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명- 시인을 찾아서 2
저- 신경림
출-우리교육(2002.9.8)
독정- 2018. 9. 16. 일
• 이 책은 우리교육 기획으로 신경림 작가가 24명의 시인을 찾아다니며 취재한 내용 중심 작가와 시에 대한 이야기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새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콩알 하나-김준태
누가 흘렸을까
막내딸을 찾아가는
다 쭈그러진 시골 할머니의
구멍 난 보따리에서
바져 떨어졌을까
역전 광장
아스팔트 위에
밝히며 뒹구는
파라한 콩알 하나
나는 그 엄청난 생명을 집어들어
도회지 밖으로 나가
강 건너 밭 이랑에
깊숙이 깊숙이 심어 주었다
그때 사방 팔방에서
저녁노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광주대학과 조선대학에서 겸임, 초빙교수로 두 신문에 칼럼을 쓰고 흙냄새 발 냄새 풍긴다.
• 축우지변-이상국
소를 몰고 밭을 갈기란
비탈밭 중간 대목 쯤 이르러
다리를 벌리고 오줌을 솰솰 싸면서
소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바뀌면
내가 몰고 너희가 끌리라
그런 날 밤
콩섞인 여물을 주고 곤히 자는 밖에서
아무개야 아무개야 불러 나가보니
그가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몰고 너희가 끌리라’에 주술 같은 저주가 들어있다. 통치자에 대한 농민의 말로 바꿔 일을 수도. 작중 화자가 가진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경외람. 윤회사상에 따른 에니미즘, 경외감이 ‘그가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 ’는 동화적 발상을 했다.
• 소를 팔며-이상국
가는구나
반추의 슬픈 식욕을 씹으며 떠나가는
그대 발굽의 아우성
첫새벽 어둠을 한 바리씩 실어 내
건초를 바꾸던 그대 조상은
죽어서도 영영 자갈밭을 가고
보이는구나
굽어서 아픈 논두렁 밭두렁을 돌아
저문 들로 다시 오는 그대 후생의 고삐가 보이는구나.
• 엉겅퀴꽃 초-양채영
봄눈 녹은 물에
마른 겨울풀 뿌리를
씻고 있으면
솜털마다 돋아나는
생기
저 후미진
논두렁 밑 일어나는
아지랑이 속을
몰래 넘겨다 보는
실팍한 영겅퀴꽃
• 노새야-양채영
노새야
새끼도 낳지 못하는
노새야
아무도 없는
아스팔트길을
동 한 번
제대로 누지 못하는
노새야
털 빠진 가죽 등 허리로
윙윙 우는
노새야
노새야 부모의
다른 얼굴 틈으로
뻘뻘
땀만 흘리고 가는
노새야
사람 없는
강가에서
억새풀이나
이가 시리도록
뜯어 먹어라
노새야
-무한 경쟁의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처져 있거나 갈데없는 우리의 모습이자 작자 자화상이다. ‘사람 없는 강가에서 억새풀이나 이가 시리도록 뜯어 먹어라.’의 체념과 자조의 한숨이 서려 있는 대목이 이 시의 핵심이다. 버림받은 느낌의 억새풀이 노새의 소리를 강조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사람 없는
강가에서
억새풀이나
이가 시리도록
뜯어 먹어라
• 어릴 때 내꿈은-도종환
어릴 때 내 꿈은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뭇잎 냄새 나는 계집얘들과
먹머루빛 눈 가진 초롱초롱한 사내녀석들에게
시도 가르치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려 주며
창 밖의 햇살이 언제나 교실 안에도 가득한
그런 학교의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플라타너스 아래 앉아 시들지 않는 아이들의 애기도 들으며
하모니카 소리에 봉숭아곷 한 잎씩 열리는
그런 시골학교 선생님이 되는 거였어요.
나는 가라서 내 꿈대로 선생이 되었어요
그러나 하루 종일 아이들에게 침묵과 순종을 강요한ㄴ
글너 선생이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밤 늦게까지 아이들을 묶어 놓고 험한 얼굴로 소리치며
재미없는 시험문제만 풀어주는
선생이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옳지 ㅇ낳은 줄 알면서도 그럴 듯하게 아이들을 속여넘기는
그런 선생이 되고자 했던 것은 정말 아니었어요
아이들이 저렇게 목숨을 끊으며 거부하는데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편이 되지 못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자의 편에 선 선생이 되라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아직도 내 꿈은 아이들의 좋은 선생님이 되는 거예요.
물을 건너지 못하는 아이들 징검다리 되고 싶어요
길을 묻는 아이들 지팡이 되고 싶어요
헐벗은 아이들 언 살을 싸아는 옷 한 자락 되고 싶어요
푸른 보리처럼 아이들이 쑥쑥 자라는 동안
가슴에 거름을 얹고 따뜻하게 썩어가는 봄흙이 되고 싶어요.
