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유』
“이름 붙이고, 경계 짓고,
회피하는 다수로부터
나는 자유로운가?”
우리 안에 감춰진 시선에 관한 고백
어딘가에 뿌리내리기 위해
애쓰는 ‘나’의 이야기
한번은 겪을 수 있는,
누구나 곱씹어 봐야 하는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담은 에세이.
보통의 삶이더라도 언젠가는
‘전혀 새로운 곳에서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이향규는 다수에 의한 소수의 구분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개인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지.
스스로는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 놓는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결국
다수와 소수를 떠나
개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성찰로 귀결된다.
평창올림픽에서 미국 국기를 달고
금메달을 딴 클로이 김 선수를 인터뷰하는
미국 언론들이 첫 질문으로
“어디 출신이냐?”라고 묻는 것처럼
정체성에 관한 시선은
한국 사회만의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향규의 담담한 고백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한 할아버지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정말 뜬금없이, 불현듯 내가 말했다.
아무 인사도 없이, 맥락도 없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숨을 일순 뱉어 내듯.
“나는 닥터예요.”
노인이 당황해서 쳐다보았다.
내 말에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침묵 뒤에
그는 애써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아, 소아과 의사인가요?”
“아니오,
나는 박사,
피에이치디(PhD)예요!”
이번엔 다소 긴 침묵.
노인은
“아……, 그러세요……” 하고
작게 말하고
점점 빨리 걷기 시작했다.
그가 빨리 걷자
나는 더 천천히 걷게 되었다.
부끄러워도 눈물이 나는 모양이다. ……
나는 그때 정말 아무 계획 없이
남편의 나라로 이민을 갔다.
하지만 내가 결혼 이주 여성으로 살았던
그 이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_
책 84~85쪽에서
이런 경험과 감정.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만난
다양한 사람들,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로 구분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내가 아닌
자기 스스로가 바라보는
고유한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다문화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혼혈이라고 불렀으면 좋겠어.”
‘다문화’라는 이름은,
이런 시선을 감추면서
뭔가 타인을 배려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름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하루는 애린이가 그랬다.
“다문화라고 하지 말고,
차라리 혼혈이라고 불렀으면 좋겠어.
그걸 얘기하고 싶은 거잖아.”
다문화 가족이라는 이름이
알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다문화(多文化)가 이름 그대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상태를 말하고,
문화가 생활양식이나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면,
나는 세상에 다문화 가족이 아닌
가정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단문화(單文化) 가정이 있을까?
말은 결국 사람을 무리 짓게 만든다.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때때로 그들을
무리 밖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말에 반대한다.
_책 54~55쪽에서
이 책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수자를 대하는 당위를 설명했다면,
누군가의 사례를 늘어놓기만 했다면
이렇게 흥미롭지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 만난 영국인과 결혼해서
영국으로 이주한 결혼이주 여성.
서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정부 기관과 대학에 재직하며
소수자를 지원하고 연구한 전문가.
학교에서 스스로를 ‘다문화’라고 배우는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
가족을 위해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영국에서 정착 중인 이주민.
이런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누군가가 아니라 ‘나’이기에
특정 집단이 아니라 그 사람,
그 이야기에 공감하다 보면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이름 붙이고,
경계 짓고,
회피하는 다수로부터
나는 자유로운가?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말로
“나는 특별하다.”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하지만 똑같은 자존감을 위해
“나는 특별하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문화 가정의 구성원,
결혼 이주 여성,
탈북자,
동성애자 등등.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존재를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들이 특별하지 않음을 말한다.
반대로 스스로 특별하다고 말하는
‘보통 사람’들은 그들을 인정하면서도
은연중에 특별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나와 구분 짓는다.
이런 감춰진 시선을
소수자를 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하는 이향규
스스로도
영국에 정착하면서 깨닫는다.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대답을 찾아 나가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에 관해.
길동무가 생겨서 참 좋다.
친구가 생기자
나는 여기서 사는 게
조금 좋아지기 시작했다.
_책 281~284쪽에서
에필로그에는
이향규가
영국에 다시 정착하면서 만난
전동 휠체어를 타는 아니타,
프랑스 출신이면서
레즈비언인 리사,
수녀였다가 쉰이 넘어서
공동체를 나온
수잔이 등장한다.
그리고 한국 출신
결혼 이주 여성인 그는
다른 세 명을
‘친구’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Who are you?”라는 물음에서
사람들이 불러주는 내가 아닌
그 모든 포장지를 벗은
내가 누구인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책속으로
이 글이
어딘가에 뿌리내리기 위해
애쓰는 당신에게 힘이 된다면 기쁘겠다.
그리고 언젠가 혼자 힘으로
낯선 곳에서 살게 될 당신에게도
들을 만한 이야기가 된다면 좋겠다.
---「에필로그」중에서
나중에 결혼 소식을 알 려 드리니
박수를 치며 반가워하면서도
다시 이 질문을 했다.
/
“그런데 문화적 차이가 커서
힘들지 않을까요?”
/
“여러분은 남편과
문화적 차이를 느끼지 않으세요?”
/
토니가 다시 묻자,
남편과 족히 30년은 같이 살아온
이분들이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그녀가 만났다」중에서
내 동생이,
그러니까 아이의 외삼촌이
‘애린,
Erin’이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그동안 찾아 헤매던
이름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애린(愛麟),
사랑스런 기린.
기린은 다 알 듯이
동양의 신수(神獸)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어질고
뛰어난 재주를 가진
상서로운 기린아(麒麟兒) 애린이.
우리 큰딸의 이름이다.
또한 에린 Erin은
대표적인 아이리시 이름이다.
아일랜드(Ireland)를
시적으로 표현할 때
‘에린’이라고도 한다.
시어머니는 아일랜드 분이다.
우리는 애린이가
이 이름을 가짐으로써
할머니의 고향을 기억하기를 바랐다.
---「다 자기 이름이 있다」중에서
결혼 이주 여성.
나는 이 말을 들으면
가슴속이 찌르르 저린다.
15년 전에 유모차를 밀면서
하염없이 길을 걷던
젊은 엄마가 생각나서 그렇다.
아직도 아픈 것을 보니
가만히 돌아보면서
‘애쓴거 다 안다’고
나를 위로해 줄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문득 궁금해졌다.
한국으로 시집온 많은 여성들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곁에서 가만 손잡아 주며 애쓴다고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 건지.
---「낯선 곳에서 엄마가 되었다」중에서
[예스24 제공]