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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
信天함석헌
나는 꽃들을 사랑하지만 누가 묻기를 어느 꽃이 가장 아름다우냐 하면 대답을 못하고 “글쎄……” 하고 만다. 여러 가지 책을 감격을 가지고 가장 읽지만 좋은 책을 골라 추천하라면 역시 “글째……” 하다 마는 일이 많다. 인물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요새 누가 만일 추천을 해달라고 청한다면, 그보다도 청이 오기 전에 내 편에서, 권하고 싶은 것은 간디의 자서전이다. 그것은 물론 내가 그 책을 지금 우리말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또 더 깊이 반성해 봐도 그런 것만이 아닌 것이 있다.
나의 간디가 자라고 있다.
어느 사람의 생애는 아니 그럴까마는, 특히 간디의 일생은 마치 큰 나무의 자라나는 것을 보는 것 같다. 날 때에는, 모든 도토리가 꼭 같이 뵈는 도토리 알이듯이, 간디도 각별히 천재적인 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자람에, 따라 점점 그것이 보통이 아닌 위대함을 보여준다.
태어난 가정환경도 좋기는 하지만 특별한 것은 없고, 거기 일어났던 일들도 보통 누구나 다 당하는 씨알적인 인생이지 무슨 큰 충격이나 감동을 준 것은 없다.
교육도 그때 인도 사회에서는 중류 이상이지만, 만났던 선생 중에 큰 인물이 있은 것도 아니고, 자기가 천재적으로 해낸 것도 아니었다. 성적은 자기 말대로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간디만이 홀로 당했던 무슨 극적인 사건은 없었고, 크게 한 일이 있다면 자기편에서 자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한 것이지, 비상한 운명적인 것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일생에 파란곡절이 많다면 많았고, 폭풍 속에 자라는 참나무같이 그것과 싸우는 데 따라 그 참나무적인 인격이 드러났지만, 그 기회란 우연히 밖에서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가서 만든 것이었다. 말하자면 마라톤 경주자의 당하는 바람이었다. 아니하는 다른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무사태평으로 지나갈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한마디로 해서 간디는 자기를 개발한 사람이다. 이 의미에서 내가 한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그의 말은 그대로 옳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서전을 읽어 가노라면 꼭 소금을 집어먹는 것 같다. 언제든지 같은 맛이다. 같은 맛인데 싱거운 대목이 하나도 없다. 어떤 위대한 사람의 생애를 봐도 보통 때와 감격스러운 대목이란 것이 따로 있는데, 이것은 매주 연속적으로 게재했던 관계도 있겠지만, 어느 장을 봐도 거기 간디의 전면이 늘 들어있고, 수식해서 쓰는 문구 한마디도 없는데, 읽는 사람의 마음을 꼭 잡아버린다. 그것은 쓴 사람이 그렇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소금에 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각별한 맛을 내는 것 없는데 싱거운 대목은 하나도 없다. 늘 짜릿짜릿 한 맛이다. 한 알 속에 전체가 들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그것을 실험이라고 한다. 그에게는 시간마다가 비상시였단 말이다. 그러니 ‘참’ 아니겠나?
놀랍다, 놀라운데, 놀라운 것을 해서 놀라운 것이 아니다. 놀라운 것이 없는 것을 놀랍게 했다는 말이다. 전쟁을 영웅적으로 싸운 것이 위대하다면 평일의 인생을 영웅적으로 싸운 것은 더 위대, 그야말로 참 의미의 위대 아닌가?
