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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루니통신 6/스위스-프랑스 여행후기(하)/190507]
4월 5일(금). 오늘은 대망의 박물관 순례. 서울에서 미리 구매한 ‘뮤지엄 패스’는 나흘 동안 55곳을 관람할 수 있다. 엄청 편리하다. 3일간 9곳을 보았으니, 그나마 많이 본 것이다. 세계적인 예술작품을 직접 보는 행운을 위하여 아무리 몸이 불편해도(하필이면 프랑스 오자마자 변비와 요실금이 더욱 심해졌다. 아마도 탄산수와 석회수 물 때문일 것이다) 발품을 팔자. 먼저 루브르박물관(Louver Museum)을 숙소에서 걸어서 가다. 입구의 ‘유리 피라미드’가 무척 인상적이다. 지하1층 내부는 ‘유리 逆피라미드’로 설계되어 있다. 300여만점의 세계 유물과 회화 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명성이 높은데, 어느 큐레이터가 했을까? 진열과 배치가 일품이다. 지도를 보면서 대표적인 작품을 찾아다니는 것만도 2박3일은 잡아야 할 듯. 4시간 반만에 ‘무거운 숙제’를 해치우는데 ‘우리, 이것들만 보고 나가자’가 정답이다. 말할 것도 없이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 들라크로와의 ‘민중의 여신’ 그리고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이번에 불이 난 노트르담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등이다.
‘모나리자’는 너무도 유명하여 가까이 갈 수 없을 정도로 인파가 넘친다. 간신히, 겨우 비스무레하게 인증샷을 찍고 만족할 수 밖에 없다. 다만, 밀레의 ‘晩鐘’을 보지 못한 게 유감인데, 박물관지도에 없는 것을 보면 잠시 외출한 것같다. 생각해 보면, 이 유물들은 이집트 등에서 약탈해온 대부분 戰利品이 아닌가. 오후엔 루브르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오르세 미술관(Musee Orsay)을 향해 부랴부랴 발길을 돌렸다. 맨먼저 들른 곳이 고흐의 작품이 있는 곳. 그곳에서 또 우연히 남궁옥분 자매 일행을 만나게 돼 환호작약하다. 정말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서울에서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지다. 오르세미술관은 세잔느, 고흐, 고갱 등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이 주류이다. 모네의 ‘수련’은 이 미술관의 白眉(8m의 거대한 수련 연작은 인근의 오랑주미술관이 독점하고 있다). 1848년부터 1914년까지의 작품을 주로 전시하고, 1848년 이전 작품은 루브르박물관, 1914년 이후 작품은 퐁피두센터가 소장, 전시한다고 한다. 美術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친절하게 화가와 그 작품에 대해 설명해주는 아내가 있기에 무척 행복했다. 이런 명화의 實物을 보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4월 6일(토). 오늘은 피카소미술관과 로댕미술관을 찾기로 하다. 파블로 피카소(Piccaso․1881~1973)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페인 출신의 입체파 화가. 그가 낙서라도 한 줄 하면 수억대를 호가하는 작품이 된다. ‘아비뇽의 처녀’ ‘게르니카’ 등의 작품을 기억하시리라. 에너르기가 차고 넘친 거장 중의 거장. 거침없는 여성 편력도 늘 화제가 되곤 했다. 우리나라도 방한하여 전시회를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허나 미술관은 쓸만한 작품이 별로 없어 실망했다. 아마도 세계 어느 나라에 外遊를 간 때문이리라. 이어서 찾아간 로댕미술관은 너무 좋았다. 언젠가 서울 삼성그룹 본관에서 한 전시를 보았지만, 그때 ‘생각하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그가 살았다는 집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은 훌륭했다. 근대 조각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로 불리는 오귀스트 로댕(Rodin․1890~1917)이 누구이던가.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을 야외에서 직접 본 감격적인 느낌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정원에 우뚝 세워놓은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동상 아래 벤치에 앉아 오래오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아서 행복했다. 그는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유고를 숭배했다고 한다. 그를 기린 작품들이 습작품들과 함께 많다.