• 당신의 무덤가에-도종환
당신의 무덤가에 패랭이꽃 두고오면
당신을 구름으로 시루봉 넘어 날 따라오고
당신의 무덤가에 소지 한 장 올리고 오면
당신은 초저녁별을 들고 내 뒤를 따라오고
당신의 무덤가에 노래 한 줄 남기고 오면
당신을 풀벌레 울음으로 문간까지 따라오고
당신의 무덤가에 눈물 한 올 던지고 오면
당신을 빗줄기 되어 속살에 젖어오네
•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도종환
견우직녀도 이날만은 마나게 하는 칠석날
나는 당신을 땅에 묻고 돌아오네
안개꽃 몇 송이 함께 묻고 돌아오네
살아 평생 당신께 옷 한 벌 못 해주고
당신 죽어 처음으로 베옷 한 벌 해입혔네
당신 손수 베틀로 짠 옥사지 몇 벌 아이웃께 나눠주고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돌아오네
은하 건너 구름 건너 한 해 한 번 마나게 하는 이 밤
은핫물 동쪽 서쪽 그 멀고 먼 거리가
하늘과 땅의 거리인 걸 알게 하네
당신 낮중 흙이 되고 내가 훗날 바람 되어
다시 만나지는 길임을 알게 하네
내 남아 밭갈고 씨뿌리고 땀흘리며 살아야
한해 한 번 당신 만나는 길임을 알게 하네
• 무릉 가는 길1 –민영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정해야 한다
가가운 길이 있고 먼뎃길이 있다
어디로 가든 처마 끝에
등물 달린 주막은 하나지만
가는 사람에 따라서 길은
다른 경관을 보여준다
보아라 길손이여
길은 고달프고 골짜기 보다 험하다
눈 덮인 산정에는 안개 속에 벼랑이
어둠이 깔린 숲에서는
성깔 거친 짐승들이 울고 있다
길은 어느 곳이나 위험 천만
길 잃은 그대여 어이로 가려 하느냐?
그럼에도 나는 권한다.
두 다리에 힘 주고 걸어가라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찾아가라고
깊은 두려움 모른 자를 두려워한다고
가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 거라고
.....한데, 어디에 있지?
지도에도 없는 꽃밭
무릉武陵
이 시는 교훈적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 어머니를 찾아서-조태일
이승의
진달래꽃
한묶음 꺾어서
저승 앞에 놓았다
어머님
편안하시죠“ 오냐, 오냐
편안타, 편안타
• 숲- 강은규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린다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1970년대 삶의 한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낸 시다. 절규성이란 문자 그대로 외침을, 삶의 상황이나 조건이 정상으 ㄹ잏을 때 그것을 외쳐서 증거하는 것이 시가 할 일 중 가장 큰 것의 하나다. 이 숲이야말로 여러모로 그 절규성을 가진 전형적인 시다.
• 한국의 아이-황명걸
배가 고파 우는 아이야
울다 지쳐 잠든 아이야
장난감이 없어 보채는 아이야
보채다 돌멩이를 가지고 노는 아이야
네 어미는 젖지 모자랐단다
네 아비는 벌이가 시원치 않았단다
네가 철나기 전 주 분은 가시면서
어머닌 눈물과 한숨을
아비는 몇 섬의 빚과 함께 남겼단다
뼈골이 부숴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 사는 나라의 백성이라서
뼈골이 부서지게 일은 했으나
워낙 못사는 나라의 백성이라서(중략)
• 화살-고은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몇십 년 동안 가진 것
몇십 년 동안 누린 것
몇십 년 동안 쌓은 것
행복이라던가
뭣이라던가
그런 것 다 넝마로 버리고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돌아오지 말자는 반어로 읽어야 한다. 70년대를 살면서 심한 좌절과 갈등, 무력감에 빠져 방황하느 전제 민중들에게 시 <화살> 만큼 가슴 격동 고무시키는 절창은 잘 없다. 시가 느슨하다는 표현은 곰팡내 나도록 식상한 은유지만 현악기의 줄은 너무 팽팽히 당기면 끊어지고 너무 느슨하면 소리가 늘어진다. 그곳에서는 소리의 긴장이 없다.
고은이 하고 있는 일은 만 사람의 내력을 시로 쓰겠다는 <만인보> 시 완성이다. 곡 시로 쓴 민중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지금껏 나온 건 열 다섯 권.
