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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02
5월21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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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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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cI7ekxJ-m9o&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2&t=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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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생의 참된 기쁨을 원하십니까?>
가끔씩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 추운 날씨에도 꽁꽁 얼어붙은 산이나 바닷가에서 야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텐트 안을 살짝 들여다봤더니 대단하더군요. 그 안에는 강추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정도의 따뜻하고 쾌적한 분위기가 연출되어 있었습니다. 편안한 야영생활을 할 수 있는 최첨단 도구들 앞에 제 눈이 다 휘둥그레졌습니다.
요즘 이렇게 여가생활, 취미활동, 레저 활동을 통한 삶의 기쁨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1박 2일, 2박 3일 동안 원하는 장소에 가서, 원하는 취미활동을 만끽하며 원 없이 삶의 기쁨을 추구하고, 삶의 만족도를 끌어올리는 노력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러나 취미활동이나 레저 활동은 삶의 한 순간이요, 인생의 양념 같은 것입니다. 그게 좋다고 인생 전체를 마냥 그런 생활로 가득 채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기쁨에도 여러 종류의 기쁨이 있고 여러 차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보다 큰 선, 보다 큰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존재로서 끊임없이 낮은 차원의 기쁨에서 높은 차원의 기쁨으로 건너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기쁨으로부터 영적인 기쁨으로 건너가고자 애를 써야 합니다. 참된 기쁨은 고통 여부에 상관없이, 자리나 재물 여부에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에 기인합니다. 다른 기쁨은 순식간에 우리에게서 멀어지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영적 기쁨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입니다.
‘영성’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참으로 다양한 영성이 있더군요. 우선 시대에 따라 영성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영성, 교부시대 영성, 중세교회 영성, 현대 영성. 뿐만 아닙니다. 성화의 길을 개척한 성인들에 따른 구분도 가능합니다. 베네딕토 영성, 가르멜 영성, 프란치스코 영성, 돈보스코 영성. 그게 다가 아닙니다. 주제에 따른 영성도 가능합니다. 선교 영성, 고통과 십자가의 영성, 평화의 영성, 화해의 영성. 말만 붙이면 거의 다 영성입니다. 그런데 기쁨의 영성은 수많은 영성 가운데 높은 경지에 도달한 최고봉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천재, 노력하는 사람, 즐기는 사람 세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영성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성생활의 타고난 천재는 영성생활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영성생활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영성생활을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성생활에 있어서 억지로가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나아가는 영성생활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영성생활인 것입니다. 기도도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흥이 나서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미사 때도 울적한 얼굴이 아니라 빛나는 얼굴로 앉아있어야 합니다. 묵주기도도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없이 행복한 얼굴로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쁨의 영성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말은 쉽습니다만 ‘충만한 기쁨’ ‘진정한 기쁨’, ‘참된 의미의 기쁨’을 찾기 어렵습니다. 전에는 안 그랬는데 내 안에 기쁨이 사라진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우리가 기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깊이 고민하지 않아도 쉽게 원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이제는 너무 커져서 그렇습니다. 내가 너무 대단해져서, 너무 높이 올라가서 그렇습니다.
가진 바가 너무 많아서, 머리에 든 것이 많아지다 보니 기쁨이 점점 사라져만 갔습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다시 한 번 작아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밑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마음을 비우고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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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관계는 쉼 없는 진동이다>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jxk0RMRvwUc
자녀에게 컴퓨터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하다가 살해를 당한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그런 짓을 하고 자신도 스스로 자살을 하였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아이에게 공부를 강요하다가 성적이 떨어져 두려워하는 아이에게 오히려 살해를 당했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의 관계를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들은 한결같이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은 별거나 이혼한 사이였습니다. 부부관계를 잘 유지할 능력이 없다면 자녀도 사랑할 능력을 잃게 됩니다. 물론 어머니가 시간상으로 자녀와 있을 시간이 더 많아집니다. 그러면 자녀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흐르는 본성이 있는데, 사랑은 마치 물처럼 위에서 흘러내려 옵니다. 아내가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다면 둘의 사이에서 발생해야 하는 사랑이 고갈되기 때문에 자녀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녀와 함께 있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사랑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자녀들은 폭력을 당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참지 못하게 되면 결국 보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빠가 직장에 출근하는데 아이가 떼를 쓰고 붙든다고 해서 출근하지 않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자녀와 떨어져 밖에 나가 일해야 아이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조금 성숙해진다면 아빠가 자신을 떠나는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한 것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아빠는 규칙적으로 다시 자신을 만나러 올 것을 알고 아빠가 떠나는 것을 크게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약한 상태에서 어른이 되면 상대가 자신을 떠날 것 같은 두려움에 연애도 제대로 못 하게 됩니다. 모든 관계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임을 깨달아야, 집착이 아닌 참다운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인간관계가 이렇게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 되는 이유는 ‘사랑의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사랑이 되시려면 그 중간을 오가는 성령께서 계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아버지나 아드님께만 머무시며 끊임없는 진동의 운동을 하지 않으시면 삼위일체는 깨지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사랑이 아니시게 됩니다. 이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자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 자녀에게도 유익한 것과 같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자녀만을 생각하며 남편을 외면한다면 남편은 사랑받지 못하는 가정에 돈을 벌어 가져다주는 것이 이용당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점점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가정이 깨지게 됩니다. 남편의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하느님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을 시간을 내지 못하면 가정을 자기 행복을 위해 이용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또는 당신의 승천과 성령강림을 통한 함께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조금 있으면” 때문에 혼란스러워합니다. 아버지와 교회 사이에서 마치 어머니처럼 오가며 진동하는 역할을 해야 하심을 아직은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엄마를 보지 못할 때와 다시 볼 때의 감정의 변화가 없을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바로 교회와 세상 사이에서 이런 진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규칙적으로 성당에서 미사를 통해 힘을 얻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을 줄 수 있는 분에게 가는 것은 분명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 얻은 성령을 자녀에게 다시 주는 것은 더 큰 기쁨이 됩니다.
