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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4대 (광종 ) 헌릉 925년-975년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심천리에 있는 고려 광종의 능.
광종이 975년(광종 26) 5월 나이 51세로 승하하자 송악산 북쪽 기슭에 장례를 지냈다. 능역(陵域)은 장방형으로 너비 48척(尺), 길이 130척으로 그 좌우와 후방의 3면에 돌담장을 두른 흔적이 있다.
북한의 행정구역상 개성시에 있는 고려 제4대 광종과 왕비 대목왕후 황보씨가 안장된 왕릉. 넷상에 퍼진 사진이나 위성지도로 봤을 때 관리 상태는 매우 좋지 못해 보인다.
최근 들어서 다시 정비된 헌릉이 공개되었는데 석물들이 많이 사라져 초라해졌다
975년(경종 즉위년) 5월 23일 광종이 승하하자 송악산의 북쪽 기슭에 장사를 지내고 능호를 헌릉(憲陵)이라 하였다. 관련된 기록이 고려사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1910년대에 찍은 사진을 보면 능 구역은 3단면으로 이루어져 그 좌 ·우 ·후방의 3면에 돌담장(곡장)을 둘렀던 흔적이 있다. 1단은 1.65m 높이의 토류석벽(土留石壁)으로 2단과 구별했고, 여기에 능과 돌난간, 돌짐승(石獸)이 남아 있었다. 높이 70cm의 12각형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이 밖에 망주석과 석상(石床)이 남아 있었다. 2단에는 장명등(長明燈)과 석인(石人) 한 쌍이 좌우에 있고, 3단면에는 조선 후기에 세운 능비가 있었다. 정자각은 터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원래 위치를 알려준다. 그러나 2017년에 촬영된 헌릉 사진을 보면 묘역 주변의 울창했던 산림은 훼손됐고, 돌담장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2단 양쪽에 설치돼 있던 너비 1.8m의 계단도 완전히 없어졌고, 묘비도 확인되지 않는다. 북한의 보고서에 보면 4구의 석수가 남아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진 듯하다. 과거 학계에서는 헌릉의 석물들이 훼손된 데 비해 축대나 초석들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능 구역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평가했지만, 최근 입수된 사진으로 보면 1단과 2단 사이의 축댓돌들은 완전히 사라지고, 정자각 터에 있던 돌들을 모아 보수해 놓았다. 원형이 아예 사라진 것이다.
26년(975) 여름 5월 왕이 편찮아 갑오에 정침(正寢)에서 훙서하니, 왕위에 있은 지 26년이며 나이는 51세였다. 왕이 즉위한 처음에는 신하를 예절로 대우하고 정사 처리에 밝았으며, 가난하고 약한 자를 돌보고 선비들을 존중하였다.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으니 거의 치평(治平)에 이르렀다. 중반 이후로는 참소(讒訴)를 믿어 사람들을 많이 죽였고 지나치게 불법(佛法)을 믿었으며 절제함이 없이 사치하였다. 시호(諡號)를 일러 대성(大成)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광종(光宗)이라 하였으며, 송악산(松嶽山)의 북쪽 기슭에 장사 지내고 능호(陵號)를 헌릉(憲陵)이라 하였다. 목종(穆宗) 5년(1002)에 시호에 선열(宣烈)을 덧붙이고, 현종(顯宗) 5년(1014)에 평세(平世)를 더하였으며, 〈같은 왕〉 18년(1027)에 숙헌(肅憲)을 더하고, 문종(文宗) 10년(1056)에 의효(懿孝)를 덧붙였으며, 고종(高宗) 40년(1253)에 강혜(康惠)를 더하였다.
재위 949년∼975년. 이름은 왕소(王昭), 자는 일화(日華). 아버지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이며 어머니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神明順成王太后劉氏)이다. 정종(定宗)의 친동생으로 그의 선위(禪位)를 받아 왕이 되었다. 비(妃)로는 대목왕후 황보씨(大穆王后皇甫氏)와 경화궁부인 임씨(慶和宮夫人林氏)가 있다.