또하나, ‘늙은 갈보’라는 제목의 작품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1960년대초 함석헌 선생의 대표적인 역사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 속표지에서 본 작품이 그곳에 있었다. 함선생은 그 작품을 보고 고난의 역사로 점철된 우리나라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분이 단 제목은 ‘고난의 여왕’, 그때의 감동이 새삼 떠올랐다. 28일간의 여행 중 가장 좋은 것 ‘Best 3’를 뽑으라 하면, 스위스 알프스산맥의 만년설에 뒤덮인 거대한 봉우리 ‘융프라우’와 ‘마테호른’를 올라 그 雪原에서 하이킹한 것과 파리에서 4시간여 관광버스로 달려 본 ‘몽쉘 미쉘(Mont Saint-Michel)’ 그리고 ‘로댕박물관’을 들겠다. 말하자면 첫째는 대자연의 장엄함, 그 자체라 할 수 있겠고, 두 번째는 자연에 人工이 가미된 것이고, 세 번째는 순전히 인간의 재능이 폭발한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브론즈를 버물려 표현한 작품 작품을 바라보며 驚異로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제자이자 동업자이며 애인인 까미유 클로델(Camille Cladel․1864~1943)와의 안타까운 사랑은 영화로도 나왔었다.
4월 7일(일). 파리하면 곧바로 떠올릴 상징(랜드마크)인 에펠탑을 가다. 에펠탑(la Tour Eiffel)은 1889년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세계박람회를 위해 세워진 철조 구조물이다. 귀스타브 에펠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320m)로 설계했다. 3층까지 1,652개의 계단, 사용된 못만도 2천5백만개란다. 2층 전망대까지는 걸어서 오를 수 있으나, 그 다음에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전망을 말해서 무엇하랴. 사방팔방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파리는 계획도시답게 고층빌딩이 몽파르나스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몽마르트 언덕의 사크레쾨르 성당이 뚜렷이 보인다. 당시 에밀 졸라 등 유명한 문학․예술인들이 ‘추악한 鐵덩어리’라며 철거를 주장했으나, 방송 안테나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살아남았다고 한다. 저녁 夜景사진을 많이 보았으리라. 스위스의 톱니바퀴를 이용한 산악열차도 대단하지만, 이 구조물 또한 대단하다. 그들은 이미 100년, 200년 전에 인간의 상상력과 무한한 挑戰의식으로 문명의 利器를 최대한 이용할 줄 알았다.
파리의 지하 지하철은 또 어떤가. 어쨌거나 선진국을 자랑했다. 세느강 유람선인 ‘바토 뮤슈’을 타는 것은 코스에서 빠트릴 수 없다. 세느(Seine)강은 또 우리에게 어떤 강인가. 아폴리네르(1880~1918)의 ‘미라보다리’라는 한 편의 시로 잊을 수 없는 강. <미라보다리 아래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을/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우리들 팔 아래 다리 밑으로/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결이 흐르는 동안/ ……/인생은 얼마나 지루하고/희망은 얼마나 격렬한가/……/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우리들 사랑은 오지 않는데/미라보 다리아래 세느강은 흐른다>. ‘Tombe la neige(눈이 내리네)’라는 샹송과 함께 이 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또 하나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눈 밟는 소리가>로 시작되는 구르몽(1858~1915)의 ‘낙엽’이라는 시. 프랑스는, 아니 파리는 적어도 나와 우리에게 이런 작품들로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다. 십 수년 전에 나온 ‘퐁네프의 연인’이라는 영화와 함께. 그 파리를 아내와 함께 7박 8일 동안 더트며 다니고 있다.