한 마을에 꽃을 파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가난했습니다. 복장은 허름했고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전체에 항상 행복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노인을 ‘행복한 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보지요?”
노인은 특유의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게 행복의 비결이 하나 있지요.”
노인의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 나이에 어찌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고통을 당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의 새벽을 맞지 않았습니까? 저도 고난이 다가올 때마다 마음속으로 ‘사흘만 기다리자.’라고 다짐합니다. 그때부터 제 삶이 한결 행복해졌어요.”
이 할머니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항상 행복한 기분이 들어서가 아니라, 지금 힘들어도 사흘 뒤에 또 행복해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지금의 십자가를 잘 질 수 있어서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지금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도 곧 다시 오셔서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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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6,16-20 :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절)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당신께서 “잡히시던 날 밤”(1코린 11,23) 하셨다. ‘조금 있으면’, 즉 그날 밤 그분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셨고, 다음 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십자가에서 내려진 다음 무덤에 모셔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그들은 다시 그분을 보게 될 것이었다. 주님께서는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시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사십 일 동안 부활에 대한 많은 증거를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17절) 이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다. 그분의 죽음은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 위로의 말씀은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7.19절)로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당신께서 돌아오시리라는 것, 당신이 그들을 떠나는 것은 잠시 뿐이며 영원히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을 알려 주신다. 그분은 아버지께 가시며 어둠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당신 성전을 다시 세우실 것이다.(요한 2,19 참조)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 주님을 사랑한 이들은 주님께서 잡혀 결박당한 채 최고 의회로 끌려가 사형선고를 받고,채찍질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옆구리를 창으로 찔리시고 묻히시는 것을 보고 울며 애통해 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한 자들은 보기만 해도 거슬리던 자가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해지자 기뻐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죽음에 처해졌을 때는 슬퍼했지만 주님의 부활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다.”(코헬 3,4)라고 하였다. 울 때란 고통의 때이다. “울며 애통해 할”(20절) 때인 것이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는 웃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20절)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적으로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은 슬퍼했으나 세상은 기뻐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셨을 때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었으나 세상을 사랑한 이들에게는 기쁨이 슬픔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함께 기뻐한다면 세상과 함께 슬퍼하게 되겠지만, 세상이 즐거워할 때 슬퍼한다면 나중에 세상이 슬퍼할 때 기뻐하게 될 것이다.
이 기쁨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뜻이 죽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낸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기쁨이다. 즉 자기 자신을 죽인 후에 얻는 기쁨이므로 부활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기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기쁨은 그리스도인들의 옷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이 옷을 입지 못한다면 어떻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겠는가? 내가 우선 기쁨을 가져야 기쁨을 행복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얻은 기쁨은 결코 빼앗기지 않는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세상이 변하면 쉽게 변할 수 있으나,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그분이 변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그 어떤 세상의 힘도 빼앗을 수 없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으로서 그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며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에 우리의 기쁨도 완전한 기쁨이 되어 없어지지 않는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쁨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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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조금 있으면 …….”이라고 표현된 시간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지상 삶이 끝나 간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군가 함께 있다 떠나가면 허한 마음에 울먹일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도 떠나가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슬퍼할 수 밖에 없겠지요.