그런데 대목왕후는 광종에게 있어 이복누이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따라서 이들의 혼인관계는 고려왕실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근친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생으로는 경종(景宗)·효화태자(孝和太子)·천추전부인(千秋殿夫人)·보화궁부인(寶華宮夫人)·문덕왕후(文德王后)가 있다. 경화궁부인 역시 광종과는 숙질(叔姪)간이 된다. 부인의 아버지는 고려 제2대 혜종(惠宗)으로 광종과는 이복형제지간이 되기 때문이다.
광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끈기 있고 정력적으로 노력해 큰 성과를 거둔 왕이었다. 광종의 치세(治世)는 즉위년∼7년, 7년∼11년, 11년∼26년 등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기에는 왕권강화와 관련된 정책은 시행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국내정세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성종대(成宗代)에 최승로(崔承老)가 “광종 8년 동안의 다스림은 가히 삼대(三代: 중국의 하·은·주 3대)에 견줄 만하다.”고 격찬할 정도였다. 또한 중국 왕조와도 밀접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내외 정책을 통해 새 국왕으로서의 지위 및 그 정치기반을 닦아나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시기에는 호족세력의 제거와 왕권강화에 필요한 제도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956년에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실시했고 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960년에는 백관의 공복(公服)도 제정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호족세력의 반발이 야기하기도 했으나 광종은 철저한 탄압을 통해 강행시켜 나갔다.
956년부터 왕권강화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중국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등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쌍기는 후주에서 왕권강화책을 추진한 적이 있는데 이를 광종에게 제시함으로써 고려사회에서도 왕권강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쌍기를 중용한 해에 노비안검법을 세운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시기에 이르면 왕권강화책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호족세력에 대해 과감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960년에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權信)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좌승(佐丞) 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보고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광종은 즉시 이들을 귀양 보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 이후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기회를 얻어 충직하고 어진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를 참소하는 행태가 벌어졌다고 하였다. 또한 감옥이 항상 가득차서 따로 가옥(假獄)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 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왕권안정에 대한 광종의 집념은 매우 강렬해 호족세력은 물론 골육(骨肉)과 친인척에 대한 경계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한번 의심이 가면 살육마저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혜종과 정종의 아들마저도 비명에 죽어 갔다.
958년부터 실시된 과거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시위군졸(侍衛軍卒)은 문무(文武) 양면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반을 배경으로 정적(政敵)들에 대한 과감한 숙청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족세력 등 정치적 적대세력들의 반발도 더욱 거세져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광범위한 세력기반의 구축이 필요해졌다. 963년에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해 각종 법회와 재회(齋會)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펴나간 것은 이러한 필요성에서 나온 결과물들이었다. 즉 귀법사의 승려 균여(均如)·탄문(坦文) 등을 통해 호족세력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을 포섭하고,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광종은 왕권강화책 외에도 많은 치적을 남겼는데 밖으로는 중국의 여러 왕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고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켰다. 국방대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영역을 서북과 동북방면으로 더욱 확장시키는 동시에, 거란과 여진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불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여러 가지 시책을 펼쳤다. 968년에는 혜거(惠居)를 국사(國師)로 삼고, 탄문을 왕사(王師)로 삼음으로써 고려국사·왕사제도의 체계를 완성하였다.
광종(光宗)은 제2대 혜종, 제3대 정종과 여러 면에서 대비되고 있다. 우선 재위기간도 혜종의 2년, 정종의 4년보다도 훨씬 긴 26년이었다. 그리고 혜종과 정종이 각각 박술희(朴述熙)와 왕식렴(王式廉)으로 대표되는 측근의 세력기반에 의지해 왕권을 부지한 반면, 광종은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바탕으로 왕권을 확보하였다.
따라서 광종은 주변세력의 영향력 없이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 결과 태조 이래 열세에 놓여 있던 왕권을 호족세력보다 우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광덕(光德)’·‘준풍(峻豐)’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수도인 개경을 ‘황도(皇都)’라고 명명하였으며 만년에 ‘황제(皇帝)’라는 호칭까지 사용하는 것은 모두 그 결과물들이라 할 수 있다.