골목 골목이 개똥, 담배꽁초 등으로 지저분하고 지하철에 지린내가 진동할지라도 역시 와보기는 잘한 듯하다. 세계 문화․예술․패션의 중심지가 아니던가. 미술관 순례 역시 마음을 한없이 富者로 만든다. 오랑주미술관의 모네 ‘수련’ 연작에 너무도 황홀해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일중의 하나. 세느강은 우리의 한강에 비하면 폭이나 뭐나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유람선 하나는 탈 만했다. 박물관, 미술관, 에펠탑, 노트르담성당 등이 양쪽으로 스쳐 지나간다. 강바람이 싱그럽다. 강변에서 손을 흔들어주는 파리시민들, 반짝공연들, 공원에서 짝짝이 춤연습을 하는 사람들, 유람선은 언제나 만원인 듯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밤에는 몽마르트언덕에 올라 파리의 야경을 보자는 생각으로 낮에 탔지만 나쁘지 않았다. 오후에 찾은 노트르담(Notre Dame) 대성당. 노트르담은 ‘성모 마리아’를 지칭한다. 우리에게 영화 ‘노트르담 꼽추’로 유명한 그 성당, 꼽추 콰지모도의 애달픈 사랑과 종소리를 기억하시리라. 귀국 직후 화재로 첨탑과 지붕이 타는 비극적인 사건에 우리도 애가 닳았다. 1455년 잔 다르크의 명예회복 재판이 열린 곳, 나폴레옹이 교황을 앞세우고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등 거창한 대관식이 열린 곳, 드골 장군과 미테랑 대통령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 13세기에 만든 지름 13m의 薔薇窓(스테인그라스)이 있는 곳, 예수의 가시면류관을 보관하여 한 달에 한번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곳,
그 성당 내부에서 20년째 한국인들에게 해설을 해준다는 한국인수녀를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1163년 건설을 시작하여 170년만인 1330년에 완공되었으나, 시련도 많았던 성당, 프랑스혁명군들에 의해 피폐된 곳, 위대한 작가 빅토르 위고의 주장으로 옛모습을 되찾은 성당, 그 내부에서 2시간여 ‘재능기부’ 해설을 들으며, 노트르담성당이 왜 세계적인 문화재이고 기독교의 성지인 줄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일반인들은 들어갈 수도 없는 것을 입장하게 해주고 사진까지 찍게 한 그 수녀가 이번 화재로 얼마나 놀라고 가슴 아파했을까를 생각하니, 내가 다 가슴이 아팠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파리시민들이 ‘인간띠’가 되어 희귀한 유물들은 훼손되지 않았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오죽하면 복원 비용으로 며칠 사이에 3조가 넘는 거액이 몰렸을까. 복원에 최소 40년은 걸릴 거라는데, 우리 생애엔 얼마 전에 직접 오른 첨탑을 볼 수 있을까.
4월 8일(월). 새벽 5시부터 서둘렀다. 오늘은 여행 중 처음으로 한국에서 예약한 문화해설사가 이끄는 관광버스를 타고 노르망디 지역의 ‘바위섬 수도원’ 몽생미쉘을 가는 날이다. 개선문 근처에서 한국인 45명을 태우고 출발하는 이 버스는 다음날 새벽 2시 반(밤 9시 몽생미쉘의 야경을 본 후 출발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에 도착하는, 강행군 중의 강행군. 같은 숙소에서 아침저녁 같이 밥을 먹은 일행 4명을 버스 속에서 발견했다. 가는 도중에 들른 관광지 옹플뢰르(Honfleur)와 에트르타(Etretat)도 잊을 수 없는 곳. 아니, 프랑스에 간다면 꼭 가봐야 할 곳이다. 해안도시 에트르타는 코끼리바위(아빠-엄마-아기코끼리)로 유명하지만, 원래는 작은 포구마을이었다고 한다. 피가로의 편집장이 여행 후기에 ‘친구에게 처음으로 바다를 보여줘야 한다면 주저없이 에트르타를 보여주고 싶다’고 쓴 이후 폭발적으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제는 아주 큰 도박장이 2개나 있을 정도로 관광도시가 되었다. 어릴 적 심취했던 ‘괴도 루팡’이라는 탐정소설을 아시리라. ‘셜록 홈즈’를 압도했던 그 작품을 쓴 모리스 루블랑의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또한 모파상은 이곳에서 ‘목걸이’라는 유명한 단편을 쓰기도 했고, 해안에는 모네가 그린 명화 ‘도판’이 2개 서있기도 했다.