예수님의 죽음이 세상에는 기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세상은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빛을 어둠이라 여겼고, 없애야 할 악으로 여긴 것이 세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고 당신을 내어 주실 만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과 늘 함께 살아간다고 믿는 우리 신앙인들이 누릴 기쁨은, 세상의 대립과 반감을 끝까지 사랑하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반목과 대립의 자리에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고, 슬픔과 좌절의 자리를 위로와 자비로 채우는 것이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세상이 악하여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세상이 너무 나약하였기 때문입니다. 경쟁과 다툼에 담대히 나서 사랑을 선포할 힘이 없어서, 폭력과 차별에 용맹히 맞설 결기가 없어서입니다. 나약함이 악이 될 수 있음을 알고, 그 나약함을 이겨 내어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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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1-22)
이 말씀에서 강조되고 있는 말은, ‘잊어버린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가 얻게 되는 기쁨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겪었던 슬픔을 잊어버릴 정도로 ‘큰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기쁨”, 즉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의 기쁨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강조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겪게 될 슬픔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이지 그 슬픔과 고통을 잊어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무엇을 위해서 수난을 당하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일을 당하셨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총이 자동적으로 나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기를 바란다면, 누구든지 스스로 믿고 회개해야 합니다.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헛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다음 시편이 연상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5-6) 우리의 신앙 여정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에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환호하며 추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날이 되면 씨를 뿌릴 때의 눈물은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실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말 후의 일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씨를 뿌리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곡식이 없습니다. 지금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심판 때에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 여정은 목적지가 확실하게 정해져 있는 여행입니다. (신앙생활은 결과를 알고서 하는 생활입니다.) 물론 각 개인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할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거나 헤매는 일은 없습니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한다면, 십자가는 부활을 향해서 가는 길의 한 과정일 뿐이고, 십자가 자체는 목적이 아닙니다. 사람에 따라 십자가가 조금 더 무거울 수도 있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수도 있지만,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히브 12,2-3)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 12,7)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히브 12,11) (여기서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난과 고통들을 하느님의 훈육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 하느님의 훈육이 아닌, 악에서 온 고난과 고통들도 있습니다. 그 경우에도 참고 견디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내는 십자가 수난을 견디어 내신 예수님을 본받는 일입니다.)
신앙 여정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뒤따라 걸어가는 일입니다. 사도들과 순교자들과 수많은 신앙인들이 이미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코 외로운 길은 아닙니다. 혼자라고 느껴지는 때에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만일에 너무 힘들어서 걷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업고 걸어가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6-18)
신앙생활은 ‘내가’ 구원받으려고 하는 생활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나 혼자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이 먼저 나를 도와주십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을 어쩌면 나보다 예수님께서 더 바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입니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3ㄱ)
‘그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성령 강림의 날’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또 성령을 받은 뒤에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 하느님의 섭리 등을 모두 깨닫게 될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께 물을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떤 고난과 고통을 겪게 되면 “도대체 왜?” 라고 물을 때가 많습니다. 그 고난과 고통도 힘들지만, 이유를 알지 못해서 답답한 것도 힘든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고, 또 우리의 신앙생활이 부족할 때,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를 깨닫는 일도 더디게 됩니다. 알고 싶고 깨닫고 싶다면, 단순하게 믿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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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 승천 대축일은 부활 후 40일째 되는 부활 제6주간을 목요일에 지내지만, 한국에서는 부활 제7주일로 옮겨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뉴욕은 부활 제6주간 목요일을 주님 승천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대중 매체를 통한 교회의 여러 가지 사도직 수행을 더욱 효과적으로 강화하고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 세계 교회가 홍보의 날을 제정하여 기념하기를 바랐습니다.(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18항 참조) 이에 따라 1967년에 ’홍보의 날’이 제정되었고, 한국에서는 출판물 보급 주일과 통합하여(1980년) 주님 승천 대축일을 ’홍보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올해는 제40차 홍보 주일입니다.
3달 동안 ‘Stay at home'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이전에 일정표는 쉬는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신문홍보, 사순특강, 그리스 터키 성지순례, 북미주 사제 피정, 북미주 서울 대교구 모임, 직원연수, 뉴멕시코 피정’과 같은 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모든 일정은 취소되었고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책을 읽고, 기도하고, 산책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신문의 구독자가 줄고 있습니다. 본당에 다니면서 신문구독 홍보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독자가 줄어드는 만큼 신규 구독자를 늘려야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자동차는 어떤 자동차일까요? 컴퓨터를 내장한 계기판, 안전한 좌석, 최상의 타이어, 좋은 기름, 양보 운전하는 운전자가 있어야 합니다. 운전자가 있어도, 최상의 자동차가 준비되어도 필요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도로입니다. 비포장도로에서는 아무리 좋은 차도 잘 달릴 수 없습니다. 끊어진 길에서는 아무리 좋은 운전자도 달릴 수 없습니다. 좋은 차는 쾌적한 도로가 있어야 비로소 가치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좋은 신문은 어떤 신문일까요? 감동을 주는 기사입니다. 교회의 소식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겁니다. 전례와 교리, 신학과 성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겁니다. 그러나 좋은 신문은 읽어주는 독자가 있어야 합니다. 독자가 없는 신문은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와 같습니다.