내가 간디의 이름을 처음으 들은 것은 아마 스물이 한둘 넘어서였을 것이다. 3.1 운동이 있었을 그 당시가 간디가 인도에서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크게 전개하던 때이므로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그래서 로망롤랑의 간디전을 읽은 것이 1924〜25년일 것인데, 나는 그것을 퍽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대체로 간디에 대한 내 마음이 일어나기를 그 책 때문에 됐었는데 그가 간디의 요점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오랜 세월이 지나 그 문구는 하나도 기억할 수 없으나 다만 한 가지, 간디는 외양으로는 분주한 정치활동을 하고 있으나 속살은 종교의 사람이다. 낮에는 활동을 하고 밤이면 종교라는 지하실에 내려가 내일의 활동을 위한 힘을 기르고 있다는 의미의 평을 했던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사람은 나기는 물질적인 존재로 나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인 존재에까지 올라가야만 한다는 것이 힌두교의 알짬이라면, 인도민족이 간디에게 마하트마라는 칭호를 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간디 자신은 물론 그것을 아주 싫어했다. 참의 사람인 그가 그런 우상숭배적인 떠들석을 좋아할 리가 없다. 그러나 역사를 굽어보는 견지에서 한다면 그것은 역시 인도 씨알의 자기 발견의 한 발걸음, 다소 빗나간 점이 있다 하더라도, 나아가는 한 발걸음이라 해야 할 것이다. 간디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자는 노력이다. 본다기보다 조각해내는 한 끌질이라 해야 할 것이다. 힌두교의 신앙은 하나님은 이 세상이 타락되어 정의가 무너질 때마다 의인을 건지기 위해 자기가 사람의 형상을 쓰고 온다고 믿어서 그 사람을 아바타르, 곧 화신(化身)이라고 한다. 그들은 간디에게서 그것을 봤던 것이다. ‘마하트마’란 ‘마하’ 곧 ‘크다’는 말과 ‘아트만’, 곧 ‘영혼’ 혹은 ‘자아’라는 말을 합해서 만든 말인데 인도 역사에는 여러 마하트마가 있다. 민중에 의해서 불리어진 이름이지 어떤 제도에서 나온 지위가 아니다. 동양 말로는 대성(大聖)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인데 마하트마에 이르렀으니 m에서 M으로 올라간 것이다. 힌두교에서 인생의 목적이 self(小我)에서 Self(大我)의 발견에까지 가야 한다는 그대로다.
그러면 간디를 마하트마에까지 올라가게 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그것을 그는 ‘참’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서전의 제목을『나의 진리 실험의 이야기』이라고 했다. 그 실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자기 일생을 하나의 실험으로 보는 데 간디의 간디 된 점이 있다. 실험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하는 일의 목적이 분명히 정해져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재주도 있고, 의욕도 강하고, 맘성도 착하면서도, 일생을 그저 흐지부지로 없애버리고 마는가? 그것은 목적 의식이 부족해서 그런다. 간디는 그 점에서, 아주 투철하였다. 누가 시킨 것 아니라 스스로 나도 사람 노릇해야할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강했다. 그것은 하면 있는 것이고 아니하면 없는 것이다. 조즉존 사즉실(操則存 捨則失)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어떻게 무엇을 하렵니까 물을 필요 없다. 생각하면 된다. 그렇기에 간디는 어려서부터 끝날까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남이 못하는 놀라운 활동을 했다 해서 그저 쉽게 행동의 사람이라고만 해서는 안된다. 생각은 없이 하는 행동은 껍데기의 행동이요, 속고 속이는 행동이요, 남을 죽이고 저도 망하는 행동이다. 이 세상은 행동이 부족해서 망하는 것 아니라 생각이 부족함으로 망하는 것이다. 간디의 이루어 놓은 일만 보고 욕심을 내고 스스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목적이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있다. 간디는 믿었다. 무얼 믿었단 말인가? 이 우주 간에는 근본이 선한 의지가 꽉 차 있어 그것이 생물 진화와 인간 역사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믿은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세상에 흔한 욕심을 그대로 두고 도덕적으로 제 의무를 다할 생각은 없이, 어떤 마술적인 힘을 얻어 행복한 자리에 가잔 그런 미진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강하고도 겸손한 신앙의 사람이면서도 소위 말하는, 더구나도 인도에는 예로부터 많은 신통력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을 한 번도 보여준 일이 없다. 그럴 뿐 아니라 매양 사티아그라하는 과학이라고 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큰 영향력을 대중 위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그들을 기분에 도취시키거나 탈선시킨 일이 없다. 이점은 크게 주의할 만한 점이다. 그야말로 씨알을 깨워서 올라가게, 하는 참 자도자였지, 역대의 많은 지도자들이 했던 것같이 씨알을 우롱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알짬은 도덕이라고 늘 강조했다.
그 다음 하나 더 말한다면, 그를 몰아 총알에 쓰러지는 순간까지 지칠 줄을 모르고 그저 올라만 가게 한 것은 씨알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이다. 소위 말하는 자선이니, 박애니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간디는 자기와 씨알의 구별이 없다. 자기가 곧 씨알이 돼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불가촉민 제도를 철폐할 것을 주장했고, 완전히는 못되었어도 적어도 제도상으로는 평등의 사회를 만드는 기초를 놓아 줄 수 있었다. 자서전을 읽어가며 놀랍고도 또 눈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저 페이지마다 사건마다, 씨알, 씨알, 봉사, 봉사로 옷의 실밥처럼 무늬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5억 인도의 씨이 어딜 가 보아도 그를 각하, 지도자는 그만두고, 씨니, 선생님이니 하는 소리도 없이 그저 “바부지”(아버지)라 부르니 얼마나 좋은가?
씨알의 소리 1976. 10월. 58호
저작집; 10- 51
전집; 7-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