옹플뢰르는 바이킹의 전설이 살아 있는 아담하고 한 폭의 그림같이 예쁜 항구도시이다. 1608년 캐나다 퀘벡을 처음 발견한 탐험가 샹플랭의 고향이자 음악인과 작가들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샹플랭은 퀘벡을 고향인 옹플뢰르처럼 조성하여 두 도시의 風이 어쩐지 비슷하다고 한다. ‘도깨비’라는 드라마를 보신 분들은 그 분위기를 아시리라. 이윽고 원래의 목적지인 몽생미쉘에 도착했다. 干滿의 차가 15m나 되기에 물이 들어오면 사람은 얼씬도 못하는 높이 80m의 바다 속 바위섬. 그 바위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그 위에 80m의 수도원을 처음 지은 사람이 서기 708년 오베르신부라고 한다. 그는 대천사 미쉘(Michel․영어로는 마이클, 우리는 미카엘)가 꿈에 여러 번 나타나 지으라고 하여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몽은 언덕, 생은 성인(Saint). 미카엘은 그가 꿈을 믿지 않자 그의 이마를 세게 눌렀다던가. 최근에 앞이마가 크게 눌린 형태의 유해가 발견되어 보관하고 있는데, 오베르의 해골이라고 한다는데, 믿거나말거나이지만 무척 신기한 이야기이다. 일본인들의 관광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복원 대공사에 거액의 후원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2025년까지 자연을 복원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다).
프랑스혁명때 이 수도원이 수난을 당해 정치범들의 감옥으로 이용되는 등 크게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이때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가 복원하여 인류의 유산으로 남겨야 한다는 글을 쓰는 등 운동을 벌여 오늘날의 몽생미쉘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글이 이렇게 공헌하는 것을 보면 역시 ‘붓이 칼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같다. 몽생미쉘은 JTBC 드라마 ‘더 패키지’의 주요 촬영지이기도 하고 대한항공의 광고 ‘약속편’에도 등장하여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으며 최근 크게 각광받는 관광지이다. 비싼 비용으로 꼭 한번 와봐야 할 신비롭기까지 한 수도원을 둘러보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어떤 종교적인 신념이나 의지가 이런 難工事를 극복했을까. 여기까지 왔는데 몽생미쉘의 야경을 보지 않으면 앙꼬빠진 찐빵이라는데,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일몰이 지난 한참 후에 하나둘 켜지지 시작하는 불빛에 비친 몽생미쉘은 fantastic하고 무척이나 경이롭다. 오기를 백번 했다.
해설사에게 들은 재미난 이야기 하나. ‘몽생 미쉘의 백종원’이라 불린다는 폴라 아줌마이야기다. 폴라 아줌마는 원래 대공사때 한밭식당을 운영했는데, Mr. 폴라와 사랑에 빠져 그곳에서 결혼, 공사가 다 끝났어도 주저앉아 오믈렛식당을 열었는데,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고. 현재의 기념품가게와 식당 80%가 폴라 아줌마의 후손들이 운영한다고. 무조건 프랑스 관광 강추 1번이다. 정확히 새벽 2시반. 무려 21시간만이고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좋은 데 다녀왔다는 기분으로 뿌듯했다. 전날 새벽에 출발했던 개선문 근처에서 하차, 우버택시에 피곤한 몸을 실었다.