4년 전입니다. 은경축을 지내면서 글을 모아 ‘사제생활 할 만하십니까?’라는 책을 만들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원하시는 분에게 신청을 받았고, 신청하신 분들에게 나누어 드렸습니다. 예전에도 읽었던 책을 인터넷을 통해서 신청을 받아 나누어 드렸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신청해 주셨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인터넷을 통해서 신문구독 신청을 받고 싶습니다. 북미주에서 신청하시는 분들에게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전화번호, 주소, 이름을 메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이번에 도움을 주시면 제게는 코로나19를 이길 수 있는 큰 힘이 될 겁니다. 여러분의 도움이 도로가 되어서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리라 믿습니다. 저와 직원들은 매주 후원회원과 독자를 위해서 미사 중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수도원에서 읽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네 삶이 불행해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 너는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네 주인으로 삼지 않았고, 나를 진리라고 하면서 내게 배우지 않았다. 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너는 나를 능력이라고 하면서 나를 의지하지 않았고, 나를 응답이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다. 이제 모든 근심을 멈추고 오직 나를 바라보며 기도하라.” 주님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모시면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청합니다. (E mail : africa41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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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렇다면 나는>
요한 16,16-20 (이별의 슬픔과 재회의 기쁨)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자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서로 말하였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그들은 또 “‘조금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누군가 버려진다
버린 세상은 기뻐한다
그렇다면
그 세상 안의 나는
누군가 짓밟힌다
짓밟은 세상은 기뻐한다
그렇다면
그 세상 안의 나는
누군가 죽임당한다
죽인 세상은 기뻐한다
그렇다면
그 세상 안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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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공동사목의 중요성>
코린토는 당시 로마 제국의 속주인 아카이아 주의 수도로서 로마 총독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이 도시는 전략상 요충지이며 무역이 활발한 항구도시였다. 때문에 시민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윤리 도덕적으로는 타락하여 코린토 사람이란 성적으로 부도덕한 사람을 뜻할 정도였다. 또한 이 도시에는 많은 이방 신전들이 있어서 우상숭배가 심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 도시에는 로마에서 추방된 아퀼라와 브리스킬라라는 부부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천막제조업자였다. 바오로는 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갔고,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특히 실라와 티모테오가 온 후에는 오직 복음전파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계획적으로 바오로를 적대하며 복음전파를 방해하였다.
그리하여 바오로는 “누구든지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든 그 동네를 떠나라. 떠날 때에는 그들에게 경고하는 표시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려라.”(루가카9,5)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옷의 먼지를 털면서 그들을 떠나 이방인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파한다.
성경에서 옷을 터는 것은 엄숙한 맹세나 저주의 행동으로 받아들여졌다.(느헤 5,13) 당시 발이나 옷에서 먼지를 떠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마을에 들어갔다 나올 때 부정한 모든 것을 거룩한 곳인 자신들의 땅에 묻혀 들어오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행동이었다.
즉 종교적으로 이방인들의 영향력을 없애는 동시에 자신들은 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행동이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를 역이용하여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은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의 방법대로 보여준 것이다. 바오로는 유대인들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티티우스 유스투스(Titus justus)의 집으로 갔다. 그는 하느님을 섬기는 이방인이었는데, 그의 집은 코린토 교회의 최초 집회 장소가 되었다.
그 후 회당장 그리스보와 많은 고린토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코린토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다른 지역에서보다 더욱 심하게 바오로를 방해했다. 이는 그들이 타락과 우상숭배의 도시 코린토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하여 더욱 완고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마음의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자신들의 전통을 지키는데 급급하고 있었다. 때문에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오로를 적극적으로 방해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서는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는 바오로가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오로가 홀로 사목하지 않고 실라와 디모테오와 더불어 사목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 혼자 보내지 않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마태 6,7; 루카 10,1)
복음을 전파하는데 홀로 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편이 더 좋기 때문이다. 병을 고쳐주고 악령을 제어하는 데에도 함께 하는 편이 더 좋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단 두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계시겠다(마태 18,19)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에게 힘을 주신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든지 자기 홀로 하기보다 이웃과 함께 일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서로 상의하고 협력하며 서로 용기와 힘을 줄 수 있도록 힘을 합해야 하겠다. 그 때 주님께서는 더 큰 결실을 맺게 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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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오로회 故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조금 있으면>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한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더 이상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더 이상 육안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 더 있으면 보게 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다. 조금 더 있으면 보게 될 예수님의 모습은 죽음을 극복하신 예수님,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 이전의 예수님과는 모든 면에서 완전히 다른 예수님이시다.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되게 해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지난번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아주 오래 전에 우리 수도회에서 지원자로 생활했었던 어떤 형제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형제가 전화로 "신부님,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신부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전화 드렸어요. 신부님은 나의 어버지이시잖아요. 내 인생에 신부님을 만나 것은 큰 축복이라고 생각됩니다. 비록 수도생활을 끝까지 하지는 못했지만 신부님을 통해서 나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올바로 갖을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요즈음 들어 부쩍 신부님 생각이 많이 나고 신부님을 생각하면 마음의 고향같은 생각이 듭니다. 신부님 건강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신부님께 작은 선물을 부쳤는데 내일 받아 보실꺼예요. 작은 것이지만 신부님 건강에 좋은 것이니까 냉장고에 넣었다고 조금씩 드세요."라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 형제와 통화를 하면서 "내가 너에게 해준 것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해 줘서 정말 감사하다. 그래 열심히 살아라. 그리고 '다가오시는 예수'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잘 읽어보아라. 그러면 많은 은혜 받을 것이다."라고 통화를 마쳤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함께 살 때에는 모르지만 세월이 지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참으로 감사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왜냐하면 함께 있었을 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그의 존재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늦게서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죽은 이에게 보내는 편지를 묶어서 책을 내었는데 "하늘 나라 우체국"이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 이런 글이 있다.