그의 시적 스펙트럼은 넓다. 그의 시 성격은 몇 마디로 규정하기 어렵다. 발 빠르게 변화하는 것이 그의 시여서 이렇구나 싶으면 저렇고 여기 왔구나 보면 저만치 딴 데 가 있다. 끝없이 나아가고 끊임없이 부딪친다는 표현이 오히려 맞다. 승려로 출발하여 허무주의 시인으로 방황하다가 다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기수로 고난을 겪고 선과 지혜와 생명 사랑의 시인으로 거듭난 인생역정과도 문학적 시적 갈증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 내가 나를 바라보니-조오현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가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2000 만해축전>에 특별기고로 실린 자화상. 이 비유가 죄의식이나 자괴감이지만 오히려 천지만물에 대한 외경이 이런 표현으로 나타났다. 불교는 늘 권력이며 대중에게 매맞아 온 종교요. 매 맞는 가운데 철학이 있다. 김효사 시인은 조오현 시인을 “설악만큼이나 큰 스님”이라 한다. 백담사에서 만해축전을 하는 것은 이 곳이 만해가 줄가해 승려생활을 시작한 곳이요 <불교유신론>과 <님의 침묵>도 이 곳에서 썼다.
• 재 한 줌-조오현
어제 그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줌 재로 흩부리고
누군가 훌쩍어리는 그 울음도 날려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리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다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 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일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ㅃ부린 한 줌 재뿐이네
• 겨울 골짜기-조향미
가슴 수북이 가랑잎 쌓이고
며칠내 뿌리는 찬비
나 이제 봄날의 그리움도
겨울날의 쓰라림도 잊고
묵묵히 썩어가리
묻어 둔 씨앗 몇 개의 화두
푹푹 썩어서 거름이나 되리
볓빛 또록한 밤하늘의 배경처럼
깊이 깊이 어두워지리
• 들꽃 같은 시-조향미
그런 꽃도 있었다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이 더 많지만
혹 고요한 눈길 가진 사람은
야트막한 뒷산 양지바른 풀밭을 천천히 걷다가
가만히 흔들리는 작은 꽃들을 만나게 되지
비바람 땡볕 속에서도 오히려 산들산들
무심한 발길에 밟히고 쓰러져도
훌훌 날아가는 씨앗을 품고
어디서고 피어나는 노란 민들레
저 풀빛의 초롱한 눈으로 빛나는 하얀 벌꽃
허리 굽혀 바라보면 눈물겨운 작은 세계
참 그런 눈길 고요한 사람의 마을에는
들꽃처럼 숨결 낮은 시들도
철마다 알게 모르게 지고 핀다네
-조향미 시정신의 근본은 남들이 거들떠 보지 않는 작은 것, 하찮은 것에서 큰 아름다움, 진짜 아름다움을 보는 데 있다.
•경내-서정춘
하늘이 조용한 절 집을 굽어보시다가 댓돌 위의 고무신 한 컬레가 구름 아래 구름보다 희지고 있는 것을 머쓱하게 엿보시었다.
-절창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는 시인이다.
• 새들에게 쓰는 편지- 이해인
몸과 마음의
무게를 덜어내고 싶을 때마다
오래도록
너를 그리워한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가벼워야 자유롭고
힘이 있음을 알고 있는 새야
먼데서 가끔은
나를 눈여겨보는 새야
나에게 너의 비밀을
한 가지만 아려주겠니?
모든 이를 드겁게 사랑하면서도
끈끈하게 매이지 않는 서늘한 슬기를
멀고 낯선 곳이라도 겁내지 않고
떠나 수 있는 담백한 용기를
가르쳐주겠니?
시인은 “이 아름다운 나무들 사이에서 흙을 밟고 채소를 심는 일, 이것이 다 시지. 시와 기도와 생활이 어디 따로 있겠어요. 다같이 있는 거지.”한다.
• 선암사- 정호승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 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은 사랑의 시인이다 첫 시집<슬픔이 기쁨에게-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에서부터 <슬픔으로 가는 길ㅡ내 진실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 <슬픔은 누구인가>,슬픔 많은 이 세상도> 맨 슬픔 타령이다. “<슬픔으로 가는 길><슬픔을 위하여-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슬픔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다섯 번째 시집<사랑하다가 죽어 버려라>까지 사랑이 관심 대상이고 눈물이다. 그의 선함은 치열하고 철저한 인식을 요구하는 사회성을 견디지 못했고, 마침내 그의 눈물은 그가 현실 사회에서 찾지 못했던 것을 자연이나 관념 속에서 찾으면서 고마움의 눈물로 변한 것이다.