광종의 노력으로 국가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동시에 왕권의 한계성도 함께 노출되었다. 왕권 또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는 침투하지 못했고 호족세력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호족세력에 대한 왕권의 일방적 승리는 아니었다. 광종이 죽고 경종(景宗)이 즉위한 이후에 나타난 대대적인 반광종운동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광종의 치적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시호는 대성(大成)이며, 능은 헌릉(憲陵: 현재 경기도 개풍군 적유현)이다.
즉위 후 노비안검법 실시
우선 광종은 호족들의 세력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호족들이 소유한 노비들 중 원래 양인이었지만 강제 및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다시 양인으로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고려의 지배층을 이루며 호의호식하던 수많은 호족들은 후삼국시대의 격렬한 전쟁 와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지고 이를 갚지 못한 것 등의 이유로 양인에서 노비가 된 사람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당시의 관념상 노비는 당연히 재산 취급을 받았는데, 이들은 단순한 소유물을 넘어 소작농 겸 사병 역할까지 도맡아 했기에 호족들의 중요한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이는 왕씨의 황권을 위협하는 요소로써 임금인 광종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었다. 물론 이런 속내를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광종은 신라-고려의 왕조 교체기를 통하여 혼란했던 사회적 신분 질서를 바로잡는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노비안검법 실시를 강행했다.
이를 통해 호족들의 군사력 및 경제력을 약화시켜, 그들의 세력을 뿌리채 흔들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양인 계층으로 면천된 해방 노비들이 세금을 내면서 군역의 의무까지 지게 되어 왕실의 재정을 확충하고, 군사력을 증강시킬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온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충선왕이 “우리나라(고려)의 문물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묻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광종 이후 문교(文敎)를 닦아 서울에 국학(國學·국자감), 지방에 향교와 학당을 세워 학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문물이 중국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광종은 중국의 마지막 5대 왕조인 후주 출신으로서 고려에 사신으로 방문했던 쌍기를 귀화시킨 뒤 전격 발탁하였다. 쌍기의 제안을 받아들여 958년(광종 9년)에 호족들의 직위 세습을 막고자 이미 중국에서 시행되고 있었던 과거제를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실시하였다. 쌍기는 한국사 최초의 과거시험 때 그것을 주관하는 지공거가 되었으며, 한국사 최초의 과거 시험 장소는 개경 본궐의 위봉루(威鳳樓) 앞 구정이었다.
중국에서 과거제가 최초로 정착된 수나라와 당나라가 그랬듯이 귀족적 관료제의 특성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과거제 실시는 의미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시 과거제도도 호족들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서희의 아버지 서필부터 호족 출신이었고, 과거 시험도 본시 계급이 호족이 아니면 붙기가 힘들 만큼 어려웠으며, 과거 시험 중 가장 어렵다는 문과를 중심으로 과거제를 짰다. 또한 호족들 중엔 파평 윤씨라거나 옛 왕족 출신인 경주 김씨까지 모두 고려조는 물론 조선조 문•무대신들의 조상들이 숱하게 많다.
이전까지 한반도 사회는 귀족들이 관직을 독점하고 세습하는 사회였기에 순수하게 과거만으로 관리를 뽑으면 그에 따른 반발이 심했기 때문에 귀족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음서제가 함께 도입되었다. 그런데 고위 관직은 음서제 출신자들만 진출할 수 있는 등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과거제가 유명무실해진다. 이런 관행은 결국 조선에 가서야 뒤집어진다. 물론 정치적 야망이 있는 귀족의 경우, 음서로 관리 생활을 하면서 과거시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고, 출세의 지름길로 이용했다.
이미 고려 이전 신라 하대의 열조 원성왕(제38대) 때 독서삼품과가 시행되기는 했었지만 진골 귀족들의 반발이 심한 탓에 하급 관리에 제한되어 실시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한반도에 관료제 국가를 확립하는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으며, 958년 도입된 과거제는 이후 900년 넘게 실시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된다.
공복 제정
960년 3월 신하의 공복(公服)을 제정했는데 보라색(자색) > 붉은색(단색) > 연한 붉은색(비색) > 초록색(녹색) 순으로 정했다. 이는 국왕이 직접 백관의 의복을 제한함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다잡고, 후삼국 통일 이후 엉망이 된 조정 내 서열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공복 뿐만 아니라 신분증을 넣고 다니는 어대(魚袋)에도 제한을 두어 조정 내 위계를 명확히 했다.