"이젠 목메도록 그립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젠 죽을 정도로 후회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젠 가슴속에 사무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이젠 사랑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우리가 부모를 떠나 보내고 난 다음에, 또는 정말로 사랑하는 애인을 떠나 보내고 난 다음에서야 고백할 수 있는 참회록과도 같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조금 지나고 보면 그 사람이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아니 제자들은 그것을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알고 계셨나 보다. 반드시 제자들이 지금은 당신의 죽음으로 슬퍼하겠지만 당신의 부활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지금 받아야할 은혜가 있다면 그리고 복음을 묵상하면서 받는 은혜가 있다면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복음을 묵상하면서 조금씩 진리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된다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없다면 복음 묵상의 의미가 없다. 아니 복음을 묵상할 필요가 없다.
분명히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죽음을 승리하신 예수님,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모든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즉 복음 묵상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부활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 은혜를 통해서 우리들이 부활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지 못하고 죽은 예수님의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결코 기쁠 수가 없다.
모든 일이 근심일 뿐이다. 그러나 복음을 통하여 죽음을 물리치신 승리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내 삶의 의미가 달라지고 삶의 목표가 달라질 것이다. 근심이 기쁨으로 바뀐다는 것은 분명 기적이다. 은혜이다.
근심이란 무엇인가? 괴롭게 애를 쓰는 마음이다. 심리적으로 어떤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언제 우리는 근심하게 되는가? 근심은 어떤 일이나 사건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 보통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아무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근심하게 된다. 그러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면 기쁨으로 바뀐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지금 당장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심하는 많은 것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 세상에 국한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좀더 넓고 깊은 세계 즉 부활이라는 세계에서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무엇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또 지금 갖지 못한다고 해서 근심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의 일들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에 있어서 초연해질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 많은 경우 내가 근심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부활의 관점에서 보면 근심거리라고 하는 모든 것들도 다 포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단순히 당신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알려 주는 것만은 아니다. 조금 더 묵상해보면 이 말씀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영적으로 부활하지 못하면 보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부활하면 새롭게 보이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던 것들이 영적으로 눈이 뜨이니까 보이기 시작하는 그 단계에로 넘어가기까지가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라고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씩 볼 수 있는 단계로 넘어가는 시간이어야 한다. 1년 전이나 10년 전이나 30년의 신앙 생활을 했으면서도 조금도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아니 영적으로 눈이 뜨지 못한 생활이다.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 있으면 다시 보게되는 영성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면 근심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부활한 삶을 사는 사람은 부활하지 못했을 때에는 근심이었던 생활이 이제는 모두 기쁨으로 다가올 것이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보지 못하던 것을 "조금 있으면" 볼 수 있게 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그 "조금 있으면"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될 것인가는 각자의 영성 생활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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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녀회 윤영수 수녀님]
<새로운 시작>
요한복음 15장에 이어 16장에서도 주님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와 주님이 세상을 떠나시고 난 후 제자들과 주님을 배척했던 세상의 반응에 대해 정확히 규명해 주십니다.
특히 오늘 복음은 주님의 고별사 중에서도 제자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염려 그리고 희망, 세상 어둠의 세력들의 움직임에 대한 유언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살아 계실 때보다 돌아가신 후에 더 깊이 느끼고 그리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전에 부모님은 이걸 좋아하셨고, 이런 경우에 칭찬해 주셨고, 혼내셨고, 기뻐하셨고 등.
