이기 때문에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b)라는 권면입니다.
이제 그 이유입니다(9). “(왜냐하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8b) 명령의 이유가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기 때문이라”(9)는 것은 빛인 우리는 어둠의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오직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기에, 주 안에서 빛인 우리는 빛의 자녀들처럼 행해야 하며,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빛이 어둠을 이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진리인 것같이 이것을 아주 당연하고 아주 자연스럽고 아주 쉽게 여기시고, 절대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구하라,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 도리어 책망하라는 세 가지의 명령(10-11)과 그 이유(동기) 입니다(12-14a).
첫째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10)입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있는 우리, 곧 빛의 자녀에게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권면입니다. 복음에 의하여 주와 연합한 우리(그의 소유, 종)는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사는 새사람으로 재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롬14:7-9절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시험하여 먼저 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라”(11a)입니다.
이 명령의 이유는 12절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즉 그들의 어둠의 일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이기에 그들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도리어 책망하라”(11b)입니다. 여기서 ‘책망하라’는 우리 말로 그들의 어둠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빛의 열매로 그들의 죄를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11b)에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13-14a).
첫째 이유는 “책망을 받는(드러나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기 때문이다”(13)입니다. 이것은 주 안에서 빛인 우리의 빛의 열매, 즉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9)을 통하여 어둠의 속한 자의 죄악을 드러나게 하여서 그들로 그들의 죄악의 실체를 보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왜냐하면) 드러나는(책망을 받는) 것마다 빛이니라.”(14a)입니다. 이것은 첫째 이유(동기)보다 더 나아갑니다. 우리의 빛의 열매를 통해서 그들의 죄악이 드러난 자들이 우리와 같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와 같이 주 안에 빛이 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빛인 우리가 빛의 열매를 통하여 어둠의 일을 행하는 자들을 책망하라(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심적 선교(centripetal mission)입니다. 이처럼 주 안에서 빛인 우리는 세상을 어둠을 이기고 심지어 그들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는 참 빛이신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세상의 죄악들, 예를 들면 동성애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전문가들은 동성애자들은 생물학 또는 의학적으로 그런 성향을 지닌 자들이기에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자연적이며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주장도 생물학적으로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것입니다. 유전자가 그렇게 변화되었기에 인간의 의지나 교육으로 고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성향의 동성애는 타락한 육체의 성향(본능)이며, 본문이 말하는 어둠의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을 입으로 비난하며 반대하는 데모를 하여야 할까요? 이것은 ‘도리어 책망하라’(11) 말씀에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주 안에서 빛의 자녀로서 그들의 동성애의 성향(본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빛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유전자는 새로운 환경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는 ‘후생생물학’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초대 교회가 로마 제국을 정복한 것은 성도들의 빛의 열매인 사랑이라고 모든 역사학자가 동의합니다. 주 안에 있는 빛인 우리도 초대 교회와 같이 우리의 빛의 열매로 그들을 책망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그들의 죄악을 드러내시고, 그들을 빛으로 변화시키는 우리의 선교 열매들을 맺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의 결론 말씀(14b)으로 설교의 결론도 맺고자 합니다.
14b절입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이 인용에 대한 많은 주장이 있지만, 이것은 사60:1절을 기독론적 성취로 해석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여기서 ‘빛’은 ‘영광’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14b)은 어거스틴을 회심하게 하였던 롬13:11-14절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사생아를 낳을 정도로 성적 욕망의 노예였고,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 기도 대상이었습니다. 386년 어떤 정원에서 어린이들이 그에게 라틴어의 책을 주면서 읽어 달고 하였습니다. 그 책을 열자, 롬13:11-14절이었습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32세였던 그는 이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였고, 나중에 성 어거스틴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어거스틴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종말의 구원의 그리스도가 이미 오사 사60:1절을 성취하셨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14b)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어거스틴과 같이 이것(14b)을 하나님이 우리(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확신하시고, “잠에서 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서 그리스도가 주시는 빛”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재창조로 종말의 그리스도 부활에 이미 참여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는 주님을 항상 바라보시기 바랍니다(히12:2). 남아공에서 들꽃의 구경을 하러 가면, 자동차를 해를 등지고 몰아야만 합니다. 이는 모든 꽃이 해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예쁘게 웃고 있는 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빛을 주는 해를 항상 바라보는 이 들꽃과 같이 그의 몸인 우리에게 그의 빛을 비추시는 주님만을 항상 믿음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찬송 502장, 그리고 성찬 후에 다같이 기도하며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