《고려사》 <여복지> -서문-에 따르면 고려가 개국된 뒤 새로운 공복 제도를 만들지 않고, 전대 신라의 의복 제도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고 한다. 문제는 신라의 의복 제도는 골품제라는 신분제에 맞추어져 있고, 새로운 국가 지도층인 호족들은 골품제에 맞춰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고려도 새로운 신분제를 사용했으므로 신라의 의복 제도는 고려와 정말 맞지 않는 상극이었을 것이다.
이미 태봉때부터 신하들은 의복 제도를 무시하고,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채 조정에 나타나서 태봉 조정은 '패션쇼 파티장'이 된 상태였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공복 자체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고려사》 및 《삼국사기》에 나온대로 패션쇼를 드라마에서 할 수는 없었을테니. 고려 초기에도 정리 노력은 했지만 공복이 제정되어 있지 않는 이상 패션쇼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따라서 광종은 공복을 제정함으로써 패션쇼를 금지하고 대대적인 기풍 정화 운동을 펼쳤다.
광종의 공복 제정은 고려 왕조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고려 국왕이 주도하는 조정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고려가 실정에 맞춰 의복 제도를 고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선례가 되었다. 공복 제정을 통해 호족들의 사치를 제한하는 효과도 있었는데, 사실 광종의 공복 제정은 호족의 사치를 제한하는 효과를 노리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호족들은 공복 제정에 저항했으나 광종이 공포정치를 시행하고, 이 와중에 호족 대숙청을 감행해서 공복 제정에 저항하던 호족들은 버로우를 탔다.
외교
북송과의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송나라의 연호인 '건덕'을 사용했다. 2개의 연호 가운데 '광덕'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어 이견이 없지만 청주시 용두사지 철당간과 일본의 조련사 동종에서 확인되는 '준풍'은 독자적 연호인지 당시 북송에서 쓰던 연호(건륭의 '건'은 태조 왕건, '륭'은 왕건의 아버지 세조 왕륭의 휘.)의 피휘인지 논란이 분분하다.
이후 960년에 문화적, 경제적 목적을 가진 고려는 군사적인 목적을 가진 북송과 윈-윈 통교를 시작했으며, 연호와 칭호는 송나라의 것을 따랐다. 또한 발해의 후신인 정안국을 '형제의 나라'로 부르면서 이들과 연합해 거란족의 요나라를 공격하는 등 요나라에 대한 강경책을 펼쳤다. 이는 태조 당시의 만부교 사건과 더불어 요나라와의 전쟁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되었고, 후대 왕인 성종(제6대)과 현종(제8대)은 요나라와 길고 긴 여요전쟁을 치러야했다.
왕권 강화 황제국 지향
광종은 949~953년{광덕(光德)}과 960~963년{준풍(峻豊)} 무렵에 '광덕'(光德)이나 '준풍'(峻豊) 등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해 사용했으며, 960년, 개경을 황도(皇都)라 하고, 서경을 '서도'(西都)로 삼는 등 황제국의 지향을 보여주었다. 또한 당나라 초기의 문풍을 계승하여 과거제 등을 시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그는 퇴화군대사종(退火郡大寺鐘)에서 '금상 황제'(今上 皇帝),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에서 '우리 황제 폐하'(我皇帝陛下)라고 칭해졌다
황제국이 왕을 책봉하는 것이 두 국가의 상하관계를 명확하게 한다는 인식은 몽골복속기에서 연원한 것이었으므로, 그 이전인 고려 전기, 광종은 국제 정세를 면밀히 파악하여 후진을 비롯한 중원 왕조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면서도, 남당과 같은 10국 황제들은 급을 달리하면서 황제국으로 인정하였다. 또한 오월 국왕과는 불교를 매개로 대등한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이러한 외교를 통해 고려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한 축을 담당한 국가로 인식할 필요성을 알리고 황제국을 지향하였다.