청개구리 예화처럼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평소 그분이 나에게 기대했던 바람을 제대로 깨우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의 상태를 잘 아셨기에 미리 유언하시며 헤매지 않도록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진리가 세상의 어둠에 묻히는 현실을 보고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의 어둠은 자신의 승리인 양 기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의 말씀이 승리하는 기쁨을 삶 안에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는 말씀과 함께 주님 나라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금 인식할 수 있게 해줍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희망이고 기쁨이 되는 삶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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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수학 문제를 잘 푸는 어린 초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어떤 어려운 문제도 다 푸는 이 어린 학생에서 선생님은 어렵고 까다로운 문제를 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은 도저히 풀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냈지요. 즉, 1에서 100까지 숫자를 모두 더하면 얼마이냐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곧바로 5,050이라고 말합니다. 정답입니다. 이 아이가 바로 19세기 독일 수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디입니다. 가우디는 어렸을 때 선생님께서 내신 문제를 받고서는 곧바로 하나의 패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1과 100을 더하면 101, 2와 99를 더해도 101, 3과 98을 더해도 101…. 이런 식이라면 101을 50번 반복하면 1부터 100까지의 숫자를 모두 더한 것과 같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101×50=5,050의 식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1부터 차례대로 더해나간다면 실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지루해서 중간에 포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패턴을 발견하면 실수할 수도 또 지루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하는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신앙생활이 너무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들고, 미사나 기도가 너무 지루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패턴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으면서 우리도 세상 안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살도록 하는 패턴입니다.
이 패턴에 대입해서 주님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기쁨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근심하게 됩니다. 아직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나약한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여기에 멈추지 않으시고 다시 나를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시지요. 수난과 부활을 동시에 말씀하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이는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사랑을 알고 몸으로 느끼는 사람이 주님께서는 주시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패턴을 몸에 간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속한 자들은 지금 웃을 수 있지만, 나중에 세상이 탄식할 때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패턴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느끼고 사랑에 기쁨을 발견하는 사람만이 세상에 기쁨을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근심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근심의 자리에 기쁨이 자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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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알려고 하는 우리의 노력은?>
어떤 아이가 “신부님! 으악새라는 새도 있어요? 이 새는 ‘으악, 으악’ 하고 우나요?”라고 묻습니다.
흘러간 노래 중에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로 시작하는 ‘짝사랑’이라는 노래도 있지요. 그래서일까요? 으악새를 ‘새’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으악새는 새가 아니라 억새풀을 가리킨다고 하지요. 이런 오해는 꽤 있습니다. 청담대를 대학교 이름으로 알고, 몽고반점을 중국식당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얼마든지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인터넷에 검색해서 많은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지레짐작으로 잘못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섣부른 판단이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하면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가톨릭에 교육 프로그램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찾아보면 교육 프로그램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의 부족보다 주님을 알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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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기쁨, 만남의 기쁨>
-성령의 은총-
“항상 기뻐하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사도의 필리피서 아름다운 말씀도 생각납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역시 바오로는 기쁨의 사도입니다.
미사중 평화의 인사를 나누기전 사제의 권고 말씀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저는 한동안 부주의로 인해 이 ‘항상’이란 이 좋은 말마디를 빼놓고 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우리와 함께 있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쁨과 평화는 주님의 참 좋은 한셋트의 선물처럼 생각됩니다. 얼마전 받은 메시지도 시처럼 아름다워 소개합니다.
-“아침
아침은
늘 새롭다
나도
늘 새롭다
너무나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고 힘이 된다. 한국에 온지 10년만에, 사별의 고통과 세상이 주는 아픔에 시달려온 18년만에 새로운 아침을 만났다. 6시 새벽미사후 하늘이 넘 예뻐 걷다가 역까지 와서 커피 한잔에 늘 새로운 날을 살아오신 신부님을 떠올립니다.”-
이 아침이란 시로 늘 새로운 기쁨의 날들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어느 자매의 고백입니다. 어제 ‘찬미하라’ 주간 일반 알현 시간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주신 아름다운 말씀 마지막 부분도 기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기쁨’이란 교황님의 권고에서 보다시피 기쁨을 참 강조하신 교황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삶의 선물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는 ‘기쁨의 담지자(bearers of joy)’들입니다. 슬픔으로 소모하기에는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단지 만족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찬미의 기쁨입니다. 하느님 찬미는 ‘기쁨의 샘’입니다. 덧없이 짧은 인생, 늘 새롭게, 기쁘게 지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이별의 슬픔, 재회의 기쁨’입니다. 다음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착안한 듯 합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나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이별의 슬픔이 재회의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그러나 이미 부활의 기쁨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이별의 기쁨입니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재회의 기쁨을 앞당겨 살게 하는 부활의 기쁨 때문입니다. 하여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파견 받아 떠나 주님 안에 살다가 내일 또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예견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도 잔잔한 일상의 기쁨입니다.