4월 9일(화). 어지간히 파리를 돌아다녔지만, 아직도 가보지 않은 곳, 어제 스치며 바라본 개선문(Arc Triomhpe)에 오르고 샹젤리제(Champs Elysees) 거리를 걸어야 한다. 높이 50m 폭 45m의 개선문은 1806년 나폴레옹이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짓기 시작해 1836년 완성되었다. 튈르리 공원의 카루젤개선문과 라데팡스의 신개선문 중간에 있으며 ‘元祖 凱旋門’으로 불린다. 나폴레옹은 죽은후에야 이 개선문을 통과했다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따로 없다. 안쪽 벽에는 나폴레옹 부대를 지휘했던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전쟁 중에 전사한 사람의 이름에는 줄이 그어져 있다. 개선문 아래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무덤이 있고, 매년 7월 14일 이곳에서 군사 행렬을 하고, 11월 11일에는 무명용사 묘비 앞에서 그들을 기억하는 행사가 있다.
개선문이 있는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La Place Charles de Gaulle Étoile)은 사통팔달 12개 大路가 별(Étoile) 모양으로 둘러쌓여 있어 에투알광장이라고 불린다. 그 대로 중 하나가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 옥상 전망대를 계단으로 오르면(엘리베이터도 있다) 사통팔달 파리의 전경이 보인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어찌 폼잡고 커피 한잔 마시지 않을 수 있으랴. 이 정도 여유를 부리는 것은 사치가 아니다. ‘루이뷔통’ 샵에 들른다. 우리 한국여성들은 왜 고급가방에 목을 매는 것일까. 아내는 며느리 선물로 가방 몇 개를 들었다놓았다하다가 기백만원하는 엄청난 값에 놀라 제풀에 지친다. 나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4월 10일(수). 이제 파리의 마지막 날이 당도했다. 섭섭한 게 아니고 무조건 시원하다. 빨리 오늘밤이 지나고 내일 한국행 비행기 타기가 소원이다. 역시 집을 떠나봐야 제 집과 자기 나라 좋을 것을 알 수 있고, 우리 모두 愛國者가 된다는 것은 眞理이다. 또한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시쳇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여실히 깨닫게 된다. 낮에는 쇼핑을 하기로 했다. 북경에 가면 ‘동인당약방’을 들르는 것이 필수코스인 것처럼, 파리에는 ‘몽주약국’이 있다고 한다. 샤넬 등 향수, 화장품이나 선크림 등 간단한 미용품과 상비약 등을 파는데, 엄청 싸다는 것. 아니면 교외에 있는 ‘이마트’를 가야 한다는데 너무 번거롭다고 생각한 아내는 몽주약국을 택했다. 손님들로 밀려터지는 곳, 오죽하면 한국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교민이 서너 명 있을까? 언어 소통이 안될 거라는 것은 기우다. 참 신기한 일이다. 그곳에도 한국인이 알바를 하고 있다니.
다음으로 명품가게를 찾았다. 티셔츠를 1개 사려해도 명품을 찾는 심리를 나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모를 것같다. 브랜드 티셔츠(Saint James) 1개가 국내에서 15만원한다는데, 원산지인 이곳에서는 6만~7만원 한다니 여기까지 온 김에 욕심내는 것은 전혀 무리한 일이 아니다. 이왕이면 두 아들 내외에게 각각 커플티를 선물로 안겨주자. 아니, 우리 가족 7명(손자 포함)이 모두 같은 모양의 티셔츠를 입고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가족사진을 찍으면 어떨까? 좋다. 좋다. 그렇게 하자. 마침 돌아가면 호주에서 유학하고 있는 둘째네도 와 있지 않는가. 기회는 찬스(chance)다. 티셔츠 7장이 얼마나 된다고 우리가 이런 호사도 못누린다는 말이냐? 우리는 계획한 대로 7명이 똑같은 티를 입고 5월 4일(토) 용인 모현에 있는 ‘조아인 스튜디오’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가족사진을 찍었다. 촬영비가 100만원이라니 이것도 ‘장난’이 아니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궁금하다.
오후에는 파리 관광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투어버스를 탔는데, 교통체증으로 짜증만 덕지덕지 묻어나는 통에 중간에 내려버렸다. 만약 첫날에 탔더라면 感興이 있었겠지만. 저녁에는 몽마르트언덕에 올라 웅장한 시클러성당에서 인증샷을 하는데, 점점 어두워오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소매치기로 보여 무섭다. 서둘러 숙소로 돌아오다. 야경이 기가 막히다는데 보지 못한 게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이국타향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쩔 것인가. 흑인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 해도 왠지 그들에게 ‘포위’당해 있으면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말이라도 통하면 조금 모르겠지만.