수도 제도 개편
《고려사》 <광종 세가>에 따르면 광종은 재위 11년(960년)에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은 서도(西都)로 개칭했다. 이는 국가의 두 수도를 높여 자신의 권위를 중국 황제와 맞먹게 할려는 의도였다.
유교적 예법에 따른 수도 구분은 천자는 '경'(京)과 '부'(府)를 두는데 예를 들어 고려의 개경 개성부이다. 제후는 '부'(府)만 설치했는데 예를 들면 조선 왕조의 한성부이다. 고려는 '경'(京)과 '주'(州)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광종은 '도'(都)를 도입하여 그보다도 높힌 수도 제도를 사용한다.
제6대 성종 문의대왕은 '황도 개주'였던 수도제를 '개경 개성부'로 바꾸어 정석적인 천자식 수도제를 완성했다. 이처럼 도(都)가 경으로 돌아왔어도 이 제도는 개경은 상도(上都), 서경은 웅도(雄都) 등으로 불리는 등 자주 쓰이는 별칭으로 여전히 남았다. 그리고 이후 제23대 고종이 강화도로 천도할 때도 영향을 주어 새로운 수도가 '강도'(江都)로 명명된다.
귀화인 우대 정책
개혁 과정에서 쌍기를 비롯한 한족계 귀화인 세력을 우대해 호족들의 재산을 강제로 몰수한 뒤 쌍기에게 주기도 했는데 이걸 두고 광종에게 '내 집도 바칠 테니 그냥 쌍기에게 주라'면서 비아냥이 담긴 직언을 올린 서필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이 사람은 후에 1차 여요전쟁에서 외교로 강동6주를 얻어낸 서희의 아버지이다.
광종은 서필의 주청에 담긴 비아냥을 알아듣고 화가 났지만 그의 말에 느낀 바가 있어 특별 대우를 줄였다고 전해진다. 서필이 유력 호족이었고, 광종에 반감을 드러내기 위해 한 말이라면 광종도 그대로 숙청했겠지만 서필이 호족이기는하나 유력한 집안 출신도 아니고, 하급 관료 출신의 대쪽같은 성격에 그의 언행 하나하나가 촌철살인의 직언이 대부분이라 광종도 그의 말은 귀담아 들은 것으로 보인다. 후에 서필이 유신성과 함께 나란히 광종의 배향공신에 오른 것을 보면 광종의 최측근이었을 것이다. 당장 광종이 펼친 개혁 정책에 찬성하기도 했다.
쌍기의 아버지 쌍철은 아들이 고려에서 귀빈 대우를 받자 본인도 고려 사람으로 귀화해 고관 자리에 올랐다. 호족들을 견제한 광종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다분히 의도적인 처우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이러한 처우는 국내 관료들의 불만을 사게 된 원인이 되어 광종 사후 최승로의 <5조 치적평>, 이제현의 <사략>에서 그를 비판하는 주된 원인이 되었다.
광종은 나라의 학자들 또한 기존 호족들과 연관이 있다 생각해서인지 국내 기반이 취약해 덜 위험한 귀화인들을 선호한 듯 하다. 고려 성종(제6대) 때 활약한 최승로는 광종의 귀화인 우대 정책과 호족 숙청을 대놓고 깠지만 국내 학자 출신 관료들이 득세하도록 길을 열어준 게 광종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호족 대숙청
광종은 재위 초반까지는 그래도 호족들의 세력을 존중해주면서 공존하는 형태로 국정을 이끌었지만 재위 중반부터는 자신의 의욕적인 왕권 강화 정책에 대해 분노한 호족들의 반발과 그들의 암살 위협에 철저히 대응하기 위해 반대파는 물론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말 그대로 다 죽이거나 잡아 가두는 공포정치로 국정을 이끌었다.