하여 저는 ‘이별의 슬픔, 재회의 기쁨’이란 말마디를 바꿔, ‘떠남의 기쁨, 만남의 기쁨’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떠남의 슬픔이 아니라 떠남의 기쁨입니다. 이것은 제가 산티아고 순례 때 체험했던 진리입니다. 순례중 가장 기뻤던 순간은 짐을 말끔히 정리한 후 배낭을 메고 홀가분하게 새벽길을 떠날 때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도 하루 지나면 지루하고 따분해져 저절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때도 이렇게 기쁘게 떠난다면 참 이상적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만날 분이, 주님이 계시기에 기쁨의 떠남일 것입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 마지막연에서 노래한 소망도 이와 흡사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아름답게 살아야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떠남, 기쁨의 떠남이 될 것입니다. 얼마전 써놨던 글도 생각납니다.
-“꼭/일년만에/피어난 꽃들
꽃같은/참 반가운/만남 되려면
꼬박/일년을/기다려야하는가보다
날마다/만나도/늘 새롭고 반가운 당신이시다”-
날마다 만나도 늘 새롭고 반가운 주님이십니다. 하여 늘 피는 꽃으로, 기쁨의 꽃, 사랑의 꽃으로 살 수 있는 신자들입니다. 바로 그의 참 좋은 본보기가 앞서 예로 들은 기쁨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의 삶의 모습은 역동적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참 다양한 인간관계에 다양한 활동에도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이 부활의 기쁨을 살아가는 바오로입니다. 무엇보다 사도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복음을 무상으로 선포하기 위한 방편으로 천막을 만드는 생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다. 천막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생업이었다.”
얼마전의 체험도 새롭게 떠오릅니다. 아침 일찍 탱크 소리를 내며 농약을 치기 시작한 두 형제의 모습이 아침 일찍 출전한 주님의 전사같다는 생각과 더불어 “프로는 아름답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분야의 생업이든 프로답게 최선을 다하며 살 때 참 아름답고 기쁠 것입니다.
분도 수도자는 기도에는 신비가, 성독에는 학자, 일에는 프로 전문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삶의 프로’답게 사는 기쁨의 사도, 바오로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교황님 말씀처럼 슬픔이나 우울, 절망으로 소모하기에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단지 존재하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하느님께 찬미드리며 기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삶의 프로’가 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게, 기쁘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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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섭리를 드러냅니다.
"조금 있으면 ...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요한 16,16.17.18.19)
오늘 복음 내용에서는 이 말씀이 무려 네 차례나 반복됩니다. 마지막 절을 빼고는 모든 절에 전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든가 "조금 더"라는 말은 정확한 산술적 시간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몹시 당황합니다. 떠나신다는 스승의 말씀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그게 정확히 언제이고, 어떤 사건과 함께 이루어지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으니까요.
"그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알 수가 없군."(요한 16,18)
통상 인간은 "언제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때"를 콕 짚어 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때", 자기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때"에 그분께서 즉각 해결해 주시길 기대하고, 심지어 보채기까지 하지요.
하지만 주님의 "때"는 몇 날 몇 시라기보다, 우리에게 적당하다고 그분께서 여기시는 "때"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섭리의 때인 거죠. 인간 편에서 볼 때는 미지의 불확실성이지만, 이러한 무지를 견디는 힘이 곧 신앙의 양분이 됩니다.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선교 대목입니다.
"거기에서 그는 ... 아퀼라라는 어떤 유다인을 만났다 ... 마침 생업이 같아 그들과 함께 지내며"(사도 18,1.3)
코린토에서 바오로는 진실한 동료들을 만나게 됩니다. 열렬하고 충실한 신앙을 지닌 아퀼라와 프리스킬라 부부지요. 이들은 스스로도 훌륭한 신자이면서 초대교회 안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아폴로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사도 18,24-28 참조). 그런데 그들이 "마침" 얼마 전에 로마를 떠나 "하필" 코린토에 왔다고 하네요. 게다가 "마침" 바오로와 그들이 생업까지 같다고 합니다. 이 모든 일이 과연 우연이기만 할까요?
"그 자리를 떠나 티티우스 유스투스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 그 집은 바로 회당 옆에 있었다"(사도 18,7).
코린토에서 바오로는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려 애썼지만 그들의 거부를 직면하지요. 그래서 옮긴 거처가 "바로" 회당 옆집이었고, 결국 "회당장 크리스포스는 온 집안과 함께 주님을 믿게 되었"(사도 18,8)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직무를 수행하는 바오로는 이렇듯 미지의 불확실성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 안을 종횡무진 누빕니다. 성실하신 하느님께서는 바오로에게서 눈조차 떼지 않으시고 알맞은 때에, 꼭 필요한 사람과 만남을 안배해 주시지요.
"우연"이란,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고 보이지 않게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겸손이라고 하지요. 인간 편에서는 "기가 막힌 우연"인 것이 실은 하느님 섭리 안에 나 있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어리둥절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희망의 빛을 한 줄기 던지십니다. 물론 "바뀔 것"이라는 미래형 동사에는 여전히 정확한 시간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요.