4월 11일(목) 이제 12시간여 비행기만 타고 가면 우리나라 12일(금) 새벽 6시가 된다고 한다. 그런 것도 무슨 조화속인지 나는 모르겠다. 아무튼, 좌우당간, 두 나라 구경은 아내 덕분에 실컷 하고도 남았다. 오직 빨리 가고 싶은 마음만이 입에서 당그래질을 하고 있었다. 흐흐.
*여행 후기는 이것으로 줄이지만, 내 눈 속에서, 마음 속에 새겨진 숱한 광경과 이야기들은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게 여행의 맛이고 멋일 터. 자유여행이 궁금한 친구들을 위하여 아내에게 들은 몇 가지를 적는다.
숙소를 10번이나 옮겼는데, 어떻게 해결하는 걸까? 부킹닷컴(www.booking.com)을 통하여 이미 오래 전에 예약을 해놓은 거다. 국내에서 카드결제가 가능하다. 몇 개의 영어 단어만 알면 된다고 한다. 1박에 둘이 10만원 안팎의 숙소를 골랐다.
교통편은 어떻게? 유러패스와 스위스패스, 알프스 스카이패스, 박물관 관람권, 현지 비행기티켓 체크인 등도 한국에서 예약을 하니 집으로 배달되거나 휴대전화로 모두 확인이 된다. 정말로 좋고 편리한 세상이다. 세계가 이 휴대전화 속에 다 들어 있다니 말이다.
가장 중요한 식사(밥)은 어떻게? 쌀과 컵라면, 신라면, 누룽지 한 뭉치, 통조림을 비롯하여 밑반찬(나나스키, 멸치, 고추장, 김치를 빨아 말리면 실가리같이 된다)을 준비하여 아침 저녁 해먹었다. 파리 입성(아침저녁 한식 제공) 전까지 20일을 해결하니, 큰 문제는 없었다. 점심은 대부분 햄버거나 샌드위치 아니면 빵 등으로 해결했다. 곳곳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감자나 양파, 오이 등을 1개씩 판다. 오렌지나 귤, 야구르트도 사먹는 등 고른 영양을 섭취하게 하는 것은 아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다.
숙소나 관광지는 어떻게 찾나? 신통한 구글(google) 지도가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아내의 손에 놓인 휴대전화가 너무나 신기했다. 들여다보니 한글로도 적혀 있다. 그러니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싶었다. 스위스는 독일어가 대세이고 프랑스에서는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데, 소통은 어떻게 하나? 떠듬떠듬 아니면 ‘세계 공용어’인 바디랭기지(body langugae)‘가 있지 않은가. 그것도 안되면 아내는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구글번역기’를 이용하는데, 큰 지장이 없게 보였다.
아내의 손을 원없이 잡다. 35년을 살면서 언제 한번 며칠이라도 이렇게 붙어있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하루이틀도 거의 없었을 터.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얄짤없었다. 손을 놓치면 영영 잃어버릴 것같은 두려움. 사방을 둘러봐도 어디 동양인조차 거의 없으니, 말이 통할 리 만무한 일. 버스와 지하철을 타도, 열차에 앉아있어도 옆친구들의 눈은 어찌 그리 새파란지, 벽안(碧眼)의 뜻을 처음 알았다. 하루종일 손을 잡고 다녔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덕분에 금실이 좋아졌을까. 아니다. 앞으로 다시는 우리 둘이 이런 여행 오지 말자는 게 결론이었으니, 어찌 우리 부부에게만 해당되는 진리일까.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났는데, 다시 내년에 뉴질랜드 밀포드 트래킹이나 히말라야를 가자고 하는데, 부부싸움은 역시 칼로 물베기인가 보다.