대표적으로 자신의 후원 세력이었던 평주의 박수경 일가를 숙청하여 끝내 몰락시킨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당시 박수경은 고려 태조 때부터 공적을 세웠으며 광종의 옹립에도 큰 공을 세우는 등 고려 최강의 권신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는데, 이 박수경의 세 아들이 역모를 꾸미자 광종이 그들을 제압하여 하옥시키고 동시에 그 세력도 전부 없앴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박수경은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게 《고려사》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광종이 박수경 세력에게 반란 혐의를 뒤집어 씌워 토사구팽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꽤 많고, 실제 이들이 광종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실패해 도리어 광종으로 하여금 정당하게 자신들을 숙청할 명분을 준 꼴이 된 것이라고 여기는 견해도 더러 있는 편이다. 무엇이 사실이든 박수경 입장에서는 자신은 오래 전부터 광종의 최대 군사적 후원자로서 광종을 임금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는데 그 대가가 처절한 몰락이었던 셈.
특히 광종은 호족들뿐만 아니라 같은 왕족 친인척들에게도 무자비한 숙청을 자주 단행하였다.
자신의 이복동생인 효은태자를 사사한 것이 바로 그 실사례. 당시 효은태자는 태조 왕건과 고려 개국공신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부인 유씨 사이의 아들인데, 기록에 따르면 인성이 매우 좋지 않고, 무뢰배들과 어울러 다녔다고 한다. 그 탓에 원성이 자자했으며, 결국 역모를 꾸미다가 그 일당과 함께 사사된다.
그렇지만 후삼국통일전쟁의 걸출한 영웅이었던 유금필의 집안은 자체적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군벌이었던 점과 더불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에도 비춰 보면 효은태자 또한 광종에게 잠재적인 정적으로 분류되어 억울하게 숙청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인간 쓰레기였고, 파멸을 자초했다는 식의 기록은 광종 측의 일방적인 왜곡이자 폄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형인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로 광종 본인에게는 조카에 해당하는 흥화군과 경춘원군도 이들이 역모를 꾀한다는 참소를 듣고 곧바로 처형했다. 심지어 자신의 친아들인 태자(훗날의 경종)조차 의심해서 걸핏하면 핍박하고 야단쳤다고 전한다. 비유하자면 조선의 태종 이방원과 세조 이유, 그리고 영조 이금을 모두 합친 그런 군주라고도 볼 수 있겠다.
그 때문인지 경종은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광종이 추진했던 것과 정반대의 정책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복수법'이라는 치명적인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다만 나중에 경종도 복수법의 폐단을 알고는 즉시 복수법을 폐지한 다음 이를 추진한 호족 출신의 재상 왕선을 유배보내고, 복수법을 악용한 자들을 처벌하면서 이를 폐지시켰다.
다만, 광종과 대립각을 세우다가 숙청된 호족 집단들은 이미 후삼국시대나 고려 초기, 자신의 지역과 국왕에게 이합집산을 해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자들이었다.
왕건이 만부교 사건을 일으킨 것도 호족들의 무분별한 합종연횡과 이합집산을 멈추기 위함이었다. 혜종과 정종의 짧은 재위 기간이나 혜종 시절에 일어난 의문의 암살 미수 사건들 및 혜종의 이해되지 않는 죽음만 봐도 호족들은 왕에게 위험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광종이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시행했을 때도 반대했는데 공신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이 정작 노비를 떳떳하게 모은 것이었는지, 과거제에 붙을 만큼 실무 능력 역시 검증되었는지도 의문이었다.
특히 당시 고려의 호족 세력들은 조선 초반 이방원이 숙청한 신하들보다 더 믿을 수 없었다. 적어도 정도전은 노비 문제에 대해서 떳떳하고 과거제를 통해 들어온 검증된 인재였으며, 정도전의 최대 정적이었던 태종도 위선보다는 위악을 행했던 인물이었다. 민무질, 민무구 두 형제도 문제가 많았으나 저 호족들보다는 한결 낫다고 할 수 있다.
광종은 고려 초기 여러 세력들이 왕권 다툼을 벌이는 혼란 속에 집권하여 왕권 강화를 시도했는데 이를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펼치면서 고려 왕조의 기반을 단단히 다진 임금이다. 불교를 장려하고, 민심 안정책을 시행했으며 당시의 지배층인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수단을 강구하여 호족들과의 전면 대결에 나섰다.
호족 연합체는 그 태생부터 일관성이고 나발이고 던진 집단들 중 하나였다.