제자들이 통곡과 애통과 근심의 터널을 구비구비 지나겠지만, 언젠가는 결국 기쁨에 가 닿을 수 있다는 스승의 보증이니, 인내하고 기다리며 견뎌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섭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걸 불완전하게나마 알고 있긴 하지만, 온전히 믿고 인내하고 기다리며 견디는 것과 별개의 문제일 때가 종종 있지요. 때론 언제일지, 어떻게일지, 누구일지 등등 산술적으로 정확한 데이터를 손바닥 보듯 학인하고 싶어 조급해집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조금"이나 "조금 더"의 답안지는 적어도 우리가 이 지상 순례를 마치는 날까지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맞닥뜨리며 풀어가고, 풀어가면서 알아듣거나 나중에야 무릎을 치며 깨닫게 되는 문제지니까요. 그분이 우리의 무지를 조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게 우리에게 유익하고 복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얼키고 설킨 세상사 안에서 불확실성을 벗삼아 꿋꿋이 걸어갑시다. 주님은 "우리를 앞장서 가시고 우리 가운데 사시며 길을 열어 주는 분"(입당송 참조)이시니, 그분의 섭리 안에서 신뢰와 의탁의 끈을 부여잡고 나아갑시다. 모든 슬픔과 고통은 지나가고 모든 것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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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배반과 십자가 처형, 장례를 암시히는 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께서 “잡히시던 날 밤" (1코린 11,23) 이므로, ‘조금 있으면’, 그러니까 그날 밤의 나머지 시간과 다음 날만 지나면 그들이 그분을 보지 못하게 될 시간이 [올]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날 밤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셨고, 다음 날 늦은 시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십자기에서 내려진 다음 무덤에 모셔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있으면’ 그들은 그분을 다시 보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신 뒤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사십 일 동안 부활에 관한 많은 증거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사도 1,3 참조)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그들이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되고,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당신을 보게 되는 이유가 ‘내가 아벼지께 가기 때문’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조금 있으면 나는 무덤에 갇혀 너희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주권이 무너진 뒤 다시 조금 있으면, 내가 다시 너희에게 나타날 것이다. 이는 내가 사멸성을 취한 하느님의 계획이 이제 이루어졌으므로 내 부활의 승리를 안고 아버지께 가기 위해서다.’
-존자 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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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당신의 뜻이라면 고통을 주십시오. 저의 큰 위안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 제게 보내주신 모든 고통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당신 뜻에 맞는 일이라면 지금보다 백 배 더 큰 고통을 주십시오. 빠져나갈 길 없이 저를 짓누르는 것이 당신께 기쁨이 된다면 저는 몹시 기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게 저의 가장 큰 위안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잔 속에 담긴 희망」에서
♣지혜 자체이며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 어깨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맙시다. 고통의 불은 우리라는 진흙을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달구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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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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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제 봄도 막바지에 이르렀고, 부활시기도 막바지에 이르러 갑니다. 오늘 <복음>도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막바지에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며, 우리의 길이 됩니다. 그분의 삶의 마감이 끝이 아니라 끝에서 오히려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떠남이 떠남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길이 됨을 밝혀줍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앞 구절>의 “조금 있으면”이란 단어는 오늘 복음에서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짧은 시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뒤 구절>의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단어는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 혹은 재림의 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곧 “다시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당신의 죽음을 준비시키고자 애쓰시지만, 정작 제자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과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이는 ‘근심이나 슬픔이 지나가면 기쁨이 온다.’는 고진감래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혹은 ‘슬픔이나 근심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슬픔 다음에 기쁨이 온다는 것이 아니라, 슬픔 그 자체가 기쁨으로 변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격고 있을 때는 아픔이었지만, 뒤돌아보니 그것이 은총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이 열리면, 슬픔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슬픔인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은 기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슬픈 일 자체’가 기쁜 일로 바뀐다는 이 사실, 곧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이미 기쁨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고, 성령이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여전히 근심과 슬픔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근심과 슬픔 속에 깃들어 있는 ‘이미 베풀어진 자비’를 관상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베풀어지고 있는 사랑의 선사’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와 있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요한 16,22)을 덮어버리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그 어떤 근심과 슬픔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미 주어진 이 기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여전히 근심과 슬픔이 우리를 침범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부활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부활과 사랑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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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렇습니다. 주님!
근심이 지나고 나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근심, 바로 그것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바람은 근심도 기쁨도 떠나와, 떠남도 머물음도 떠나와,
불고 싶은 대로 불어 갑니다.
바람 속에서 열매는 싹으로 바뀌고,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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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GCEq4-b7E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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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 20)
기쁨을
따라갑니다.
바뀌고
지나가는
변화무쌍한
우리들
시간입니다.
근심이 있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근심 뒤에
기쁨이 옵니다.
근심을 나누시는
주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주님을 통해
우리는
기쁨을 다시
얻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기쁨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기쁨으로
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기쁨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믿고 따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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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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