여행 중 느낀 것 하나. 두 나라의 鐵道시설이 기막히게 잘 돼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걸핏하면 파업을 하는 통에 그렇지만, 스위스는 열차시간을 정말 칼같이 지킨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애초에 철도 기간시설에 신경을 썼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고 부러웠다.
또 하나. 지하철이든 버스든 두 나라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우리보다 훨씬 덜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대신 신문이나 포켓북 등 책읽는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하지만 우리는 열이면 아홉은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 있다. 이것은 참으로 고약한 일이다. 책을 읽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는 정설을 우리나라는 잊은 지 오래이다. 진실로 걱정이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오죽하면 100세가 되신 김형석 교수는 이렇게 가다간 GNP가 5만달러가 돼도 절대로 문화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강변하고 있지 않은가. 반성할 일이다.
우리나라 자유여행의 새로운 풍속도도 기록에 남겨야겠다. 20대 초반,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젊은 여성들이 친구, 자매, 선후배 등으로 보통 한 달, 길면 두 달씩 자유여행을 다닌 것을 보고 많이 놀랐다. 이들과 얘기를 해보니, 직장을 1, 2년 다니다 여행경비가 모아졌다하면 미련없이 사표를 쓰고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대학생들이야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여행을 온다 하지만, 30대 여성들이 결혼은 꿈도 꾸지 않고, 직장도 우습게 알고, 돈만 좀 모이면 여행을 다닌다는 것이 도무지 상식에도 맞지 않고 이해가 가지 않지만, 새로운 풍속도임에 틀림없는 것같다. 세대차이라면 이런 것이 세대 차이일 것이다. 신기했다.
자유여행과 패키지여행의 장단점을 들라면? 자유여행은 말 그대로 ‘자유(free)’인지라 運身의 폭이 넓다. 패키지는 가이드가 ‘神’처럼 보이겠지만, 자유여행은 주인공들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점’을 찍고 여러 나라와 관광지들을 무리한 일정으로 둘러볼 필요도 없고, 피곤하면 좀 쉬어가도 되고, 가고 싶지 않은 쇼핑몰 등을 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패키지여행의 가이드 말을 들으면 그 당시에는 명쾌한 해설에 다 기억할 것같아도 일일이 적어놓지 않으면 귀국 후 까마득히 잊어버린 기억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자유여행은 자기가 공부를 해야 하므로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장점이 있다. 비용 문제도 준비만 잘 한다면 패키지보다 훨씬 더 싸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8일 동안 그렇게 세심하고 철저하게 준비해 갔는데도(설거지 타올 등) 1천만원을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패키지에 비하면 얼마나 싼 편인가.
마지막으로, 추천하고 싶은 나라와 관광지를 들자면, 스위스를 손꼽고 싶다. 준비만 좀 한다면 자유여행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같다. 다른 나라 눈돌릴 것없이 1주일이나 10일쯤의 일정으로 스위스를 더튼다면 다녀와서도 무척 보람차고 흐뭇할 것같다. 알프스산맥을 끼고 도는 웅장한 만년설과 자연호수 등의 신비, 배우자와 하이킹을 하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 있을까. 나라별로, 관광지별로, 날짜별로 항목마다 사진을 첨부하면 좋겠지만, 그런 재주가 없기에 부득히 글로만 남김을 양해해 주면 좋겠다.
첫댓글 나도 가장 편한 곳은 로댕선생의 저택. 어려서 부터 봐 왔던 친숙함 때문일까? 동네 삼촌 만나는 편안한 기분. 공감허네.
노틀담 소실전 고스란히 봤다는 행운, 그동안 덕을 많이 쌓았다는 보답일테고.., 유럽여행을 잘 마치고 구경시켜줘서 고마우이.
친일파적 가치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깔레의 시민'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까?
"참, 바보같은 족속들....." 이러겠지?
이런 DNA의 사람들은 서구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매장되지만 우리나라에선 스스로 잘 났다고 떵떵거리고 심지어 일부 시민들에 의해 애국자로 신봉되기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