즉《삼국지》에 나오는 후한 말기 군벌들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나마 후한 왕조는 400년의 정통성이 있었지만, 고려는 같은 호족 출신이었던 태조 왕건이 태봉을 찬탈한 뒤 후백제와 신라를 흡수한데다가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또다시 분열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려 개국 초 수백명에 이르던 호족들이 광종의 재위 기간 동안 숙청으로 인해 초토화되어 불과 수십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고 전한다. 얼마만큼의 호족이 광종에 의해 쓸려나갔는지는 고려를 다루는 역사 기록들 중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게 거의 없어서 확실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성종 때 최승로가 '태조를 모시던 구신이 40여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발언을 한 대목을 보면, 숙청 과정에서 호족 세력들이 전체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영토 확장의 군주
《고려사》 <서희 열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서희가 또 아뢰며 이르기를, “거란의 동경(東京)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 수백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 숙여진의 잘못)이 살던 곳인데, 광종(光宗)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습니다. 지금 거란이 침입해 왔으니, 그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거란)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리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고려)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중략」
앞의 단락을 요약하자면 알려진 것과 다르게 광종은 고려의 영토를 확장시킨 정복 지향 군주였고, 그가 점령한 수백리 영토와 관련된 분쟁이 곧 여요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을 그대로 따르자면 이미 광종 때부터 거란의 동경 아래로는 전부 고려 땅이었다는 이야기인데, 고려시대 영토 범위에 대한 일반의 상식과는 매우 괴리된 내용인 만큼 추후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불교 통합
광종도 정작 호족들을 싸그리 쓸어버린 이후에는 뭔가 죄의식이라도 느꼈는지 절을 세우고, 그들을 위한 제를 자주 드렸다고 기록에 나온다. 그런데 잦은 불사로 인해 이 당시 승려를 자처한 땡추들의 횡포가 극심했다고도 전해진다. 물론 한국 유학자건 중국 유학자건 원래 글쓰는 유학자는 불교가 조금이라도 세속화되면 죽일 기세로 물어뜯곤 했다.
하지만 광종은 이마저도 실상은 최후의 최후까지 광종이 호족들을 견제하려는 수단으로 절 건설에 대한 모든 것을 왕실에서 지원하고 죄다 개경을 둘러싸는 형식으로 만들어 승려 세력들로 하여금 왕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었다. 이 사원들은 훗날 희종(제21대)과 함께 최충헌을 없애려 했다가 실패해 최충헌에게 승려들이 전부 몰살당하고, 사원들도 죄다 철폐되면서 고려 불교의 성격 또한 교종 중심에서 선종 중심으로 바뀌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사찰을 대규모로 건립한 부분도 알고보면 무서운 부분인데, 대각국사 의천보다 무려 100여년 앞선 불교의 종파 간 통합 시도였다는 것. 광종은 교종인 귀법사의 균여를 중심으로 '화엄종을 통합하게끔 하고서는 의통과 제관을 중국으로 보내 천태종을 후원하고 법상종까지 포함한 넓은 범위의 교종 통합을 시도하였다.
여기에 또 중국에서 법안종(선종 중심으로 교종을 시도한 종파)을 들여와서 선종과 합치고, 이걸 다시 앞의 교종과 통합해 불교의 완전한 '교선일치'를 꿈꾸었다. 하지만 광종이 붕어한 이후, 법안종이 쇠퇴하면서 이 시도는 결국 물 말아먹고 끝난 셈이 되었다. <제국의 아침>에서는 이 과정을 좀 더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걸 그대로 따라한 인물이 바로 의천이었다. 의천의 선•교종간 통합은 불교사에서만 주로 언급하지만, 고려 문종(제11대)의 아들이었던 의천의 주요한 목적은 바로 왕권 강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천태종에 간접적으로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중국은 천태종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회창법난'(842년 ~ 845년 당나라 무종의 불교 말살 정책)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어 중국 본토에 불교 전적들이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광종이 중국의 요청으로 고려에 남아 있던 천태종 관련 서적들을 중국에 보내는 동시에 천태종 승려 제관을 중국으로 보냈고, 제관이 중국에서 살다 죽으면서 그가 남긴 유작 《천태사교의》는 한•중•일 삼국의 천태학 교과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