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0년대🌱 |
🌱14년 주시경, '말의 소리' 간행 🌱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上海),4/11 임시헌장 10개조 발표(이동녕.이승만.김구.이시형.김규식) | |
🌱43년 4월 13일, 카틴 숲 학살 사건(Katyn Massacre) 현장 발견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조약이 체결되고 그 일주일 뒤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발발한 이후 폴란드는 두 국가에게 분할 점령되었다.
당시 소련군은 사병들은 대체로 즉시 석방했지만, 폴란드군 장교 포로 수만명은 수용소에 수감시켰다. 이후 소련군은 포로 관리를 대숙청으로 악명 높은 NKVD(Narodnyi Komissariat Vnutrennikh Del, People's Commissariat for Internal Affairs)에 넘겨주었다.
이후 NKVD의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는 1940년 3월 5일 반소적이거나 소련에 비협조적인 자들은 소련의 안보에 위험하니 즉시 제거하자고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의견을 상신했고, 스탈린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학살이 최종 결정되었다.
폴란드군 포로들에 대한 재분류를 통해 포로 25,736명을 카틴 숲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끌고 갔고, NKVD는 미리 암매장하려고 파둔 여러 곳에서 이들 중 2만 2천여 명을 1940년 4월부터 5월까지 총살했다.
총살당한 이들 중 8천여 명은 소련의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였으며, 6천여 명은 폴란드 경찰, 나머지는 폴란드 지식인이었다.
카틴에서만 4,400여 명이, 민스크에서 3,870명이, 하리코프에서 3,800여 명이, 메드노예(Mednoye)에서 6,30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외에도 키예프와 헤르손(Kherson)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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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년 로마교황청, 한국정부 승인 | |
🌱1961년 영화 ‘오발탄’ 개봉-오발탄(誤發彈)
유현목 감독 영화 ‘오발탄’ 개봉-오발탄(誤發彈)
1961년 대한영화사가 제작한 이범선 원작, 나소운·이종기 각색, 유현목 감독의 영화. 6·25동란 후 한국 사회의 빈곤과 부조리를 고발적으로 그렸다는 점과 철저한 리얼리즘의 영상으로 묘사되었다는 전후 최대의 문제작이다.
1961년 대한영화사가 제작하였고, 촬영 심재흥(沈載興)에 음악 김성태(金聖泰), 그리고 김진규(金振奎)·최무룡(崔茂龍)·문정숙(文貞淑) 등이 출연하였다. | |
🌱65년 서울시내 대학생 4000여명 굴욕외교반대 데모 🌱82년 국가안전기획부, 서울·안동에서 25년간 암약해 온 안승륜 일당 등 3개 간첩망 18명을 검거 발표 🌱83년 문화공보부, 낙동강 하류의 철새 도래지 198만 ㎡를 천연기념물 지정에서 해제 🌱85년 정부, 각종 행사서식에서 본적·본관 기재 삭제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 🌱86년 이승만 박사 유품중 한성 임시정부선언문 발견 | |
🌱87년 전두환 대통령, 특별담화로 현행 헌법으로 대통령선거 연내 실시, 88년 2월 정권이양 발표
1987년 4월 13일.전두환 대통령, 호헌 조치 발표, 대통령 간선제 유지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공화국 마지막 해인 1987년, 국민들은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대학가 역시 1987년 1월 14일 발생한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위의 열기가 절정에 달해있었다. 그러나 5공 정권은 민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한술 더 떠 1987년 4월13일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통해 ‘헌법 개정 논의를 금지한다’는 이른바 ‘4ㆍ13 호헌조치’를 발표, 시민항쟁에 맞섰다.
이날 전두환은 그동안 여야 합의에 의해 개헌이 성사되도록 기다려왔으나 전망이 절망적이어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임기 중에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후,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이 같은 발표를 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평화적 정부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개헌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