• 김용택
용택이네 학교에서는 담임인 용택이도 시를 쓰고 아이들도 동시를 쓰는데 그 실력이 막상막하다. 박완서 선생이 와서 <우리들 차지>에 붙은 글을 죽 읽어보고 한 편 골라 “이건 참 잘 썼다. 이 아이는 좋은 시인이 될 거 같다. 잘 길러라.”했다. 용택이 “박 선생님, 그건 제가 쓴 겁니다” 했단다. 박완서 선생이 내 시가 좋다고 했어야!“
• 그 여자네 집1-김용택
그 여자는 동무들과 어깨를 마주대고 오불오불 꽃처럼 모여 있었다. 마치 꽃무리 같았다. 운동회가 끝나가고 산그늘이 운종장을 덮고 마지막으로 아이들 소고놀이가 끝나면 그 여자는 도 동무들과 집에 갔다. 운동장 가의 코스모스 속에서 그 여자는 웃고 있었다. 해가 진 뒤 나는 그 여자네 동네를 지나 집에 간다. 그 여자가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모습이 보이거나, 내가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날 때 얼른 그 여자가 지나가면 우린 그날 밤에 꼭 만났다. 늘 그랬다. 그렇게 만나는 날이 가면서 겨울이 왔다.
• 그 여자네 집2-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바라보면 정다웠던 집/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서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가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손길이 따뜻해오는 집도 섬진강이 배경에 깔림으로써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 안도현이 발령장을 들고 찾아간 곳은 산토끼와 발맞추기 닥 안성맞춤 곳이었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고개 숙이고 들어가면 연탄아궁이가 딸린 부엌이 나오고 방문을 열면 라면 상자만 한 창이 달린 방이 하나 있었다. 봄이 오기 전이었는데, 연탄불은 왜 렇게 자주 숨을 놓아 버리는지. 거기서 일 년 가까이 마당에 있는 수도꼭지 앞에 쪼그려 앉아 쌀을 씻고 걸레를 빨았다. 그리고 시를 썼다. 시집<그리운 여우>에 들어가 있는 대부분의 시는 그 집의 그 방에 엎드려 쓴 것들이다. 조국은 통일되어야 하고 노동자는 착취당해서는 안 되며 어떠한 사람의 인권도 보장돼야하고 교육의 주체는 아이들이 돼야 한다는 말은 그른 데가 없지만 여기에만 충실할 때 무슨 재미있는 시가 되랴. 인간의 등과 오뇌 같은 것을 읽을 수 있어야 시다.
• 그 밥집-안도현
뜨끈뜨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중앙시장 그 밥집
어물전 아줌마도 수선집 아저씨도 먹고 가는 그 밥집
누구 하나 밥 한 톨 안 남기고 반찬 투정 한번 부리지 않는 그 밥집
그 밥집 밥 먹고 난 뒤에는 노는 사람 단 한 사람도 없을 그 밥집
-전주 콩나물 해장국집을 마다하고 중앙시장의 그 허름한 밥집으로 안내해 어물전 아줌마며 수선집 아저씨와 어깨를 맞대고 해장국에 밥을 말려 좋아하던 시인은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을 확인하게 했다.
• 비 그친 뒤-안도현
담장 및 텃밭 상추 푸른 냄새가
3층 교실까지 올라온다.
딱정벌레같이 엎드려 사는 슬리브 지붕집 빨랫줄에
누군가 눈부시게 기저귀를 내다 넌다.
저 아기도 자라면 가방 들고 딸랑딸랑 이리로 걸어올 것이다.
• 너에게 묻는다-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순댓국 한 그릇-안도현
구린내 곰곰 나는 돼지 내장
도회지에서는 하이타이를 풀어 씻는다는데
산사농협 앞 삼화집에서는
밀가루로 싹싹 씻은다
내가 국어를 가르치는 정미네 집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 먹을 때의
깊은 신뢰
• 길 따라-안도현
산서 장날 어물전 조기들이
상자 속에 반듯하게 누워 있다
부아산, 이라 붙어 있다
부안이면 여기서 300리도 넘는 곳
나는 조기를 싣고 왔을 트럭을 생각하고
조기가 흘러왔을 길을 짚어본다.
부안 죽산 동진 김제 용지 이서 전주 관촌 임실 오수 지사 산서
-시를 쉽게 쓰지만 어렵게 쓰는 시보다 더 어려운 과정을 거쳐 태어나는 것이 쉬운 시일 수도 있다. 느낌은 독자에게 그의 시에 쉽게 접근하게 하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깊은 천착과 같다.
•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안도현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올 때가 있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이라든가
내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이라든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갈아엎는
치통이라든가
귀틀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라든가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같은 것
• 우리나라 모닥불 근처에는 사람이 있다. 살아서 모여 있다. 등짝은 외롭고 캄캄해도 그 가슴이 화끈거리는-모닥불 시
•장날-안도현
장꾼들이
점심때 좌판 옆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니
그 주변이 둥그렇고
따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